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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 말씀 나눔

복음, 선악과로 생명과를

작성자오랜기다림|작성시간26.06.13|조회수7 목록 댓글 0

[복음]

"선악과로 생명과를"

단정적으로 복음이란, 위의 부제처럼, '선악과로 생명과를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선악과나 생명과는 전부 상징적이고 역시 비유적 표현들이다. 실제 그런 과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아주 의미있고 생생한 상징적 깨우침의 표현인 것은 분명하다. 나름 상상해 보건데, 선악과라는 것은, 겉 모양은 그 악으로 되어 있고, 그 내용이 곧 그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눈으로는 보이는 것은 분명 악인데, 그 내용 곧 그 안은 선으로 된 모양이다.

물론 이 때 그 선이나 악이란 표현도 상징과 비유적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법적인 것이거나 윤리도덕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곧 영적 의미들이다. 그러기에 그 내용을 알면, 오히려 그것이 곧 그 생명과이기도 하다는 의미가 된다. 즉 '존재적으로는 선악과로 표현하지만, 그 내용은 생명과라고도 비유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처음 인간에게 역시 처음 주어진 최초의 일종에 시험 과제가 바로 '그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은 '먹지 말라'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복음적 시각'으로는, 분명 먹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 먹는다'는 표현의 의미도, 존재적인 것은 아니다. 영적으로 '먹는다'는 의미는, 존재적으로는 '이해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곧 '그 광야에서 먹었다'는 그 만나와 비슷한 상징이다. 그러기에 '이해한다'는 것은 그 안다는 개념을 넘어, '하나 됨'을 의미하기 까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결국 그것 자체가 생명과라고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선악과가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비유의 표현이다.

즉 생명과라는 것은 결국 '그 선악과를 그 영적 의미로 이해된 그 사람'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열매가 또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이해다. 즉 그 산악과의 모습은 선악과 이나, 그 내용은 곧 생명과 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를 이해하면 곧 존재인 내가 그 생명과가 되어 마치 예수처럼, ' 먹으라'고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를 먹으라'는 표현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곧 그 말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가 받아 드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무슨 '신비한 무차별적 기적'이 아니라는 의미다. 받아 드리는 사람에 따라 '은혜가 또는 반대로 저주가 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나안을 묘사할 때, 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곧 '젖은 기름으로 꿀을 일종의 누룩'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선악과적 표현'이라는 의미다. 사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 표현 원리를 따른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존재적 표현인 성경의 기록 원리이기 때문이다.

즉 비록 '다른 방법이 없기에, 궁여지책인 존재적으로 표현은 하지만, 그 내용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첫 걸음은 바로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아니 그 이해는 그 신앙의 거의 전부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존재인 내 몸에 배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긴 하다. 그 광야가 40 이라는 시간이 걸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즉 '존재가 영원의 사고를 가지는 시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 곧 요한에 의하면 '말씀 육신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목사인 나는, 목사로서의 '은퇴가 그 사역의 가장 큰 은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한다. 즉 그 때 쯤이어야, 비로소 나름으로 선명하게 깨닫는 때가 되더라는 의미다. 이런 내용의 글을 만들 수 있는 은혜이기도 하다. 즉 교리로 성경을 배워 알던 것들이, 드디어 그 자체로 이해되기 시작하여 그 교리마저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는 종교를지챙하는울타리 인 것 만은 분명하다. 곧 어린 신앙일 때는 꼭 필요하지만 성장하면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도 안다.

물론 그 종교 안에서 은혜로 복음을 들어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복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종교가 하는 가장 귀한 일은 그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역시 그 복음을 전하는 그 시대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일이다. 곧 몽학선생의 역할이 곧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라는 바울의 표현이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오늘의 종교가 그것을 제대로 못하게 하기도 한다. 그 사명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 손해는 그 안에 있는 신자들의 몫이라는 안타까움이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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