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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작성자김준한|작성시간26.06.07|조회수19 목록 댓글 0

지렁이/ 김준한

 

비 오는 밤이면

어둠의 세월 깊숙이 묻어둔 기억들이

꿈틀거리며 기어나왔다

 

끝났다고 믿었던 것들이

빗소리 처럼 선명하게 살아나

가슴 밑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비는 늘 그쳤지만

떠내려가지 못한 아쉬움은 내 안에 고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른 흙보다 먼저

슬픔이 비를 마중 나간다

 

끈/김준한 

 

수없이 묶었다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서툰 관심으로 너와 나 사이를 동여맸다

 

그러나 세월은

손에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풀었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약속들은

조금씩 느슨해졌다

묶기 위해 발버둥쳤던 사랑은 

사실 내가 세상에서 

풀려나가지 않기 위해 버틴 시간이었다

 

날카로운 오해의 가위는 

아무리 설명해도 뭉툭해지지 않아

오랜 시간 묶어 온 마음을

한순간에 잘라 버렸다

 

풀린 것은 다시 묶을 수 있었지만

잘린 것은 어디서부터 이어야 할까

 

답답하게 나를 옥죄던 인연은 내가 먼저 끊어버렸다

 

전단지/김준한

 

책이 되지 못한 내 인생,

 

기대어 쉴 뒷장도

너와의 시절을 그려볼 앞장도 없이

나는 세상에 찢겨 버려진 한 장의 종이였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어제를 품고

바람 많은 골목을 떠돌던,

인연이라는 벽에 닿기도 전에

번번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가벼운 종이 한 장

 

그러던 어느 날, 너는 내 가슴에 새겨진

잘잘한 문장들을 읽어 주었다

 

공연 장소와 일시를 외우는 대신

내가 태어난 날과 고향을 물어보았고,

 

나는 제품의 성능 대신

오랜 상처에도 찢기지 않고

버텨온 시간을 이야기했다

 

한 번쯤은 네 시선에 오래 머물고 싶었고,

한 번쯤은 네 마음의 벽에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삶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세월은 비에 젖은 벽지를 떼어내듯

우리 사이의 틈을 조금씩 벌려 놓았다

바람은 다정함보다 먼저 와

내 모서리를 헤지게 했다

 

네가 지나간 시절 어딘가에 나는 이제

희미한 글씨로 남아 있다

 

나를 증명하려 적어 놓은

수많은 문장이 번져버린 자리,

그 모든 것이 흐려진 뒤에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한 문장 한 줄

 

(당신이 내 공기였던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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