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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화의 이해

[비평]영화 비평 매그놀리아를 보고

작성자박상문|작성시간00.12.04|조회수862 목록 댓글 0
3시간 8분이라는 시간이 결코 아깝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던 영화였다. 사실 매그놀리아를 보고 나서 조금 충격을 먹었다. 이런 좋은 영화를 사람들이 마지막 장면만 기억할 것 같아 서운했다.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세 번은 더 봐야 어느 정도 감상 평을 쓸 수 있을 것이 라는 두근거림과 함께 항상 좋은 영화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혼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과 ....,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들었다.
우선은 무지 길다. 그리고 주연도 없다. 있다면 영화 자체가 주연이다. 그만큼 영화는 각자 인물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각자의 인물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처럼 보이지만 서로간에 실타래처럼 엮어져 있으며 로버트 알트만의 “쇼컷”처럼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의 이동진 기자는 나와 같은 느낌을 제2의 알트만 이라고 표현했다)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일치한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우연의 일치에서 나오듯이 그렇게 맞물리려고 해도 맞물리기는 어려울 정도로 어우러져 있다.
다큐적인 화면에 나레이션. 아주 황당한 세 사건을 나열하여 "우연"이라는 화두를 꺼내놓은 후 영화는 시작된다. 그래도 그 뒤에 비하면 시작은 준비 운동쯤이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종잡을 수 없이 몰아치며 등장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아들을 학교까지 바래다주며 오디션 운운하는 아버지, 출근길에 주차를 잘못해 가게의 쇼윈도를 부수는 사람, 여성을 확실히 사로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아침 조회를 혼자 앉아 듣는 경찰, 병상에 누운 사람과 그에 비해 젊은 아내, 그리고 간호인. 그나마 퀴즈 사회자 정도가 명확할 뿐, 영화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군상들을 쭉 펼쳐 보여 줄 뿐이다. 처음 몇 분간을 집중해서 보지 않는다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시작은 어지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그들이 방송사와 퀴즈쇼 프로그램에 관계된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들의 삶은 모두 불안하고, 그들을 둘러싼 가족들은 세상과 어긋나 있다. ― 퀴즈쇼 명 사회자는 딸과, 딸은 아버지와의 과거에 있던 일 때문에 세상과 담을 쌓고 타락의 길을 걷는다. (그 딸을 사랑하게 되는 경찰 역시 경찰서 안에서 "왕따"이며 끝내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총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가 하면 병을 앓고 있는 방송사 사장은 젊었을 적 내팽개쳐 아내의 죽음을 홀로 맞게 했던 아들을 그리워하고, (그렇듯 그가 전처를 버리고 새로 맞은 그의 젊은 아내는 그의 재산 때문에 그와 결혼했으나 그가 죽어 갈 무렵에야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음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그 아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여성을 성적으로 매혹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그의 당당함은 어쩐지 공허하다. 그리고 어린 시절 퀴즈 왕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는 그것에 얽매어 있고(또한 지식이 아니라 힘이 센 것 같은, 멋진 체격의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렇듯 그에게 과거의 지식은 현재의 보배가 아니라 그를 가두는 굴레일 뿐이다.) 지금의 퀴즈 왕 역시 아버지에게 휘둘림 당한다.

물론 그런 불안과 불화는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고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며, 불안은 마치 폭탄을 가득 실은 열차가 낭떠러지를 향해 가듯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불안은 오랜 시간 계속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편치 않은 마음은 기어코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빨리 결말을 보았으면 싶은 마음을 재촉한다. 그런 마음 위로 갑자기 "개구리비"가 내린다. 자동차 위로, 도로로, 유리창으로 내리는 그것은 차라리 안도를 준다. 하지만 그 "개구리비" 끝에 새로운 날을 맞는다. 병상에 누운 방송사 사장과 아들은 대면하여 화해하고 그는 행복한 죽음을 맞고, 과거의 퀴즈왕은 새삶을 위해 훔친 돈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으며 퀴즈 왕은 평안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경찰은 과거의 상처로 고통받는 퀴즈쇼 사회자의 딸을 사랑으로 포근히 감싼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불화와 불안들을 씻겨나가 화해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까짓 조금 징그럽더라도 개구리 비쯤 맞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사는 우연을 연속인 것일까? 영화는 끝끝내 의문하나를 남겨 두고 3시간 여의 길고 그리 즐겁지는 않지만, 지루하지 않은 여행에서 우리를 놓아준다.
그런데 영화 종반에 나오는 개구리 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의 종반부에서 비내리는(?) 거리를 운전하는 차의 운전석에서 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2~3초쯤 나온다. 그때 지나쳐 가는 거리 장면에 잘 보면 화면 좌 측(그러니까 길 좌 측 인도)에 버스 정류장이 나오고, (버스정류장처럼 투명 아크릴로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든 곳) 그 위에 광고가 하나 보인다. 첨엔 보이지 않던 이 광고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 밤이라 자체 조명이 내재된 광고판) “EXODUS 8:2”라는 글자를 보였다. 개인적으로 난 기독교인 인데 집에 와서 성경을 찾아보니 “출애굽기(Exodus) 8장 2절”이
"네가(모세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신이) 개구리로 너의 온 지경을 칠찌라"
라는 어구이다. 결국 본 감독은 기독교인이 분명하며, 영화 전체를 거쳐 흐르는 내용은 "사랑"과 "용서 혹은 화해"가 그 주제라는 결론이 나왔다.
수많은 주인공들... 특별한 주인공이 없음은 인간 개개인이 모두 자기 삶에 있어서 그 주인공임을 나타낸다고 본다. 직업도 없고 아무 남자랑 자며 습관적으로 마약을 흡입하는 그 젊은 여자분(쇼 사회자의 딸)이나 백만장자의 간병인 같은 경우, 실제 사회에서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본 영화는 그러한 사람 개개인의 삶조차도 어마어마한 무게와 나름대로의 배움의 과정을 지니고 있음을, 특별한 조연/주연의 구분을 폐지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영화제목인 “Magnolia”. 사전을 찾아보면 목련이라고 나온다.
이에 대해선 세 가지 조사를 해야 했는데
1. 맨 마지막의 개구리 우박은 역사적으로 실제 발생했던 사건으로 알고 있다. 그 사건이 벌어진 도시나 지명... (Magnolia라는 도시이름이 많으며, 미시시피 주의 닉네임이 매그놀리아라고도 한다)
2. 목련의 꽃말 내지는 기독교 혹은 여타 종교에서 목룐꽃이 갖는 의미
3. 목련은 꽃잎이 여러 개이지만 각각이 꽃잎들이 하나에서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그 맨 처음의 꽃잎이 “신”을 상징하고, 거기서 퍼져나가 각자의 방향으로 갈려져 나간 꽃잎들은 "인간"으로 보면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그리고 탐 크루즈가 나중에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간 장면... 이것은 저 아래 지적되었듯 역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탕아” 혹은 “신에게로 돌아가는 인간”을 의미함에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또한 주인공중에 “암”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은 모두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들이고, 그 때문에 후회하면서 죽어간다. 이들은 가정이 파괴된 집들이며, 또한 모두 암에 진다. 그와 대조적으로 간병인인 Phil이 탐 크루즈와 통화하기 위해 전화를 건 그 비디오 회사의 전화 받는 남성의 어머니는, 유방암에 걸렸지만 완쾌되었다고 수화기 너머로 말을 한다. 그 남성과 어머니는 대단히 가까운 관계인 것이 대화에서 나타나며,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중요성을 감독이 또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맨 마지막에 모든 등장인물들이 (심지어 죽어 가는 의식불명의 사람조차)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의 가사야말로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일텐데, 그 가사가 영어라는 것이다.
대강 보니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인생의 고통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It will never stop. It will never stop. It will never stop.”이러는 거 같던데 (앞에 부분은 자막보고 안 것) 그 “깨달음”이란 것이...동양적인 의미의 “깨달음”이어도 좋다고 본다.
물론 아니라면 그 감독 의도야 신의 사랑...어쩌고...겠지만 나로선 동양적 의미의 "깨달음" 우리가 왜 사는가에 대한 “깨달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 우리 삶에서 중시해야 할 것은 돈이 아니라 (얼 파트리지-죽어가는 백만장자-의 젊은 아내 Linda가 뒤늦게 깨달았듯) 사랑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는 점...
영화 자체에 대한 분석은 후세에 그 영화를 텍스트로서 활용할 때 분명 가치 있고, 또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이 영화가 “시민케인”처럼 절대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는 말에 도움이 되는 행위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 각본을 짠 사람이라면 과연 어디에 그 의미를 두고, 영화의 내용을 전개해나갈까. 영화의 줄기는 주제의식이다. 장면에 집착하는 영화는 예술영화로서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문체에 치중하는 소설은 차라리 시라고 부른다. 폴 토마스 앤더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 사소하고도 진부한 사랑의 테마를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가슴 저리게 만드는 주제의식이 분명한 사람이었지, 개구리 우박장면으로서 영화광을 감동시키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득 영화의 처음에 나온 몇몇 말들이 생각나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들, 오히려 필연일수는 있지 않을까. 그것들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인데도 필연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것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성경까지 뒤져 가는 것들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말한 우연에서 필연까지 로의 귀결을 이끄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도로의 광고판에서도 그 필연성을 찾아내는 나의 모습.
이 영화는 명인가의 인생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였다. 뒤죽박죽한 인생의 실타래를 동시에 보는 듯 했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고,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가야 인생을 배운다란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죽어 가는 할아버지가 침대에서 자기가 인생을 얼마나 잘못 살았나에 대해서 얘기하며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거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오열을 토하며 당부하던 대사. 절대 용서하지 못할 마음을 가지고 저주하면서도 그 모든 게 사랑이 있기에 저주도 있다 라는 것들을 알게 해주었고 동일한 시간.. 동일한 세대.. 다들 정말 다르게 살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각자의 아픔이 있다라는 것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그 누구도 아픔 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사실에 조금의 위안과 어떻게 죽든 인생은 한번뿐이라는 것... 그래서 3시간 8분이 나로서는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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