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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도덕 언어로 말하면 : 순종한다.

작성자22_2 박정균|작성시간26.06.17|조회수54 목록 댓글 0

날짜 : 5월 31일

장소 : 트리오드

인원 : 박정균 도성찬 양종빈 백건우 양지효

 


 

 니체 독회가 3회차까지 진행되고 신입부원 분들도 신청하셨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학교보다 이른 기말고사로 지금까지 작성하지 못했던 3회차 후기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독회가 진행된 곳은 강남에 위치한 트리오드라는 카페입니다. 이전에 한번 와봤던 곳인데, 조용하고 소수로 대화나누기 좋아 선택한 장소입니다. 

 1층과 지하를 동시에 사용하는 카페이기에 사람이 많지 않다면 어느 장소든 선택할 수 있겠지만 도착했을 시간에 사람이 꽤나 북적거리는 통에 저희는 지하로 먼저 이동해 자리잡고 음료를 시켰습니다 

 적당한 음료와 케이크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5명의 인원 중 두 분께서는 일정상 늦게 도착하신다고 말씀 하셔서 먼저 도착한 세명은 서로 소개를 하고 어째서 독회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간단하게 어떤 감상을 느꼈는지, 그리고 당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늦으신 분들이 서서히 도착하셨을때 독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독회는 처음 참여하시는 분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어떤 방식으로 독회가 진행되는지에 대한 말을 전달드렸고, 책을 읽고난 이후의 감상을 나누고 본격적으로 독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독회에서 진행되었던 도서는 도덕의 계보였습니다. 선악의 저편과 보통 같이 묶여서 출간되는 책이며, 선악의 저편에서 다루는 것보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더 깊게 파고들어 일종의 해설서의 역할을 굉장히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리스도교적인 내용을 알아야 하는 안티크리스트에 비해 비교적 그리스도교적 배경 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니체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수 있는 책입니다. 

 

 이번 대화의 메인 테마는 그 유명한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입니다. 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여 자유의지에 대한 논쟁이 오고갔으며 이후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가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의 연장선이었다라도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키워드였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이 두 가지의 개념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인용으로 시작하자면, 도덕의 자연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겠습니다. 

 

'

그러면 우리 다시 돌아가보자 : '좋음'의 다른 기원의 문제, 즉 원한을 지닌 인간이 생각해온 좋음이라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 어린 양들이 커다란 맹금류를 싫어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이는 커다른 맹금류가 어린 양들을 채어가는 것을 비난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리거 어린 양들이 자기들끼리 "이 맹금류는 사악하다. 가능한 맹금류가 아닌 자, 아마 그 반대인 어린 양이야말로 좋은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지라도 그 이상을 수립하는 데에 전혀 비난한 만한 것이 없다. 하물며 맹금류는 이를 약간 비웃는 눈길로 바라보게 되고, 아마 "우리는 그들, 이 선한 어린 양들을 전혀 싫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사랑한다 : 연한 양보다 맛있는 것은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 강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고, 그것이 압박욕, 제압욕, 지배욕, 적대욕, 저항욕, 승리욕이 아니기를 요구하는 것은 바로 약한 것에게 강한 것으로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것만큼 불합리하다.

' - 제 1논문 13절

 

 이 절은 아마 도덕의 계보를 통틀어서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을 가장 뚜렸하게 구분한 절이 아닐까하는 만큼 그의 생각이 직관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 있어 강자로 표지되는 맹금류와 약자로 표지되는 어린 양들의 존재는 긍정과 부정, 그 어느 것에서도 물들여있지 않은 무관심에 상태에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노예와 주인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강한 힘을 지닌 맹금류는 스스로를 선하다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힘을 지녔고, 어린양들을 고려할 필요 없이 스스로를 선하다고 주장할수 있습니다. 이와 대비되어 존재하는 자들은 어린 양들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을 핍박한다고 느껴지는 존재자, 즉 강자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칩니다. "이 맹금류는 사악하다. 가능한 맹금류가 아닌 자, 아마 그 반대인 어린 양이야말로 좋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그들이 스스로를 정의내리는 방식은 맹금류의 것들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어린 양들은 그 자신의 선함을 스스로 보증하기 못하기에 악한 자를 - 그것이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해두더라도 - 설정해두고 그 반대에 존재하는 자신들을 선한자라 정의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의 방식은 주인 도덕의 경우 자기 긍정으로부터 출발하며 노예 도덕의 경우 타자 부정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니체는 악 규정을 통한 선 규정에의 흐름을 가치의 전도라고 말하며 그리스도교에 말로 이런 가치 전도의 전형이라 합니다. 또한, 작금에 상황에 있어 그리스도교의 횡행이라 함에 대해 그는 찬달라의 복수라 명명합니다. 더 많은 약자가 강자에 대한 원한과 감정을 축적시키다 그것이 특정 임계를 넘어 도덕 체계 자체가 뒤집혀버리는, 동일한 의미에서 가치의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니체에게서 상당히 강하게 비판받아지는 것들입니다. 도덕의 계보 뿐만이 아닌 안티크리스트에서도 또한 동일하게 비판받는 부분이며, 이들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죄악시하고 약함과 부정을 마땅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니체는 평등 또한 거부합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평등이라는 요소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상에서 이 말은 굉장히 이상하게만 들립니다. 그러나 니체가 평등을 거부했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게 바라보아야 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서 강한 자들의 능력과 의지, 창조력들을 발휘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평등이라는 요소는 니체에게 있어 노예 도덕으로부터 출발했으며, 이는 곧 강자를, 주인 도덕을 지닌자들을 억압하고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삶을 긍정하고 나아가 창조하는 인간을 일컬어 그는 차라투스트라에서의 위버멘쉬라고 부릅니다. 평등은 니체에게 있어 위버멘쉬가 등장할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환경적 장애물입니다. 그는 계급제를 옹호한 것이 아닌 평균화를 거부한 것에 더 가깝습니다. 

 

 중요한 점은, 니체는 힘을 단순히 물리적인 강함으로써 정의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힘이라고 함은 생명력 그 자체이자 자신을 확장하고 긍정하고 창조하는 일종의 의지적인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런 힘에 이끌리는 인간이 아닌 힘을 사용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니체를 읽어야하는 이유는 혐오감을 지니고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되려 우리는 니체라는 방법을 통하여 현 시대의 도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의심해야하기 때문에 그를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인 도덕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주인과 노예 도덕을 넘어서는 그 자신만의 도덕의 별을 따라 스스로를 비춰야 할 것입니다. 니체도 또한 이를 지시했음이 분명합니다. 주인 도덕은 노예 도덕에 대한 동정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동정성은 니체가 극도로 거부한 것이기도 하죠. 창조적인 인간, 닳고 닳도록 들어왔지만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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