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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제 18장 천국 시민의 윤리관

작성자사랑의 종|작성시간19.11.07|조회수48 목록 댓글 0

마태복음 강해 제 18장 천국 시민의 윤리관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공생애의 행적을 다룬 ‘기사’와, 교훈의 말씀을 기록한 ‘강화’의 두 부분이 5회에 걸쳐 각각 반복된다. 또한 5대 강화의 주제는 ‘천국’이며 그 중에 본장은 천국의 시민으로서 명심해야 할 핵심 내용을 교훈하고 있다. 전장에서는 4번째 기사가 끝나고 이제 본장에서 4번째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각 강화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게 된 상황과 배경을 밝히고 있는데, 14-17장으로 이어지는 4번째 기사 중에 14-15장에서는 예수의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내용이 나오고, 16장은 메시야의 자기 공개, 17장은 변화 산에서 변형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교만한 상태가 계속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강화를 무리 없이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수난에 대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 때 심히 근심까지 했으나 결국 저들의 주요 관심사는 정치적 메시야 왕국이었고 그 왕국에서 부귀와 영달을 누리며 권세를 맛보고 싶은 개인적 야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천국의 제자 된 자들의 삶의 윤리와 방법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1.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 (18:1-14절)


본문은 유명한 어린아이 교훈으로서 천국 시민의 자격과 사명에 관한 감동 깊은 가르침이다. 첫 단락은 천국 시민의 자격, 두 번째는 천국에서 큰 자, 세 번째는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 네 번째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로 나타난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물은 때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이며, 베드로를 통하여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신 때이다. 성전세는 매년 아달월 15일에 한 번씩 내기 때문에 이 시기는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일 것이며, 예수는 그 다음 달 니산월 14일에 잡혀 15일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다.

마가나 누가에 따르면 이 질문은 변화 산에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는 도중에 발생한 것으로 마가는 노중에서 제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렸다고 전하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으나 제자들이 잠잠하고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다 아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 때에 한 제자가 묻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물은 것이다. 제자들이 자리다툼과 세속적 권력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이런 질문을 했는데 그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이사랴 빌립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여 예수께 칭찬을 받은 것과, 변화 산에 세 제자만 데리고 올라가서 영광스러운 주의 변화된 광휘를 목격했다는 사실과, 베드로만 성전세를 내고 다른 제자들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제자들의 반목을 야기시켰고 갈등을 유발한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 성전세에 대하여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이 제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상 임금이 그의 아들에게는 관세와 정세를 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유로 하늘 임금의 아들이신 예수 자신도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곁에서 들은 제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머지않아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그곳을 정복하실 것이며 따라서 자신들도 새 왕국에서 백성들을 통치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으며 이러한 기대에 따라 보이지 않는 갈등과 분쟁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새 왕국에서 누가 제일 큰 자인가 하는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제자들의 오해와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저 유명한 ‘어린 아이 교훈’을 하셨다. 이 교훈은 아이들을 위한 교훈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어른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시대나 예수 당시에만 하여도 어린 아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목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순진하고 착한 특성이 바로 천국 시민이 되는 자격이라고 하시면서 그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교훈을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가 큰가, 작은가.’ 하는 문제에 답하기 전에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유도하셨다. 제자들이 천국의 실상을 바로 알았더라면 서로 크기의 경쟁을 하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에 그들의 어리석은 질문은 곧 그들의 마음 속에 천국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첫걸음 곧 초보를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면서 ‘돌이키라.’고 하셨는데 ‘스트라페테’라는 이 말은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의미로 순간적이고 결정적인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한 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격적인 변화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 아이는 천진함이나 순결함, 착한 행동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이상형, 겸손의 이상형으로서의 의미이며 제자들처럼 사회적으로 출세하려거나 육신적 욕망의 노예가 되려는 것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본질상 연약하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부모의 품을 의지하며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만 살려고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아이들은 부모를 거역하거나 배반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천국의 시민들도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하며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만 살고자 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부끄러움 없이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하여도 의심이나 부정하지도 않으며 계산이 없고 비교함도 없이 순수하게 대하며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와 믿음을 본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천국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성품이나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는 예수께서 천국의 입성을 절대 불허하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신 것이다.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하는 문제에 관심하고 있으나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자격 문제를 지적하신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입국 거부라는 이 말씀은 제자들의 쓸데없는 논쟁을 단번에 종식시키고 말았다.

천국 입국자의 자격에 관한 가르침 곧 중생에 이르게 하는 도의 초보에 대한 가르침을 전제로 내세우신 후 이어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천국 시민의 진정한 위대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셨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반대의 방향에서 주어졌으며 이는 세속적 가치관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역설적 교훈이었다. 즉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인간이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자기를 나타내고 영웅시하는 자가 큰 자이지만 공의와 질서의 천국에서는 이런 자들이 더 큰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자기를 낮추고 자기 죄를 철저하게 자복하는 그런 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큰 자가 되는 것이다.


고난의 종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이 말씀은 단순한 의미의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멸시와 천대, 굴욕을 당하면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를 말하는 것이다.

*사53:3-6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따라서 천국 시민의 낮아짐이란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수모를 받고 멸시를 당하지만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복음을 위하여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는 예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 천국에서도 작은 자가 있고 큰 자가 있다는 것이다. 물로 세상 나라 같이 귀족과 천민의 구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 된 삶에 있어서 복음을 위하여, 예수를 위하여 고난과 모욕을 받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고 높임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에서 가장 큰 자’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어린 아이 같은 신자 하나를 영접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자에 대한 보상과, 반대로 어린 아이 같은 신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먼저,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한다.’는 것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예수의 모습을 닮아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예수의 제자 하나를 영접한다는 것으로 이는 그들이 현명하거나 힘이 있거나 부유해서 영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진 것이 없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천하고 못나도, 예수의 이름으로 온 까닭에, 예수의 진리와 계시를 전하기 때문에, 예수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영접을 받는 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영접하는 자는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영광과 광영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두 번째는, ‘예수를 믿는 소자 중에 하나를 실족하게 한다.’ 라는 것으로 ‘소자’는 비록 악에 저항하여 강력한 능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 할지라도 예수께 대하여 변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족’이라는 말 ‘스칸달리조’는 ‘함정에 빠지게 한다.’ 라는 뜻으로 자신이 가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과,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실족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과 순결한 마음과 신앙의 양심을 다쳐서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 또한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고 무시함으로 고난에 처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연자 맷돌’은 소나 말이나 나귀의 힘으로 큰 돌을 돌려서 곡식을 빻는 맷돌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여자들이 손으로 돌려서 곡식을 가루로 만드는 소형 맷돌이 아니라 대형 맷돌로서 그 무게가 그 무게가 몇 톤이나 되는데 이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은 당시 로마의 형벌 중 하나로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 라는 표현은 예수 믿는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예수를 거절한 것이므로 궁극적 재앙이 오기 전에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종말적 재앙을 맞이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이는 제자들이 서로 다툼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상황, 즉 서로를 실족하게 하면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므로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게 되고, 그 다음에 메시야 왕국이 서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모두 끝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주신 엄중한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엄한 경고의 말씀을 주신 다음에 세상에 내려질 재앙을 선포하셨다. 세상은 단순히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중립 지대라기보다는 신자끼리 실족하게 하는 투쟁의 사각지대로 보는 것이 옳다. 신자들은 불신자들의 핍박이나 박해에는 오히려 잘 견디는 면이 있지만 신자끼리 충돌하고 상처를 입혀 실족하게 할 때에는 큰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에 신앙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가장 엄중한 일이요 도저히 발생해서는 안 되는 죄악의 행동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죄악의 유혹이 있기 마련이고 자신이 범죄하고 남에게도 그 범죄를 전가시키는 일이 인간의 죄악된 근성 때문에 불가피하지만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은 화가 있다고 선언하셨다. 물론 이런 죄악들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고 의인들을 정화시키며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죄악의 원인 제공자는 그 죄 값을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화를 가져오게 한 사람은 그 책임을 면하거나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자들의 다툼에 대하여 엄히 책망하시고 경고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소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육체를 상해하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사실 손과 발은 유혹의 도구일 뿐이며 그 죄악의 실천적 기능에 불과하며 죄의 원인과 동기와 그 근원은 악한 생각이 나오는 곳 즉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따라서 예수께서 손이나 발을 찍어 내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악한 생각, 죄의 유혹의 본산인 썩은 마음을 잘라내라는 말씀이며, 죄에 대하여 철저하고 무자비함으로써 제자들이 성결한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의도는 우리 손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그 손을 잘라버릴 정도로 단호하게 회개하고, 발이 실족하게 하면 그 발을 찍어버릴 정도로 회개하며 만일 눈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그 눈을 빼어 버릴 정도로 회개하여 형제를 구원하라는 강하고 냉철하신 명령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불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지옥 불에 던져지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비록 미약하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을 받고 있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고 할지라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 이유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적 보호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서 비천하게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소중하며 존귀하며 하나님의 보배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문벌 좋고 권세가 당당한 자들보다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으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이는 소자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는다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 주신 것이다.

이러한 논지를 더욱 강조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길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초점은 잃어버린 영혼조차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누가 역시 길 잃은 양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는 단순히,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양의 실수로 길 잃은 양을 말하는 단어 ‘아폴뤼미’라는 동사가 사용된 반면에 본문은 속임을 받아, 고의적으로, 혹은 실족하여 곁길로 나가게 된 양임을 강조하는 말 ‘플라나오’ 동사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그 양은 절대로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실족한 양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며 그의 양심과 환경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그를 당신의 품으로 맞이하기를 지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하여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분이다. 이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애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설교자들은 본문의 길 잃은 양을 흔히 교회 생활을 하다가 외부의 유혹을 받아 떨어져 나간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제자들의 다툼으로 인한 예수의 교훈과 연관 지워서 생각할 때 이 양은 단순한 실족이 아니라 형제를 실족하게 한 사건 때문에 떨어져 나간 양임에 틀림이 없다.

‘만일 찾으면’ 이라는 말은 잃어버린 양 가운데에는 찾지 못할 양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로 잃어버린 양이 주신을 찾는 주인의 음성을 외면하고 끝끝내 제 고집대로 행동한다면 그 주인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찾는 양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 겸손히 주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양인 것이다. 이런 양에 대해서는 주인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찾고 찾으실 것이다.


비록 상처 받고 실족한 양일지라도 주인의 음성을 듣고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양을 주인은 우리 속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하였다. 물론 주인에게 있어서 모든 양이 다 귀하고 사랑스럽고 기쁨의 존재이지만 길 잃어버린 양이 더 불쌍해 보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인이 더 큰 배려와 관심을 보이시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최고의 가치는 바로 그 자리에 참예하는 성도들이다. 따라서 잠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난 성도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교훈의 결론은 소자들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짓게 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라는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툼을 일으킨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교훈은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을 금하라는 것이다. 허영과 교만과 외식을 추구하기 위하여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일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자 된 자들이 취할 행동은 아닌 것이다.


2. 범죄 한 형제에 대한 조치 (18:15-20절)


앞 단락은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제자 된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불신자 전도와 범죄자에 대한 권면 시역에 늘 힘써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어디가지나 불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속에는 불신자, 방황하는 자, 범죄자들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죄악 된 요소에 대한 단호한 징계가 필요하다. 이 징계의 문제에 대해서 죄를 범한 형제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3단계 진지한 권면이 선행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죄는 하나님께 대한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죄가 아니라 신자 상호간에 발생하는 도덕적 범죄를 가리킨다. 우리 성경에는 ‘네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데 어떤 사본들에는 ‘네 형제가 네게 대해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어 ‘네게’라는 말과 이어서 나오는 문장 즉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라는 말과 연결해 보면 이 죄는 다른 형제를 멸시하여 실족시키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한 제 1단계의 작업으로서 죄 지은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동시에 가능한 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권고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꾸짖다’라는 말이 아니라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과 확신을 주다.’라는 말로 죄에 대한 심판이나 책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이 죄인가.’하는 설명을 바로 해 주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여 그 형제의 잘못을 개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단하거나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다시 참 형제로 얻기 위함이다. 이것은 죄를 지은 형제와 피해를 당한 형제의 첫 화해 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실족하게 한 형제와 피해를 입은 형제가 개인적으로 만나 권면을 듣는 경우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실족한 사람이 순수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권고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혜와 조심성과 자기 부정을 할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그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지한 노력을 통하여 형제와 친교하며 그를 주의 제자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일 것이다.

실족한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한 제 2단계의 시도는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는 것으로 신명기의 말씀이 그 배경을 이룬다.

*신19:15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증할 것이며..


이렇게 하는 것은 제 1단계의 약점인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편협한 주장을 일소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법적인 처리의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성도가 두세 명이 함께 나가서 문제가 되었던 발언이나 사건의 구체적인 행위, 갈등을 유발시킨 내용에 대하여 권면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실족시킨 당사자끼리 만나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형제의 고충이나 아픔을 서로 나누면서 대화의 장을 열어간다면 오해했던 부분이나 갈등의 소지를 다소나마 이해하고 화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도 정죄가 아니라 권면이며 공개적인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족한 형제를 잃지 않는 3번째 단계로 이 문제를 교회에 제출하고 교회가 공식적으로 개입하여 범죄 한 그 형제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두세 사람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듣거나 무시하고 신중하지 않거나 오히려 그 말을 비판하고 반박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럴 때 마지막 조치로서 교회가 연합된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교회가 태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도래할 교회 즉 하나님 나라요 진리 전수의 터전이요, 신앙인들의 성결한 교제의 장소며, 신앙 훈련의 성숙한 도장인 교회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가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고 하셨는데 이는 유대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으로서 유대의 회당이나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교인들이 범죄 한 형제에게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의 징계를 넘어 사회적인 책벌까지 가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세 번에 걸친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교인과 교회는 더 이상의 친교와 교류를 금하고 접촉을 피하라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로부터 소외’라는 압력을 가함으로써 그에게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고 돌아오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절대권은 물론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러나 이 권리는 늘 사람을 통해서 행사되는데 그 권한을 맡은 자가 16장에는 베드로와 12제자들에게 있다 하셨고, 지금은 모든 신자에게 공동으로 부여하신 것이다. 18절에 ‘너희는’ 전 교회를 의미하며 이 권한 역시 전 교회에 주신 것이다. 주께서 ‘매면’ ‘풀면’ 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서 랍비들이 행동의 규율을 부과할 때 쓰는 말이다. 규율을 엄격하게 할 때는 ‘맨다.’고 했고 규율에 상당한 자유를 부과할 때는 그 얽매임에서 푼다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말을 인용하여 실족한 형제를 위하여 두세 사람이 권면하거나 교회가 권면할 때에 하늘에서 주께서도 이 일에 동참하신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만약 교회가 형제를 설득하고 이해시켜 공동체 속에 들어오게 한다면 주님도 그렇게 하도록 도우실 것이며, 반대로 그 형제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길 경우에 주님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한다.’ 라는 말은 신자끼리 합심하거나 친교하는 최소한의 단위가 두 사람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 두 사람에 대하여 상대를 실족하게 한 사람과 실족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실족하게 한 형제를 돌이키려는 두 사람의 신자로 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조화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완전한 일치를 이룬 공동체에게 각 개인에게 임하신 것과 같이 임하시는 것이다. 즉 이 땅에서 겸손한 두 영혼의 일치된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시고 교회가 지닌 특권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고 하심으로 두 사람의 일치된 합심의 기도는 범죄한 형제의 내용에 관해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합심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이름으로 모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기를 소원하는 사람,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나가 되어 서로 연합하기를 열망하는 사람, 예수를 자신의 신앙의 궁극적 대상으로 삼기를 원하는 자들이 모이는 그곳에는 주님도 그들 중에 항상 계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을 서로 나누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예수를 찬양하며 높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막론하고 예수께서 임재하시겠다는 약속이다.


3. 끝없는 용서 (18:21-35절)


첫 단락은 형제를 실족시키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고, 두 번째 단락은 실족시킨 형제는 신중하게, 과감히 징계해야 하는 불가피성도 교훈하신 예수께서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겨진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개인적 차원에서 용서, 공동체 차원의 용서를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가 권징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후 용서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병자를 치유하시고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고, 자신을 배척하고 거절한 단 한 사람에 대해서도 징계를 하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자에 대한 단호한 징계에 대한 일말의 의아심이 생긴 지도 모른다. 그 의아심은 범죄한 사람이 권면을 받고 용서를 구한 후에 다시 죄를 지으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용서의 문제로 발전되었고 이제 그 용서의 문제를 끄집어 낸 것이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에 부응하고자 나름대로 일곱 번이라는 열정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하시고 끝없는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 이 가르침은 주께서 범죄한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얼마나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성도의 의무는 죄인을 권면하는 일과, 죄인을 용서하는 이 양자를 조화시켜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누가는 회개가 용서의 전제라고 주장한다.


*눅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용서의 최종 숫자가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는데 비하여 본문은 용서의 전제가 결코 회개가 아니며 일곱이라는 숫자도 단번에 부정되었다. 마태의 용서의 법은 누가의 법보다 극히 관대하고 너그러운데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잃지 않기 위하여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용서’라는 말 ‘아페소’는 범죄한 형제가 회개를 하든지 자백을 하든지 상관없이 즉시 모든 악을 용서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제안은 극히 관대한 조치로 율법적 용서를 넘어서는 거룩한 용서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가르침이나 베드로의 제안을 거부하시고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로 용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에 새 지평을 여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숫자상의 어떤 기준이나 실제적 용서의 범위를 초월한 끝없는 용서, 무제한적인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다.

일곱은 완전수이나 단수이며 이를 복수로 볼 때는 칠십칠 배라 하였는데 가인의 후손 라멕이 말하기를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약적 복수의 한계 규정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70번씩 일곱 번까지 가는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비유로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이 비유는 13장의 천국의 비유와 유사하며 동시에 25장 이후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예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세상의 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천국의 법에 따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의 은총을 받은 그 나라 백성들은 무한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형제의 작은 허물은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종들은 단순한 노예나 천민들이 아니라 임금에게 빚진 돈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신하들 즉 왕의 영토 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 수입을 왕에게 상납하는 지방 장관이나 봉건 영주들이었다. 이 종들을 영적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권리를 위임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임금은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신하는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였다.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중 가장 큰 단위가 달란트인데 무게 단위로는 한 달란트는 순금34kg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의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6,000배에 해당하며 현재 우리니라 노동자의 임금으로 환산하면 200,000원×6,000〓12억 원이며, 한 달란트가 12억 원이면 일만 달란트는 12조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당시 유대 전역에서 걷히는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라고 하니 그 가치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 액수는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 ‘죄’라는 말이 ‘오페이레마’인데 본문에 나오는 ‘빚진 자’라는 말은 ‘오페이레테스’로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상 ‘죄’와 ‘부채’는 차이점이 있고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첫째, 죄와 부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1) 죄는 한 번 지으면 영원히 죄로 남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2) 자신이 지은 죄를 다른 이에게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갚아줄 수 있다.

3) 죄는 쌍방 간에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 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둘째, 죄와 부채의 유사점은 무엇인가.

1)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2) 죄나 부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3) 죄나 부채는 모두 면죄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하거나 탕감해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 수 없다. 그것은 채권자의 특권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역시 우리의 죄를 취소하거나 용서하실 수 있는 것이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탕감해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는 일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적으로 개입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천국에 비유된 임금은 한 해가 저물면 그 종들과 반드시 결산했는데 어떤 신하 한 사람이 임금에게 큰 빚을 졌으나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빚을 조사하는 관리에게 적발되어 임금에게 끌려오게 되었다. 이는 영적으로 해석하면 종말의 때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하지 않고 감추어 둔 죄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을 예시하는 것이다.

임금은 갚을 것이 없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명령하기를 그 자신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을 갚게 하였는데 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노예의 몸값은 약 한 달란트였고 대부분의 노예들은 이 가격의 1/10에 해당하는 금액에 팔려나갔다. 가족을 팔거나 노예를 파는 일은 그 당시 일반적인 사회법이었다. 임금의 이러한 명령은 그 종에게 막중한 짐을 지우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임금에게 적극적으로 탄원하게 하는 은총이요 배려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지비할 정도의 요구 조건을 제시한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임금에게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인간의 영적 파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은 전적 무능이요, 절대 무능한 자라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구원의 은총을 간구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예시하는 것이다.


죄인에 대해 자비로운 성품으로 대하시는 임금의 관용함을 잘 아는 종은 임금 앞에 엎드리어 절하며 탄원을 올렸다. ‘절했다.’는 말 ‘프로스퀴네이’는 상대방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켜 존귀를 표하는 예법으로 이를 하나님께 적용하면 ‘예배와 경배’로 볼 수 있다. 종은 단순히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절하는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상대방에게 연민의 정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빚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종은 임금에게 요청하기를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채무 변재 조건을 제의했는데 이 채무자는 임금에게 빚을 갚을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했지만 실상은 어떤 가능성이 있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임금의 노여움과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자는 얕은 술책을 부린 것이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면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실상은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며,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자 임기응변으로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이 말은 전혀 진실성이 없다는 것을 임금은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은 종이 마음에도 없는 허황된 말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종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겨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것은 그를 불쌍히 여겨 내어보내며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준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시혜는 종의 탄원이 진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원과 해방은 자신의 선행 여부나 기도의 결과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 곧 긍휼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성도가 통회하고 자복하고 부르짖어 기도한 결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의 은총에 기인한 것이다.

임금은 종이 간구한 것 즉 시간적인 여유를 달라고 한 것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부채에 대한 완전한 탕감을 약속하신 것이다. 여기서 ‘빚’이라는 말 ‘다네이온’은 횡령한 금액이 아니라 형편이 나빠서 생긴 부채라는 의미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는 임금이 그 종에 대하여 상당히 자비로운 판결을 내린 것으로, 만약 부채를 횡령으로 간주했다면 그 죄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막중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부채에 대한 인식이 가난하고 고달픈 삶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긴 것이라면 이를 용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탕감했다.’라는 말 ‘아피에미’는 일반적으로 빚을 면제했다는 정도의 말보다는 그 정도를 훨씬 더 넘는 말이다. 이 말은 사람들끼리 돈을 빌려주고 되돌려 받는 행위에 대해 선처를 베풀고 그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끼리 면제해 준 사실은 그 마음에는 영원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탕감했다.’고 하는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완벽한 사죄의 은총을 예시하는 말로 영원한 도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임금의 이러한 행위는 석방과 사죄의 두 가지 법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죄인에 대해 하나님은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서 행방시켜주실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아무런 보상이 없이도 그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임금의 명령은 단 한 번의 명령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이와 같이 죄인에 대한 사죄의 은총도 하나님의 단 한 번의 말씀으로 가능한 것이다.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빚을 완전히 탕감 받은 그 종에게서 일어났다. 임금에게 큰 은총을 받고 그 앞에서 물러난 종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자신이 용서받은 감격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섭리이며 목적이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서 붙들고 목을 잡고 빚을 갚도록 독촉을 한 것이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데 한 달란트의 1/6000에 해당하므로 1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에 비해 1/600,00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참으로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미미한 소액이었다.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노동자 1일 임금을 100,000원으로 계산할 때 10,000,000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러한 비유는 1만 달란트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1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에게, 자기의 동료에게 지은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동료 한 사람’이라는 말은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 동료 관계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직장 동료이며 매일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런 친구를 붙들어 목을 잡았는데 이를 직역하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는 말로 얼마 인 되는 금액을 빚진 친구에게 난폭하고 매정하게 대하며 거만하게 굴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임금에게는 엎드려 절하면서 자비를 구했으나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악한 속성을 가진 자였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채권자는 채무자의 목을 잡고 법정에 끌고 갈 수 있었는데 이는 상대에게 극한 모욕감을 주며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려는 것이다. 그는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칼날 같은 강요를 했는데 이것은 임금이 그 자신에게 베풀었던 회계의 기회를 그는 자신의 채무자에게 전혀 부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조금도 자비를 베풀거나 인정을 베풀지 않고 무조적적으로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기를 자신이 임금에게 했던 말과 같은 말로 자비를 구하였다.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이 말은 종이 임금에게 했던 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간청이었다. 그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부채를 다 갚겠다고 했지만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이기 때문이다. 동료의 호소는 그 종으로 하여금 조금 전의 자신의 처지를 기억시키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친구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채무자가 계속적으로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채권자는 용서하기를 싫어하여 계속해서 거절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탕감해준 임금에 비해 그 마음이 얼마나 딱딱하고 완고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큰 양보도 쉽게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없을 때는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외면하게 되고, 눈물 젖은 호소 앞에도 냉정하게 되는 것이다.


임금은 그를 방면하였으나 그는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자기 손으로 친구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자신은 임금에게 지불 기간의 연장을 요청했지만 자신은 친구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를 구속시켜 버렸다고 하는 것은 그가 냉혹한 사람이라는 것과 사랑을 받았지만 사랑을 주지 못하는 참 사랑을 모독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동료들이 이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겼는데 이 말은 ‘마음이 아팠다.’ ‘슬퍼했다.’라는 말로 옥에 갇힌 사람에 대해 슬퍼하고 근심하는 모습이다. 채무자에게 가해진 형벌이 지나치게 무거운 것을 느끼고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게 된다. ‘알리니’라는 말은 단순히 통보했다는 뜻이 아니라 불의한 사실을 상세히 고하고 그 신원을 요구했다는 말이며 무자비한 채권자의 죄악을 고발했다는 것이다.

임금은 다시 종을 호출했는데 처음의 부름이 회계의 호출이었다면 두 번째의 부름은 정죄와 심판의 호출이었다. 실로 이 지상의 모든 불의한 자, 형제 사랑을 외면한 자들은 언젠가는 이 두 번째의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부름의 후에는 영원한 투옥과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임금은 다시 끌려 나온 종에게 ‘악한 종아’ 라고 불렀다. ‘악하다.’라는 이 말은 이미 유죄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 한 마디 말에 의해 전에 그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특사와 은전은 모두 상실되고 말았다. 그는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임금은 종에게 말하기를 ‘네가 빌었다.’고 했는데 임금이 용서해 준 것은 빚진 자의 간청 때문이 아니라 임금의 무자비한 자비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단수를 사용하여 한 번 빌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 한 번의 간청으로 그를 불쌍히 여겼는데 이를 영적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께 받은 첫 번째 자비는 두 번째 자비 즉 사람들에게 행해질 자비를 촉구하기 위한 근거와 요인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자비는 은혜와 감사의 정도가 엄청난 것으로 앞으로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 번째 자비를 행하는 자에게는 당연한 의무이자 도리인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자비를 베푸는 것은 마땅한 일인 것이며 마땅한 일을 행하였을 경우 그것은 칭찬의 대상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임금은 이에 대해 노했는데 ‘노하다’라는 말은 ‘자극을 받아 격분하다.’ 라는 뜻으로 불의하고 매정한 동료의 처신이 임금의 감정을 크게 훼손시킬 정도로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형제에게 그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것이며 형제 사랑과 용서와 화해를 잊은 영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격렬한 노여움으로 그에게 갚으실 것이다. 그 결과 그 종은 임금에게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 형벌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종신형인 무기 징역이 선고된 것이다. 악한 종이라고 하는 유죄 선고에 이어 그에게 마땅한 형량이 선고된 것이다.


이는 영원토록 불타고 있는 지옥의 형벌을 상징한다. 임금의 이러한 선고는 그 자신이 진 빚에 대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동료의 죄를 탕감해 주지 않은데 대한 형벌이었다. 자신은 부채를 탕감 받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사랑이 없는 자는 받은 사랑을 등한시 하는 모욕으로 간주되어 끝 날의 심판 때에 극한 형벌을 선고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탕감 받은 악한 종의 비유’의 결론적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너희 큰 죄를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용서를 하되 중심으로 곧 말과 행동과 마음이 일치된 용서를 하라고 하셨다. 이 중심으로 한 용서는 훗날의 회상이나 보복이 있을 수 없으며 상한 감정조차 가지지 않는 실제적이고 무한대의 용서이다. 실로 용서의 회수는 무한대이며 용서의 질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형제끼리 화목하지 못하고 단절을 일삼는 자에게는 극렬한 분노와 진노를 내리시고 저희의 허물을 도저히 용서하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말씀인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자마다 영원한 형벌에 처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약2: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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