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신앙의 이중성"
신앙은 이중적이다. 먼저와 나중의 관계로 설명되는 이유다. 곧 일종의 먼저 주고 받는 계약서와 나중에 그 실제로 그 이행이 뒤 따라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즉 먼저 그 계약서와 같은 성경이 주어지고 그 나중으로 그 계약서에 따른 실제가 내 몸에 이루어져야 한다. 곧 성경은 결국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과 같다. 곧 내가 그 성경과 하나되어 성경이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 그것도 '충만한 자 됨'이다.
그런 면에서 성경의 내용은 반드시 해석되고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의 해석과 설명은, 가능하면 '두 번 이상' 전해져야 한다는 이해다. 두 번 이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먼저와 나중' 또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일종의 '성경 원리' 때문이다. 즉 성경은 항상 모든 내용이 그 '시작과 완성'이라는 원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 먼저라는 의미는, 먼저 주어지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 곧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대변한다.
곧 율법이란, 우리 존재들을 위하여 그 영적인 내용을 존재적인 표현으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경이나 성전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으로, 분명 그 내용은 영적인 것임에도 그 표현이 완전히 존재적인 것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분명 그 해석이 필요하고 역시 그것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기에 '성경은 분명 사람의 기록이지만 그 내용은 영적'이라고도 하는 이유다. 즉 성경의 표면적 이해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그 성경이나 성전이 담고 있는 진정한 영적 의미를 제대로 다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영원을 이해한다는 것은 원래 불가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럼에도 그것을 그렇게라도 이해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차적 은혜'라고도 하는 이유다. 즉 복음이란 곧 그 영적인 내용을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 존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쉽지 않다. 즉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의미다. 이 때 등장하는 개념이 곧 성령 충만이다. 곧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어야 비로소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다. 그리스도 라는 표현은 우리가 아는대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성령 충만 사람'의 다른 표현 곧 명사형이다. 곧 우리 신앙인의 최종 목표 곧 그 완성적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의 그리스도 됨이다.
그런 완성을 위해서 반드시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것처럼 말씀은 당연히 그렇게 같은 내용의 말씀을 반드시 두 번 이상 전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곧 먼저는 율법적인 형태도 문자나 문맥적인 표현을 다시 해석하는 과정이라면 두 번째는 그것을 근거로 다시 진리적 곧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물론 이 두 번째 과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는 그것이 말씀 전하는 훈련이다.
그 과정에서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가 먼저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먼저 말하는 그 '팔복'의 첫 머리, 곧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개념조차 이해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곧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다르게 곧 '진리에 굶주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지도 않는 사람에게 그것에 대한 굶주림이 생길 리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그 내용 전부가 상징과 비유로 되어 있다는 이해다. 그도그럴것이 존재적 표현으로는 그 영적인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적인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궁여지책으로 우리가 아는 것을 근거로 설명해야 하기에, 모든 내용을 우리가 안다고 할 수 있는 상징과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반드시 해석과 설명이 필요하다고도 하는 이유다. 그나마 설교가 등장한 이유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