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미국 뉴욕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여학생들의 축구 경기를 두어 번 봤는데 의외로 재미난 부분이 있었다.
동내 축구팀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뛰어봤자 얼마나 잘할까 싶었지만 얼핏 월드컵 경기를 보는 듯했다.
경기력이 비슷했다는 게 아니라 남미와 유럽계 아이들의 플레이에서 어떤 전형성이 보였던 것이다.
까무잡잡한 남미계 아이는 공을 거의 발에 붙여놓고 리드미칼하게 드리블했고,
동유럽계 백인 아이는 약간 뻣뻣해도 월등한 피지컬과 힘으로 밀어붙였다.
여자든 남자든 저렇게 타고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축구는, 월드컵은 여전히 유럽과 남미의 놀음이다.
역대 월드컵 4강 진축국 가운데 유럽과 남미에 속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 모로코, 미국뿐이다.
영국의 칼럼니스트 사이먼 쿠퍼와 스포츠 경제학자 스테판 지만스키는 공저 '사커노믹스'(2009)에서
각국의 축구 실력에 영향을 미치는 세가지 핵심요소로 인구와 국민 소득, 국제 경기 경험을 꼽았다.
이들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까지는 아프리카 국가 조만간 우러드컵에서 우승하리라는 예측이 유행했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인구는 늘고 있었지만 소득이 너무 낮아 양질의 축구 경험을 수입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던 탓이다.
쿠퍼와 지만스카는 3요소(인구.소득.경험)를 고려한 결과 일보노가 미국, 중국, 이라크가 아프리카보다 먼저
월드컵 챔피언에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17년 전에 한 예측인데 적중률이 많이 떨어진다 .
일본과 미국은 앞으로 실날같은 희망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중국과 이라크의 정상 등극은 여전히 어처구니없는 전망이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는 1998년 밀레니엄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같이 썼다.
'다행스럽게도 세계대전 이후 유럽 열강들은 평화를 지켜 왔다.
이제 유럽인들은 서로를 난도질하지 않고도 미워하는 방법을 발견한 듯하다.
이 기적은 축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축구는 전쟁의 대체물이다.
국가들이 경기장에서 싸우는 한, 사상자 수는 두손에 달린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에 머물 것이다.'
'이건 더 오랜된 28년 전의 글이라 더욱더 격세지감이 든다.
너무나 미운 상대와 하고픈 마음을 축구라는 모의 전쟁으로 억누른다는 것, 지금 세상과 비교하면 동화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지금은 다시 전쟁의 문턱이 낮아진 시대다.
아무리 못 참겠어도 전쟁만은 안 된다는 불문율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축구는 더 이상 전쟁의 대체물이 아니다.
진짜 전쟁과 축구라는 유사 전쟁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이다.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이란을 보자.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마국과 이란은 16강 티켓을 놓고 일전을 치렀는데, 미국이 이란을 1:0으로 꺾자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4년이 흘러 2026 북중미월드컵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회에 이란이 과연 참가할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출전이 안전상 부적절하다는 뜻을 내비치다가 며칠 전에는 '난 괜찮다. 그냥 뛰게 둬라'고 말했다.
이란이 경기하러 미국에 오는 것 자체도 긴장감 넘치는 일인데, 이란과 미국의 리턴매치가 벌어진다면 어떨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미국이 D조, 이란이 G조에서 각각 2위로 32강에 오를 경우 양 팀은 댈러스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있다.
그건 또 하나의 전쟁이다.
아마도 이란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라도 미국을 꺾기 위해 거의 목숨을 내놓고 뛸 게 분명하다. 천지우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