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 회보 -정읍장과 고창장

작성자smile|작성시간26.06.17|조회수6 목록 댓글 0

 

▲ 일제강점기 장날의 모습 (함경남도 홍원시장), 출처: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조사공개」 국립중앙박물관.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13세(1883년) 되신 무렵 정읍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다가 잠시 다른 곳을 살피는 사이에 모시베를 도둑맞으셨다는 일화가 나온다.

 

상제께서 열세 살 되시던 어느 날 모친께서 짜 놓은 모시베를 파시려고 이웃 사람 유 덕안(兪德安)과 함께 정읍(井邑) 장에 가셨도다. 그는 볼일이 있어 가고 상제께서 잠시 다른 곳을 살피시는 사이에 옆에 놓았던 모시베가 없어진지라. 유 덕안이 곧 돌아와서 상제와 함께 온 장판을 찾아 헤매었으나 날이 저물어 찾지를 못한지라. 상제께서 덕안의 귀가 권유를 물리치고 덕안에게 일러 돌려보내고 그 길로 다음날이 고창(高敞) 장날임을 아시고 고창에 행하셨도다. 포목전을 두루 살피시는데 마침 잃으신 모시베를 팔러 나온 자가 있는지라. 상제께서 다시 그것을 찾아 파시고 집에 돌아오셨도다.(행록 1장 14절)

 

  이를 살펴보면 잃어버린 모시베를 찾지 못한 상제님께서는 유덕안을 돌려보내고 홀로 고창으로 가신 후 베를 다시 찾아 팔고 귀가하시는 내용이다. 상제님께서는 험한 일을 겪으셨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시베를 찾아오는 비범함을 보이셨는데 이때 들르신 곳이 정읍장과 고창장이다. 이러한 일화가 담긴 정읍장과 고창장을 답사하며 당시 상제님의 발자취를 다시 느껴보고자 한다.
  여주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3시간 이상을 달려 먼저 도착한 곳은 현재의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의 상제님 생가터다. 그동안 여러 번 방문했던 곳이지만 2021년 5월 14일 정읍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푯말을 보니 새삼 의미가 남달랐다. 주변에 담장을 세우고 깔끔하게 터를 단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상제님께서는 이곳에서 정읍장과 고창장을 거쳐 다시 본댁으로 오셨으므로 이날 답사 이동 경로는 상제님 생가터에서 정읍장, 정읍장에서 고창장, 고창장에서 생가터로 이어지는 길로 잡았다.
  생가터에서 정읍시장까지의 거리는 약 9km로 차로는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도보로는 2시간 20분 정도 되는 거리다. 오늘날에는 자동차 길이 잘 닦여 있어서 편안한 길을 이용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길이 없었으므로 다른 경로로 이동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옛길은 객망지를 지나 작은 고갯길인 등판재를 넘어서 덕천면사무소로 가는 길이었다. 생가터에서 남쪽의 아름드리나무들 사이로 객망지의 입구를 찾아 들어섰다. 날씨는 조금 추웠지만 밝은 햇볕에 객망지의 물이 반짝이고 켜켜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걸으니 제법 늦가을의 운치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등판재를 조금 넘어서자 사람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서인지 옛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좀 더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곧 정읍시장으로 향했다.

 

▲ <지도 2> 객망지와 등판재 사잇길 (출처: 카카오맵)

 

 

정읍장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를 보면 시기리에 시(市)라고 표기된 곳이 정읍장이다(<지도 3>). 현재 ‘샘고을 시장’의 약간 위쪽에 있었다(<지도 4>).

 


  1918년 지도(<지도 3>)와 오늘날 지도(<지도 4>)를 비교해 보면, <지도 3> 가운데 있는 市(시)라고 표시된 곳 오른쪽 옆에 점선이 보이는데 이것은 도로를 표시한 것이다. 이 도로는 북쪽으로 1시 방향으로 나 있다. 이 길을 <지도 4>에서 찾아보면 1시 방향으로 중간에 약간 꺾인 큰 길이 보인다. 꺾인 이유는 도시 정비 과정에서 방향이 약간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길 왼쪽이 옛 시장터이며 지금은 구시장이라고 부른다. 또 市(시) 밑에 보이는 사거리는 현지 지도에서 보면 오거리로 바뀌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이곳을 가면 ‘구시장’이라 쓰여 있는 가게 간판들이 심심찮게 보여 이곳이 옛 시장터였음을 짐작케 했다.
  옛 지도(<지도 3>)를 보면 장터 주변은 공터나 논과 밭이었다. 이는 정읍천과 시장 주변이 논과 밭으로 표기된 기호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시장에는 수많은 가게가 들어차 있지만 옛날에는 큰 대로를 중심으로 넓은 공터에 좌판을 펴고 장사를 하였다. 현재 시장은 상업의 중심지로 다른 곳보다 비교적 현대화되고 활성화된 거리였다. 그래서일까? 상제님 당시의 소박한 시골장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 아쉬웠다.
  지금은 시장의 중심지가 상설시장의 발달로 샘고을 시장으로 옮겨가 있는 상태다. 하지만 샘고을 시장 주변과 옛 시장 터 주변에서 아직 5일 장이 이루어지고 있어 과거의 모습 또한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 당시 상제님께서 정읍장에 팔러 나갔던 모시베는 60자(1필)01였다. 모시베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모시베는 모시풀로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저마(苧麻)라고도 한다. 그래서 모시베를 저포(苧布)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이 저마를 전라도 사투리로 모시라고 불렀고 주요 생산지가 전라도 일대였으므로 오늘날 모시베로 불리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전라북도 정읍에서 모시를 재배한 시기는 고려 경종 때부터였다고 한다.02
  모시는 매년 6ㆍ8ㆍ10월 3차례 수확해 모시올을 뽑은 후 여러 올을 꼬아 모시실을 만드는데 최소 5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 모시실을 베틀에 올려 한 필을 완성하기까지 보름이 걸렸다고 하니,03 올해 수확하여 모시베를 만들면 이듬해에 내다 팔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경』에는 정확한 시기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모시베는 무더운 여름에 입는 의복의 옷감이었으므로 봄과 여름 사이에 팔러 가시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현재 한산모시 1필은 약 100만 원 정도라고 하니 옛날에도 나쁜 마음을 먹은 자라면 누구든지 눈독 들일만한 물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정읍장은 5일 장이었고 전국에는 무려 천여 개가 넘는 장이 있었다고 한다. 5일 장은 5일 간격으로 서는 시장으로 정읍장은 2일(2일, 12일, 22일)과 7일(7일, 17일, 27일)에 열렸다. 주변의 다른 장을 살펴보면 가까운 정읍 천원장은 1일과 6일에 장이 섰고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고창장은 3일과 8일에 장이 열렸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정읍장 다음 날이 고창장이기 때문에 가까운 천원장이 아닌 멀리 있는 고창장으로 향하신 것이다.

 

▲ <지도 5> 정읍장에서 고창장 경로 (출처: 네이버 지도)

 

 

고창장
  정읍장에서 이어진 다음 행선지로 고창 전통시장을 찾았다. 정읍장에서 고창장까지는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지만 도보로는 무려 24km에 6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으로 검색되었다. 지도상에서 도보를 기준으로 보면 이동 경로는 정읍장 → 정읍 대흥리 → 고창군 성내면 용교리 → 고창 신림면 → 고창 전통시장(<지도 5>)으로 추정된다.
  고창 전통시장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개설된 고창읍내장을 계승한 시장으로 현재 상설시장과 5일 장을 함께 운영한다. 주로 고창의 특산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물품을 판매하고 있다. 고창읍내장이 언제부터 열렸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동국문헌비고』(1770)에 “고창읍내장은 3일과 8일에 열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1770년대 이전부터 5일 장이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04
  조선 말기 고창읍내장은 동부시장과 서부시장으로 나뉘어 열렸다. 이는 1872년 고창현 지방지도(<지도 6>)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고창읍성을 기준으로 북서쪽이 서부시장이고 북동쪽이 동부시장으로 불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동부시장이 서부시장(고창전통시장)에 합쳐져 현재는 한 곳만 운영하고 있다.

 

▲ 고창읍성

 

 


  고창읍성 밖 북쪽에 있었던 동부시장은 8일(8일, 18일, 28일)에 섰고, 서부시장은 3일(3일, 13일, 23일)에 열렸다. 동부시장은 모시베를 비롯한 수공업 제품을 주로 팔았다고 하며, 서부시장은 쇠전이라 불릴 정도로 우시장05이 크게 열려서 축산물을 주로 거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장 판매 물품의 정황을 볼 때, 상제님께서는 수공업 제품을 주로 팔았던 8일에 열리는 동부시장에 가신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상제님께서는 고창장에서 모시베를 찾아 파시고는 신림면(고창) → 성내면(고창) → 소성면(정읍) → 덕천면(정읍) 본댁으로 향하신 것으로 보인다(<지도 1> 참고). 이 경로는 현재 도보 기준으로 30km를 넘고 8~9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정읍장 다음날 열릴 고창장에서 잃어버린 모시베를 찾을 수 있음을 아신 점과 당시 지금처럼 정비되지 않은 도로 사정에서 성인도 가기 어려웠을 길을 가셨다는 사실에서 13세 나이의 행동이라고 믿기 힘든 상제님의 비범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01 『증산의 생애와 사상』, p.35. 모시는 1필당 팔기 때문에 당시 1필이 60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1필이 70자이다.
02 「모시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03 김석모, 「서천의 효자 한산모시」, 《조선일보》 2020. 6. 12.
04 주영하, 『사라져가는 우리의 오일장을 찾아서』 (서울: 민속원, 2003), p.196 참고.
05 정재훈 외 1명, 「스토리텔링개발에 의한 문화관광형시장의 활성화방안에 관한 연구- 고창전통시장 스토리텔링개발을 중심으로 -」,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 59 (2019), p.17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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