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바다/김준한
미용실 문을 열면 부두의 어둠이 깨어난다
파마 2만 원, 70세 이상 무료,
유리문에 붙은 가격표 뒤로
제 무게를 삐걱이며 밀려오는 고물선들
검게 탄 풍랑 위로 그녀의 가위가 지나갈 때마다
세월의 물결에 접힌 추억들이
단골들 입에서 주저리주저리 풀린다
파도 따라 꼬불꼬불해진 머릿결도 제 물길을 찾는다
녹슨 프로펠러가 하루를 베어 먹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의 밀물과 썰물을 건너고
몇 척의 배를 무사히 돌려보낸다
담벼락 너머로 사라진 그림자를 따라
저녁 물때가 슬그머니 밀려오면
갑판 위에 파닥이던 피로는 가라앉고
거울마다 잔물결처럼 흔들리던 얼굴도 잠잠해진다
빗살에 걸린 노을 몇 가닥 풀어 내리는 동안
창문은 붉은 부표 하나 밝힌다
마지막 손님 떠난 의자 위 체온이 식어 가는 동안
그녀는 빗자루로 쓸어 모은 모래 같은 하루를
문밖에 내려놓는다
어둠이 항로를 접어 넣으면
벽시계도 닻을 내리고
손등에 밴 소금기가 달빛에 녹아내린다
내일도 그녀는 바다의 머리칼을 빗어
수평선 끝에 엉킨 근심을 잘라낼 것이다
멀리서 온 바람 부두에 묶고 돌아서는 길
골목 모서리에서 허기를 세운 고양이,
월척 한 마리 물고 담장을 넘는다
층수/김준한
현관문에 새겨진 숫자는 계급표다
아침이면 발아래층을 깔아 누르며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면 계단을 오르는 가쁜 숨소리 하나 없이
수직 상승하는 건 고층의 타고난 운명이다
하지만 승강기도 손끝 실수 한 번이면 수직하강
하기도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낮은 층의 불빛은 어둠보다 늦게 돌아와
새벽 첫차 보다 일찍 잠든다
가난은 아래로 갈수록 두꺼워지고
계단참에 쌓인 광고지들은 위로 갈수록 얇아진다
창문 밖 풍경값도 층수마다 다르게 매겨지는 것은 아닐까
하늘 가까이 오른 사람들은
허공에도 시세가 붙는다고 믿지는 않을까
누구의 등기부에도 이름을 올린 적 없는 하늘
같은 청구서는 저마다 다른 무게로 우편함에 꽂히지만
창문에 걸린 노을은 어느 층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새벽이 오면 가장 먼저 깨어나는 것은
아직 오를 층이 남은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강수확률/김준한
충돌한 승용차 두 대 때문에
직선이던 출근길이 찌그러진 채 갓길로 휘어졌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지 비가 오겠습니다.>
한 번도 젖은 허공을 건너본 적 없는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는 햇살처럼 환했다
텅 빈 조수석엔 낯선 풍경들이 앉았다가
차창 밖으로 흘러갔다
언제나 만남은 사고처럼 들이닥쳤고
이별은 늘 예보처럼 적중했다
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도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것은
예보가 빗나가기를 바래서였다
어차피 과거로부터 오늘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기억들을 막아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땅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지는 파편의 속도
그런 날은 온 생을 적셔 울부짖어도 좋았다
창문 하나 밝게 켜진 저녁,
아직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결별할 수없어 끝내 잠그지 못한 창틀 사이,
세월 저편으로 흘러가지 못한 슬픔이
오늘도 정확한 강수 확률로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