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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猛-왕맹 위진남북조 시대 전진의 최고 지략가.

작성자수일재|작성시간15.04.15|조회수92 목록 댓글 0

【큰 지혜로 현명한 군주를 택하고,  남다른 책략으로 나라를 일으키다.】

 

  왕맹(325∼375)은 자가 경략 景略이고, 북해 극현(지금의 산동성 창동현) 사람이다.

어려서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삼태기와 키 같은 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하루는 낙양식에서 삼태기를 팔고 있었는데, 웬 사람이 비싼 값으로 삼태기를 사고 싶은데 마침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며 자신을 따라 자기 집으로 가면 돈을 주겠노라 했다.

왕맹은 그 사람을 따라 나섰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백발의 노인이 평상에 앉아 주위 10여명과 고상한 이야기를 신나게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왕맹을 데리고 온 사람이 왕맹의 손을 이
끌어 그 노인에게 절을 하게 했고, 노인은 열 배나 되는 값으로 삼태기를 사고는 왕맹을 보냈다.

그 자리를 빠져 나온 왕맹이 얼마쯤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온데간데없고 놓은 산이 버티고 있었다.

왕맹은 이 일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특히 그 노인의 풍채와 박학다식함에서 받은 인상은 오래도록 왕맹의 머릴를 떠나지 않았다.

노인에게서 받은 백은으로 왕맹은 병법서를 사서 삼태기를 파는 틈틈이 공부하여 병법의 오묘함을 깊게 깨닫기에 이르렀다.

한번은 그가 업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사내다운 기상을 보고 서통이란 사람이 그를 불러 공조로 삼으려 했으나 왕맹은 응하지 않고 달아났다.

그는 노인을 잊지 못하고 화음산으로 그 노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화음산에 은거하며 노인에게서 넓고 깊은 학식을 배울 수 있었다.

이로써 왕맹은 용안의 주군을 만나 그를 도와 세상을 구하겠다는 풍운의 뜻을 품기에 이르렀다.

과연 그는 훗날 부견 부견을 도와 전진 前秦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5호16국 시대를 통털어 가장 뛰어난 정략가이자 군사가이자 모략가였다.

  

【부견을 보좌하여 법으로 혼란을 다스리다.】

 

진 晉(사마의가 위나라를 찬탈하여 세운나라) 영화 10년인 354년 대사마 환온이 군대를 이끌고 부견의 진을 공력하러 나섰다.

환온의 군대는 단숨에 진의 장수의 목를 베고 관문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장안에서 멀지 않은 패상까지 곧장 진격해왔다.

환온은  패상에 군대를 주둔시켜놓고 천하의 인재들을 모집했다.

이때 왕맹도 그모집에 응하여 환온에게로 갔다.

환온의 군영에 도착한 왕맹은 패상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모습을 보고는 이 상태로는 장안을 탈취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장수를 찾아 만나니 않고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는 일부러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다 떨어진 옷에 온몸에 이를 잡는다며 수선을 떨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천하의 대사를 물 흐르듯 거침없이 내뱉었다.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기인의 형상을 한 왕맹을 향해 환온은 이렇게 물었다.

내가 천자의 명령을 받아 정예군 10만을 거느리고 반역자를 토벌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 그런데 천하의 호걸들이 다모이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

 

왕맹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공은 천 리를 멀다 않고 적의 땅 깊숙이 들어왔소이다. 지금 장안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패수를 넘지 못하는 것은 백성들이 아직 공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환온은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강동에 이에 견줄 자 없구나"라며 왕맹을 군의 자문으로 삼았다.

그러나 환온은 너무 신중을 기하다 기회를 놓치고 결국은 진에게 대패하여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면서 환온은 왕맹에게 마차를 주면서 함께 동진으로 가자고 권했다.

왕맹은 화음산으로 돌아가 노인에게 마저 공부를 하겠다며 환온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다시 산중에 은거하여 수많은 책을 읽고 병법을 공부했다.

진은 군주 부건이 죽고 부생이 즉위한 상황이었다.

부생은 살생을 좋아하고 나쁜 짓을 함부로 일삼았다. 지도층은 물론 백성들도 불만이 여간 아니었다.

반면에 동해왕 부견은 넓은 아량과 큰 지략을 지닌 인물로 인심을 크게 얻고 있었다.

부견의 주위 사람들은 부견에게 부생을 죽이라고 권했다.

부견은 책사 여파루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여파루는 자신은 칼의 손잡이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라 그렇게 큰 일을 판단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파루는 자신의 친구 왕맹이 남다른 모략과 천하의 형세를 파악하고 있는 인재이니 그를 불러 기용하면 틀림없이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견은 여파루를 왕맹에게 보내 초빙에 응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마치 평생을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의기투합했다.

부견은 "유비가 공명을 만난 것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부견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마침내 부생을 죽이고 자신이 정권을 잡았다

왕맹은 중서시랑이라는 중책에 기용되어 중요한 기밀을 관장했다.

이 무렵 시평(지금의 섬서성 흥평현 동북)에서 토착 세력들이 마구 날뛰며 도적질을 하는 등 극심한 혼란상이 벌어졌다.

부견은 왕맹을 시평령(시평최고직)으로 임명하여 이 혼란을 다스리게 했다.

시평으로 온 토호들의 행패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왕맹의 갑작스러운 조치에 부하 관리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왕맹은 그 중 대표적인 인물들을 골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채찍질을 가해 죽였다.

이 일은 실권자 부견의 귀에도 들어갔다.

부견은 "모름지기 정치의 기본은 덕이 먼저인데 어찌하여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렇게 가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인단 말인가"? 라며 은근히 왕맹을 나무랐다.

이에 왕맹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은 이렇게 들었습니다. 나라의 편안함은 예로 다스리고, 나라의 혼란은 법으로 다스린다고.... 명군을 위해 흉악하고 교활한 자들을 제거함에 있어서 처음 간신 하나를 죽이면 수많은 사람이 남을수 있습니다.

만약 신이 포악한 짓을 하는 자들과 법을 어기는 자들을 깨끗하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어찌 한 구역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저의 정치가 가혹하다는 말씀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부견은 왕맹의 말에 충분히 일리가 있닥 생각하여 여러 신하들 앞에서 "왕맹은 관중과  자산에 견줄 만하도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는 왕맹을 상서좌승으로 승진시켜 더욱 중용했다

왕맹도 자신의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여 관리들을 정돈하는 등 정국을 새롭게 탈바꿈시켜 나갔다.

부견은 다시 그를 경조윤으로 승진시켰고, 이으고 이부상서 겸 태자첨사를 거쳐 상서좌복야보국장군 겸 사예교위로 승신시켰으며 여기에 기도위거중숙위라는 직함을 보탰다.

당시 왕맹의 나이 불과 서른여섯 살이었다.

1년에 다섯번이나 승진했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위상은 안팎을 흔들었다.

왕맹은 "나라의 혼란은 법으로 다스린다"는 원칙으로 토착세력의 이익을 박탈했다.

기득권을 가진 왕공대신들을 비롯한 토착세력들은 왕맹에게 큰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대장군 번세는 저족 출신의 세력가이자 개국 공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부건을 보좌하여 관중을 평정하는 등 탁월한 공적을 남긴 막강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공신들을 향한 왕맹의 엄격한 법집행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 앞에서 "장안 성문에다 왕맹의 목을 걸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등 막말을 일삼았다.

법을 무시하는 번세의 행패에 왕맹은 이런 상황을 부견에게 알렸다.

얼마 뒤 부견은 왕맹과 번세가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일부러 공주를 양벽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면서 의견을 물었다.

이 말에 번세는 양벽은 자신으 사위감이거늘 이떻게 공주를 취할 수 있냐며 화를 냈다.

그러자 왕맹은 사해가 황제의 소유이거늘 어찌 감히 황제앞에서 혼사 문제로 다툴 수 있나며 번세를 나무랐다.

번세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왕맹을 때리려 했으나 좌우 사람들에 의해

제지 당했다.

성을 참지 못한 번세는 씩씩거리며 마구 욕을 했는데 부견까지 끌고 들어갔다.

이에 부견은 크게 성을 내며 바로 번세를 참수토록 명했다.

승상 장사석보와 상서 구등도 왕맹에 대해 불만을 품고 부견에게 글을 올려 왕맹을 비방했다.

부견은 이를 구실로 이 둘을 파면시켰다.

강덕은 진의 옛 군주 부건의 처남이었는데 술주정 등으로 백성들을 몹시 괴롭혔다.

부견은 강적을 잡아들여 목을 베서는 저잣거리에 전시하여 경고했다.

왕맹의 법집행은 태산과 같았다.

여기에 황제 부견의 강력한 지지가 뒷받침됨으로써 아무도 불만을 토로 하지 못하고 모두 법집행을 따랐다.

이렇게 해서 전진은 법치라는 제도를 갖추었고, 마침내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줍지 않을 정도로 사회기강이 바로 잡혔다.

  

【가슴에 큰 계산을 품고 연을 멸망시키다】

369년(태화 4년) 동진의 대사마 환온이 연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연은 호뢰(지금의 하남성 사수현) 서쪽 땅을 전진에게 떼어주겠다는 조건으로 구원병을 요청했다.

부견은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이일을 논의했다.

신하들은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지난날 환온이 우리를 정벌하기 위해 패상까지 쳐들어왔을 때 연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환온이 연을 정벌하러 나섰는데 우리가 왜 연을 돕습니까.

또 연은 우리의 변방이 되길 원치 않는데 우리가 왜 연을 구원합니까"

회의가 끝난 뒤 왕맹은 개인적으로 부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연이 강하긴 합니다만 환온의 적수는 되지 못합니다. 만약 환온이 산동을 거점으로 낙읍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하북의 군대와 하남의 식량을 확보하게 되는 날에는 폐하의 큰 뜻은 헛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지금 연과 합세하여 환온을 물리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환온이 물러나면 연도 골병이 들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약점을 간파하여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부견은 왕맹의 계책에 따라 군대를 ㅂ내 연을 구원했고, 환온의 군대는 물러갔다.

전투가 끝난 뒤 진은 연에게 호뢰 서쪽 땅을 요구했으나 연은 마음을 바꿔 그 땅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연의  국력은 벌써 쇠약해져 있었고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환온을 물리친 명장 모용수도 핍박을 견디다 못해 부견에게 투항했다. 연을 정벌하여 북방을 통일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진과 연은 당시 북방에서 가장 강력한 두 나라였다.

따라서 연을 평정한다는 것은 북방을 통일하는 것과 같았다. 연을 정벙하기에 앞서 왕맹은 전체적인 작전과 진격노선 등에 대해 면밀한 연구와 설계에 들어갔다.

당시 연을 공격할 수 있는 노선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었다.

첫째는 장안에서 함곡관으로 나와 낙양·형양 두 곳의 큰 전략거점을 차지한 다음, 황하 안팎에서 강의 두 기슭을 따라 동북으로 진격하여 원수·장수를 건너 업도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노선은 낙양과 형양을 차지한 다음 황하 안쪽과 동쪽에서 상당을 공격하고 업도로 밀고 가는 것이다.

이 노선은 가장 빠르고 연에게 치명상을 입히기에 충분한 노선이었다.

마지막 노선은 평양에서 북진하여 진양을 취한 다음 동쪽의 정형을 나와 상산을 취하여 연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왕맹은 반복적으로 이들 노선을 연구한 끝에 두 번째 노선을 확정했다.

진의 군대는 이 노선을 따라 연 정벌에 나섰다. 낙양과 형양을 취한 다음 형양 방향에서 공세를 취했다. 군대를 나누어 진양(지금의 산서성 태원)을 공격하여 연의 병력을 분산시켜 주력 부대가 있는 북측을 엄호하게 했다.

이는 가장 효과적으로 업도를 탈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위수·황하·분수를 이용하여 식량 등을 운반할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369년 12월, 부견은 연이 약속을 어겼다는 구실로 왕맹에게 3만 보기병을 거느리고 연을 정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왕맹은 모용수를 길잡이로 삼아 낙양으로 곧장 쳐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370년 정월, 낙양을 겹겹이 포위했다.

왕맹은 전투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낙주자사 모용축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로 했다. 왕맹은 편지 한통을 모용축에게 보냈다.

"그대의  나라는 성고(지금의 하남성 사수현)의 험준함에 막혔고, 진맹(지금의 맹진 황하도구)의 길은 끊겼다.

용맹한 백만 군대가 지관을 넘어 바로 업도로 쳐들어 갈 것이다.

그대가 쌓은 낙양의 금용성은 구원받을 길이 없고, 3백명 밖에 안 되는 보잘것 없는 졸병으로 지탱할 수 있겠는가?"

편지를 받아든 모용축은 새파랗게 질려 바로 낙양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왕맹이 낙양을 공략하고 있을 때 연의 대장군 모용장이 정예병 10만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왕맹은 장군 양맹에게 동쪽석문에서 모용장을 막도록 했다.

그러나 양맹은 모용장에게 대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모용장은 여세를 몰아 형양 공격에 나섰다. 왕맹도 건위장군 양성과 낙주자사 등강에게 1만 정예병을 이끌고 서둘러 달력 맞붙도록 했다.

모용장이 한 발 늦었다.

연의 대군이 황하를 미처 건너기 전에 양성의 공격을 받아 신락(지금의 하남성 신향현)으로 후퇴한 다음 성을 쌓고 진의 군대에 저항했다.

왕맹은 등강에게 금용을 지키게 하고는 자신은 군사를 장안 쪽으로 돌렸다.

그로부터 한 달이 못 되어 왕맹은 낙양을 손에 넣었다.

이렇게 낙양과 형양이라는 양대 전략거점을 잇달아 차지했으니 그의 용병술이 얼마나 신속한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4월, 부견은 다시 왕맹에게 진남장군 양안  장지  등강등 10여명을 장수와 보기병 6만을 통솔하여 연 정벌을 준비하게 했다.

6월 12일, 연 정벌을 위한 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견은 왕맹을 패상(지금의 섬서성 서안 동쪽)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대에게 연 정벌의 대사를 맡기는 바이오. 계획에 따라 호관·상당에서 로천(지금의 장하 상류)으로 나와 곧장 업도로 밀고 가시오.

그대가 떠나고 나면 내가 직접 군대를 독려하여 배로 식량을 운반하면서 수륙 양면으로 진격할 것이오.

그러니그대는 뒷일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에 왕맹은 "신은 계획에 따라 바람이 낙엽을 휩쓸 듯 잔당을 소탕할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의 자리에 먼지가 날아들지 않길 바랍니다" 라고 하면서, 부견에게지금부터튼 일찌감치 선비족을 대비하라고 건의 했다.

왕맹의 정벌 노선은 두 길로 나우어졌다.

그는 주력을 이끌고 호관(지금의 산서성 장치현 동남)으로 진공했고, 장군 양안은 진양으로 곧장 밀고 올라갔다.

8월, 왕맹은 호관을 공격하여 상당태수 남안왕 모용월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군현들이 모두 진에 항복했다.

진양성의 연나라 군대는 식량이 충분했기 때문에 9월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왕맹은 둔기교위 구장에게 호관을 지키게 하고 직접 양안을 도와 진양성을 공격했다.

진양성의 방어막이 견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왕맹은 병사들에게 성 안쪽을 향해 땅굴을 파게 했다.

땅굴이 완성되자 호아장군 장자에게 날랜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성안에 잠입하게 했다. 진양성의 연나라 군대는 성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열중하느라 성안으로 진의 군대가 잠입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성안에 잠입한 진의 군대는 고함을 지르며 성문을 열였다. 9월 초, 마침내 진양성이 함락되었다.

병주자사 동해왕 모용장을 포로로 잡았다.

이때 연의 황제 모용위는 태부 상용왕 모용평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진에 대항 하도록  명령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모용평은 30만 정병을 거느리고 로천에 이르렀으나 왕맹의 군대가 두려워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하천을 이용하여 수비에 들어갔다.

이에 왕맹은 주력을 이끌고 일거에 로천을 공격하여 모용평과 하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모용평은 왕맹의 군대가 깊숙이 들어왔으니 지구전으로 맞서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모용평은 사람이 아주 탐욕스럽고 야비했다.

적을 앞에 두고 군대는 먹을 물이 모자라 애를 먹고 있는데, 이 자는 산에서 솟는 샘물을 독점하여 병사에게 이 물을 사다가 먹게 했다.

물을 판 돈과 옷감이 산처럼 쌓였다.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은 채 원한을 품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왕맹은 "모용평이란 자가 정말 어리석구나, 우리가 억만 군중도 두려워하지 않거늘 하물며 수십만병이야!

이제 반드시 이들을 물리칠 것이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왕맹은 유격장군 곽경에게 기병 5천을 이끌고 야간에 길을 돌아 산 옆에 설치된 모용평의 군영에다 불을 지르게 했다.

그런 다음 죽기를 맹세한 결사대들을 결집시켜 놓고 큰 공을 세워 나라에 보답하자며 격려했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가 용감하게 함성을 지르며 공격했다.

연의 군대는 대패했다. 왕맹은 연의 군사 15만 이상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모용평은 혼자 말을 타고 업성으로 도망쳤다.

연의 주력군을 소멸시킨 왕맹은 12월 16일, 업성을 포위하여 마지막 전투를 전개했다. 업성을 포위한 다음 왕맹은 부견에게 편지를 보내 연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어짊과 사랑의 의지를 표명하여 6주의 인민들이 주인이 바뀐 사실도 모르게" 함으로써 연을 안정실 것을 권했다.

부견은 왕맹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장군은 전보다 더 큰 공을 세웠다. 짐이 지금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밤낫으로 달려갈 테니 장군은 병사들을 쉬게 하면서 짐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연을 취하라"라고 명령했다.

부견은 이위에게 태자 굉을 보필하면서 장안을 지키게 하고, 낙양에는 부융을 보내 지키게 했다.

자신은 10만 정예병을 이끌고 업도를 향해 달려갔다.

7일 만에 안양(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서남)에 도착했고, 왕맹은 안양까지 나와 부견을 맞이 했다.

왕맹과 만난 부견은 " 그 옛날 주아부는 한 문제를 영접하러 나오지 않았는데, 장군은 적을 앞에 두고 군대를 버리고 이렇게 나를 마중나왔으니 어찌된 일이오?" 라고 물었다

이에 왕맹은 "신은 폐하의 위엄과 신령스러운 명을 받들어 못된 적을 공격했고, 적은 이미 솥안에 든 물고기와 같으니 무슨 걱정입니까.

어린 태자께 나라를 맡기시고 이렇게 멀리까지 오셨습니다. 폐하께서는 패상에서 신에게 하신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라고 답했다.

왕맹이 모용평을  추격하여 업성에 아직 이르지 못했을 때, 업성부근에는 도적이 날뛰며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왕맹은 업성을 포위한 다음 군사들에게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안심시키게 했다.

그리는 군기를 엄격하게 다스리고 법집행을 간결하면서도 너그럽게 시행하게 했다.

부견이 업성에 이르자 계속 성을 공격하는 한편 북쪽 신도(지금의 하북성 기현)를 기습했다.

11월 7일, 왕맹의 강력한 공세에 산상시랑 여울은 부여·고구려 및 상당의 인질 5백여 명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북문을 통해 진의 군대로 도망쳐왔다. 연의 군주 모용위와 문무 대신들은 당황해서 도망치기에 바빴고 왕맹은 군사를 보내 그들을 추격하여 모저리 죽이거나 붙잡았다.

연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부견은 왕맹을 관중 6주의 군사권을 장악할 수 있는

관직을 내렸고 아울러 기주목에 임명했다.

  

【정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리고, 몸이 부서지도록 실천하다】

왕맹이 연을 멸망시킨 지 얼마 뒤 부견은 그를 수도로 불러들여 승상으로 삼았다.

아울러 군사 전반을 총감독하도록 했다.

왕맹은 여러 번 사양했다. 그는 그런 중책은 부견의 친왕들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부견은 받아들이지 않고 승상에 임명하였고 국가를 다스리는 중책을 맡게했다.

왕맹은 나라의 안팎을 원칙을 가지고 다스려 나갔다. 우선 공평한 정치를 시행하여 내외의 불만을 없애고, 밖으로는 군대를 개혁하고 안으로는 유학을 장려하여 나라의 체제를 정비했다.

죄가 없으면 형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고, 제주가 없으면 임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치를 펼쳐나가는 동안 그는 다음 몇 가지 큰 일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관리들을 보다 더 정비하고 법치를 실행했다.

이렇게 햇 비교적 청렴하고 효율적인 관료기구와 안정된 사회질서를 세웠다.

그는 재능 있는 지방 관리들을 원했다.

일정한 기준에 합격하지 못하면 파면시키거나 좌천시켰다.

이런 정비를 거친 결과 내외의 관리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법치와 태산같은 법집행으로 관리들은 부정과 비리는 엄두를 낼 수 없었고 백성들도 법을 어기지 못했다.

사회의 기강과 풍속이 더욱 호전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경제발전에 큰 힘을 기울여 민중들의 삶을 향상시켰다.

왕맹이 부견을 보좌하여 어려 해에 걸쳐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생산력은 크게 발전했다.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력은 안정정되지 못했다.

왕맹은 연을 멸망시킨 뒤 대대적인 군사행동은 중단하고 경제발전에 힘을 집중시켰다.

농업 방면에서는 북방 지역의 땅에 맞는 경작기술을 도입한 이른바 구전법을 시행했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고, 농사에 힘쓰는 가족들을 표창했다.

동시에 세금과 부역을 줄이는 일과 빈민구제에 힘을 쏟아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이와 함께 상공업을 장려했다. 시징을 열어 각직의 상인들이 몰리게 한다는 방침을 실행하여 상품유통이 활기를 띠게 되고 경제발전은 크게 촉진되었다.

교육에서는 유학을 장려했다. 왕맹은 진의 지도층과는 달리 한족출신으로 유학에 길들여져 있었다.

부견은 지족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유가사상의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두 사람 모두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왕맹은 각지에 학교를 지어 인재를 길러내게 했다.

더욱이 각급 관리의 자손들은 반드시 학교에 진학하여 유가경전 위주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교육을 거쳐 재능 있고 인품이 좋으면 바로 상을 내리고 관직에 등용했다.

공부하지 않아 유가경전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은 퇴학시켜 평민으로 만들었다.

소수민족을 존중하여 민족관계를 개선했다.

당시 중국 북방은 다섯 개의 소수민족 정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각 정권이 서로를 공격함으로써 민족간의 갈등이 대단히 심각했다.

 진은 저족에 의해 통치되는 정권이었지만 부견과 왕맹이 모든 민족이 융화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개방된 민족정책을 실행함으로써 민족갈등을 완화할 수 있었다.

연을 멸망시킨 뒤 왕맹은 모용위를 포함한 항복한 전연의 귀족과 대신들을 장안으로모두 옮기고 옛날과 같이 모용씨가 군신들을 거느릴 수 있게 관작을 내려줄 것을 건의 했다.

민족간의 화해를 기조로 하는 관대한 정책은 대단히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전진 주변의 여러 민족과 서남·서역의 여러 나라가 사신을 보내거나 전진에 귀순하는 일이 속속 벌어졌다.

왕맹은 전진을 다스리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그를 통해 저리되었다.

전진의 국력은 부강해졌고 백성들은 넉넉하고 편안한 삶을 누렸다.

그러나 왕맹의 심신은 쇠약해져만 갔다.

극심한 피로와 병이 겹쳐 날이 갈수록 위중해졌다.

국왕 부견은 왕맹의 건강을 위해 직접 종묘사직에 기도를 올리는 한편 측근들을 싴 각지의 산과 강에서 기도를 드리게 했다. 왕맹은 감동했다.

병에 조금 차도가 보이자 왕맹은 글을 올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죽는 날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그러면서 부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전쟁을 잘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을 꼭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이 좋다고 해서 꼭 끝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지혜로운 선왕들께서 공업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아시고 깊은 계곡을 건너듯 전전긍긍하셨던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폐하께서 부디 선왕들의 뒤를 본받으신다면 천하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왕맹의 글을 본 부견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로부터 십여 일 뒤 왕맹의 병세는 다시 악화되었다.

부견은 직접 왕맹을 찾아가 병문안을 하는 한편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왕맹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마지막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신이 죽으면 폐하께서는 더 이상 동진을 도모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의 적은 선비와 서강입니다. 디들이 큰 걱정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점진적으로 제거하시어 사직을그르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을 마친 왕맹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 쉰한 살이었다.

왕맹의 죽음에 부견은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세 번씩이나 통곡했고 태자 굉에게는 "하늘이 나에게 천하를 통합하라고 하면서 어찌  왕맹을 이렇게 빨리 빼앗아갈 수 있단 말이냐"라고 울부짖었다.

왕맹을 잃은 부견은 마치 한 쪽 눈을 잃은 사람 같았다.

전과 달리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점차 교만방자해졌다.

그는 왕맹의 유언에 따르지 않고 건원 19년인 393년 백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정벌하다 결국 대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저 유명한 비수전투다.

이 전투에서 부견의 백만대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부견 자신도 선비족 모용수의 반란 통에 강족 요장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진은 허망하게 멸망했다.

왕맹은 인재 한사람이 국가의 흥망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예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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