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로의 선택 (겔33:10-16절)
생명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생명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큰 의미가,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사느냐, 못 사느냐, 건강 하느냐, 병들었느냐, 혹은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를 묻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도 자랍니다. 스스로 가꾸어야 자라납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진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혼탁한 도시 공기 속에서도 자기 아름다움을 하루하루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큰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자란다는 것은 특별한 것입니다. 자라남은 그 안에 생명력이 있음을 뜻합니다. 죽거나 병들어 있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이 자라나면 당연히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기만의 향기, 너그러움과 따뜻함, 지성, 겸손, 인내, 절제, 용기, 넉넉함이 아름다움이 자라나 맺는 열매들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근거를 그 모양이나 가치에 두려고 합니다마는 사실 알고 보면 살아 있다는 것만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생명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생명일지라도 살아 있기에 그것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또한 살아있는 것은 생명을 생산합니다. 죽음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생산하고 생명에로 연계합니다. 생명은 보탬을 줍니다. 생명의 향상을 가져다줍니다. 나아가 생명은 가치를 창출합니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가 생명에 근거합니다. 생명은 그 생명을 지키며 그 생명을 연장하며 또 다른 생명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늘 생명으로 지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사는 것을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악인일지라도 악에서 떠나 생명의 길에 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악인이 악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에서의 절망으로 이제 회복과 구원에 대한 희망은 없다고 믿는 유대인들, 회개하면 산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불신앙에 빠진 유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고 질책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살고자 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데요. 이렇게 간절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우리에게 '죽고자 하느냐.' 고 하신 말씀은 당치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 여기에 귀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생명에는 필연적인 면과 선택적인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의 마음대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 역시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욥은 고백하였습니다. 이렇듯 생명에는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 같은 필연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에의 선택적인 면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나의 말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생명의 길을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신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이렇듯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선택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살고 싶다면서 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의 길에 서 있기 때문이요 죽음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생명은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모든 생존하는 생명체가 그렇듯이 사람도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음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앞에 음식을 두고도 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이는 필시 죽기를 각오한 사람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먹지 않습니다.
이렇듯 생명은 하나님께 있지만 먹어야 사느니 만큼 그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려고 하면 잘 먹어야 하고 또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미련한 일이 있습니다. 살기를 바라면서도 음식을 살도록 먹지 않고 죽도록 먹습니다.
음식에 대한 욕심이 과해서 배터지게 먹어놓고 소화제를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미련한 일입니다만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살자고 먹는 음식이니 즐겁게, 맛있게, 적당하게 먹어야 하는데 끝장을 보는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식탐하는 자들입니다.
위장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의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 세계인들 가운데 오직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만 있는 병이 하나 있는데 그 병명이 '위하수' 라고 합니다.
'위하수'란 위가 무기력해지는 병입니다. 서양의 의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위 수술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농담처럼 한답니다. '언젠가 한 번 위 수술을 하는데 배를 개복했더니 위가 없더라.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위가 장 밑에 들어가 있더라.' 무슨 말이냐 하면 위가 제 위치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기력해져서 축 늘어져 장 밑에 숨어 있을 정도로 위하수 증세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이 병의 원인은 너무 많이 먹는데 있다고 합니다.
위는 70% 이상 먹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위를 가득 채워야 직성이 풀립니다. 결국은 위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축 늘어지는 현상이 일어나 병이 되는 것입니다.
*잠23:2-3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
*잠23:6-7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은 먹지 말며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살자고 먹는 음식이 아니라 죽자고 먹는 음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생명은 환경이 적합해야 삽니다.
생명은 환경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늘 환경을 주도하고 적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동식물이 그러하듯 인간도 환경의 지배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해마다 철새들이 스스로의 삶에 맞는 환경을 찾아서 더운 지방으로, 혹은 추운 지방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들의 몸에 맞는 기후조건을 찾아다니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27:7-8 배부른 자는 꿀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여기서 우리는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우리를 살리는 환경으로 가꾸어 나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오히려 환경을 죽이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죽하면 이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고 국제 환경기구는 보고했겠습니까.
*롬8:19-22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것은 살고자 함이 아니라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적당한 소유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소유가 있어야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가 지나치게 많거나 적어도 문제입니다. 인격은 부족한 사람이 높은 지위를 얻는다든가 많은 재산을 가지든가 하면 그 소유에 치여서 제 명대로 못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26:1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그런 사람은 그저 가난하게 웬만큼 살았으면 좋았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돈 좀 벌고 지위 좀 높아지는 바람에 사람을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다 잃고 비참해 집니다. 결국 소유 때문에 죽게 됩니다.
*잠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성경에도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경계의 비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 우리 주위에는 소유로 인하여 죽는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4. 생명에는 반드시 사랑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가정에 가보면 '가화만사성' 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알면서도 가정의 불화는 끊이지 않습니다.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살자는 것입니까 죽자는 것입니까. 이 불화가 마음의 멸망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평화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국가나 사회, 가정, 교회 모든 면에서 평화가 있을 때 그 속에 생명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하고 무기를 만들며 공작정치를 합니다. 대량살상무기가 해마다 개발되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유지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생명은 사랑으로 통합니다. 사랑하면 거기 생명이 있고 미워하면 거기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잠10: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면서 살고자 한다면 그런 사람은 역시 자살 행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5. 생명에는 도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서 도덕성이 지켜질 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도덕성을 떠난다면 그것은 죽자는 것이지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몸도 마음도 죽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잠10:17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이 세상에는 사람이 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솝의 어릴 때의 일입니다.
많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 이솝에게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옆에 있는 공중목욕탕에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너라.' 현장을 돌아본 이솝이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이솝과 그의 동무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발 들이밀 틈이 없었습니다. 기가 막힌 선생님은 이솝을 불러서 '야! 이놈아 한 사람 밖에 없다더니 왜 이렇게 사람이 많으냐.' 라고 나무랍니다.
이 때 이솝은 천연스럽게 '사람 같은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네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냐.' 라고 선생님이 되묻자 '제가 여기 와보니 목욕탕 문 앞에 커다란 돌이 하나 있는데 들어가는 사람마다 발에 걸려서 넘어질 뻔 하면서도 그냥 들어가는데 딱 한 사람이 그 돌을 치워놓았습니다. 그러니 사람 같은 사람은 하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잠21:10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6. 올바른 신앙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릴 때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면 그 속에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잠21:3-4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더 죄니라.
죄는 뼈를 마르게 하고 골수의 진액을 마르게 합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영혼을 썩게 만듭니다. 육신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망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사람이 만일 죄에서 떠나지 않고 죄의 길에 여전히 서 있다면 그 사람은 살고 싶은 것입니까, 죽고 싶은 것입니까.
유대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짓고 살아남을 수 없음을, 자신들이 죄인 됨을 알고 있습니다. 구제불능의 죄인임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너무 많다는 것 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기에 이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멸망밖에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다 끝났다, 다 망했다, 다 죽었다, 이제 소망은 없다, 결정적 종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겔33:12-13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그러나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바른 신앙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아직은 살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게는 길이 없으나 하나님께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계십니다.
나는 나를 포기했을지언정 하나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에 매여서 절망하고 있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를 제시하시면서 생명의 길로 나오라고 재촉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끝났다고 결정적으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 간곡하게 예언하고 계십니다.
*겔33:14-16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치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궁극에서도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노력을 완전히 정지하는, 완전히 포기하는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7. 생명은 곧 하나님 사랑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아직도 죄 중에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 중에 있습니다. 이대로는 하는 수없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우리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이 생명의 현재성 그 자체가 엄청난 긍휼이요 기적인 것입니다.
이 자체가 놀라운 역사입니다. 생명의 현재성이 있기에 지금도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눅13:4-5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기회요 소망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은혜가 아니면 죄도 지을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늘에서 벼락을 치기라도 했다면 누가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일마다 전부 못된 짓을 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짓만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과거에도 은혜 안에 있었고 현재도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돌이키고 돌이키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10절로부터 16절까지 '돌아오라.' 는 말이 여섯 차례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말에는 회개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친다는 뜻을 가진 '나함' 과 돌아오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브' 가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돌아오라'는 말은 '수브'입니다. '회개' 뉘우침' 이라는 것은 물론 귀한 일이지마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에는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뉘우치면서 인생을 포기하고 죽어갑니다. 자살을 기도하고 후회하면서 더욱 깊은 실의에 빠집니다. 지난날을 후회하면 앞으로 살아갈 용기를 잃어버리고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다가 인생을 종말을 고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풀러스 알파의 믿음이 주어진다면 뉘우침으로부터 긍정적인 세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마음의 변화, 태도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마음에는 변화가 있는 듯한데 아직 자세가 바로 되지 않았습니다. 태도는 고친 듯한데 여전히 과거의 행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생활의 변화까지 이루지 못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라고 거듭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 재벌 가운데 깁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깁슨의 3대 성공비결'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미리스 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아주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음 물레방앗간에서 심부름하는 머슴으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별로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함으로 당대 미국 최고의 재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자 많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저는 늘 이 세 가지를 약속하고 지켜왔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 둘째, 고생을 두려워말고 일을 할 것. 셋째, 하나님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말 것.' '여러분! 고생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편하려고만 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 신조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켰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다른 비결은 없습니까.' 라고 다시 묻습니다. 깁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많은데 이대로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생명의 길을 몰라서 안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몰라서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을 하라고 하면 얼마나 잘 합니까. 가르치라고 하면 모두가 선생입니다. 문제는 행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이는 행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입니다. 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슴을 치며 한탄만 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생명의 길로 돌아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망의 길을 떠나서 생명의 길로 돌아오라. 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자기 신뢰나 율법에 얽매여 자책하지 말고 은혜의 세계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오라.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는 많은 축복과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시고 우리를 당장이라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생명에의 길은 사랑의 길이요 화목의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온전한 자유요, 온전한 사랑이요, 온전한 소망입니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살기를 바라면서 두려워하며 죽음의 길로 가겠습니까. 죄악의 길로 가는 것을 언제까지 계속하시겠습니까. 모순된 생활에서 이제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생명이 있고 주님을 떠나면 생명도 떠나는 것입니다.
*요일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험하고 협착하고 고통의 길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길이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길입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새로운 생명의 길로 돌아오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화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 생명에로의 선택을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