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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 / 박갑순(서울 경인지부)

작성자배만식|작성시간26.06.17|조회수37 목록 댓글 0

네모 / 박갑순

 

나른한 오후 새까만 지면에 마음이 갇혔다. 진하고 연한 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네모. A4 용지 이면에 생각없이 끄적이기 시작한 지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다. 큰 네모 안에 조금 작은 네모를 그리고 작은 네모에 더 작은 네모를 집어넣어 결국 점 하나 찍을 공간만 남을 때까지 반복했다. 왜 부질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가 지면처럼 깜깜한 마음을 열어본다.

네모에 갇힌 건 그날부터였다. 생전 어머니 모습답지 않게 화려하게 장식된 제단에 모셨던 영정. 검은 리본을 여민 네모 안에서 어머니는 여한이 없는 표정으로 소녀처럼 웃었다. 그토록 편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곱게 단장하고 살아생전 입어보지 못한 값비싼 옷 한 벌 입고 먼 길 떠날 때 동행한 관도 네모였다. 그곳에 누워 있는 모습은 어찌 그리 곱던지. 네모가 그렇게 아늑한가? 긴 이별 앞에서 통곡할 때 네모가 마음에 박혔다.

어머니는 고전 명언을 따로 배울 기회는 없었지만, 백 번 꺾일지언정 휘어지지는 않겠다는 신념으로 사셨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말은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곤궁한 생활이었지만, 비굴하게는 살지 않으려는 자신만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 지난한 삶을 어이 견뎠으랴.

사람들은 생김새만큼이나 자신만의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 것 같다. 네 개의 변으로 이루어진 네모, 세 개의 변으로 이루어진 세모,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원 등의 도형처럼. 네모형이라고 다 같은 네모가 아니고, 둥근형이라고 똑같지 않다. 같은 종류의 병을 앓아도 예후가 다른 것처럼 생긴 모양이 같다고 그 속성까지 같지 않은 것이 마음의 도형이다.

어머니는 평생 심중의 각이 흐트러지지 않게 단도리하며 사셨다. 그 모습을 보며 자란 나도 정사각형의 네모에 갇힌 삶을 살았지 싶다. 생각이 유연하지 않고 늘 틀에 박힌 모습이었다. 간혹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사는 답답한 딸의 성향을 아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네모는 당신 살아온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말라는 당부였을까.

내 안에는 정교하게 각이 진 네모가 있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편협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다. 대충 넘기면 되는 일에도 각을 세우고 시시비비를 가리려 든다. 어느 단체에서 책임 있는 일을 맡아 할 때도 사면의 각이 조금도 기울지 않도록 직을 수행하다가 몇몇 회원들과 얼굴 붉히는 일이 있었다. 옳지 않은 일을 눈감아 주거나 모른 척하는 일은 각 잡힌 나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른 척한다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명쾌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용기 있는 일이라며 지지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편도 있었다. 다른 임원들처럼 좀 유연하게 선을 늦추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는 지혜를 발휘했더라면 날카로운 각을 세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힘든 일에 봉착할 때면 어머니의 네모를 생각한다. 틀 안에서 살았지만, 이웃과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살았던 어머니.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날카로운 각을 안으로 다독이며 둥글둥글 조화를 이루었다. 어머니를 아는 누구라도 법 없이도 살 따듯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있어서만은 선을 더욱 단단히 조여 네모가 조금도 기울지 않은 정사각으로 사셨다. 그날 어머니는 네모 안에서 어리석은 딸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를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부러져도 휘어질 줄 모르는 팽팽하고 경직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딸에 대한 염려. 삶은 네모에 잘 적응하는 것이라고 꽝꽝 닫히는 관 속에서도 어머니는 말씀하셨을 것이다.

부모님께서 새집에 든 지 3년이 되어간다. 바둑판처럼 정교하게 손질된 네모 안에 둥그렇게 앉아 계신다. 헌 집에 사실 때, 태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릴 때마다 집이 무너지는 악몽에 시달렸다. 평생 한쪽 각이 무너진 집에서 사신 부모님이다. 마지막까지 어머니 혼자 지켰던 고향집은 이미 무너지고 흔적도 없다. 각이 모두 허물어져 평평한 면이 되었다. 곤궁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 악을 쓰며 지켰던 각이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범위도 사각이라 한다. 우리 삶에도 수많은 사각이 있다. 독불장군처럼 각을 세우고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을 따지려 들었던 나를 허물고, 새로운 사각을 장착하기로 했다. 사각지대에 놓인 어려운 사람을 발굴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사각을 실행하는 중이다.

어느 사이 내 손엔 지우개가 있다. 네모 대신 둥그런 원 모양을 수없이 그리고 있다. 까맣던 지면이 조금씩 동그랗게 밝아지고 있다. 내 마음이 유연해지고 있다. 내 안의 각 잡힌 네모를 둥글게 하는 나만의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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