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0호 정서현 / 강江에 대한 명상

작성자노혜숙|작성시간13.06.13|조회수267 목록 댓글 5

 

강원 영월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공무원(現 평택시청 기획예산과 근무).

2010 동서커피문학상 및 2011 공무원문예대전 입상.

 

 

강江에 대한 명상 / 정서현

 

 

해가 서쪽 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다. 저녁놀에 물든 동강이 갑자기 내 발목을 부여잡는다. 보고 싶었다며, 잠시 쉬어가란다. 애원조의 구슬픈 목소리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들과 나란히 제방에 앉아 저무는 강을 바라본다. 삭막한 도시생활로 인해 쉽게 볼 수조차 없는 강. 한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낸 강이 아니던가. 내 눈은 강에 꽂힌 상태로 정지되어 있다. 귓가에는 오로지 물소리만 들려온다. 온갖 상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다가는 이내 강을 따라 흘러가버린다. 우리는 침묵으로 일관한 채 눈빛만 교환하고 있다. 이심전심이란 말이 살갑게 다가온다.

 

강은 말없이 흐른다. 누가 뭐라 하든 그저 흐르기만 한다. 소리쳐 불러도 묵묵부답이다. 그렇다고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몰라서도 아니다. 다만 나서지 않을 뿐이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을 따름이다. 보고도 못 본 체, 알아도 모르는 듯, 들어도 못 들은 척, 사는 지혜를 알고 있음이다.

 

강은 쉼 없이 흐른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지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난다. 가는 도중 바위 같은 장애물을 만나지만 절대 맞서 싸우는 법이 없다. 상대의 허리를 살짝 휘감으며 돌아가거나 슬쩍 비켜 나가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강이 빚어내는 몸매는 가히 환상적이다. 여성들이 갈구하는 곡선을 넘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부드러움의 극치다.

 

강은 순리대로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치고 올라가 거꾸로 흐르는 법은 없다. 순리에 맞게 사는 것이 세상 이치임을 안다. 일 년에 한번쯤은 강을 거슬러 오르느라 진땀 흘리는 연어 떼를 만나기도 한다. 강은 그들의 아름다운 회귀본능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살다보면 가끔 예외란 것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다. 강은 그마저도 아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향한다. 인간의 욕심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강은 변함없이 흐른다. 하루아침에 마음이 변하거나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추운 겨울, 흰 눈이 나풀거리며 내려와 강을 유혹한다. 강의 품속으로 비집고 들며 살살 녹아든다. 때로는 소복이 쌓인 눈으로 하얀 솜이불을 만들어 강을 덮어버린다. 둘만의 은밀한 침실에서 다정하게 속살거리고 싶은 게다. 이마저 안 된다 싶은 날엔 기온을 뚝, 떨어뜨린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강물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어 붙잡아 두려나 보다. 강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눈이 제 아무리 녹아든들 본래의 맛은 변하지 않는다. 얼었다 녹는다 한들 본성이 바뀌겠는가. 햇살이 찾아와 반갑게 인사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모습으로 돌아가 유유히 흐른다.

 

강은 원망하지 않는다. 해마다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며칠씩 심통을 부리는 비라는 녀석이다. 후드득후드득, 처음에는 장난치듯 떨어진다. 강은 아무런 불평 없이 빗물을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강한 빗줄기를 계속 퍼붓는다. 천둥, 번개까지 불러내어 그야말로 야단법석이다. 강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체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온 힘을 다해 버텨보지만 모두 허사다. 결국 위험 수위를 넘어 마을까지 침범하게 된다.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하늘만 원망한다. 강은 자책감으로 벌겋게 된 얼굴을 푹 숙인 채 더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강은 차별하지 않는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생겨난 가느다란 물줄기가 하나로 모이고, 또 합쳐져 강을 이룬다. 이처럼 각처에서 생면부지로 만나 한 몸이 되어 흐르지만 결코 싸우는 법이 없다. 죽마고우처럼 금방 친해지고 쉽게 동화되어 간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으로 서로를 옭아매고 편을 가르는 인간세계와는 다르다. 어차피 만나 한 몸이 된 것을. 그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인연은 어디에도 없다. 멀고 긴 여정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서로를 아끼고 존중한다.

 

강은 화내지 않는다. 소금쟁이가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약 올려도, 송사리가 이리저리 오가며 간지럼 태워도, 미꾸라지가 온통 흙탕물 튕기며 장난질 쳐도 즐겁기만 하다. 강은 마실 나온 새들과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가 하면, 강가 풀잎이나 꽃나무 가지들과 입맞춤도 한다. 신이 나면 졸졸졸, 콧노래를 부르다 콸콸콸, 우렁찬 목소리로 군가도 불러 젖힌다. 이렇게 웃고, 떠들고, 노래하며, 가던 길이 한순간 뚝, 끊기는 일이 있다. 무시무시한 장비가 산허리를 자르고 강을 막아버려 졸지에 미아 신세가 되기도 한다. 더러는 얌체족이 슬며시 내다버린 독극물에 신음할 때도 있다. 그러나 강은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노심초사다. 그 벌은 하늘의 몫이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강은 찡그리지 않는다. 날씨가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내리나 눈이 오나 한결같은 표정이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강 속에서는 무수한 일들이 쉴 새 없이 벌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는가 하면 굴러온 바윗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강은 모든 걸 초월한 듯 태연하게 흐른다. 그 자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강물 속으로 빨려든다. 특히 강이 연출해내는 윤슬은 너무 고혹적이다. 강이 지닌 최고의 매력이자, 내가 강에게 반하는 가장 큰 이유다. 잔잔하면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윤슬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라면 더없이 좋으련만.

 

강에게는 멋진 연인이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항상 머릿속에 그려온 대상이다. 바다라고 불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아주 큰 강이다. 강은 그 임을 만나 넓은 가슴에 폭, 안기는 것이 소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 산 멀리서부터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왔다.

 

강은 내게 각별한 존재다. 알몸으로 멱 감던 시절부터 20여 년을 애인처럼 지내왔다. 강은 나의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줄 줄 안다. 어떤 비밀을 얘기해도 귀담아 들어주곤 절대 남에게 옮기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찾아가 하소연해도 전혀 귀찮아하지 않는다. 재미있게 놀다 싫증이 나면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가버려도 미워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한없이 관대하고 베풀기만 한다.

 

나는 오늘에서야 강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역지사지의 심정이 되어보고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자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다. 부끄러운 나의 자화상이 강을 통해 고스란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강처럼 신중하거나 부지런하지 못하다. 사소한 일에 불끈 화를 내는가 하면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때로는 남을 탓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만 골라 편애도 한다. 좋고 싫음이 얼굴에 쉽게 나타나고, 짜증도 곧잘 낸다. 강과 더불어 살아오긴 했으나 삶의 방식은 사뭇 다르다. 강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듯, 나 또한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그때 임을 만난 심정으로 얼굴 한가득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고 굳게 속다짐한다.

 

어느새 사방은 어둑하게 변해 있다. 어릴 적 놀러나간 나를 기다리다 직접 찾아 나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물수제비를 뜨려던 아들이 흠칫 놀라 내 쪽을 바라본다. 나를 꼭 빼닮은 모습에 순간 웃음이 난다. 강은 서서히 어둠속으로 멀어져간다. 작별을 못내 아쉬워하는 듯. 나는 오늘 이 소중한 추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고향집 불빛이 먼발치서 어서 오라 손짓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노혜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6.13 강의 사유, 그 강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강의 연인 바다 그리로 흘러가기 위해 강은 부단히 흐르며 평상심을 고르는 거구나, 글을 보며 느낍니다.
    신인상 수상 축하드리고요. 강물처럼 쉼 없는 정진 있으시길 바랍니다.
  • 작성자정서현 | 작성시간 13.06.13 안녕하세요? 정서현입니다.
    멋진 댓글 감사드리구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노혜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6.13 수비골사랑방에도 들러 흔적 남겨 주세요. 향 좋은 차 대령하고 기다리겠습니다.^*^
  • 작성자변종호 | 작성시간 13.06.14 강의 대한 명상이란 제목을 보고 어느 강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 글을 썼을까 궁금했습니다.
    동향인 영월 출신분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강에 대한 사유가 넓고 깊음을 느낍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리며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 답댓글 작성자정서현 | 작성시간 13.06.14 아, 영월분이시라니 더욱 반갑고 기쁩니다.
    새내기인만큼 많은 조언을 부탁드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