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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느님의 은총 중에 죽었으나 죄를 완전히 보속하지 못했을 때 이러한 영혼은 하느님께 나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연옥에서 씻는다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연옥의 영혼은 지상의 인간들과 연결을 맺고 있어서 살아있는 우리가 죽은이를 위해서 미사, 기도, 자선 등의 여러 선업으로써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위로와 보속의 단축을 도울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연옥에 대한 교리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리와 함께 교회의 오랜 믿음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옥에 대한 교리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하느님 말씀의 메시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연옥에대한 교리는 인간이 선을 지향하며 언제나 자신의 변화를 통해 거룩하게 완성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연옥의 근거
연옥이란 말과 교리가 성서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연옥에 관한 믿음은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근거로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즉 연옥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성덕이 필요하고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도 현세적 잠벌(潛罰)이 있다고 하는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카베오 후서에 함축적으로 연옥의 존재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마카베오는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 달라고 병사들과 함께 기도하였고 병사들에게 모금을 하여 예루살렘에 보내며 제사를 올리기 위한 비용으로 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마카베오 후서 12,45)"고 하였습니다.
또한 교부의 가르침과 교회의 관습에도 연옥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명확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성인은 죽은 자리에서 회개하여 보속의 시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후세에서 정화의 불로 성화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도 자신이 저술한 시편 주해서에서 죽은 후에 정화의 불을 당하지 않도록 현세에서 자신을 정화하여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고 이처럼 연옥의 존재에 대해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옥 교리의 올바른 이해
과거에는 연옥을 하나의 장소 혹은 일정한 기간으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연옥이라는 곳에서 정화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마치 천국과 지옥 가운데에 대기실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서 정화된 영혼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내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연옥에 관한 교리를 그렇게 공간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이 강합니다.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상에 나타난 하느님 체험들이나 또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의한 하느님 체험 상황들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성서에서 보면 인간이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엄청난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몹시 두려워 떨며 감히 대하기 무서워하는 모습들은 인간이 본래 나약한 것으로 자신의 무능함, 부당함, 죄악성을 하느님 앞에서는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죄인에게는 무엇보다 두려운 심판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연옥의 상황은 이상에서 표현된 죄 중에서 하느님을 두려워 하며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K.라너(독일 근대 신학자)는 연옥의 상황을 심리적 측면에서까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워낙 인간은 삶속에서 회개하더라도 여태까지 저지른 죄악과 그 결과는 간단히 없어지지 않고 자신의 태만과 과실로 영적 능력이 폐쇄되어 버렸기에 연옥의 시련을 면하기 위해서 현세에서 미리 매 순간 노력을 하여 본래의 모습대로 자신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할 이유는 죽은 후에 대면하게 될 하느님과의 만남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연옥은 어떤 특정한 장소나 환경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연옥은 하느님과 만나는 상태라고 설명하는 편이 낫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들이 조물주가 사랑으로 알려주신 방향을 알려 하지도 않고 완전히 무시하고 한 생명의 시한이 다 끝나 버린 다음에서야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사랑의 원천이신 아름다운 그분을 알게되고 만나게 된다는 것이 곧 연옥이라는 것입니다.

연옥의 고통
사실 죽은 후 하느님을 만나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두 가지 의미의 처형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연옥의 고통은 두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현세의 우리들이, 하느님에게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상상하는 고통과, 지극히 사랑하오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쓰라린 고통으로 봅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의 표현을 보면 현세 방식의 무서운 벌의 의미보다는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을 대면할 수 없다는 고통이 더 극심하다는 표현으로 연옥의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띠누스 성인은 연옥의 고통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그 어느것보다도 더 고통스럽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옥의 고통에 대해서 교회가 분명히 규정하거나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옥에서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무한히 선하심을 완전히 깨달았지만 이미 자기가 지은 죄의 장애로 말미아마 잠시나마 그 아름다움 자체를 지복직관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은 지옥과 달라 평화는 느낄 것입니다. 이제 구원은 아주 확실하여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정화'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세기의 제노아의 신비신학을 말한 카타리나 성녀는 "연옥의 불은 매우 효과적으로 영혼을 태우는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영혼이 가지는 하느님께 대한 큰 동경이 연옥벌이라는 것 외에는 연옥벌에 관해서 더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즉 하느님을 극도로 보고 싶어하는 고통 외에는 연옥에 대하여 어떤 벌이라든지 기간이라든지 하는 등에 관해서 확정된 가르침은 없습니다.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는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신앙의 아름다운 한 표현으로써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신자들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인간이 죽게되면 스스로는 어떤 의지도 없는 불가능의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기도를 통해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영신적으로 도움을 주어야합니다. 교회의 청원기도에서 하느님은 인간 모두의 주님이시며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아들까지 내어 주신 사랑의 하느님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은 이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망각하지 않고 그들도 우리를 의지하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이처럼 죽은이를 위한 기도는 사랑의 구체적 실현이 됩니다. 이처럼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은 결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만남이 됩니다. 이 만남은 기도와 희망으로 나타나며 신자들과 성인들의 청원 기도로써 지원을 받아 교회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업적입니다.
교부들의 저서에서도 연옥의 존재뿐 아니라 신자들이 죽은 영혼들을 위한 기도, 특히 미사성제로써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죽은 이를 위한 미사가 있었다는 것이 비문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이들과 유대를 맺고 있음을 명심하고 끊임없이 죽은 이를 위해기억하고 기도해야 됩니다(교회헌장 50)
*참고자료*
[가톨릭 신앙입문]
[그리스도의 가르침]
[간추린 생활교ㅣ]
[조암ㄹ신앙]G.ㄱ레사케. 심상태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