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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

[스크랩] 삼천궁녀에 가려진 의자왕의 진실

작성자현순남|작성시간08.12.21|조회수225 목록 댓글 1

삼천궁녀에 가려진 의자왕의 진실


200520864감이슬

●삼천궁녀와 의자왕은 바로 백제멸망의 상징이다.술과 유흥으로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간 의자왕.과연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의 방탕함 때문일까?

중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백제하면 떠오르는 것을 한단어로 적게했다. 학생의 90%이상이 의자왕과 삼천궁녀라는 답안지를 적어 제출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사진첨부)또한 이것이 우리들의 전반적인 의자왕에대한 인식이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는 지금의 충남 부여군이다.부여군을 감싸돌고있는 백마강 줄기를 따라가다보면 부소산의 삼천궁녀의 전설이 남아있는 낙화암까지 다다르게된다.(사진첨부)





 고란사,삼천궁녀를 기리기위해 고려시대에 지어졌다.(사진첨부)
후세에 누군가에의해 그려진 삼천궁녀의 비극을 전하는 벽화.(사진첨부)

왜 당시 백제인들은 낙화암으로 몰렸을까?자연적인 요새인 낙화암의 지형적인 특징에서 그 이유를 찾을수있다.

전시의 사비시가지.(사진첨부)
660년 7월 백제의 마지막 날,그들이 최후요새인 낙화암까지 다다랐음을 추측해볼수있다.


●왕의 칭호는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붙여지게되는데 의자왕,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있다.
우리가 알고있는 의자왕이라면 여자와 술에빠진 방탕한 왕인데 어떻게해서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을까?
전혀 다른모습의 의자왕을 만나보자.

유왕산은 왕이머문곳이라 하여 유왕산이라 지어졌다한다.
당으로 끌려가는 왕을 모든 유민들이 이 산에 올라 통곡을 하였다 한다.잡혀가는 왕과 그 망국민들이 피눈물을 쏟았던 유왕산.


(사진첨부)태자 융을 비롯한 만이천여명과 함께 당으로 끌려간다.
당으로 끌려가는 의자왕의 아픔이 부여를 중심으로한 충남지역엔 또다른 형태로남아있다.의자왕과 순국한 이들을 그리워하며 농민들이 지어부르던 소리인 산유화가가 그것이다.

산유화야,산유화야
입포에 남당산은
어찌그리 유정튼고
매년 팔월십육일은
완아낙네 다모인다
무슨 모의가 있다든고...


전북익산시,대왕릉.무왕의 묘와 선화공주의 묘 소왕릉.극적인 로맨스로 유명한 선화공주와 무왕의 아들이 의자왕인셈이다.

국립부여박물관,백제의 문자유물이 전시중이다.


이곳에 의자왕에 대해 알수있는 한점의 유물이있다.(사진첨부)
태자융(의자왕의 아들)의 묘지석이다.

태자융은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이 지석은 중국 낙양에서 발견됐다.이 묘지석에서는 태자융의 연대기와 성격을 기록하고있는데,의자왕의 나이를 추정해볼 수 있는 단서가있다.
태자 융은 68년이되던 영순원년에 죽었다.(서기 682년)
이것으로 추정해본 의자왕의 출생년도는 590년쯤으로 보고있다.
의자왕은 641년에 즉위하였다.(사진첨부,아래)

그의 나이 40,이는 그가 태자로써 쌓아왔던 정치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나이이다.
삼국사기에 묘사된 의자왕의 성격과 그 정치(사진첨부1,2,3)




●다른왕들에 비해 기록이 많은 편인 의자왕.그러나 유달리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한 구문이 많이 눈에 띄인다.

왕이 직접 신라를 공격해서 사십여성을 빼앗았다.
일만 군대가 신라에 대야성을 쳤다.
신라에 당항성을 공격했다.
신라에 일곱성을 빼앗았다.

의자왕 제위 20년동안 신라를 공격한 것이 10차례나 된다.2년에 한번꼴로 신라를 공격했다는 것인데,그야말로 전쟁의 연속이었다해도 과언이아니다.의자왕은 왜 그토록 신라를 공격했던 것일까?

의자왕의 격렬한 흔적이남아있는 대야성.견고하게 쌓은 석성의 흔적들,발굴현장

(사진첨부)

 

대야성은 낙동강 서쪽지역을 방어하던 신라의 최고요충지였다.이곳을 의자왕은 즉위한지 2년만에 집중공격하여 확보한다.황강을 이용하면 경주까지 갈수있는 전략요충이다.이는 양국의 관계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역을 백제가 확보하게된 것이다.


(사진첨부)

대야성의 함락은 신라로써는 대단히 큰 손실이었다.
즉,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위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해 의자왕은 친히 군대를 끌고나아가 신라의 미후성등 40여성을 함락시켰다.
(사진첨부)

왕이 몸소 전장에 나가 작전을 지휘하고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전쟁의 비중이 큼과동시에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되면 왕권이 강화되게된다. 의자왕은 이러한 점을 노리고서 전쟁에 참여하게된다.그리고 예상대로 의자왕의 위상은 크게 증대된다.

(의자왕 재위적의 전쟁연표.사진첨부)


백제의 첫 도읍지인 서울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한강을 회복하고자했던 백제는 신라와 손잡고 한강유역을 회복하나 이내 신라는 백제의 한강하류지역을 급습한다.
이후 이는 백제인들의 오랜 염원이 되고,의자왕은 한강유역회복에 박차를 가한다.그렇기에 의자왕의 제 1 목표는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이었다.의자왕은 낙동강 동쪽까지 신라를 몰아내고영토를 넓혔다)

고대국가에있어 영토회복이란,왕의 통치의 일환으로볼 수 있다.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을 지속적으로 취할수있었음은 내부적으로 의자왕의 정치가 성공을 거두고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의자왕대의 강성함은 정림사지 5층석탑에서확인된다.탑의 1층전면엔 빼곡히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적은 글들이 들어서있다.(백제최후의날 왜 일본은 지원군을보냈나편에도 거론되는내용)
(사진첨부)
당시의 백제의 강성함을 알수있는 단서로 백제 멸망당시의 고을수는 250현에 인구가 620만명이다.당시의 생산력에 비한다면 엄청난 인구수다.

백제가 멸망할때에도 백제는 부강한 나라였다.이는 당신의 김유신과 진덕여왕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고있다.

작은나라인 신라가 큰나라인 백제를 건드렸다가 화를 당하지않을까 걱정하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

●기록에대한 의문
-의자왕이 주색과 향락에빠졌다는 기록은 의자왕의 나이 60이넘어서야 나타나고있다.그이전에는 일체 그러한 기록을 찾아볼수가 없다.

3천궁녀의 허구성에대해 알아보자.
백제수도 사비의 호수는 1만호,호당 5으로환산할때 5만명이다.그중 여자가 2만오천명,또 그중 노인과 아이를 제외한 젊은여성이 만 오천명이라 가정하면 사비도성의 젊은여성 20%가 다 궁녀라는 이야기가된다.

유적을 통해 당시의 궁궐을 파악하면 삼천궁녀가 살 수있는 면적이 나오지않는다.
더불의 삼국사기에서도 삼천궁녀에대해 찾아볼 수가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다음과같은 내용이있다.

-삼천궁녀의 기원
장판각의 민재인 선생의 문집 판각들중 삼천궁녀에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문화적 장치 내지는 상징으로 이해되는 3천의 수치.후궁 역시 여성보다는 궁인으로 해석되어야함.

-대중가요에의해 굳어진 삼천궁녀의 이미지
삼천궁녀를 노래하는 가요가 수십곡이나 됨.일제시제~1960년대까지 널리불리워졌다.패망한 나라에대한 애틋함이 국민들에게 쉽게 다가간것으로 보여진다.


●백제멸망의 진실
-삼국사기에 기록되는 백제멸망의 징조들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두꺼비 수만마리가 나무위에 모여들었다.
어떤 여자의 시신이 떠내려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태자 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백제 최후의 날,누군가 황급히 백제의 보물 향로를 묻은 것을 알 수 있다.다급햇던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기위해 국제정서를 알아보자.

당시에 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당을 중심으로 움직이고있었다.백제또한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있었다.
그러나 반면 신라에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백제의 지속적인 공격에 신라는 당과의 관계에 국운을 걸게된다.신라는 당의 원조를 얻기위해 제도와 복식,연호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당시 최고통치자였던 진덕여왕이 직접 당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칠 정도였다.

결국 당의 노골적인 신라 편들기는 의자왕으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의자왕 12년,결국 의자왕은 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제관계를 모색하게 된다.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해외영토인 왜를 통해 당과 신라를 견제하는 십자외교관계였다. 이러한 국제관계를 토대로 의자왕은 패망직전까지도 신라에 대한 정복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660년 당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면서 파국의 길을 맞게된다. 그리고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를 돌파하고 18만의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가 함락되게된다. 그리고 660년 여름,백제라는 이름은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660년 8월 2일,사비성에서는 백제의 항복식이 치러진다.
의자왕이 단 아래에서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술을 따르자 울지않는이가 없었다.

그리고 포로로써 당나라로떠나게 된 의자왕은 1300년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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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서영화 | 작성시간 08.12.21 나의 생각 :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천, 만 숫자를 많다는 의미에서 썻는 경우도 더러 있다. 삼천이란 숫자도 꼭 삼천명의 궁녀다는 의미보다 실로 많다는 의미로 본다. 작년에 백마강과 낙화암을 갔는데, 백마강폭이 그리 넓지 않았고, 그리 깊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삼천궁녀가 빠져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역사의 흐름을 글로 남긴 미쓰 현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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