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김준한
비 오는 밤이면
어둠의 세월 깊숙이 묻어둔 기억들이
꿈틀거리며 기어나왔다
끝났다고 믿었던 것들이
빗소리 처럼 선명하게 살아나
가슴 밑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비는 늘 그쳤지만
떠내려가지 못한 아쉬움은 내 안에 고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른 흙보다 먼저
슬픔이 비를 마중 나간다
끈/김준한
수없이 묶었다
풀리지 않기를 바라며
서툰 관심으로 너와 나 사이를 동여맸다
그러나 세월은
손에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풀었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약속들은
조금씩 느슨해졌다
묶기 위해 발버둥쳤던 사랑은
사실 내가 세상에서
풀려나가지 않기 위해 버틴 시간이었다
날카로운 오해의 가위는
아무리 설명해도 뭉툭해지지 않아
오랜 시간 묶어 온 마음을
한순간에 잘라 버렸다
풀린 것은 다시 묶을 수 있었지만
잘린 것은 어디서부터 이어야 할까
답답하게 나를 옥죄던 인연은 내가 먼저 끊어버렸다
전단지/김준한
책이 되지 못한 내 인생,
기대어 쉴 뒷장도
너와의 시절을 그려볼 앞장도 없이
나는 세상에 찢겨 버려진 한 장의 종이였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어제를 품고
바람 많은 골목을 떠돌던,
인연이라는 벽에 닿기도 전에
번번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가벼운 종이 한 장
그러던 어느 날, 너는 내 가슴에 새겨진
잘잘한 문장들을 읽어 주었다
공연 장소와 일시를 외우는 대신
내가 태어난 날과 고향을 물어보았고,
나는 제품의 성능 대신
오랜 상처에도 찢기지 않고
버텨온 시간을 이야기했다
한 번쯤은 네 시선에 오래 머물고 싶었고,
한 번쯤은 네 마음의 벽에 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삶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세월은 비에 젖은 벽지를 떼어내듯
우리 사이의 틈을 조금씩 벌려 놓았다
바람은 다정함보다 먼저 와
내 모서리를 헤지게 했다
네가 지나간 시절 어딘가에 나는 이제
희미한 글씨로 남아 있다
나를 증명하려 적어 놓은
수많은 문장이 번져버린 자리,
그 모든 것이 흐려진 뒤에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한 문장 한 줄
(당신이 내 공기였던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