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받침/김준한
시작도 끝도 모르는 백지 위에 던져진 생
막막한 시간을 엮은 비뚤한 서체
남과 다르다는 비난은 아팠지만
남과 닮았다는 말은 자존심 상했다
답이 있다는 듯
누군가 먼저 눌러 남긴 자국 위를
한 줄씩 베껴 쓰는 사람들
칸을 벗어나면 틀렸다고,
여백을 남기면 게으르다고,
남의 문장을 삼킨 채 제 목소리인 양 내뱉는다
몇 장의 시절이 넘어가는 동안
종이는 빼곡해졌으나
정작 자신의 글씨는 몇 획 남지 않았다
깊이 눌린 아포리즘, 닳도록 외운 문장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명품이 되지 못한들 어떤가
시장통 한구석 허기진 속을 덥혀 주는
시래깃국 한 그릇이면 충분한 것을
누군가의 흉내로 살다가
짝퉁이 된 자신과 마주했을 때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남이 남긴 자국을 지우고
비뚤고 서툰 글씨일지라도
처음으로 제 문장을 써 내려간다
태어날 때는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울지만
남과 다른 결말로 마침표 찍는 이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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