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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수도인 수기 -나의 첫 명품

작성자smile|작성시간26.06.14|조회수10 목록 댓글 0

 

 

 

 

  이건 나의 첫 명품과 ‘해원’ 이야기다. 나는 옷이나 화장품 하나에 3만 원 이상을 쓸 일이 거의 없다. 화장품은 저렴하게 사서 오래 쓰는 편이라 나의 관심 한참 밖에 있었다. 그런 내가 재작년 초, 정확히는 1월 26일에 명품 립스틱 하나를 받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냥 립스틱은 아니고, 내가 온 우주에서 가장 얄밉다고 자부했던 나의 친언니가 준 작은 립스틱이다. 이야기를 풀어 가기 위해 가족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의 탄생일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꽤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기싸움(?)’도 싸움으로 친다면 언니와 나의 싸움은 30하고도 몇 년 전 무더운 7월, 내가 태어난 날에 시작되었다.
  미운 네 살이던 언니는 크고 뜨거운 아버지의 손을 잡고, 검은 아스팔트가 내뿜는 열기를 견디며 ‘고래병원(고려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니의 발음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고쳐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곧 태어날 둘째 생각에 아버지의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볼에 욕심과 열정이 가득한 첫째 딸은 그저 덥다며 생떼를 부렸다. 마침내 고려병원 근처 횡단보도에 다다랐을 때 철없는 네 살배기는 기저귀가 하늘을 향하도록 드러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집에 가겠다고 악을 써댔다. 아버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단단한 손이 언니의 뺨을 내리쳤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렇다고 울음을 그칠 언니가 아니었다. 언니는 아버지의 손에 거의 질질 끌려가듯이 걸으며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고래병원’에서 태어난다는 그 아기가, 언니는 너무도 미웠다.
  모두가 남자애라고 생각해 기대를 모았던 4.5kg의 아기는 장군 같은 여자애로 밝혀졌다. 아기는 퉁퉁했고 못생겼지만, 집에 들어오자마자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맞벌이를 시작한 부모님이 아기를 외할머니댁에 맡겼을 때 언니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아기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날은 내가 하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줄줄 흐르는 콧물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으며 집으로 가는데, 다시 보니 소매가 온통 시뻘게져 있었다. 코피는 쉴 새 없이 흐르고 저녁이 되어 온몸이 열로 끓었다. 나는 서 있을 힘이 없어 간신히 작은 방에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그때 언니가 거실 소파에 앉아 나에게 소리쳤다.
  “야, 물 좀 떠오랬지!”
  신경질적인 소리가 내 머리 안에 끝없이 반사되어 울렸다. 나는 언니를 거역할 수 없었다. 예쁘고 공부 잘하고 인기 많은 언니가 난 그저 좋았다. 언니가 나에게 욕하거나 때릴 때는 속상했지만, 미움을 지속하기엔 동경과 사랑이 너무도 컸다. 그러나 그날의 아픔은 어린 나에게 큰 변화를 주었다. 젖먹이 시절에도 운 적이 손에 꼽고, 젖병도 스스로 쥐고 먹는 데 아무 불만이 없던 내가 언니에게 처음으로 싫다고 대들었다. “쿵쿵쿵” 성난 발소리가 났고, 곧이어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다. 더 맞기 싫었던 나는 있는 힘껏 일어나 조용히 컵에 물을 따랐다. 복수심에 이글거리며 한 모금을 몰래 마신 뒤 언니에게 툭, 잔을 건네주었다. 침대에 누우니 흠뻑 젖은 솜옷을 입은 듯 몸이 가라앉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나는 저녁 내내 목구멍에 욱여넣은 설움을 엄마에게 말하려 다가갔다. 순간 언니가 나를 힐끔 보더니, 잽싸게 엄마 품에 안겨 재잘거리며 시선을 끌었다. 언니가 너무너무 얄미웠던 나의 첫 기억이다.
  우리 가족은 몇 년에 한 번씩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갔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는 서울 이대역 근처에 45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했고 아버지가 고른 몰딩과 벽지를 발랐다. 새로 산 가구, 가전제품, 그리고 삼 남매에게 하나씩 주어진 방을 둘러보며 행복을 만끽했다. 고급스러운 갈색 몰딩과 비싼 가전제품은 나의 행복과 무관했지만,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아버지의 눈에 어린 희망을 보면 덩달아 기뻤다. 나는 처음 가져보는 내 방 침대에서 베개를 꼭 껴안고 마음껏 뒹굴었다. 그 안도감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집안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부모님은 매일 싸우셨고, 밤낮 없이 술을 드시던 아버지 때문에 모두가 밤새 폭력에 시달렸다. 집안 상황과는 달리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가 날로 번창해서 분점을 냈고, 약 10년간 호황기를 누렸다. 아버지는 기세를 몰아 화장품 브랜드를 출시했다. 유명한 연예인을 불러 홍보했지만, 브랜드는 날개를 달기도 전에 고꾸라졌다. 신촌에 이름있는 화장품 가게와 편집숍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부모님은 가게를 정리하셨고, 이후 어머니의 뇌수술, 사기, 재산 압류 등 불행이 한여름의 태풍처럼 포악스럽게 우리를 집어삼켰다. 그런 와중에도 부모님은 여전히 서로를 탓하며 싸우셨다.
  그때 나는 언니가 너무너무 미웠다. 고생하는 엄마에게 투정 부리고, 화를 냈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이 밤마다 텅 빈 집에서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언제 올까 공포에 떨 때, 언니는 어김없이 독서실에 갔다. 가끔 언니와 마주칠 때도 언니는 나에게 늘 짜증을 냈다. 그럴 때면 살가운 인사는커녕 나에게 화풀이를 일삼는 언니가 미웠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 우리는 허름한 주택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머리가 크면 나아지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언니가 대학교,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사소한 문제로 우리는 크게 다투었다. 언쟁 끝에 또다시 언니가 때리려고 손을 올렸다. 18년간의 설움이 한꺼번에 터졌다. 이성을 잃은 내가 언니에게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그리고 난생처음 언니에게서 사과를 받아냈다. 사과를 들을 때까지 내가 언니의 머리채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언니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내가 만약 키가 작고 약했어도 언니가 나를 존중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후 우리는 각자 다른 지역에서 자취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가슴 속 응어리는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 속에 묻혀갔다.
  오랫동안 받아들이기 힘든 나의 모습을 볼 때면 아버지와 언니가 내 안에 남긴 흔적이 선명하게 보여서 괴로웠다. 그 흔적 중 하나가 취약성이었다. 나는 공격성에 취약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지켜야 할 순간에 드러냈을 그것을 나는 늘 잘못된 방식으로 다루었다. 20대 후반까지도 나는 분노를 쌓아두다가 관계를 끊거나, 수동적으로 표출하거나, 엉뚱한 순간에 폭발시켜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일이 많았다. 점차 사회를 알아가면서 다뤄지지 않은 분노가 남을 찌르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방법 외에는 나와 타인을 보호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분노는 방향을 잃고 결국 나를 아프게 찔렀다.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고 숨 쉬듯 혐오했다.
  아이들과 수업할 때 키가 내 반만큼도 안 되는 녀석이 공격성을 드러낼 때마다 나는 굳어버렸다. 걸음마를 뗄 때부터 무의식에 켜켜이 쌓인 폭력 경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내 공격성을 다룰 줄 몰랐기에, 타인의 공격성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내 반응을 본 아이는 더 활개를 치며 물건을 던지고 선반을 기어올랐다. 뒤늦게 수습해도 아이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겉으로만 엄격하게 군들 나의 내면이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옆 반에 가면 얌전해지는 아이를 보며, 나의 자괴감은 커져만 갔다.
  ‘내가 아이를 망치고 있어. 나는 사람을 올바르게 길러낼 수 없는 걸까.’
  내 안의 불구덩이에서 매일 생생한 아픔이 떠올라 나를 괴롭힐 때마다 길을 물으러 선각을 찾았다. 선각분의 말씀과 『전경』 내용에 따라 그것이 나의 겁액임을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 깊이로 반성했다. 그게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청소와 이미지화 작업이 도움이 되었다. 더러운 곳을 닦으며 심고를 드리다 보면 절로 겸손해졌다. 지금의 감정을 깊이 살펴보면 전생에 내가 남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을지가 생생히 보였고, 어떤 부분을 반성할지 알 수 있었다.
  진심 어린 반성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심안이 생긴다. 심안이 열릴 때마다 겁액을 풀 기회를 준 상대방에게 감사한 마음이 커졌다. 나의 겁액 때문에 화를 느끼고 가시가 돋친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이를 안쓰러워하며 전에 몰랐던 그들의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럴 때면 창생을 바라보는 하늘의 애정 어린 시선이 문득 깨달아져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이 내 안의 깊은 사랑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 되었다.
  나는 틈틈이 두 손을 단전에 모아 괴로운 기억 속 아버지와 언니에게 사과하고 감사하기를 반복했다. 수년간의 노력에도 원망과 분노가 다시금 올라오면 그간의 노력이 헛된 게 아닐까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시간을 큰 토막으로 잘랐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자신을 몰아세우는 대신, 10년 전 내 모습을 떠올리며 그동안 애쓴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매일 간신히, 나는 다시 해 나갈 용기를 얻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에 말간 얼굴을 한 아버지가 나타나 나에게 다정한 말을 건넸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틀에 한 번꼴로 폭력적인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온몸이 굳은 채로 깨어나기 일쑤였는데, 그날은 달랐다. 따스한 햇살이 거실을 환하게 비추고, 크림색 커튼이 봄바람에 일렁이며 살랑살랑 예쁜 그늘을 드리웠다. 하얀 소파, 내가 좋아하는 원목 테이블, 아름다운 부엌에서 아버지와 나는 맛난 음식을 해 먹으며 도란도란 소소한 시간을 보냈다. 평소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꿈에서만큼은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가 진실이었다.
  행복을 만끽하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알람을 끈 뒤 눈을 꼭 감았다. 가슴에서 올라온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드디어 내가 평생 보고 싶던 아버지의 맑은 웃음을 본 것 같아 반가운 한편, 이번 생에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저며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본가에 가는 날이었다. 청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실제 아버지의 모습은 화난 눈썹이 거의 60도 각도로 가파르게 치켜 올라가 있고, 건조한 얼굴과 때로 살기 어린 눈빛, 깊게 팬 주름 때문에 인상이 사나워 다가가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꿈속에서처럼 환하게 웃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 허무하게 구름 사이로 흩어졌다. 나는 부모님 집 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무거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여는데,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차분해 보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은아 왔냐”라며 나름 살가운 인사를 해주었다. 가파른 눈썹의 각도는 여전하지만, 놀랍게도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차분함이 유지되고 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꿈은 다른 색으로 채워졌다. 아침이 전보다 가벼워졌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크나큰 겁액이 한 꺼풀 풀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남은 건 언니였지만, 언니를 향한 감정이 특별히 드러나지 않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나는 당시 특정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괴로워하던 중,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났는지 언니가 먼저 무슨 일인지 물었고, 나는 애써 감정을 눌러가며 상황을 전했다. 내 말을 들은 언니의 첫 마디는 “너 같은 애는…”이었다. 나는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전화를 받았다가 마음에 생채기만 남았다. 문제는 두 달 뒤 언니의 생일이었다.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메신저 창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휴대폰을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내가 변하고 강산이 변한다고 해서 우주의 진리가 변하지는 않으니까, 반성부터 해보자고 되뇌었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은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두 손 모아 심고를 드리니, 문득 대학교 4학년 때 내가 친구에게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야, 너 같은 애는….”
  아차, 싶었다. 따뜻한 마음보다 한낱 세 치 혀가 앞서나가던 시절의 과오였다. 그 말을 내뱉었을 때 그 애가 지은 표정은 충격 그 자체였다. 깊은 반성과 함께 이제라도 그 애의 아픔에 공명할 수 있어 감사했다. 내 잘못을 깨닫게 해준 언니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언니에게 치킨 기프티콘과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몇 분 뒤, 언니에게서 답장이 왔다.
  “내가 네 나이 때 갖고 싶었던 거야.”
  언니는 나에게 명품 립스틱 선물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마음은 괜찮은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등, 당시 내가 겪고 있던 일을 내 입장에서 상세히 듣고 질문해 주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을 나누는 대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대화.
  ‘언니가 내 나이 때 갖고 싶었던 것….’
  언니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에 교차했다. 왜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문득 언니의 삶이 다른 시각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밤 부서지는 그릇, 비명, 귀를 찌르는 사이렌, 우는 동생들, 아픈 엄마, 아비규환 속에서 매달릴 곳 하나 없는 장녀의 자리가 처절하게 느껴졌다. 본인도 사랑이 필요했을 텐데,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언니에게 요구한 기준이 나와 동생에게 제시한 것보다 훨씬 높고 엄혹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학 입학금을 제외한 등록금은 언니가 스스로 벌었고, 가세가 기울었을 때 언니는 틈틈이 과외해서 번 돈을 부모님께 드렸다. 그러고도 졸업 후에 아버지의 열렬한 반대와 폭력을 무릅쓰고 자신의 길을 찾아 다시 수능을 보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외롭고 불안했을까, 두렵고 아팠을까.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란 동기들이 용돈을 받으며 대학 생활을 하고, 간식을 사서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졸업 후 하나 둘씩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해 마음껏 꾸미고 다닐 때 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제야 어린 언니의 삶이 생생히 그려졌고, 그 작은 언니를 마음 깊이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 느꼈던 동경이 존경이 되어 피어올랐다. 지금 언니는 곧 셋째 출산을 앞두고 있다. 셋째 태몽은 내가 꾸어 주었다. 언니에게서 받은 명품 선물은 그렇게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립스틱은 앞으로도 영영 쉽게 사용하지 못할 것 같다.
  고통이 빠져나간 자리에 사랑이 가득 찼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해주든 그렇지 않든 이제는 마음 깊이 그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무시하는 사람에게 굳이 나서서 잘해주지는 않는다. 상대에 맞게 처신하되 마음속으로는 그의 천심을 믿고 사랑할 뿐이다. 내 안에 조건 없는 사랑이 샘솟으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좋아졌다. 인정이나 사랑을 외부에서 구할 필요가 없었다. 본디 내가 상제님께 받은 천심에 한 발짝 가까워진 것 같아 기뻤다.
  그토록 염려하던 교육 일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 내 안에서 화해가 일어나자,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공격성을 드러내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마음의 힘이 생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더라도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교실에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하늘의 마음을 느끼고, 늘 연결되어 있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차올랐다. 욕망은 구함이 되었고 매 초, 매 순간 하늘에 닿고 싶어 들숨에 한 번, 날숨에 한 번 심고를 드렸다.
  심고가 생활화되니 모든 사람과 동물, 강물, 심지어 아스팔트 도로, 건물 외벽, 가로수와도 한 몸으로 연결됨을 느꼈다. 만물이 생명력을 뿜어냈다. 그 차원에는 분별심이 없었다. 누군가의 큰 실수, 작은 실수, 어리석음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감사와 사랑이 전부였다. 서로 연결된 감각 속에서 각자의 모습은 더 선명해졌다. 큰 사랑 안에서는 모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더 소중하게 길러지도록 충분히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며 그토록 차갑게 느꼈던 콘크리트와 빠른 걸음, 굳은 얼굴마저 그리 예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선물 같은 깨달음이 오면 감사함으로 깊은 차원과 공명하고, 그 공명으로 새로이 깨닫는 과정이 일각의 틈 없이 반복되었다. 어릴 때 배운 ‘양심’이라는 단어가 이 마음에 비해 제한적으로 느껴졌다. 너와 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양심이라는 개념이 불필요해진다. 남을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함과 구분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양심적이라고 생각되는 말과 행동을 ‘그저 하게’ 된다. 반면에 사회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나와 타인이 구분되어있다는 개념적인 한계 안에서 양심의 의미를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도덕의식,’ ‘선악의 나침반’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필연적으로 진실과 개념 사이에 찝찝한 틈이 남는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라고 했다. 마음에 양심과 사심 두 가지가 있다고 한 이유도, 결국 마음이라는 광활한 공간을 분절시키는 것은 ‘나/내 것’이라는 개념이 만든 좁은 칸막이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고 드리는 과정에서 새롭게 다가온 구절이 하나 있었다.
  “너희들이 믿음을 나에게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교법 1장 5절)
  상제님의 믿음을 받기 위한 자격 요건이 크고 무겁게 느껴져서, 이 구절이 떠오를 때마다 내 마음이 착잡해졌다. 당장 나를 류훈장이나 최익현 같은 인물과 비교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실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을 이룩하려면 대단한 각오가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나는 심고 자체가 곧 믿음을 드리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심고를 드릴 때마다 바로 응답해 주시듯 내 안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친구나 가족, 혹은 스승에게 그들이 들어줄 것을 믿고 이야기를 털어놓듯, 상제님께 고하는 일 역시 ‘들어 주심’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상제님께서 당연히 들어주신다. 1미터가 되려면 1센티미터부터 그어야 하고, 1센티미터는 1밀리미터로 만든다. 일관성 있는 믿음을 이룩하기 위한 기본 단위가 심고인 셈이다. 가장 확실하며, 1각의 지체도 없는.
  감사한 마음으로 심고 드리기를 여러 달.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자기 심고가 드려지지 않았다. 마음이 스스로 옻칠이라도 한 듯 모든 생각을 튕겨냈다. 기도 중에 문득 생각이 하나로 모아졌다. ‘정성이 부족하구나.’ 다음날 일을 마치자마자 나는 회관에 가서 기도를 모셨다. 마침 수임원께서 계셔서 집사를 봐주셨다. 시립하는 동안 나는 간절히 심고를 드렸다.
  ‘정성 들이게 해주세요. 어떤 정성을 들여야 할지 알려주세요.’
  너무 간절한 마음에 한 글자마다 혼을 담아 주문했다. 단전에 음향기기가 탑재된 듯, 주문 한 자를 외울 때마다 온몸이 울렸다. 기도를 마치며 좌배를 드리고 일어섰는데, 수임원께서 갑자기 모두를 불러 세우셨다.
  “기도를 모시는 누군가의 아주 간절한 마음이 집사자에게 전달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큰 울림을 받았어요.”
  ‘혹시 나를 말씀하신 걸까?’
  신기함 반, 감사함 반으로 멀뚱히 서 있는데, 수임원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한참 대화하다가 선감께서 나에게 물어보셨다.
  “고선무, 혹시 공부 들어갈 생각 없어요? 자리가 나면 알려줄 테니 생각해 봐요.”
  나는 도심이 대단한 사람만 공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망설였다. 그러나 이 또한 하늘이 내 습성을 아시고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기회를 주신 거로 생각했다. 이렇게 신비로운 방법이 아니었다면 나는 두려움이 내 눈을 가리게 두었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어떤 정성을 들여야 할지 막막했는데, 공부에 들어갈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대답은 이미 내뱉었고, 부족한 정성과 끈기는 과정 중에 채우기로 했다. 제안을 수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반이 들어가는 공부반에 자리가 생겼다.
  한 사람의 내면에 일어난 작은 화해가, 결국 하늘과 나 사이의 길을 열어준 이야기. 어쩌면 일련의 과정이 도주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을 구하는’ 훈련이었는지도 모른다. 올해가 공부에 들어간 지 3년 차다. 20대 초반이던 공부반 도우가 눈 깜짝할 사이 이십 대 중반, 나도 삼십 대 중반이 되었다. 정년을 맞이하신 교정은 마지막 공부에 곱게 지은 새 한복을 입고 영광스러운 은퇴를 하셨다. 나도 수반과 함께 언젠가 고운 새 한복을 지어 입을 날을 상상한다.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때로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일이 있지 않은가.
  공부를 하니 시간이 대꾸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개념이 없어서 공부 중에 꾸중을 듣기도 하고, 모난 돌에 정 때려가며 열심히 다듬는 중이지만, 다음 공부 때는 더 나은 마음가짐으로, 다음에는 더 바른 몸가짐으로 임하고자 한다. 이제 남은 일은 하늘이 주신 기회에 감사하며 꾸준히 정성 들이는 일이다. 이 정성이 확장되어 또 다른 덕을 낳을 수 있게, 끝까지.
  《대순회보》에서 읽은 도전님 훈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도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인 각자의 심리까지 다 파악하여 맞추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대순회보》 282호)
  내가 내면의 감옥에 갇혀 버둥거릴 때마다 두 팔 걷어 손을 내밀어 주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부족한 나를 알면서도 곁을 지켜준 이들, 평생 수도를 함께할 가족과 선각분들, 도우, 직장동료, 그리고 삶을 스쳐 간 여러 사람. 모두가 한 팀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돕는다. 맞물린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성장한다. 난을 짓는 이도, 난을 다스리는 이도 모두 천지화육(天地化育)의 이치 속에서 성장하며 넘어지고, 다시 나아간다. 그 과정 끝에 마주할 또 다른 나를 조용히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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