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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 1

[국문학사 1] 19세기 문학사의 여러 양상과 근대 문학의 접점

작성자김준|작성시간26.06.05|조회수89 목록 댓글 16

19세기 문학사의 여러 양상과 근대 문학의 접점

국어교육과 20256086 김준

 

 

19세기 문학사의 여러 양상과 근대문학의 접점

 

19세기 문학사의 특징은 간명하게 압축하여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19세기 내부에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문학적 흐름과 얽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18세기와 구분되는 19세기 문학사의 특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이다. 또한 19세기는 근대전환기와 연접한 까닭에 근대문학과의 연속성 측면에서 논란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시대의 문학사는 연구자의 이념과 시각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임을 감안하면, 19세기 문학사 이해의 편차는 결국 연구자들의 상이한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간 19세기 문학사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일별해 본다.

내재적 발전론 입장에서 문학사를 살펴보면 19세기는 다소 실망스러운 시대로 인식된다. 한국 문학사가 근대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발전의 도정에 있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대체로 19세기 문학사의 실질은 오히려 18세기 문학사가 도달한 문예 미학적인 성취나 발전의 내적 동력마저 약화되거나 상실되었다고 파악되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나타난 실학파 문인들의 혁신적인 사유와 현실주의적인 미의식, 여항예술의 창조적 기풍, 사설시조의 전복적인 상상력과 발랄한 언어, 판소리의 민중 의식 등이 19세기 들어 제대로 계승되거나 새롭게 고양되지 못했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그러나 최근 이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고 있다. 19세기 들어 식자층이 확대됨에 따라 한문학의 저변이 확대되고 다양해졌으며, 저층에서의 통속적 취향과 더불어 문예의 고급화·전문화를 통한 심미성이 고조되었고, 근대성의 한 범주로 간주되는 도시적 일상성이 문예에 포착되었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다. 분명 전시대 문예와는 다른 지향과 소통 환경의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한편, 근대와의 접점에 대해서도 문학사 인식의 변화가 발견된다. 한국 문학사를 민족 문학의 자생적 발전 과정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19세기 문학과 근대문학의 계기적 연관성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 문제일 뿐, 그 접속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최근 비판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다. 지난 세기말 거대 담론의 붕괴와 더불어 탈근대주의 입장을 취하는 연구의 일각에서는 19세기 문학과 근대의 기원적 공간으로서 근대계몽기의 문학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한다고 본다. 한국의 근대성과 민족 담론의 형성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서의 강제 편입 이래 서구 지식의 충격과 제국주의와의 대항 과정에서 성립된 것인 만큼 이전 시대와 불연속적인 지점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탈근대론적 시각에서는 내재적 발전론 자체가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작동하는 목적론적 시간관, 즉 진보와 발전을 선형적으로 배치하는 관점이 투사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렇듯 19세기 문학사를 둘러싼 시비는 문학사 인식의 근본 시각에서부터 문학사의 실제 국면에 대한 가치평가에 이르기까지 다단하다. 문학사에 대한 인식 틀과 자료적 실체,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이 좀 더 긴밀한 연관성을 획득할 때 19세기 문학사는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2. 도시적 감수성과 소통영역의 확대

 

19세기에 들어 주목할 만한 문예 현상 중 하나는 특정 계층에서만 향유되던 장르가 그 계층적 기반을 넘어서 소통 영역이 확대되는 한편, 중앙과 지역 간의 문예 교류가 광범위하게 확산된다는 점이다. 시조의 경우, 중세의 이원적 문자 체제하에서 사대부들의 가창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창안된 양식으로, 단아한 형식에 평담한 미의식을 담아 전아하고 세련된 가곡창으로 불렸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여항가객층의 합류와 사설시조로의 확장을 통해 시조는 도시적 감수성과 중간계층의 미의식, 서민층의 욕망과 생활 감각 등을 받아들이면서 전에 없는 창조적 활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 시조 창작은 안민영(安玟英)과 이세보(李世輔) 등 소수 작가를 제외하고는 작품 수나 내용 미학적인 차원에서 현저히 뒷걸음질 친다.

이러한 창작 쪽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음악적인 전문성과 향유 기반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시조는 가곡창과 시조창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연행되는데, 19세기에 이르러 음악적으로 상당한 변화와 분화가 나타났다. 가곡창 쪽에서는 새로운 악곡을 파생하거나 곡목을 재분배하면서 최고 수준의 음악적 세련성과 전문성을 확보했다. 이렇듯 가곡창이 예술적 높이를 지향했다면, 시조창은 대중적 확산을 추구하였다. 영조조에 서울에서 형성된 시조창은 19세기 초에 이미 지방에까지 널리 파급되었고, 이어서 서울의 경제(京制), 충청도의 내포제(內浦制), 전라도의 완제(完制), 경상도의 영제(嶺制)로 정착되었다. 지역적 특색에 따른 창법과 악곡이 발현된 것이다. 이는 시조창의 전국적 확대와 대중화의 진전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서울과 지방간의 동시 소통이 이루어진 것처럼 문화 소통의 중심에는 선상기(選上妓)라는 매개자의 존재, 안민영·신재효(申在孝)같이 전국을 활동무대로 삼은 후원자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발달과 유흥문화의 흥성에 다른 예술 수요층의 확대가 더 근본적인 요인이다. 무숙이타령으로 알려진 게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주인공인 김무숙은 거금을 들여 전국의 유명 예인들을 동원하고, 이들과 더불어 한강에서 호화찬란한 선유 놀음을 차리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벌인 놀이의 성격과 선택된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진지한 향유보다는 쾌락적 풍류와 통속적 정취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예술의 상업화에 따라 이제 돈이 있다면 전국의 어느 예인이라도 불러들여 수용자 취향에 맞는 다종다양한 음악회를 구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19세기 들어 신분에 따른 예술의 특권적 독점이 완연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상업성에 기반한 유흥문화의 흥성과 그 파급력은 향유층이 뚜렷이 준별되던 정가(正歌)와 잡가(雜歌)의 위계까지 무너뜨린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궁중에서도 민속악 계통의 공연을 유치하는가 하면 궁정의 나인조차도 육자배기, 늴늬리야를 흥얼거릴 정도가 되었다.

유흥의 만연은 수요층의 확대뿐만 아니라 전통 노래의 장르 경계까지 해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19세기에는 장르 간의 교섭·전이·혼종의 양상이 전에 없이 증폭되었다. 민요에서 가사로, 가사에서 판소리 단가로, 사설시조에서 잡가로 전이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장르가 잡가이다. 19세기 중후반부터 대중적인 음악취향을 그 어떤 장르보다 민감하게 포착했던 잡가는 특유의 음악적 세련성으로 인해 텍스트 내적 질서를 파괴해 갔다. 이종의 가창 장르들을 특유의 음악적 질서로 혼종화한 이 노래는 형식적인 면에서 시가의 정형성을 가장 크게 깨뜨렸고, 세련된 수사를 동원해 통속적 정조를 극단까지 끌어올렸다. 타 장르의 노랫말과 정서적 효과를 재조합한 잡가에서는 창신의 면모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가가 20세기 초 근대계몽기에 가장 인기 있는 레퍼토리로 부상한 까닭은 도시 유흥의 발달과 새로운 감성의 음악적 견인력 때문이다.

18세기 중엽의 김수장(金壽長)“30년 전만 하더라도 산림이 그윽하게 우거진 곳이나 폭포수 떨어지는 소나무 아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종일토록 창습(唱習)하여 마침내 일가를 이룬 자가 많았는데, 세상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일들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라고 개탄한 적이 있다. 이처럼 18세기 예인들에게서 우리는 자기 예술세계의 완성을 위한 치열성과 그 과정의 고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예인들의 태도는 사뭇 다른데, 자기 예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물론 예술가로서의 자의식도 희미해진다. 정음(正音)이 사라져가는 것을 한탄하여 가곡창의 정수를 추구했던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이 판소리 광대들과 거리낌 없이 놀이를 벌였고, 판소리와 잡가가 정가·가곡과 향유층을 공유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대중의 취향에 따라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19세기 예인들의 변화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필경 19세기 예술은 통속화로 경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 예술의 물적 토대는 봉건 해체기 국가권력의 이완을 틈타 치부된 자본이 소비적으로 흘러 조성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 성격이 약여(躍如)하게 드러난다. 통속화는 소비자의 유락적 욕망과 상업주의에 복무하는 예술이 나아갈 예정된 길이었다. 그러나 통속성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통속성은 그 특유의 흡인력으로 인해 예술의 대중화를 촉진하고 예술 향유층의 저변을 확대했으며, 그 자체로 중세적 이념과 가치 영역에서 분리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3. 체제모순의 심화와 민중 문예의 부상

 

19세기 전반은 세도정치라는 권력 집중 구조가 성립되어 운용된 시기다. 19세기 중반의 대원군 집정기를 거쳐 서양 열강과 일제의 침탈로 이어지는 후기에 이르기까지, 체제모순의 심화는 1811년 홍경래의 봉기, 1862년 임술민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규모 민중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민중들이 변혁운동의 주체로 성장한 만큼 문예 방면에서도 민중 양식이 부상했으니, 이 역시 당대의 특징이다.

체제모순에 대한 민중저항 과정에서 직접 이를 반영한 작품은 바로 현실비판가사다. 이 유형의 가사는 1733년 직후에 지어진 임계탄을 비롯하여 18세기에도 몇몇 작품이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창작은 민중저항이 거세진 19세기에 이루어졌다. 1804년 장연작변에서 이달우가 지었다는 장연가(가칭), 1826년쯤 청주괘서 사건과 관련된 풍덕가(가칭), 1862년경 임술민란시 유계춘이 지었다는 진주가(가칭) 등의 실전(實傳) 가사 등을 비롯해 향산별곡등 현전 가사는 모두 19세기에 창작되었다. 19세기 민중의 저항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생존 투쟁의 일환이자 모순에 찬 현실의 개선을 요구하는 정소(呈疏)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거창가는 관장(官長)과 이서배(吏胥輩)의 늑탈로 인한 민막(民瘼)과 폐정을 핍진한 묘사와 격정적 어조에 담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거창가는 그 지역 순찰사에게 올린 의송(議送)의 일종인 거창부폐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실 고발의 성격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한편, 실전가사의 창작 정황을 고려해 볼 때, 현실비판가사는 민란의 유발과 확대를 위한 선동 목적에 활용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실비판가사는 주로 향촌의 몰락한 양반, 즉 비판적 지식인들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실비판가사가 도달한 현실주의적 성취나 사회비판의식은 이후 근대계몽기에 게몽지식인에 의해 산출된 계몽가사와 맥락이 닿는다.

이 시기 민중 성향의 노래 가운데 종교가사도 제외될 수 없다. 동학가사와 천주가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평등을 노래하며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민중종교운동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이 노래는 조선왕조의 유교적·신분적 체제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이념은 반봉건적이며, 불평등한 사회제도로 피해를 입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기에 체제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었다.

질곡의 현실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민중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저항과 비판을 담아 민요로 부르기도 했다. 예컨대 제국주의의 침탈이 노골화되던 동학농민전쟁 직후에 민중들은 민요 아리랑의 형식으로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 양에야 양철을 짊어지고 / 놀미갱갱이 패전했네라고 노래하면서 패전의 안타까움을 표함과 동시에 새로이 전의를 다지기도 했다. 반면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창작된 민요도 있다. 춘천의병아리랑중에는 우리나 부모가 날 기르실 제 / 성대장 줄려고 날 낳으셨다 / 귀약통 납날개 양총을 매고 / 벌업산 대전에 승리를 했네라는 구절이 담겨있다. 이처럼 19세기 민중 문예의 한 방향은 체제 저항의 성격을 짙게 담아내면서 반봉건적 민중운동과 결합했던 것이다.

민중 문예의 또 한 방향은 계층의 제한성을 넘어 이른바 근대적 대중예술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배층 양반에 대한 통렬한 풍자, 남성 가부장적 횡포의 폭로 등 중세 사회의 모순된 현실을 극적 구조에 담아 주제적으로 실현한 탈춤은 대표적인 19세기 민중 문예 양식 가운데 하나이다. 대체로 현재와 같은 공연 형태를 갖춘 시기를 19세기 무렵으로 추정하는데, 전문예인층의 결합과 상인층의 후원으로 세련된 대중 공연 양식으로 정착한 탈춤은 당대에 유행했던 민요나 사설시조, 잡가들을 자기 양식 안에 흡수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극적 기능의 한 부분을 담당했으며, 대중적인 흥취를 고양하면서 대중예술로서의 토대를 더욱 공고히 했던 것이다.

한편, 지방의 미천한 광대들로부터 출발한 판소리가 19세기 들어 보여준 약진은 놀랄 만하다. 서울과 지방의 양반층, 중서층, 평민부호층, 하층의 애호를 받았고, 더 나아가 중앙 고관과 왕실에서까지 판소리를 향유했으니, 전국에 걸쳐 전계층이 즐기는 대중예술로서의 위상이 확고해진 것이다. 판소리의 동향과 관련해서 부정적인 면모 또한 존재하는데, 양반 좌상객의 참여로 인해 민중적 발랄함과 비판의식이 상당 부분 소거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소리의 향유층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며, 판소리계 소설 양식으로 전환되어 방각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4. 근대문학과의 접점, 그 비연속의 연속

 

1876년 조선은 개항과 더불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강제 편입되어 급속하게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서구 제국주의와의 치열한 대항 과정에서 민족 현실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근대문학의 형성 과정에서 서구문학이나 메이지 시대 일본문학의 영향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근대문학의 형성에서는 아래의 요인이 더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우선, 낡은 봉건유제의 청산과 민족주의·근대화를 중핵으로 하는 계몽 이념의 확산이다. 근대적 의식의 각성이 시대적 소명이었으며 각종 매체와 담론 체계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던바, 자주독립, 문명개화, 남녀평등, 신교육, 미신타파, 조혼철폐 등은 계몽가사와 신소설의 주요 주체로 구현되었다.

다음으로 근대적인 인쇄술과 신문 매체의 출현이다. 이러한 근대계몽기 문학 장르들은 주로 신문을 통해 보급되었는데, 이는 종래의 문학 유통 방식과 문예 양식의 전환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시가는 부르는 노래에서 읽는 시로, 소설은 이야기하거나 읽어주는 것을 듣는 방식에서 독자가 직접 읽는 방식으로 전환됨에 따라, 구술성의 한계를 넘어선 상상력과 묘사의 확대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시사성을 생명으로 하는 신문 매체의 특성상 여기에 실린 작품들의 소재는 당대의 생생한 현실에서 취택되어 작품이 사실성을 구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셋째는 국어의 발견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기획 과정에서 국민의 정신적 통합을 위한 기제로써 국어라는 개념이 성립되었고, 언문일치의 활용으로 인해 문학이 당대 대중사회의 주도적인 예술 형식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근대적인 문학 양식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근대계몽기의 문학 양식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으며, 근대문학에 어느 정도 근접했을까? 대한매일신보에 집중적으로 실린 계몽가사는 논설이나 잡보 등에서 주제가 될 만한 내용들을 끌어오고, 선행의 양식들(한시·가사·잡가·창가 등)을 절취, 변환하여 등가화 원리에 입각한 연의 구성, 서사·본사·결사의 유기적 구성 등을 통해 독특한 자기 양식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계몽가사는 주제 측면에서 광범위한 계몽 담론을 수용하고, 표현 측면에서 현실의 매개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은유를 활용하였으며, 수준 높은 사실성을 구현했다. 소통 측면에서 읽는 시로의 전환을 완성하여 근대시로의 도정에 한결 근접하였다.

그러나 엄정한 정형률에서 탈피하지 못한 점, 집단 화자를 통해 계몽의 열정을 담아내긴 했으나 개별 존재의 서정을 표출하기 위한 내면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점, 투명한 수사적 전략으로 고도의 상징과 비유를 담아내지 못한 점에서 근대 서정시에 다가서지는 못하였다.

소설사의 전환 또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신소설의 선행 양식으로서 근래에 주목받는 것이 역사전기소설과 단편서사양식이다.

민족영웅을 형상화한 역사전기소설은 전()과 군담 소설과 같은 전통서사양식에 뿌리를 두고 근대계몽기 역사물이나 전기물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 작품들은 서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 관심은 민족영웅을 통한 계몽의 효과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야담이나 한문단편 같은 전통 양식에 근대적 문화 양식인 논설이 결합해 탄생한 단편서사양식은 사실성의 확장과 계몽주의 시대정신의 전파, 율문적 문체에서의 이탈, 묘사의 확대, 다양한 양식적 실험 등에서 근대문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대중적 기호의 획득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후 등장한 신소설은 대중적인 정서와 기호에 한결 부합했다. 신문에 발표된 신소설은 대중 독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계기로 소설의 근대적 전환에 한층 근접할 수 있었다. 신소설이 고소설과 확연히 다른 점은 인물과 사건 설정의 현실성에 있는데, 신소설은 실재하는 현실의 구체성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근대소설에 가깝다.

신소설은 구성의 측면에서 시간 순서에 따른 사건의 나열을 탈피하여 서술적 역전구조를 활용하고 있으며, 문체의 측면에서 더러 구어체 문장을 사용, 언문일치를 지향한다. 때로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까지 포착하는 묘사력의 확대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이 고소설과 확연히 분변된다.

반면, 서사 전개에서 우연성의 남발, 내적 필연성이 결여된 결말 구조, 작가의 과도한 개입과 주제 제시로 인한 개성있는 인물 형상화의 실패, 권선징악의 서사구조를 차용한 이상주의의 표출 등은 근대소설에 미치지 못한 점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소설 작가들은 소설의 계몽적 효용에만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대중적 흥미와 여가를 위해 존재하는 근대소설의 기반을 고려하지 못하여, 작품의 유기성과 주제의 방향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의 접점은 단선적인 경로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연속이지만, 미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다단한 비연속성이 존재한다.

자생적 발전인가 외래적 이식인가라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근대성이나 민족 담론의 형성이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의 강제 편입 이래 서구 지식의 충격과 제국주의와의 대항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었으며, 문학 개념 자체도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번역·창안된 것인 만큼 서구적인 요소의 개입이 적잖다. 하지만 내재적 요인이 없었다면 우리 문학사의 근대적 전환은 성립되기 어려웠을 것임을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근대문학은 특정한 시간 단위의 한 좌표점에서 일시에 실현된 것이 아니며, 작품에 관여하는 근대적 요소 또한 복합적이다. 무엇보다 고전문학의 근대적 전환을 위한 자기갱신의 노력, 그리고 상당 기간 지속된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의 공존 과정 등을 상기한다면, 성급한 이식론이나 단순화된 연속론 모두 문학사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 요컨대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의 접점은 단 하나의 결절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선들의 접속과 단절 그리고 변이의 양상을 띠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비연속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5. 개인적 감상

 

19세기 문학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시기를 단순히 고전문학이 끝나고 근대문학이 시작되기 전 단계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전에는 19세기 문학을 근대문학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번 학습을 통해 이 시기에도 나름의 특징과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특히 같은 시대의 문학이라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또한 19세기에는 문학과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시조와 음악, 공연 문화가 일부 계층만의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고, 여러 장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를 단순히 전통이 약해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문학과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근대문학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전 문학의 변화와 발전이 쌓여 만들어졌다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은 완전히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끊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문학사의 변화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학습을 통해 19세기 문학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이해할 때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앞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면 문학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까지 함께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 토론

예술의 대중화는 예술성을 약화시키는가?”

19세기에는 시조, 잡가, 판소리 등 다양한 문학과 예술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대중의 취향을 반영하며 통속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고, 장르 간의 경계도 점차 허물어졌다. 이를 예술이 대중화될수록 본래의 예술성과 수준이 낮아질 수 있다고 볼 수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즐기고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대중화가 예술의 발전과 확산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술의 대중화는 예술성을 약화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예술의 가치를 더 넓게 확장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김준 국문학사 발표자료.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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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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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하현지 | 작성시간 26.06.08 여항문학에서는 중인과 서민들의 삶이 작품 속에 자주 등장했는데, 그 배경에는 시정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하층민을 훈계하거나 특별한 경우에만 기록했다면, 조선후기에는 그들의 일상과 생활 자체를 관심 있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여항문학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문인들이 이전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작성자서준재 | 작성시간 26.06.08 발표 잘 들었습니다. 19세기 문학사를 통해 고전문학에서 현대문학이라는 장르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시점을 공부함을 통해서 문학의 변천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토론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술성이 뛰어나서 대중화가 이루어진 작품들도 많으나 현대에서도 아무의미 없는 유행어가 유행하는 것처럼 꼭 대중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예술성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작성자박민경 | 작성시간 26.06.08 발표 잘 들었습니다.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이 완전히 단절된 것도 그대로 이어진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문학사의 변화가 복잡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번 발표를 통해 문학을 이해할 때 작품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도 함께 보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 작성자20 오기근 | 작성시간 26.06.10 좋은 발표 감사합니다. 19세기 문학사라 하면 단순히 고전에서 근대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 발표를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전 시기가 문학을 향유하는 계층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면 19세기는 향유층을 넘어, 주류/비주류 문학의 경계가 흐릿해져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한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 작성자박준서 | 작성시간 26.06.18 19세기 문학사는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이 단절되거나 단순히 이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변화와 갈등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문학과 예술의 향유층이 확대되고 민중의 목소리가 문학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근대문학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기존 문학의 변화와 축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이번 학습을 통해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함께 살펴보아야 문학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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