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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 말씀 나눔

신앙과 율법 그리고 복음 95, '타력과 자력 구원'

작성자오랜기다림|작성시간20.02.28|조회수81 목록 댓글 0


[신앙과 율법 그리고 복음 95, '타력과 자력 구원']


대부분의 종교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의 구원론은 흔히 하는 말로 '타력 구원'을 주창한다. 즉 '구원은 나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곧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구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표현은 그리 틀리지 않은 것이긴 하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 속에는 은연중에 '결국은 내가 믿어야 그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내포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는 사실 그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와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표현을 성경에 의도대로 잘 모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정작 그 '예수를 믿는다'는 표현이나 곧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곧 그 의도대로 아는 것이 그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역으로 그렇게 자주 그리고 흔하게 표현되는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이지만 정작 그 의미는 사실 정작 제대로 모르고 사용한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물론 안다고 한다. 그리고 아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곧 율법적 차원으로 문자적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안다고 하지만 정작 모른다'고 하는 이유다. 그 율법적 앎이 복음적으로 다시 해석되어야만 비로소 안다 고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해석되고 다시 표현되어도 그 표현 자체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긴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을, 존재인 인간에게 전하는 방법이 그나마 그것 밖에는 따로 없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은 그 영원에 대한 우리 존재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분명 '타력 구원'이 옳다. 즉 그 구원은 내가 아니라 내 밖에서 올 수 밖에 없다는 의미다. 곧 굳이 설명하자면 전혀 다른 차원 즉 인간은 모르는 것으로의 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표현에 문제가 아니라 실은 그 표현 속에 담긴 그 의도를 아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다시 '자력 구원'이라는 의미가 담긴다. 즉 타력에 의해, 다르게 표현하자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 영원이라는 차원을 대부분이 알지도 못하거나, 자기의 사고 속에 갇혀 반대하거나 배척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은 그것을 받아 드리고 결국 이해하여 그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역시 자신에게 있다. 물론 이런 설명도 그것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존재들의 존재적 표현은 그 존재들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그 존재의 차원을 벗어나면, 그 다음은 그 존재적 표현으로는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곧 온전하다는 것은 역시 그 차원이 될 때만 가능하다는 이유다. 


그리기에 신앙에서 곧 성경이 구원을 다르게는 '하나 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아는 것'이란 아직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안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 된다'고 하는 의미는 비로소 그 영원과 하나된 '영원적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로 구원을 표현하는 것이다. 요한이 그 샘플로 예수를 '말씀 육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그러나 그 아는 것을 거치지 않으면 그 하나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구원은 내가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연습하고 훈련해서 결국 하나가 될 때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그 구원을 설명할 때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고 이어서 '하나님이 한다'고 하면서도, 역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굳이 표현하자면 '타력과 자력이 합력하여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비록 상징적 표현들이긴 하지만 이미 창세기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곧 인간의 창조 모습을 그릴 때, 짐승들과 다름 없이 진흙으로 만들어지는데 짐승과 다른 것은 그 인간에만 그 생기를 불어 넣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선악과가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인간에게는 말씀이 주어지는데 그 의미를 '알고, 먹어, 하나 되면, 구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인간이 선악과를 상징으로 하는, 곧 율법 즉 그 말씀이 주어지기 전에는 사실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그 말씀을 받았고 지혜롭다는 뱀으로 상징되어진 그 중보자가 해석해 주는 것을, 그 처음 사람들처럼 이해하고 받아 드려 그 선악과를 먹어야 비로소 그 말씀과 하나되어, 죽어, 그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오늘의 종교들처럼 그것을 원죄 정도로 오해해서 받아 드리지 않으면, 분명 은혜는 받았지만 곧 중보자의 해석을 오히려 배척하고 결국은 그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받아 드려, 죽지 않아서, 그저 짐승의 상태로 있는 것이라는 이해다.  


사실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보인다. 사람과 짐승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같은 원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인간은 그 짐승들에 비해 좀 더 도구들을 이용하고 고상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리적으로만 보면 그 짐승들과 절대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 그런 짐승을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를 보라'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 짐승들 중에도 여러 차이가 있는 것을 본다. 그러기에 사람도 그 짐승들에 비유하는 것이다. 쥐 같은 놈이나 박쥐 같은 놈 또는 곰 같다거나 사자 같다고도 한다. 진화론에서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영원과 하 되지 못한 사람이 곧 그 짐승들이다.


물론 좀 더 고상하고 유치한 것의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이고 그 인간이 그 짐승들과 별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현실 속에서도 아주 분명하게 본다. 본성으로만 보면 전혀 다르지 않다. 똑같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생존 경쟁에서는 짐승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얼마나 똑똑하게 머리를 써서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가가 관건이 세상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교육이 그렇잖은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한 것이다. 경쟁이다. 신앙과 그 세상 교육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곧 그것이어야 한다. 즉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 차원적 존재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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