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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라 잉굴다이(龍骨大)

작성자수일재|작성시간14.12.24|조회수93 목록 댓글 0

타타라 잉굴다이(만주어: , 중국어 간체: 他塔喇 英俄尔岱, 정체: 他塔喇 英俄爾岱, 병음: Tatara Inggūldai, 1596년 ~ 1648년 2월 24일[1])는 청나라의 장수이다. 한국어권에는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용골대(한자: 龍骨大)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침입하여,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삼전도의 굴욕 사건으로 유명하다.

만주정백기 타타라 가문 출신이다.

 

생애 초반[편집]

  잉굴다이는 자손 대대로 자쿠무(현재의 요녕성 무순 동남쪽 일대)에 거주했는데 그의 조부인 다이투쿠하리가 누르하치에게 귀순하였다. 잉굴다이는 용맹이 뛰어나서 젊은 시절부터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하여 니루이 어전(niru-i ejen, 牛祿 額眞)으로 승진하였으며 누르하치를 따라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을 세워갔으며 특히 1621년 요양, 심양전투에 참전하여 결정적인 공을 세움으로 인하여 그 공로로 참장(參將)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해 말 사고에 연루되어 비어(備御)로 강등당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천명 8년(1623년)에 무훈을 세워 삼등유격으로 진급했다. 그 이후 천명 10년(1625년)에 무훈을 또한번 더 세워 삼등참장으로 승진한 후 참수형을 당할 일이 생길때 1번 면제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등 청나라 황제로부터 엄청난 총애를 받았다.

병자호란[편집]

  17세기 초반 굴기한 누르하치의 후금이 명의 무순성을 함락시키면서 시작된 중원공략은 명나라는 물론 임진왜란의 여파로 피폐한 조선에게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1616년 대금이라는 국호를 제정하고 독자적인 여진국가를 만천하에 공표한 누르하치는 이후 1618년, 명의 요동지역 요충지 무순성을 함락시키면서 대명공략을 시작하였다. 이후 1619년 사르후 전역에서 명, 조선, 여허 연합군으로 이루어진 10만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후금의 기세는 한껏 올라갔다.

  이런 후금을 지척에서 바라본 조선의 위기감은 갈수록 커졌고 사르후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지리멸렬한 명나라는 조선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서 압박을 넣고 있었다. 게다가 요동의 장수 모문룡이 요민들과 패잔병을 이끌고 조선경내로 들어오면서 긴장감은 한층 높아졌다.

  광해군은 이에 피폐한 국내상황을 추스리기 위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후금과 적대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이념이 국정철학으로 확고히 자리잡아가는 조선의 현실에서 '대명의리를 져버리는' 광해군의 외교방식은 국내여론의 반발을 불러왔다. 심지어는 광해군을 옹립했던 대북파마저도 대명의리론을 들먹이는 형국이었다. 또한 폐모살제와 같은 패륜적 정치사건이 일어나고 무리한 궁궐공사로 민심이 이반되자 실각했던 서인들과 대북에 밀려 소외당한 남인들의 '거사'의 명분이 조금씩 싹틀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623년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 서인이 주축이 된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기에 이른다. 친명배금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운 인조정권은 그러나 현실적으로 후금과 배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알았으며 정작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친명배금이 실행되기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인조정권의 외교정책은 광해군대의 그것을 답습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1627년 정묘호란을 당했던 이후에도 인조정권은 후금과의 마찰을 되도록 피하려고 노력했다. 정묘호란 때도 인조정권은 화친을 요구하는 후금의 조건을 상당부분 들어주는 형태로 화약을 맺었던 바 있었다. 이 때 조선은 명의 연호 사용과 명과의 '군신관계'를 인정받는 조건으로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기근에 허덕이는 후금에게 매년 세폐를 주게된다. 양국의 정치, 군사,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미봉책으로 맺어진 화약은 끝내 병자호란때 깨지고 만다.

  병자호란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벌어졌다.

첫째는 명나라 장군 공유덕,경중명이 수군을 이끌고 후금에 귀의한 사건으로 인해 일시에 동북아 군사균형이 깨져 후금의 대명공략이 한층 더 탄력을 받았다는 점이다. 애초 수군이 취약했던 후금이 수군까지 보유하게 되면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던 동북아의 정세가 일시에 흔들리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조선같은 경우, 유사시 강화도로 대피하여 농성을 벌이는 것을 유일한 계책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 후금의 수군보유가 가지는 국가안보적 위기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에 명나라 수군과 함께 공유덕, 경중명 요격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고 후금의 원한만 사게 되었다.

  둘째는 정묘화약에서 약속되었던 형제의 맹약을 맺은 후금이 형제국이 아닌 종주국으로서 조선에게 군림하려 하여 반발을 샀던 점이다. 후금은 애초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으면서 조선에 대해서 명나라와의 군신관계를 용인해주는 태도를 보인 바 있다. 하지만 갈수록 명나라에 대한 우위가 확고해지면서 점차 조선에게 명과 동일한 대우를 바라게 되었으며 실제 후금으로 들어간 조선외교사절을 통해 군신관계에 따른 외교적 제스쳐를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조선은 이를 거부했고 후금은 틈나는대로 조선이 자신들을 명나라와 동급으로 대해주기를 바라며 채근했다. 정묘호란때의 임시적인 평화조약은 동시에 병자호란을 향한 시한폭탄이었던 것이다.

  셋째는 끊임없는 명나라의 조선견제였다. 명나라는 사르후 전투의 궤멸적 타격을 뒤로하고 또다시 조선을 요동수복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을 통하여 압박을 주었고 심지어 모문룡같은 경우 요동의 한인들을 끌어모으고 '조선과 합세하여 요동을 수복한다'라는 자극적인 격문을 돌림으로써 후금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이도저도 할 수 없던 조선으로서는 난감함 그 자체였고 모문룡의 주둔으로 인해서 후금의 침략을 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뾰족한 방도가 없이 가도에 대한 지원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에 대한 후금의 의구심은 커져갈 수 밖에 없었다.

  넷째는 차하르 몽골을 정벌하면서 원나라 황실의 '대원옥새'를 손에 넣음으로서 주변민족들을 규합하여 제국을 세울 정치적 명분을 얻었다는 것이다. 징기스칸의 직계후손인 릭단 칸이 이끄는 차하르 몽골을 정벌하면서 우연치 않게 대원옥새를 얻은 후금은 이를 하늘의 계시로 보았다. 몽골과 중원, 만주를 아우르는 지배권의 정통후계자로서의 명분이 더해지면서 정치적 힘 또한 강해졌다. 만리장성 이북의 내몽골을 평정한 후금에게 있어서 더 이상 거칠 것은 없었고 약소국 조선과의 형제의 맹약은 그저 휴지조각이었다.

  다섯째는 이러한 군사,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명황제와 동등한 황제를 칭하고 제국을 표방하며 국호를 청이라고 고친 청나라의 세계관과 오직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따르는 조선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원옥새를 얻고 명실상부한 초원과 중원의 지배자로서의 명분을 얻게된 후금은 칸인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표방하면서 그 정점을 찍게 되었다. 명과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된 청에게 있어 조선의 운명은 장난감과 같은 것이었고 형제의 맹약은 공허한 외침이었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조선은 일시에 반청의식이 고조되었다.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명나라 다음가는 문명국, 군사강국을 표방했던 조선에게 있어서 개국이래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황제를 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잉굴다이와 마부대가 몽골의 왕자들을 대동하고 조선으로 와서 칭제건원을 알렸을 때 격앙된 분위기에 놀라 간신히 빠져나와 본국으로 돌아간 것은 더이상 조선과 청 사이의 화약이 소용이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1636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10만의 청군은 질풍같이 조선의 수도로 향했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인조는 황망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50일이 넘게 농성을 벌였지만 결국 왕실가족들이 피난가있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 조선의 근왕군이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했지만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지리멸렬하여 조선의 저항의지는 애초에 꺾여버렸다. 잉굴다이와 최명길의 회담끝에 인조의 출성이 결정되고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이 벌어지게 된다. 이후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의 연호를 사용하며 청의 신하국이 되었다. 60만명의 피로인들이 심양으로 끌려갔으며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전란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맡게 되었다.

  잉굴다이는 청태종 홍타이지의 신뢰를 바탕으로 조선과 청을 오가며 끊임없이 양국의 외교를 조율했으며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과격하게 조선조정을 주물렀다. 차하르 몽골원정 때 대원옥새를 발견하여 홍타이지에게 바쳐 공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칭제건원을 조선에게 통보하기 위해 인열왕후의 조문사절단을 맡은 마부대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가 격앙된 조선조정의 반응에 당황하여 민가의 말을 빼앗아 겨우 본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어 병자호란때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마부대와 함께 조선조정과의 협상을 담당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이후 청나라의 조선길들이기정책에 큰 영향을 발휘하면서 조선에 큰 인상을 남겼다. 그의 조선출신 통역관 정명수는 용골대의 권세를 등에 업고 조선에서 악행을 저질러서 증오와 분노를 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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