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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散文

鄭宗魯, <地頭說>

작성자수일재|작성시간26.06.19|조회수21 목록 댓글 0

鄭宗魯, <地頭>

 

立齋集 24/ 잡저(雜著)

 

大凡物於宇內者 無論飛潛動植 隨其所在하여 莫不各有地頭 이나 四者之中 植者 其地頭一定而不易하고 飛潛動三者 其地頭 數易而不定이라

대개 우주 내의 모든 사물은 조류[飛]ㆍ어류[潛]ㆍ동물[動]ㆍ식물[植]을 논할 것 없이 그것이 있는 곳에 따라 각각 지두(地頭 위치하는 자리)가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가운데 식물은 그 지두(地頭)가 한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고, 조류 어류 동물 세 종류는 그 지두가 자주 바뀌어 일정하지 않다.

 

吾人 卽動物之一也 而要 是吾人之外則皆未有義理於其間이라

우리 사람은 곧 동물의 일종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사람 외에는 모두 그 사이에 의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다

 

彼一定而不易者 全塞不通하여 從生至死 只得依其所在地頭而已 何所知覺하여 而可論義理리오

. 저 한번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 것은 완전히 막히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지 그 있는 곳의 지두에만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니, 어찌 지각(知覺)함이 있어서 의리(義理)를 논할 수 있겠는가.

 

其數易而不定者 稍通一路하여 能擇利害하여 而爲趨避地頭 이나 是其知覺으로 亦何足與論於義理리오

그 자주 바뀌어 일정하지 않은 것은 한 길로 조금 통하기 때문에 이(利)와 해(害)를 가려서 나아가고 피하는 지두가 될 수 있지만, 그 지각이 또 어찌 충분히 의리를 논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惟其中所謂蜂虎雎鴈及麟鳳龜龍之屬 能薄有天性하여 而以時隱見하여 其所在地頭 疑若有發見之異於他者 而是亦不過一點明處耳 曾何足以責夫義理之全哉

오직 그 가운데 이른바 ‘벌[蜂]ㆍ범ㆍ저구새ㆍ기러기[雁] 및 기린ㆍ봉황ㆍ거북[龜]ㆍ용(龍)’의 등속이 적게나마 천성(天性)을 지니고 있어서 때에 따라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그 있는 곳의 지두가 발현함이 다른 것과 다른 점이 있는 듯하지만, 이 또한 한 점의 밝은 곳에 불과할 따름이니, 일찍이 어찌 충분히 의리의 온전함을 요구할 수 있었던가.

 

然則其可以責夫義理之全者 惟是吾人所在之地頭而已矣 而吾人所在之地頭 亦有大地頭 小地頭之異焉이라

그러하니 의리의 온전함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사람이 있는 곳의 지두(地頭)일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 사람이 있는 곳의 지두 또한 대지두(大地頭)와 소지두(小地頭)의 다른 점이 있다.

 

所謂大地頭者 卽此心之寂然不動 而吾之所以爲人之理 悉具於其中하니 必於此地頭而下存養之工 然後 大本以立이라

이른바 ‘대지두’라는 것은 곧 이 심(心)이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곳으로, 우리가 사람이 되는 바의 이치가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반드시 이 지두(地頭)에 존양(存養)의 공부를 한 뒤에라야 대본(大本)이 이로써 수립된다.

 

所謂小地頭者 卽此心之感而遂通 而吾之所以爲人之道 發見於其間하니 必於此地頭而加省察之工 然後 達道以行이라

이른바 ‘소지두’라는 것은 곧 이 심(心)이 감이수통(感而遂通)하는 곳으로, 우리가 사람이 되는 바의 도(道)가 그 사이에서 발현되니, 반드시 이 지두(地頭)에 성찰(省察)의 공부를 더한 뒤에라야 달도(達道)가 이로써 행해진다.

다.

 

이나 大地頭 其寂然不動處 渾全包涵하여 只是一箇地頭而已 小地頭 則面面異狀하고 頭頭殊形하며 隨其所在而有千百箇地頭

그러나 대지두는 그 적연부동한 곳이 혼전(渾全)하게 포함한 단지 하나의 지두일 따름이지만, 소지두는 곧 면면이 모양을 달리하고 개개가 형태를 다르게 하여 그 있는 곳에 따라 천백 개의 지두(地頭)가 있다.

 

試略數之컨대 方其感而遂通之際 目有所視이면 則是爲視思明地頭 耳有所聽이면 則是爲聽思聰地頭 口有所言이면 則是爲言思忠地頭 身有所爲 則是爲事思敬地頭 若此類不可勝記

시험 삼아 대략 헤아려 보건대, 바야흐로 감이수통(感而遂通)할 즈음에, 눈으로 보는 것이 있으면 이는 시사명(視思明)의 지두(地頭)가 되고, 귀로 듣는 것이 있으면 이는 청사총(聽思聰)의 지두가 되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언사충(言思忠)의 지두가 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사사경(事思敬)의 지두가 되니, 이 같은 종류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而又以夫身所接者 言之하면 在父子則父子爲盡慈孝之地頭 在君臣則君臣爲盡禮敬之地頭 以至夫婦也 長幼也 朋友也 何莫非盡其分之地頭리오

그리고 또 자신이 접하는 것으로써 말해 보면, 부자(父子)에 있어서는 곧 부자간에 자애와 효도를 다하는 지두가 되고, 군신(君臣)에 있어서는 곧 군신 간에 예와 공경을 다하는 지두가 되며, 부부(夫婦)와 장유(長幼)와 붕우(朋友) 간에 이르러서도 무엇이나 그 분수를 다하는 지두 아닌 게 없다.

 

而此特擧其大者耳其間 小小地頭 又何可勝記哉리오

그러나 이는 다만 그 큰 것만 들었을 뿐이니, 그 사이에 소소한 지두를 또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凡此許多地頭 固當隨所在하여 無所不著工이라 이나 必先於大地頭 極其存養而立大本하여 方能於小地頭 致其省察而行達道 其先後之序 固當如是러라

무릇 이 많은 지두는 진실로 마땅히 있는 곳에 따라 공부를 하지 않을 데가 없다. 하지만 반드시 먼저 대지두에서 그 존양 공부를 극진히 해서 대본(大本)을 수립해야 바야흐로 소지두에서 그 성찰 공부를 다 해서 달도(達道)를 행할 수 있으니, 이는 선후의 순서가 실로 마땅히 이와 같아서이다.

 

而抑又念人固爲動物之一하니 其地頭 未始不數易而不定이라

그리고 또 생각건대 사람은 실로 동물의 한 종류가 되니, 그 지두(地頭)가 애초에 자주 바뀌어 일정하지 않은 존재가 아닌 적이 없었다.

 

이나 若以存養之工으로 言之하면 只是一於戒懼하여 平平存在하고 略略提省之外 無他道焉하니 則是其大地頭著工 其亦可謂一定而不易矣

그러나 존양(存養)의 공부로 말해 보자면, 단지 이는 한결같이 계신(戒愼) 공구(恐懼)하여 ‘마음을 화평하게 갖고’, ‘점차적으로 일깨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 곧 대지두의 공부는 또한 한번 정해져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以省察之工으로 言之하면 彼其外物之來感者面面異狀하고 頭頭殊形하여 照之少忽하면 應之輒謬雖或於此而無失이나 又將於彼而有誤하니 而其不可不愈致其謹 有如是焉이라

성찰(省察)의 공부로 말해 보자면, 저 외물이 와서 감응[感]하는 것이 면면이 모양을 달리하고 개개가 형체를 다르게 하여 비춤이 조금만 소홀하면 응(應)함이 문득 잘못되어 비록 혹 이것에서는 잘못이 없더라도 장차 저것에서 잘못이 있게 되니, 그 삼감을 더욱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은 점이 있다.

 

이나 殊不知面面異狀之中 吾之所以應之者 自有夫合當其狀之理하고 頭頭殊形之中吾之所以接之者 自有夫合當其形之則하니 是亦未始不一定而不易이라

하지만 자못 면면이 모양을 달리하는 가운데 내가 그것에 응하는 바가 절로 그 모양에 합당한 이치가 있고, 개개가 형체를 달리하는 가운데 내가 그것에 접하는 바가 절로 그 형체에 합당한 법칙이 있음을 알지 못해서이니, 이 또한 애초에 한번 정해져 바뀌지 않는 것이 아닌 적이 없다.

 

蓋不論大地頭 小地頭 以其旋寂而旋感 忽此而倐彼觀之하면 則是其地頭l 固數易而不定이라

대개 대지두(大地頭), 소지두(小地頭)를 논할 것 없이, ‘막 고요하자마자 바로 느낌’, ‘홀연 여기 있다가 홀연 저기에 있음’으로써 살펴보면, 그 지두(地頭)가 실로 자주 바뀌어 일정하지 않다.

 

而以其此理之無往不天然本有者 觀之하면 則其一定而不易又初未嘗不同也

그러나 이 이(理)는 가는 데마다 천연(天然)한 본래 소유가 아님이 없다는 것으로써 살펴보면, 한번 정해져 바뀌지 않음이 또한 애초에 같지 않은 적이 없었다.

 

何故 非以隨所寓之地頭 而盡其地頭上所當爲之工하여 以得夫地頭中所固有之理 則理無往而不天然自在하여 不可一毫加하고 又不可一毫減故耶

이는 무엇 때문인가? 처한 바의 지두를 따라 그 지두상에서 마땅히 해야 할 공부를 다 하여 지두 중에 고유(固有)한 이(理)를 얻으면 가는 데마다 이(理)가 천연 자재(自在)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한 터럭만치라도 더할 수 없고 또 한 터럭만치라도 덜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大抵當爲之工與固有之理 只在於所遇之地頭 則此地頭外 雖有他地頭無數 人須掃除百千하여 惟作此地頭人하여 以盡此地頭之工 然後 方可得此地頭之理

대저 마땅히 해야 할 공부와 본래 지니고 있는 이(理)는 단지 만나는 바의 지두에 있으니, 이 지두 외에 비록 다른 지두가 수없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은 모름지기 천백 가지를 싹 제거하여 오직 이 지두의 사람이 되어서 이 지두의 공부를 다 한 뒤에야 바야흐로 이 지두의 이치를 얻을 수 있다.

 

而今人不然하고 將欲作此地頭人하여 而此地頭未了한대 忽復作彼地頭人하여 怳惚搖蕩하여 畢竟不知爲何地頭人이라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장차 이 지두의 사람이 되고자 하면서 이 지두가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다시 저 지두의 사람이 되어서 멍하게 흔들려 결국 어떤 지두(地頭)의 사람이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若是而尙可望於盡其工하여 以得其理耶 由今之道하여 無變今之習하면 其去飛潛之類l 數易不定者 無幾矣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그 공부를 다 하여 그 이치 얻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지금의 도(道)를 따라 지금의 폐습(弊習)을 변화시킴이 없으면 그 조류와 어류가 자주 바뀌어 일정하지 않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然則如之何而可也 曰隨其所遇之地頭하여 主一無適하여 則其庶矣乎哉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만나는 바의 지두(地頭)에 따라 주일무적(主一無適)하면 거의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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