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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바다

작성자김준한|작성시간26.06.07|조회수12 목록 댓글 0

그녀의 바다/김준한 

 

미용실 문을 열면 부두의 어둠이 깨어난다

 

파마 2만 원, 70세 이상 무료,

유리문에 붙은 가격표 뒤로

제 무게를 삐걱이며 밀려오는 고물선들

 

검게 탄 풍랑 위로 그녀의 가위가 지나갈 때마다

세월의 물결에 접힌 추억들이

단골들 입에서 주저리주저리 풀린다

파도 따라 꼬불꼬불해진 머릿결도 제 물길을 찾는다

 

녹슨 프로펠러가 하루를 베어 먹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의 밀물과 썰물을 건너고

몇 척의 배를 무사히 돌려보낸다

 

담벼락 너머로 사라진 그림자를 따라

저녁 물때가 슬그머니 밀려오면

갑판 위에 파닥이던 피로는 가라앉고

거울마다 잔물결처럼 흔들리던 얼굴도 잠잠해진다

 

빗살에 걸린 노을 몇 가닥 풀어 내리는 동안

창문은 붉은 부표 하나 밝힌다

마지막 손님 떠난 의자 위 체온이 식어 가는 동안

그녀는 빗자루로 쓸어 모은 모래 같은 하루를

문밖에 내려놓는다

 

어둠이 항로를 접어 넣으면

벽시계도 닻을 내리고

손등에 밴 소금기가 달빛에 녹아내린다

 

내일도 그녀는 바다의 머리칼을 빗어

수평선 끝에 엉킨 근심을 잘라낼 것이다

 

멀리서 온 바람 부두에 묶고 돌아서는 길

골목 모서리에서 허기를 세운 고양이,

월척 한 마리 물고 담장을 넘는다

 

층수/김준한

 

현관문에 새겨진 숫자는 계급표다

 

아침이면 발아래층을 깔아 누르며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면 계단을 오르는 가쁜 숨소리 하나 없이

수직 상승하는 건 고층의 타고난 운명이다

 

하지만 승강기도 손끝 실수 한 번이면 수직하강

하기도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낮은 층의 불빛은 어둠보다 늦게 돌아와

새벽 첫차 보다 일찍 잠든다

가난은 아래로 갈수록 두꺼워지고

계단참에 쌓인 광고지들은 위로 갈수록 얇아진다

 

창문 밖 풍경값도 층수마다 다르게 매겨지는 것은 아닐까 

하늘 가까이 오른 사람들은 

허공에도 시세가 붙는다고 믿지는 않을까

 

누구의 등기부에도 이름을 올린 적 없는 하늘

 

같은 청구서는 저마다 다른 무게로 우편함에 꽂히지만

창문에 걸린 노을은 어느 층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새벽이 오면 가장 먼저 깨어나는 것은

아직 오를 층이 남은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강수확률/김준한

 

충돌한 승용차 두 대 때문에

직선이던 출근길이 찌그러진 채 갓길로 휘어졌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지 비가 오겠습니다.>

 

한 번도 젖은 허공을 건너본 적 없는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는 햇살처럼 환했다

텅 빈 조수석엔 낯선 풍경들이 앉았다가

차창 밖으로 흘러갔다

 

언제나 만남은 사고처럼 들이닥쳤고

이별은 늘 예보처럼 적중했다

 

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도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것은 

예보가 빗나가기를 바래서였다

 

어차피 과거로부터 오늘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기억들을 막아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땅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지는 파편의 속도

그런 날은 온 생을 적셔 울부짖어도 좋았다

 

창문 하나 밝게 켜진 저녁,

아직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결별할 수없어 끝내 잠그지 못한 창틀 사이,

 

세월 저편으로 흘러가지 못한 슬픔이

오늘도 정확한 강수 확률로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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