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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종(수필외)

명태냉면(문학저널 투고용)

작성자흰머리소년|작성시간26.06.07|조회수0 목록 댓글 0

명태 냉면(20260607 문학저널 투고용)

 

서울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았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한 하늘에 비나 눈이 온다는 예보도 없었다. 겨울 여행에 마냥 들뜬 우리는 안심했다. 누군가는 오늘 같은 날은 봄 소풍을 가도 되겠다고 말했다. 차 안에는 오랜만의 여행에 폭죽처럼 터지는 수다와 웃음이 넘쳤다. 목적지는 속초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명태 냉면 한 그릇 때문이었다.

냉면은 추운 겨울이 제맛이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냉면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속초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이라고 했다. 그 말 몇 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겨울 들판도, 멀리 보이는 산자락도 모두 평화로웠다. 그날의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냉면 한 그릇을 향해 들뜬 마음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거창한 목표보다 뜻밖의 사소한 일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그날 우리의 여행도 단순히 냉면 한 그릇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그 냉면 한 그릇이 몇 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을 줄은.

봄 소풍 같았던 날씨는 춘천을 지나자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바람과 함께 몰려오는 회색 구름이 산등성이를 덮었다. 뒤이어 눈송이 몇 개가 자동차의 앞 유리를 스쳤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겨울 여행길에 눈쯤이야 흔한 풍경이었다. 오히려 적당히 내리는 눈은 여행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제에 들어서자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바람은 산비탈을 타고 몰아쳤다.

용대리를 지날 무렵에는 앞차의 뒷모습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와이퍼는 쉼 없이 움직였지만 금세 쌓이는 눈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느새 차 안의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엔진 소리만 들렸다.

미시령 고개 초입에 들어서니 세상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눈은 하늘에서만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좌우 사방에서 덮쳐오는 것 같았다. 강풍이 눈송이를 휘몰아치며 차체를 흔들었다. 도로는 어느새 얼음판으로 변해 있었다. 타이어는 미끄러졌고 핸들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

그때 앞쪽에서 빨간 비상등이 번쩍였다.

승용차 한 대가 도로 옆 눈더미에 반쯤 처박혀 있었다. 잠시 후 반대편에서는 화물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미끄러져 비스듬히 멈춰 섰다. 앞차가 미끄러지는 순간, 우리 모두 숨을 삼켰다. 운전대를 잡은 현우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거 심상치 않은데.”

누군가 낮게 말했다.

말을 마친 순간 뒤따르던 차량이 미끄러지며 우리 쪽으로 밀려왔다. 차 안에서는 짧은 비명이 터졌다. 다행히 충돌 직전에 차량이 방향을 틀었지만, 모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차창 너머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눈보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조금만 잘못되면 오늘 여행은 추억이 아니라 사고 기사 한 줄로 끝날 수도 있었다.

잠시 후 현우가 입을 열었다.

“돌아갈까?”

그 말에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은 온통 흰색뿐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실수해도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차 안을 짓눌렀다.

그때 뒷좌석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명태 냉면은 먹고 가야지.”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웃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가 공포를 밀어냈다. 사람은 희망이 있을 때 버틴다. 우리의 희망은 거창하지 않았다. 속초의 명태 냉면 한 그릇이었다.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 상황에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방법도 없었다. 긴장과 공포 속에서도 머릿속에는 냉면이 떠올랐다.

얼음 동동 뜬 육수,

쫄깃한 면발,

담백한 명태살.

그 상상 하나가 우리를 버티게 했다.

몇 시간을 사투 끝에 우리는 마침내 미시령을 넘어 속초에 도착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살아서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승리감을 느꼈다.

이제 남은 것은 명태 냉면뿐이었다.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멈춰 섰다.

식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이 입구를 가리고 있었다. 주차장 한편에는 눈사람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고, 직원들은 삽을 들고 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우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오늘 쉬는 건 아니겠죠?”

직원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폭설 때문에 영업 못 합니다.”

순간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넘은 미시령.

머릿속으로 수십 번 먹었던 명태 냉면.

그 모든 기대가 단 한마디로 무너졌다.

‘영업 못 합니다.’

그 말은 마치 결승선을 통과한 직후 경기가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는 것만큼 허망하게 들렸다.

허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누군가 피식 웃기 시작했다.

이내 다른 사람도 웃었다.

곧 모두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너무 허망하면 사람은 웃게 된다. 그날 우리는 눈보라보다 허무함이 더 깊게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고픔은 현실이었다.

우리는 근처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허름한 국밥집 하나를 발견했다.

오래된 간판 아래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김이 얼굴을 감쌌다.

“많이 춥지요?”

주인 할머니의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곧 뚝배기 하나가 눈앞에 놓였다.

보글보글 끓는 국물.

김이 피어오르는 수육.

잘 익은 깍두기.

첫 숟가락을 떠먹는 순간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동시에 녹아내렸다. 긴장이 빠져나가며 온몸에 따뜻함이 번졌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문턱을 지나온 사람처럼 굳어 있던 얼굴들이 하나둘 풀어졌다.

국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날의 국밥은 우리를 현실로 되돌려 준 안도의 온기였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솔직히 냉면보다 맛있다.”

순간 가게 안에 또다시 웃음이 퍼졌다.

그날 우리를 살린 것은 명태 냉면이 아니라 뚝배기 속에서 보글보글 끓던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이었다.

명태 냉면은 결국 한 그릇의 음식이었다. 그러나 그 냉면을 찾아 나섰던 여정은 내 삶에 굵은 밑줄을 그어 놓은 사건이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날의 눈보라를 떠올린다. 결국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손에 넣은 결과보다 그곳까지 함께 걸어온 시간과 과정이라는 사실을.

또 다른 미시령이 내 앞에 나타나더라도 나는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품고 끝내 고개를 넘어갈 것이다. 속초의 명태 냉면 맛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눈보라 속에서 나누었던 웃음과 닫힌 식당 앞에서 허탈함, 그리고 뜨거운 국밥 한 그릇의 온기는 아직도 선명하다.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끝내 기억하는 것은 도착한 장소보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순간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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