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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철학 ,법,교육

숙신/읍루/말갈/여진/만주족/발해/금/청

작성자작은소나무|작성시간11.08.22|조회수790 목록 댓글 0

 

 

 

파일:Map of The east barbarian 2.png

337~351년 동안의 오호 십육국 시대(304~439)의 동북아시아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의 동북쪽 천여리에 있었으며, 동쪽은 큰 바닷가이다.

남쪽에는 북옥저와 접하고 있으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그 땅은 산이 많고 험했다.

주민들은 부여와 비슷했으나 언어는 부여와 같지 않았다

 

 後漢書/卷85
挹婁,古肅慎之國也。 在夫余東北千餘里,東濱大海,南與北沃沮接,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余,而言語各異

 

 

파일:Map of The east barbarian 4.png

 

말갈(靺鞨; 중국어 정체: 靺鞨, 간체: 靺鞨, 병음: Mòhé, 모허)은

6~7세기만주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주나라 때에는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이후 고구려, 발해에 복속했었으며,

발해 멸망 이후 요나라 때부터 여진(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 말갈신라, 백제와 교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 시기 등장한 "말갈"을 예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말갈족은 후에 여진족으로 불렸으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만

 아구다가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확장해 금나라를 세우고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하였다.

 

[편집] 말갈의 7부족

 

 

  • 이외에도 백돌부(伯咄部)[1], 안거골부(安車骨部)[2], 불열부(拂涅靺鞨)[3], 호실부(号室部)[4]등이 있었다.
  •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는 퉁구스계 부족이며,
  •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부여 계통이거나 점차 고구려화한 부족으로 여겨진다.
  • 이외에 사모말갈 (思慕靺鞨), 군리말갈 (郡利靺鞨), 굴열말갈 (窟說靺鞨), 막예개말갈 (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편집] 함께 보기

[주석

  1. 납립하 유역
  2. 하얼빈 의란현(依蘭県)에서 동쪽
  3. 안거골(安車骨部)의 동쪽
  4. 현재 수분하(綏芬河) 유역

 

완안함보

신라사람으로 신라가 고려에게 흡수 되자 북쪽으로가서 세력을 키운 뒤, 941년 여진족의 추장이자 시조가되었다. 960년 죽었으며 그의 아들 완안오노는 여진족 제2대 추장이되었다.

또, 그의 후손은 금나라청나라를 세우게된다.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방송일: 200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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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방송 : 2009. 9. 5(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류지열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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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금태조 아골타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
                       (금사본기 제 1권, 세기)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 왕과 같다”(송막기문
금사 송막기문


고려에서 온 신분이며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금 시조 함보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권교체기였던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두 사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함보, 그는 누구인가?
금황실 계보도

<동명해사록>에 함보의 9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년)
조선의 유학자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최고가문 권행의 후예라고 하고 있다.그런데 권행의 본래 성은 金(김)씨였다.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 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 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그의 성이 金(덧말:김)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동명해사록>의 금 시조와 <금사>의 함보는 과연 동일인인가? 

 

신라 후예인 왕족과
 발해 후손의 왕비족이 세운 나라, 금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하여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청 황실의 성씨도
 김씨였다
청태조 누루하치
금 멸망 후 1606년, 여진은 다시 중원을 장악했다.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 성은 아이신 줘러 였다. 아이신(愛新)이란 금(金), 줘러(覺羅)란 겨레(族)부족 씨 등을 뜻한다. 결국 금 부족, 김씨들 이라는 뜻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그의 후예인 금 황실, 청 황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金)씨들이었던 것이다.

 

만주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1부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


▣방송 : 2009. 8. 29(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최필곤 PD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1부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8월 29일 토 20:00~21:00 KBS 1TV)
2부 금 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9월 5일 토 20:00~21:00 KBS 1TV)
 

 

BC 6000년, 만주 요하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황하문명보다 천년이나 앞선 고대문명.
특히, BC 3500년경 꽃 핀 홍산문화에서는 대규모 적석총, 제단,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이미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한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을 무대로 문명의 새벽을 연 이들은 누구일까?
발굴 결과, 요하문명은 중국 중원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오히려 우리 민족의 문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장장 4000㎞의 만주 탐사 대장정
만주 땅에 아로새겨진 민족의 기원을 찾아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문명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황하문명은 인류의 4대 문명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요하문명으로 인해 세계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한다.
요하문명은 이들 4대문명보다 시기적으로 1000년 이상 빠르다. BC 6000년, 요하문명의 새벽을 열었던 사해·흥륭와 문화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옥귀걸이와 꼭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도 출토되었다. 대륙을 건너온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을 밝혀줄 단서가 아닐까.

 

요하문명의 꽃, 홍산(紅山)문화
요하문명은 홍산에서 그 꽃을 피운다. 홍산인들의 성도(聖都)인 우하량에서 여신묘가 발견되었다. 그곳에서는 두 눈을 푸른 옥으로 장식한 여신상도 함께 발굴되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신체의 조각들로 봐서 사람크기와 2배, 3배의 여신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신묘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여신의 얼굴, 눈동자에 푸른옥이 박혀있다
또한 우하량 각지에서는 수많은 적석총이 발견되었다. 한 변이 60m가 넘는 거대한 피라미드형이다.
제단, 신전, 무덤이라는 정신문명의 삼위일체의 유적들과 매우 정교한 옥기의 대량 생산 등은 홍산인들이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홍산문화의 발견은 중국으로서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우하량 적석총

 

흔들리는 중화사상, 중국의 새로운 국가 전략

중국은 예로부터 황하문명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고, 만리장성 이남을 중원이라 믿었다. 그러나 오랑캐의 땅이라 여겨왔던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빠르고 이미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요하문명이 속속 발굴되자, 수 천년간 지속되어온 중화사상은 크게 흔들린다.


중국은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웠다.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의 역사공정에 착수했고, 그 핵심이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요하문명이 중국 문명의 시원일까?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은 누구인가?

BC 2000년 경, 홍산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진다.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견되는 치를 갖춘 석성, 비파형 동검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중원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요하문명의 주도 세력이 중화민족과는 다른 집단이라는 것이다.

 

치를 갖춘 석성은 고구려 성의 특징을 보여주며, 비파형 동검도 그 중원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요하유역과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는 완전한 국가단계라고 평가되는데, 기원전 2,000년 경 요하유역에 있을 수 있는 국가는 무엇일까? 모든 사서를 뒤져봐도 그것은 고조선 외에는 없다.

흥미로운 것은 홍산문화 우하량의 여신묘에서 곰의 턱뼈와 진흙으로 만든 곰의 발도 함께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제사장으로 보이는 인골은 곰의 얼굴을 형상화한 옥룡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이는 홍산인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다는 증거다. 우리 민족의 기원 신화인 단군 신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여신묘에서 발견된 진흙으로 만든 곰발 소조상
그러나 주류학계에서는 단군신화를 신화로서만 인정할 뿐, 단군 조선이라는 역사적 실체는 부정해 왔다. 이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요하문명을 바탕으로 단군조선의 실체에 대해 적극적인 검토를 해야 할 때이다.



 

 
동성왕 피습사건의 전말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1부 제 5의 문명 요하를 가다

 

 

(金, 1115년~1234년)

 

또는 아이신 구룬(Aisin Gurun)은 여진족 완안아골타가 세운 왕조로 1115년 아골타가 국호를 대금(大金), 연호를 수국(收國)이라고 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정식으로 금나라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수도는 북송 시대에는 상경 회령부, 남송 시대에는 중도(中都)였으며, 몽골의 침략 이후로 수도를 카이펑으로 천도했다.

 

1125년에 여진의 금(金)왕조는 거란족를 합병(거란족 중 왕족의 한 명인 야율대석은 거란족을 포섭해서 서요를 세우나 징기즈칸에 의해 망한다.)하고

 

 1153년에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37년에 중도 북쪽에 대도(大都)를 건설하였다.

[편집] 역사

금나라 건국 이전에 여진족들은 지금의 만주 헤이룽장 성에 거주하던 말갈족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표현은 10세기 여진족 언어의 "여진"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이 단어의 기원은 현재 학계에서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요나라의 지배(동단국)를 받았다. 하지만 요나라의 지배가 약화되면서(지리적 요건과 시간적 요건(오대 십국시대)) 여진족들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결국 여진족들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1115년 완안아골타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해 부족을 통합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금나라를 건국했다.

 

2대 태종 때인 1125년에는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를 멸망시켰다. 1126년에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자 이들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여진 군대는 장강까지 남하하였으나 회하 부근에서 저지되고 남송은 일단 국경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자 송나라 수도였던 허난 성카이펑을 공격하여 1127년에 송나라의 상황 휘종황제 흠종 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여진 부족들은 전쟁에 뛰어났으나 정착하여 수십 년을 지내게 되자 점차 스스로 유목 정체성을 잃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중국 한족과 혼인하기 시작하였으며 남송과의 평화를 공고히 하였다. 금나라의 지배자들은 유교 이념을 따르게 되었다.

 

1189년에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을 상대로 두개의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제8대 선종(재위 1213년 ~ 1223년)은 1214년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피하여 도성을 베이징에서 카이펑으로 옮겼다.

 

1234년 제9대 애종은 몽골, 남송 연합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함으로써 금은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다.

 

 

금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금 태조
(金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
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
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
(完顔阿骨打)
(아구다)
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1115년 ~ 1123년
제2대 금 태종
(金太宗)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功
哲惠仁聖文烈皇帝)
완안성(完顔晟) 천회(天會) 1123년 ~ 1135년 1123년 ~ 1135년
- 금 휘종
(金徽宗)
(금 희종 추숭)
경선황제
(景宣皇帝)
완안종준(完顔宗峻) - -
제3대 금 희종
(金熙宗)
(금 민종<金閔宗>)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
(무령황제<武靈皇帝>)
완안단(完顔亶) 천회(天會) 1035년 ~ 1037년
천권(天眷) 1038년 ~ 1040년
황통(皇統) 1041년 ~ 1049년
1035년 ~ 1049년
- 금 덕종
(金德宗)
(해릉왕 추숭)
헌고홍도문소무열
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
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완안종간(完顔宗幹) - -
제4대 - 폐황제
(廢皇帝)
(해릉양왕<海陵煬王>)
완안량(完顔亮)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1149년 ~ 1161년
- 금 예종
(金睿宗)
(금 세종 추숭)
입덕현인계성광운
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
文武簡肅皇帝)
완안종요(完顔宗堯) - -
제5대 금 세종
(金世宗)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완안옹(完顔雍)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1161년 ~ 1189년
- 금 현종
(金顯宗)
(금 장종 추숭)
체도홍인영문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睿德光孝皇帝)
완안윤공(完顔允恭) - -
제6대 금 장종
(金章宗)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완안경(完顔璟)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1년
태화(泰和) 1201년 ~ 1208년
1189년 ~ 1208년
제7대 - 무평황제
(武平皇帝)
(위소왕<衛紹王>)
완안윤제(完顔允濟) 대안(大安) 1209년 ~ 1211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녕(至寧) 1213년
1208년 ~ 1213년
제8대 금 선종
(金宣宗)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완안순(完顔珣)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1213년 ~ 1223년
제9대 금 애종
(金哀宗)
(금 의종<金義宗>)
순정황제
(順靖皇帝)
완안수서(完顔守緒)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1223년 ~ 1234년
제10대 - 말황제
(末皇帝)
완안승린(完顔承麟) 성창(盛昌) 1234년 1234년

 

청나라: 1616 - 1912

.

청나라(淸—)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 또는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은 일반적으로 중국이 여진족(만주족)의 지배를 받은 시기를 말한다.

 

원래 청나라는 1616년에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동북 지역에 건국한 이민족의 나라를 말하는데, 초기에는 금(흔히 “후금”이라 부름)이었다가 후에 세력을 강화하여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는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몽골 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이민족으로써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간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1]

[편집] 역사

[편집] 건국

1616년 만주족누르하치만주를 통일하고, 예전에 만주족의 다른 이름인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 후계자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順治帝)때 청의 팔기군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發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의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을 받았는데, 이들을 기선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2][3]

 

이 때 학살당한 인원수는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4] 이 주장이 완전히 맞다고 할 수는 없어도,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정복 초기에만 학살이 있었을 뿐, 이후에 체제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 하면서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된다.

[편집] 성장과 강건성세

만주족이 세운 청은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에 힘썼다.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초기까지 오삼계(吳三桂)등 3명의 번왕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청나라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이 있었으나 1683년 모두 진압되고, 대만도 청나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강희제(1661 ~ 1722)는 순치제가 사망하자 8세로 즉위한다. 15세때부터 친정을 시작하여 오배의 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복속함으로써 진정한 중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한다.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 외몽골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고 자신에게 반항하던 준가르의 군세를 크게 꺾어놓았다.

 

문화적으로는 한자 5만여자를 부수별, 획수별로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하였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대표적으로 아담샬을 들수있다.)들을 총애하였다.

 

강희제 치세에 이르러 광동 성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적장자 윤잉을 황태자로 세운 뒤 폐해가 일어나 윤잉을 두 번 황태자에 책봉하고 두 번 폐위하였으며 뒤이어 자식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여 말년에는 그리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는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이 있었다.

 

강희제가 사망하자 넷째 아들 옹정제 (1722 ~ 1735)가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형제의 난에서 승리하여 부황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청나라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옹정제는 세금을 단일화 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때 시작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것을 억누르는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옹정제는 하루 4시간밖에 자지않고 정무에 너무 몰두하다가 과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옹정제의 최후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1735 ~ 1795)는 몽골 제국을 제외한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완성하였다. 이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의 종주권를 확보 했다. 이 시기의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명나라의 인구가 6천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 경전과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청조는 이 편찬 사업을 한족 지식인을 감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청조통치에 문제가 있는 내용들은 폐기하였다. 또한 이러한 편찬사업은 금석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해외정벌과 계속되는 황실의 사치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비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게되어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건륭제의 총신(寵臣)이었던 화신(和神)의 전횡과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건륭제 말기에는 청나라 각지에서 백련교의 난(白蓮敎─亂)을 비롯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편집] 쇠퇴와 멸망

청나라의 반식민지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강희제 이후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더러는 직접 지배하고 더러는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불렸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백련(白蓮, 1796년-1804년),·천리(天理, 1813년)의 난을 계기로 청나라는 점차 쇠퇴로 기울었다.

 

한편, 영국1792년 매카트니를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세기무렵에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아편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려고 했으나, 청조는 이를 반대하여 아편 무역을 금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1840년-1842년)을 시작하여 승리하였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넘어갔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이 쇄도해옴으로써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이 휘청거렸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내면에서는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이 일어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제2차 아편 전쟁이후, 청나라는 휴전에 중재역할을 한 러시아 제국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지방을 할양해야만 하는 서구열강세력들로부터 이권 침탈이 더욱 심화되어갔다.

 

태평천국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과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앞세운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天京:태평천국이 난징을 고쳐 부른 이름)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洋務)은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의 주도하에 일어났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켜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정부의 감독을 받았기 때문에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1894년-1895년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은 일본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여 무술개혁(戊戌)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西太后)·이홍장 등 기존세력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과 그 수습을 위한 베이징 의정서(1901년)를 체결하며 청조는 쇠퇴해갔다. 또한 1904년-1905년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서태후는 유학생을 일본 등에 보내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에 대해 알아보게 했으며, 국내적으로도 낡은 과거 제도 대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최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은 신해혁명(1911년)으로 인해 1912년 멸망하였고, 위안스카이중화민국의 대총통으로 취임하면서 그 영토를 계승하였다. 그 이후, 1949년에 중국 본토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되고, 타이완 섬은 분리되어 중화민국이 된다.

[편집] 청나라의 경제

청나라 시대에는 외국 무역이 더욱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청은 18세기 초에 인두세(정은)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지은) 속에 포함시켜, 세금 제도를 단순화한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이 교역을 원하자, 청나라는 교역항을 광저우로 한정하여 서양 상인들을 통제하고, '공행'이라는 특허 상인의 조합에 대외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공행무역등으로 서양 상인들의 무역량이 적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청나라의 차와 생사는 유럽에서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과 청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한편, 이시기에 유럽의 상인들 중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가고있었을 무렵이었다.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무역 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양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된 영국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무역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매년 급격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수출양이 증가하자, 청나라는 국내의 아편중독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게 된다. 이무렵 청나라는 '은본위제'를 실시했었는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무역'으로 인해 은의 급격한 감소로 국가체제의 위기를 맞게된다. 1830년대에는 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하고, 그결과 은으로 세금 납부하던 농민들과 상인들은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외세 열강세력들의 침탈이 본격화 심화되면서 청나라의 경제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만 가게 된다.

 

청나라때에는 양자강 중류 지역이 최대의 쌀 재배 지역이 되고, 감자, 양파, 땅콩, 옥수수 등의 외래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상품 작물 재배와 함께 면, 제지, 제당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편집] 청나라의 문화

이 부분의 본문은 청대의 문화입니다.

비(非)한족 지배자인 청조는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코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熙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출물들이 건설되었다.

[편집] 종교

[편집] 기독교

[편집] 경교와 천주교

중국에서는 일찌기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중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였다. 조상제사문제는 1704년 조상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제사를 중국인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5]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가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을 입는 등 중국전통문화를 존중하였다.

 

파일:CIM in 1865.jpg
중국에 온 선교사들

[편집] 개신교

개신교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사람들과 똑같은 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영어: China Inland Mission,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영어: Overseas Miss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 [6]


[편집] 청나라의 행정구분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 성-부-주-현-청 (省 府 州 縣 廳)

[편집] 역대 황제

[편집]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건주여진 추장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 청 시조
(淸始祖)
(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포고리옹순
(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청 조조
(淸肇祖)
(청 태조 추숭)
원황제
(原皇帝)
애신각라맹특목
(愛新覺羅孟特穆)
1405년 ~ 1433년
- - 순황제
(順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충선
(愛新覺羅充善)
1433년 ~ 1467년
- - 흥황제
(興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탈라
(愛新覺羅脫羅)
1467년 ~ 1481년
- - 정황제
(正皇帝)
(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석보제편고
(愛新覺羅錫寶齊篇古)
1481년 ~ 1522년
- 청 흥조
(淸興祖)
(청 태조 추숭)
직황제
(直皇帝)
애신각라복만
(愛新覺羅福滿)
1522년 ~ 1542년
- 청 경조
(淸景祖)
(청 태조 추숭)
익황제
(翼皇帝)
애신각라각창안
(愛新覺羅覺昌安)
1542년 ~ 1571년
- 청 현조
(淸顯祖)
(청 태조 추숭)
선황제
(宣皇帝)
애신각라탑극세
(愛新覺羅塔克世)
1571년 ~ 1583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1583년 ~ 1616년

[편집] 후금(後金, 1616년 ~ 1636년)

후금 대칸과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
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
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

노이합적
(愛新覺羅努爾哈赤)
(누르하치)

천명(天命) 1616년 ~ 1626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

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천총(天聰) 1626년 ~ 1636년

[편집] 청(淸, 1636년 ~ 1912년)

청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
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
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

황태극
(愛新覺羅皇太極)
(홍타이지)

숭덕(崇德) 1636년 ~ 1643년
- 청 성종
(淸成宗)
(청 세조 추숭)
무덕수원광업정공
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
安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睿忠親王>)

애신각라

다이곤
(愛新覺羅多爾袞)
(도르곤)

- -
제3대 청 세조
(淸世祖)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
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
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애신각라

복림
(愛新覺羅福臨)

순치(順治) 1643년 ~ 1661년
제4대 청 성조
(淸聖祖)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
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
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애신각라

현엽
(愛新覺羅玄燁)

강희(康熙) 1661년 ~ 1722년
제5대 청 세종
(淸世宗)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
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
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애신각라

윤진
(愛新覺羅胤禛)

옹정(雍正) 1722년 ~ 1735년
제6대 청 고종
(淸高宗)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
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
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애신각라

홍력
(愛新覺羅弘曆)

건륭(乾隆) 1735년 ~ 1795년
제7대 청 인종
(淸仁宗)
수천흥운부화수유숭문경무
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애신각라

옹염
(愛新覺羅顒琰)

가경(嘉慶) 1795년 ~ 1820년
제8대 청 선종
(淸宣宗)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
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애신각라

민녕
(愛新覺羅旻寧)

도광(道光) 1820년 ~ 1850년
제9대 청 문종
(淸文宗)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
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애신각라

혁저
(愛新覺羅奕詝)

함풍(咸豊) 1850년 ~ 1861년
제10대 청 목종
(淸穆宗)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
성지성효신민공관명숙의황제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
聖智誠孝信敏恭寬明肅毅皇帝)

애신각라

재순
(愛新覺羅載淳)

동치(同治) 1861년 ~ 1875년
제11대 청 덕종
(淸德宗)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
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
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애신각라

재첨
(愛新覺羅載湉)

광서(光緖) 1875년 ~ 1908년
비정통 - 대아가
(大阿哥)
(대황자<大皇子>)

애신각라

부준
(愛新覺羅溥儁)

보경(保慶) 1899년
제12대 청 공종
(淸恭宗)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
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
(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
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말대황제<末代皇帝>,
손황제<遜皇帝>)

애신각라

부의
(愛新覺羅溥儀)
(푸이)

선통(宣統) 1908년 ~ 1912년

[편집] 참조

  1. 중국에게 있어 이 시기는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족에 의한 학살로 인구가 급감하기도 했었고, 피지배계층 한족들은 만주족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다 학살과 탄압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말기에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반대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2. 杜文凯 (1985年 6月版). 《清代西人见闻录》. 中国人民大学出版社(중국인민대학출판사), 53页(페이지)쪽
  3. 司徒琳 著 (1992年 12月版). 李荣庆等译《南明史》. 上海古籍出版社(상하이고적출판사), 131页(페이지)쪽
  4. 明熹宗实录 卷4 “明代中国人口,最后的全国官方统计,为5,165.5459人,时间为明光宗泰昌元年。”
  5. 《5시간만에 읽는 교회사》/유현덕 지음/작은 행복 p.181
  6. 한국 OMF홈페이지에 올라온 OMF역사 설명문

[편집] 같이 보기

중국의 역사
이전 시대 청나라 청나라
1616 ~ 1912
다음 시대
명나라 중화민국 중화민국
(베이징·난징 정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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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李成桂] >

생몰년 : 1335년(충숙왕 복위 4)~1408년(태종 8)

자 : 중결(仲潔), 군진(君晋)

호 : 송헌(松軒)

본 관 : 전주

고려 말의 장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왕. 재위 1392년~1398년.


등극 후의 이름은 단(旦). 이자춘(李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이자춘도 원나라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으며,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61년 11월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1월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장이 되어 적의 장수를 2명이나 사살하여 수도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웠다.


1380년 8월에는 왜구가 500척의 대선단으로 금강 어귀의 진포에 침입하여 남쪽 지방을 약탈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삼아 왜구 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이리하여 양군은 9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산 위의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이성계는 죽음을 각오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 격전이 벌어졌고, 마침내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 황산대첩으로 이후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고,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에도 이성계는 계속 무공을 세워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으며 마침내 1392년 7월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만년에 불교에 정진하여 덕안전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죽었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이고, 묘호는 태조이며, 능호는 건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다

 

 

................

<이자춘> 환조

 

환조(桓祖, 1315년~1361년)는 조선시대 추존왕이자 태조(太祖)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이름은 이자춘(李子春), 몽골식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편집] 생애

아버지 이춘(李椿)의 사후 형인 이자흥(李自興)마저 연이어 사망하자 어린 조카인 이교주(李咬住)를 대신하여 원나라천호(千戶)를 세습받아 재직하였고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세력(附元勢力)인 이복동생의 외척, 조씨(趙氏)가문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승진(쌍성총관부 만호 관리)하였으나 그뒤 원나라의 정책에 의하여 타격을 받게됨에 따라 점차 원나라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황실은 라마 교에 빠져 흥청망청거리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분열되고, 반란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때 대륙에서 원,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반원(反元)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은 동북면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연결되어 있는 친원사대파(親元事大派)인 기씨(奇氏)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자춘를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이자춘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하여 1355년, 고려에 투항하여 소부윤(少府尹)의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와 더불어 동북면을 협공하게 하여 쉽게 이 지역을 점령하여 원의 간섭기 이래 빼앗겼던 동북영토를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로써 그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가세하여 뿌리깊게 대립하였던 조씨세력을 제거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의 전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이 하사되었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개경에 머무른 지 1년 만에 그가 동북면으로 돌아가려하자 그곳의 토착기반을 이용하여 고려의 조정을 배반할 것임을 들어 그의 동북면 귀환을 대신들이 반대하였으나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하여 그는 다시 영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4년 뒤인 1361년에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문하시중에 증직되었고 조선 건국 후 아들인 태조에 의해 환왕(桓王)으로 추존되었다가 손자인 태종 때 다시금 환조(桓祖)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으로 추존되었다.

 

능(陵)은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한 정릉(定陵)으로 아내인 의혜왕후(懿惠王后)의 화릉(和陵)도 같은 묘역에 위치해 있다.

[편집] 가족 관계

  • 부 : 도조 이춘
  • 모 : 경순왕후 박씨
  • 왕비 : 의혜왕후 최씨(懿惠王后 崔氏)
    •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 정화공주(貞和公主) /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하가(下家)
  • 후궁 : 이씨(李氏)

 

<이춘 도조>

도조(度祖, ?~1342년)는 조선시대 추존왕이자 환조(桓祖)의 아버지, 태조(太祖)의 조부이다. 이름은 이춘(李椿)이며 아명은 선래(善來), 몽골식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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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원나라로부터 아버지인 이행리(李行里)의 천호(千戶) 관직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다.

 

처음에 박씨(朴氏)와 결혼하여 이자흥(李子興)과 이자춘(李子春)을 낳았으나, 얼마 후 박씨가 죽자 쌍성총관(雙城總管)의 딸인 조씨(趙氏)와 재혼하고 집을 의주에서 화주(和州, 함흥)로 옮겼다.

 

화주로 옮긴 것은 농업과 목축에 편리한 점도 있으나 후처인 조씨가 조휘(趙暉)의 손녀이므로 처가의 정치세력을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훗날 이자춘과 조씨의 소생들 사이에 후계자 쟁탈전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 손자인 태조에 의해 도왕(度王)으로 추봉되었다가 증손자인 태종 때 도조(度祖)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으로 재추봉되었다.

 

능(陵)은 함경남도 함흥시에 위치한 의릉(義陵)으로 아내인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朴氏)의 능(陵)인 순릉(純陵)은 함경남도 흥남시에 위치해 있다.

[편집] 설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설화에 의하면, 어느 날 도조의 꿈에 백룡이 나타나 "나의 거처를 빼앗으려 하는 흑룡을 몰아내 주십시오." 하며 부탁하였다.

 

 도조는 이를 예사 꿈으로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얼마 후 꿈에 다시 백룡이 나타나 "공은 어찌 내 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며 와야 할 날짜까지 제시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도조는 기일에 활과 화살을 들고 약속한 곳으로 갔는데, 그 곳의 못 위에서 백룡과 흑룡이 한참 싸우고 있었다. 도조가 활으로 흑룡을 쏘아 맞히니 흑룡은 못으로 떨어졌다.

 

뒤에 꿈을 꾸었는데, 백룡은 "장차 자손 중에 큰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1]

[편집] 가족 관계

  • 부 : 익조 이행리
  • 모 : 정숙왕후 최씨
  • 왕비 : 경순왕후 박씨
    • 완창대군(完昌大君) 이자흥(李子興), 이탑사불화(李塔思不花)
    • 환조대왕(桓祖大王) 이자춘 (李子春)
  • 계실 : 조씨(趙氏)
    • 완원대군(完原大君) 이자선(李子宣), 완자불화(完者不花)
    • 완천대군(完川大君) 이평(李平), 나해(那海)
    • 완성대군(完城大君) 이종(李宗)
    • 문혜공주(文惠公主) / 대장군(大將軍) 문인영(文仁永)에게 하가(下家)
    • 문숙공주(文淑公主) / 다루가치(達魯花赤) 김방괘(金方卦)에게 하가(下家)
    • 문의공주(文懿公主) / 허중(許重)에게 하가(下家)

 

<이행리 익조>

익조(翼祖, ?~?)는 조선시대 추존왕이자 도조(度祖)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조부, 태조(太祖)의 증조부이다. 이름은 이행리(李行里)이다.

[편집] 생애

1275년 아버지인 이안사(李安社)의 천호(千戶) 관직을 계승했다. 1290년 의주(宜州)로 이주하여 쌍성총관부 등지의 다루가치가 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 증손자인 태조에 의해 익왕(翼王)으로 추봉되었다가 고손자인 태종 때 익조(翼祖) 강혜성익대왕(康惠聖度大王)으로 재추봉되었다.

 

능(陵)은 함경남도 안변군에 위치한 지릉(智陵)으로 아내인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의 능(陵)인 숙릉(淑陵)은 함경남도 문천군에 위치해 있다.

[편집] 가족 가계

  • 후궁 : 정빈 김씨(定嬪 金氏)
    •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이안사 목조>

목조(穆祖, ?~1274년)는 조선시대 추존왕이자 익조(翼祖)의 아버지이다. 휘(諱)는 이안사(李安社)이다.

[편집] 생애

처음에 전주에 살았는데, 산성 별감(山城 別監)과 갈등을 빚고 삼척으로 이주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 산성 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 현재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는데,

 

1254년 원의 산길(散吉)이 항복을 몇 번씩 청해 오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洞)으로 이주하였으며,

 1255년 알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천호(千戶)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1274년 죽으니 아들 이행리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1392년 7월 28일 조선 태조에 의해 목왕(穆王)에 추봉되었다가 1411년 4월 22일 태종에 의해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에 재추봉되었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경남도 영광군에 있다.

[편집] 가족 관계

[편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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