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 회보 -동곡 약방 옛길

작성자smile|작성시간26.06.22|조회수6 목록 댓글 0

 

▲ 금평저수지

 

  상제님께서는 1901년부터 천지공사를 시작하신 후 여러 곳을 다니시며 공사를 보셨다. 상제님의 자취가 있던 곳을 보며 상제님의 행적을 되새기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선사한다. 그중 동곡마을은 동곡 약방과 종도들의 집 등 상제님의 공사와 연관된 행적이 많았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의 동곡마을은 저수지가 조성되어 옛길과 집들이 사라지고 도로가 새로 생기면서 주변 지형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상제님의 옛 행적을 볼 수 있는 건물과 길들이 사라지게 되어 상제님의 자취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상제님의 행적을 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상제님께서 공사를 행하시며 다니셨을 동곡마을 주변의 옛길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금평저수지


  현재 동곡 약방 남쪽 가까이에는 드넓은 금평저수지가 펼쳐져 있다. 이는 상제님 재세 시에는 없었다. 금평저수지는 농업 관개용 저수지로 1957년 1월 1일 착공하여 1961년 4월 30일 준공되었다. 이로 인해 마을 주민들의 집과 냇가 주변의 논은 수몰되었고 동곡 약방 주변의 옛길과 김자현 종도의 집도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소풍 다니던 냇가와 원평장터로 가던 길이 사라지면서 추억과 애환이 깃든 공간이 되고 말았다.01  
  하지만 금평저수지의 조성으로 주변 마을 사람들의 근심거리인 가뭄이 해소되었다. 『전경』에서도 동곡마을의 가뭄에 대해 여러 번 나오는데 당시 동곡마을을 비롯한 근처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오면 모여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금평저수지 축조 이후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산과 산 사이를 흘러 금평저수지를 채웠기 때문에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써 금산면과 봉남면, 금구면 등 100여 곳의 마을에서 농업용수로 사용해도 물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 유량이 풍부해졌다. 금평저수지는 유역 면적(하천이 흘러갈 수 있는 땅의 넓이)이 2,571㏊이며, 만수 면적은 59.5㏊이고, 수혜 면적(용수공급시설에서 물을 공급받아 농사를 짓는 농경지 면적)은 1,000.3㏊이다.02

 

 ▼ [지도 1] 1910년에 측정한 동곡 약방 주변 고지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위에 표기 추가

 

▲ [지도 2] 현재 동곡 약방 주변 지도(출처: 네이버 지도) 위에 표기 추가 

 

 

동곡 약방 주변 옛길
 

  동곡마을에는 여러 방향의 옛길이 있었다. 첫째는 동곡마을의 뒷산을 넘어 전주 읍내로 가는 길, 둘째는 동곡마을 앞 갈림길에서 왼쪽 길을 따라 하운동을 거쳐 전주 읍내로 가는 길, 셋째는 동곡마을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통해 원평과 용암리로 가는 옛길이 있었다. 전주 읍내로 가는 길이었던 첫째 길과 둘째 길은 청도원에서 만나 전주 읍내로 넘어가는 산길이다. 현재 청도원에서 전주 읍내로 가는 길은 상제님 재세 시의 옛길과 큰 차이가 없다. 금평저수지의 영향으로 수몰되어 현재 길과 차이 나는 구간은 동곡마을 앞에서 하운동으로 이어지는 둘째 길 일부와 동곡마을 앞에서 원평으로 가는 셋째 길 일부이다.
  [지도 1]을 통해 동곡마을 주변의 옛길을 보면 먼저 파란색 선이 보이는데 이는 냇가를 표시한 것이다. 동곡마을 뒤편 구성산과 동쪽 모악산 골짜기에서 흐르던 물이 동곡마을 앞에서 합류하여 원평 쪽으로 흘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동곡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진 주황색 길은 마을 뒷산을 넘어 전주 읍내로 가는 방향이고, 노란색 길은 하운동을 거쳐 전주 읍내로 가는 길이다. 이 길 중간에 고동색으로 표시된 길을 따라가면 금산사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빨간색 길은 원평 방향의 길로 중간에 보이는 보라색은 용암리 쪽으로 가는 길이다.

 

 

(1) 주황색 길: 동곡마을 - 전주 읍내
  동곡마을 주변 옛길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다. 먼저 주황색 길은 동곡마을에서 전주 읍내로 가는 동곡마을 뒷산 방향의 길로 중도에 청도원을 거쳐 가게 된다.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청도원은 하운동에서 전주 읍내로 가는 방향의 길(노란색 길)과 합류된다. 주황색 길은 동곡에서 전주 읍내를 왕래할 때 하운동을 거쳐 돌아가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다. 현재는 산길로 남아 있다.
  행록 5장 20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1909년 6월 10일 경에 동곡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청도원 김송환의 집에 들러 유숙하시게 된다. 이때 마침 신경원이 상제님을 배알하자 그에게 유(儒)ㆍ불(佛)ㆍ선(仙) 석 자를 쓰게 하시고 유 자 곁에 이구(尼丘), 불 자 곁에 서역(西域), 선 자 곁에 고현(苦縣)이라 쓰시고 그 양지를 불사르셨다.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이 길을 따라 동곡 약방에 가셔서 모든 종도들에게 6월 20일에 모이라고 통지하셨다. 이렇게 주황색 길은 상제님께서 동곡마을에서 전주 읍내를 다니실 때 자주 이용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 수리개봉 배경의 동곡마을 전경 (2018년 10월 22일 촬영)

 

 

(2) 노란색 길: 동곡마을 - 하운동
  다음으로 노란색 길을 보면 동곡마을에서 하운동으로 이어져 있어 두 마을을 왕래할 때 이용했던 길임을 알 수 있다. [지도 1]에서 사각형 모양의 녹색 선은 현재 금평저수지의 담수 영역을 표시한 것이다. 이 영역 안에 있는 동곡마을 앞에 보이는 다리가 하운동과 원평의 갈림길이었는데 금평저수지 조성으로 노란 길 일부가 수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저수지의 물이 차오르면서 다리와 하운동의 옛길이 수몰되어 금평저수지 경계선을 따라서 길이 새로이 조성되었다. 새로운 길은 [지도 2]에서 보이는데 [지도 1]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저수지의 담수에 영향을 받지 않은 길은 수몰되지 않아 현재의 길과 노선이 유사하다.
  교운 1장 3절을 보면 1902년 김형렬은 상제님의 본댁 객망리에 계실 때 찾아뵈옵곤 하였고 상제님께서도 본댁에서 하운동(夏雲洞)으로 자주 내왕하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객망리에서 하운동으로 가려면 원평을 거쳐 동곡마을 앞 다리를 건너서 하운동으로 가는 길로 다니셨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상제님께서 하운동으로 가실 때 노란색 길을 따라 김형렬의 집으로 향하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3) 고동색 길: 동곡마을 - 금산사
  동곡마을에서 하운동으로 가는 노란색 길 중간에 다리를 건너서 고동색 길로 가면, 금산사 방향으로 가는 길에 용화동이 나온다. 고동색 길은 길을 새로 내면서 반듯하게 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현재 도로와 유사하다.
  동곡마을에서 금산사로 가는 행로와 관련된 내용이 공사 2장 11절에 보인다. 1908년 6월 상제님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박공우와 김광찬에게 주시며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라고 하셨다. 두 사람은 동곡 약방을 나서서 금산사에 도착한 뒤 명하신 대로 행하니, 십여 년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을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졌다. 이때 박공우와 김광찬은 동곡마을의 주황색과 노란색 길을 따라가다가 고동색 길을 통하여 금산사로 갔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4) 빨간색 길: 동곡마을 - 원평
  빨간색 길은 동곡마을에서 원평으로 왕래하는 길이었다. 원평은 큰 장이 서는 곳이어서 당시 이곳은 타 지역에서 전주, 정읍, 태인, 김제로 갈 때 지나가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동곡마을은 원평에서 전주 읍내로 갈 때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1910년에 제작된 [지도 3]을 보면 동곡마을과 원평을 잇는 길이 하나인 것을 볼 수 있다. [지도 1]에서는 이 옛길이 냇가와 나란히 천변(川邊)을 따라 조성되어 있었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현재의 금평저수지를 가로질러서 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옛길이 수몰되면서 현재는 [지도 2]에서 보듯이 금평저수지 주변을 둘러서 가는 길로 바뀌었다.

 

▲ [지도 3] 1910년에 측정한 원평과 동곡 지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위에 표기 추가

 


  동곡마을에서 원평 가는 길과 연관된 내용은 행록 4장 13절에서 볼 수 있다. 상제님께서 박공우를 데리고 동곡마을 김준상의 집에 머무셨는데, 그날 밤 김준상을 잡으려고 구릿골(동곡)에 사람이 온다는 말을 전해 들으셨다. 이때 박공우는 뒷산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었는데 원평 쪽으로부터 등불을 가진 사람 대여섯이 구릿골을 향하여 오다가 마을 입구 선문(旋門)03에 이르렀을 때 등불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이에 박공우는 이들이 불을 끄고 몰래 김준상을 잡으러 오는 것으로 알고 종도들을 깨워 피하려 하였으나 한 식경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자 안심하고 잠들었다. 이튿날 상제님께서 그에게 “대장은 도적을 잘 지켜야 하나니라”라고 이르셨다. 이 일화에서 박공우가 뒷산에서 망을 본 것은 동곡마을과 원평을 잇는 길이 외길이라서 통행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 보라색 길: 동곡마을 - 용암리
  보라색 길은 동곡마을에서 용암리로 가는 소로보다 더 작은 샛길이다. [지도 3]을 보면 원평에서 북동쪽 위치에 있는 용암리를 가려면 동쪽 길로 가다가 중간에 놓인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이 길은 원평에서 볼 때 용암리보다 더 북쪽에 있는 동곡마을을 거치지 않고 가는 길이다. [지도 1]을 참고하면 동곡마을에서 용암리로 가는 길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원평으로 향하는 길을 가다가 중간에 보라색 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이 보라색 길은 샛길이어서 축척이 작은 1910년 지도[축척 1:50,000]에는 나오지 않지만 1914~1915년에 제작된 지적도[축척 1:1,200]에는 나타나 있다.
  이 샛길은 냇가를 건너서 가는 길이었다. 이곳은 냇가의 폭이 좁은 편이다. 용암리로 가는 옛길은 동곡마을에서 원평으로 가는 빨간색 길에서 갈라지는데 현재 금평저수지의 보가 축조된 곳 부근에 갈림길이 있었다. 지금은 댐 아래로 갈림길이 나 있어서 과거와 갈림길 위치가 달라졌다.([지도 2] 참조)
  용암리와 관련된 구절이 공사 1장 8절에 나온다. 1902년 가을 상제님께서 김형렬에게 금구군 용암리에서 쇠꼬리 한 개를 구하여 오게 하신 후 공사를 보셨다. 상제님께서 김형렬에게 풀을 한 곳에 쌓고 그 풀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쇠꼬리를 두어 번 둘러 내라고 하신 후 “태양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김형렬이 햇무리가 나타났음을 아뢰니 상제님께서 “이제 천하의 형세가 마치 종기를 앓음과 같으므로 내가 그 종기를 파하였노라.” 하시고 그와 술을 드셨다. 이 공사가 있었던 곳은 하운동 김형렬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김형렬이 쇠꼬리 한 개를 구하러 용암리에 가기 위해서는 노란색 길을 가다가 동곡마을 앞 다리를 건너 원평 쪽으로 간 후 중간에 용암리로 가는 보라색 샛길을 따라갔을 것이다.

 

 

(6) 기타: 저수지로 변한 김자현 종도의 집
  상제님께서 다니셨던 동곡마을 옛길은 금평저수지의 조성으로 수몰되었는데 이때 김자현의 집도 같이 수몰되었다. 그의 집은 현재 지적도상에는 번지가 남아 있지 않지만 1914~1915년에 만들어진 지적도를 보면 038-500번으로 되어있다. 김자현은 1902년 4월 이후로 『전경』에 등장하였으며 김형렬과 10촌 지간으로 김형렬과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르게 된 인물이다.04 [지도 4]를 보면 전주 읍내로 넘어가는 주황색 길 오른쪽에 김자현의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자현과 관련된 상제님의 행적에 대해 『전경』 내용 중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상제님께서 김자현의 집에 가시곤 하셨는데 1908년경에 그에게 “네가 공신의 집에서 여러 날을 숙식하였으니 공신을 네 집에 데려다가 잘 대접하라.” 하는데 그가 깜박 잊고 대접할 기회를 놓쳤다. 상제님께서 그에게 “잘못된 일이라, 이 뒤로는 대접하려고 하여도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라고 하셨는데 그 후 김자현은 문공신과 서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05

 

▲ [지도 4] 동곡 약방 옛길과 김자현 집(출처: 네이버 지도, 그 위에 표기 추가)

 

 

  동곡마을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동곡 약방이 있던 곳이자,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면서 다니셨던 옛길과 종도들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 상제님 화천 후 그 자취를 직접 찾아보고자 하였으나, 금평저수지 조성으로 상제님께서 다니셨던 길이 수몰되어 볼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상제님 재세 시와 근접한 시대에 측정된 옛 지도들을 통해, 상제님께서 다니셨을 그 길을 다시 더듬어 볼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사라진 길이지만, 지도 위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며 그 시절 상제님의 자취를 가슴 깊이 그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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