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회원으로 승진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제키까지 오르고 은퇴한 유명한 고니시키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일본에서 광고 스타로 변신하여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답니다.
선수 시절에 외국인 차별로 고생을 많이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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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키(小錦·35)의 선수 시절 별명은 ‘덤프 트럭’. 그는 2년 전 씨름판 생활을 마감하고 TV 대담프로 사회자와 일본 정부 친선대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TV광고 모델로 유명하다. 고니시키는 광고 속 모습을 통해 골치아픈 외국인에서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광고 모델로 탈바꿈했다.
스모협회의 완고한 원로들은 현역시절의 고니시키에게 스모 최고 영예인 요코즈나(橫綱)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외국인은 일본의 국민적 스포츠 스모의 최고 챔피언이 되기에는 ‘힌카쿠’(品格)가 결여돼 있다고 그를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하와이에서 성장해 82년 일본에 건너와 스모판에 뛰어든 고니시키의 품격을 의심하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일본인들은 그가 연기하는 광고모델을 좋아한다. 산에서 곰에게 쫓겨 내려오는 역할(위스키 광고), 힙합 춤을 추는 역(패션 디자인 업체), 꼭두각시 앵무새와 함께 나무에 앉아 노래부르며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역(또 다른 위스키 광고) 등 다양하다. 세키네 다쓰오(關根建男) CM종합연구소장은 “스모 선수 시절보다 열 배는 더 인기있다”고 말했다.
그런 고니시키도 92년에는 골치아픈 외국인이었다. 천황배(天皇賜杯)를 세 번째 손에 넣은 뒤 요코즈나 승격은 ‘떼어 논 당상’인 듯했다. 그러나 스모협회는 스모 3백 년 역사에 유례가 없던 외국인 요코즈나를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니시키는 협회의 인종차별을 소리 높여 비난했다. “내가 일본인이었다면 벌써 요코즈나에 올랐을 것이다.” 결국 1년 후 하와이 출신의 아케보노(曙)가 외국 태생으로는 최초로 요코즈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협회는 고니시키를 가장 일본적인 스포츠라는 스모의 상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97년 그가 은퇴할 때 협회는 그가 링 밖에서 선수명을 계속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선수명은 현역 선수들에게 그것을 부여하는 도장 소유다. 협회는 스모 선수들이 은퇴 후에도 유명 닉네임을 계속 사용토록 허용했지만 그에게만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연예인으로 새출발을 꿈꾸던 고니시키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협회는 희한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선수명을 계속 사용하되 로마字로만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고니시키는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제치고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태생 광고모델이 됐다. 지난해 5월 TV광고에 데뷔한 이래 인기조사에서 네 차례나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는 현재 산토리·유나이티드항공·하와이 관광청·유니덴전자·DDI 국제전화 서비스의 광고에 출연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스모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기억한다. 처음에 번번이 나가떨어지기만 하던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7백33승 4백98패라는 스모 사상 손꼽히는 기록을 쌓았다. 컴퓨터 컨설턴트인 한 팬은 “그에게는 승패를 떠나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니시키가 미국 프로 레슬러 출신으로 미네소타 주지사에 오른 제시 벤투라의 길을 따를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자선단체 모금행사에 종종 모습을 나타낸다. 또 문부성의 공익광고에 등장해 청소년들에게 학업을 권장하기도 한다.
세키자와 히데히코(關澤英彦) 박보당(博報堂)생활종합연구소장은 “인기의 여세를 몰아 일본 최초로 외국태생 의원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내다보았다. 고니시키의 대변인 우시지마 에이조는 그가 정계에 입문할 확률을 ‘사실상 제로’라고 보면서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스모 샅바 차림에 이어 핑크색 토끼 차림의 연기까지 무난히 해낸 것을 볼 때 감색 정장도 자연스럽게 어울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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