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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시한마당

달과 구들장 외 9편 / 김동원

작성자유가형|작성시간26.06.05|조회수5 목록 댓글 0
달과 구들장 외  9편


김동원




난간 앞에는 꽃나무를 심으리라


그녀가 좋아한 백모란 흑모란을 심으리라


남향으로 난 기와집 앞엔 연못을 둘러 두리라


후원 뒤뜰엔 열 한 살에 간 형이 좋아한 매화 두 그루도


옮겨 놓으리라 겨울 아궁이에 불을 피우면 따뜻한 구들장 밑에


두 모자母子가 발을 넣고, 빙그레 웃으시는 아버지 바라보며


도란도란 옛이야기 들리는 대청을 두리라


툇마루를 밟고 밤마다 꿈속에 올라가 보름달 한 켠에


옛 고향 집을 다시 지어 드리리라


그믐달을 파고, 초승달을 놓고, 상현달을 건너


하현下弦을 지나, 봉황산 붉은 노을로


북창엔 당초 무늬 격자창을 내리라


서안書案엔 내가 지은 시집도 올려두리라


그리고 그리고 겨울이 오면, 수천만개의 흰 눈이 바닷물 속에


녹는 것을, 사랑하는 어미가 보게 하리라




천구天狗


  먹은 달을 뱉고 돌아 나오다 어둠 속 번진 그녀를, 잠깐, 스쳐보았습니다. 그 순간 번개 맞은 듯, 내 심장은 쿵쾅거렸습니다. 아아, 그 밤부터 그녀의 눈빛은 내 허공을 따라 돌았습니다. 왜 아픈 사랑은 시공이 휘어져 보일까요. 심연 속 사라진 알 수 없는 말들이, 내 절망을 휘감습니다. 백 년을, 천 년을, 만 년을 이렇게 돌아야 할까요. 사랑이 있기에 그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있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손으로 더듬는 외로움은 왜 이리 깊을까요. 그녀가 제 곁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둡고 어둡습니다. 사랑은 해를 삼킨 웅크린 천구天狗. 어긋난 우리는 어느 광년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아아, 허虛와 공空 사이, 내 사랑은 왜 이리 긴 이별일까요. 마음이 어디 있어, 이런 내 마음, 어두운 밤하늘 위에 그녀가 묶어두었을까요.




오십천




 어릴 적 난 홀어머니와 함께, 강가 백로 외발로 선 오십천 천변에 핀 복사꽃 꽃구경을 갔다 봄 버들 아래 은어 떼 흰 배를 뒤집고, 물결이 흔들려 뒤척이면 붉은 꽃개울이 생기던, 그 화사한 복사꽃을 처음 보았다 젊은 내 어머니처럼 향기도 곱던 그 복사꽃이 어찌나 좋던지, 그만 깜박 홀려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갓 서른이 넘은 어머닌 울고 계셨다 내 작은 손을 꼭 쥔 채, 부르르 부르르 떨고 계셨다 그 한낮의 막막한 꽃빛의 어지러움, 난 그 후로 꽃을 만지면 손에 확 불길이 붙는 착각이 왔다


  어느새 몸은 바뀌고, 그 옛날 쪽빛 하늘 위엔 흰구름덩이만 서서, 과수원 언덕을 내려다본다 새로 벙근 꽃가지 사이로 한껏 신나 뛰어다니는 저 애들과 아내를, 마치 꿈꾸듯 내려다본다




  *오십천은 청송 주왕산에서 발원해 영덕읍을 가로질러 강구항으로 흘러듬.




세월처歲月處




  좀 들어 보라 카이. 의미 그거 다 쓸데없는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이가. 바람 불면 꽃 쪽으로 달빛 나오면 댓잎으로, 간들간들 사운대다 가는 게 인생 아이가. 그래, 그기라니까. 말도 안 되는 기 말 되는 기라니까. 그래, 그래, 반쯤 술에 취해 그렇게 놀다 서산으로 번지는 기라. 한 백 년 서로 얽키고 설키고 뜯어먹다 가는 기라. 좀, 좀 들어 보라 카이. 안 보이는 거 보이도록 하는 기 시詩 아이가. 막히면 죽고 뚫리면 사는 거 연놈들 이치 아이가. 쓱 쓱 허공에 썼다가, 쓱 쓱 쓱 지우는 거, 그게, 오고 가는 세월처歲月處 아이가!




바다와 시니피앙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




작부酌婦




 술집 작부 치마폭에 쌓인 것 맨키로, 볼또그리 취한 강구항 밤 야경. 어판장 뒷골목마다 그 옛날 홍등에는 야화夜花가 피어 흥청망청했지. 속초로 울릉도로 고깃배 타다 뭍에 내리면, 낮부터 술판에 젓가락 장단에 홍도야를 불렀지. 작부 년 분 냄새에 불뚝불뚝 아랫도리 힘은 뻗쳐, 그 어부들 주장군主將軍 명태 대가리만 했네. 소주 막걸리에 떡이 되면, 영순 아버지 마누라 새끼들 까맣게 잊어먹고 곱사춤을 추었지. 연분홍 치마저고리 입은 작부 엉덩이는 얼마나 컸던지, 고랫등만 했네. 아니, 아니 밤바다 보름달만 했네. 그 겨울 폭설에 대구 명태 방어 잡아 번 돈, 구삥에 도리짓고땡에, 그년들 치마폭에 다 녹아들었지. 새벽 오줌 누러 나와 어둑어둑한 방파제 파도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면, 그때서야 동해에 밥 찾으러 나간 아비 기다리는, 올망졸망한 자식들 얼굴이 등댓불처럼 눈앞에 깜박깜박 비추는 거라.




처녀와 바다
―시간의 저편 너머에 묻힌 h에게




내 마음속엔 언제나 해당화 꽃처럼 붉게 멈춰 버린
처녀의 무덤이 산답니다
저 바닷가 물밑에 가라앉아
진주가 돼버린 처녀랍니다
처녀는 곱고 수줍고 아름다운 머릿결이 물풀 같았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운명처럼 만나
아침마다 해가 뜨기 전 금빛 물결이 일렁이는
바닷물 위 걸어서
해를 만지러 가곤 했습니다
해는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 같아
잡힐 듯 잡힐 듯 손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처녀는 그 겨울 바다 속 生이 잠기고
영원히 바닥에 잠겨서 물풀에 가려졌습니다
그 후 난, 문득문득 깊은 밤 혼자 잠에서 깨어나 웁니다
그토록 그리운 처녀는, 내 바다 위 어디에도 없고
백사장 흰 모래알 속에나 등대 불빛 밑으로
찾고 또 찾아 헤맸지만,
잃어버린 바닷길은 그대로 천 길 물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따금 처녀는 그 처녀는, 저 먼 시간의 저편 너머 수평선에서
붉은 해를 타고 올라와,
그 새벽 깨어나 우는 내 서러운 등을 두 손길로 따뜻이 어루만져 줍니다




시검詩劍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 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말귀


  매화 꽃잎은 천천히 허공을 여네. 말귀는 열어 두고, 찻잔 속에 향을 머금네. 대숲 바람이 눕는 사이, 부드럽게 모음이 구르네. 말은 오므라 드네, 아니, 벌어지네. 그래, 그래, 조여 지는 말의 체위. 달빛은 바람의 샅을 핥고 있네.


  구름은 또, 허공의 귓등 새로 말이 흐르네.


  색의 자음들이 올라타네. 홍紅, 홍紅, 홍紅, 베갯머리에선 색 쓰는 소리가 깊네. 노랑 말귀를 알아 듣는 노란 단풍. 산이 풀리고 노을이 닫히고, 사이사이 말귀가 트이네. 겨울 눈 내리고 봄꽃 피고, 돌아보니, 문득, 말들이 사라지고 없네.




이 시인 놈아




닥쳐요, 잊히면 좀 어때요.


진짜 시인이라면 구름에게 명령해요.


입금 좀 제때 하라고요.


집세가 없어요, 여보!


제발 노을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우리.


넷이서 밤마다 보름달만 뜯어먹을 순 없잖아요.


달무리라도 덮고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야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시인의 아내는 뭐예요.


그만, 그만, 내일 바람이 송금한다는


허황한 그딴 소린, 집어치워요. 제발!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이 시인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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