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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인광장(宗人廣場)

큰 스승! 나의 어머님 (성산이씨 기국공파 성주 대가면 용흥리 서치미)

작성자대장|작성시간13.06.14|조회수609 목록 댓글 3

 

 

큰 스승! 나의 어머님

 

최도열 교수(시인, 행정학박사)

세상을 반듯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원만한 인간관계의 원칙을 가르쳐 주신
내 인생에 큰 스승은 나의 어머님이다

 평소 부모은공을 알면서도 효행(孝行)에는 늘 부족함이 많았었다.부모의 심정으로 돌아가 보고 싶은 어머니께 오랜만에 큰소리로 ‘어머니’ 하고 부르며 보고 싶다는 사랑의 편지를 써 본다. 우리는 아들과 딸을 흔히 자식이라고 칭한다. 필자가 아들을 키워 지난해 장가를 보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아장 아장 걷던 손자가 결혼을 해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생각만 해도 즐거운 손자가 며칠 전에 출생하였다.
나는 어머니를 존경한다. 오늘날 시인이 되고 행정학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내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주신 훌륭한 선생님 어머니 덕분이다.
세상을 반듯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원만한 인간관계의 원칙을 잘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내 인생에 큰 스승은 나의 어머님이다.
이 시대 한국인!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신사임당 등 훌륭한 여성분들보다 우리 칠남매 자식들은 어머니가 더 훌륭하셨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분은 역사 속에 인물인 반면 나의 어머니는 우리가 늘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자식으로 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어머니를 존경하는 것은 첫째, 진정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고 둘째, 세상 살아가는 원칙,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르쳐 주셨고 셋째, 희생 봉사정신으로 멋진 인간 삶을 살아가는 기틀을 잡아준 점이다.

“어머니! 불러도 대답 없는 메아리인 줄 알면서도 오늘 따라 한없이 목놓아 불러 봅니다. 목이 쉴수록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징표로 알고 더 큰 소리로 불러봅니다.”

‘자식 둔 곳은 호랑이도 두남(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을 둔다’는 속담처럼 모든 동물의 자식사랑은 얼마나 심한지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식사랑 하니까 필자를 유별나게 사랑했었던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의 어머니는 성산이씨 29세손, 기국공파이고, 대가면 용흥동(서치미)에서 출생하셨다. 이름은 외(外)자 경(慶)자 이시다. 외할아버지와 성산 배씨 할머니 사이에 1남 1녀의 맏이시다.
19살에 아버지를 만나 7남매를 훌륭하게 키우신 어머니! 우리 형제간에게 아주 인정 있게 잘 지낼 수 있도록 인간 삶에 가치관을 심어준 분이시고, 내겐 어떤 위인보다 더 훌륭하신 분이다.
어머니는 인상(人相)이 참 준수(俊秀)하게 잘 생긴 분이었고, 성산이씨 양반의 후손이라는 자존심도 대단하셨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분명하고 보통 키에 피부가 백옥(白玉)처럼 깨끗하셨다. 어린 시절 늘 주변 분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농사일에도 익숙하셨는지 밭에 김을 매면 다른 사람 두 배로 빨리하셨다.
그런 어머니가 위로 딸만 두 명 낳았는데 아들 못 낳는다고 하마터면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갈 뻔했다고 하셨다. 귀하게 얻은 아들인 필자가 어린 시절 경기(驚氣)를 자주 해 어머니 속을 많이 애타게 했었다고 들었다.
그 당시 학교교육은 못 받으셨지만 여성이 갖추어야 할 미모와 솜씨, 맵씨, 예절, 겸손, 책임감, 배려와 나눔, 사랑 등 오늘날 현모양처의 상징처럼 지혜롭게 살다 가신 어머니의 행적(行蹟)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첫째, 무한대의 큰 사랑을 평생 실천하셨다.
회갑 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한평생 나보다 남을 위해 살다 가셨다. 자식과 집안과 이웃에 큰 사랑을 몸소 실행하셨다. 인정이 많아 막걸리 한 사발도 혼자 드시지 못하고 이웃과 나누어 드셨던 분, 우리 7남매는 부모님 음덕(陰德)으로 잘 살고 있다.
고향마을, 초전면 칠선리 오십여 호가 정답게 사는 궁전부락에는 당시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녘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가져다가 조상님께 기도를 했었다. 아마 손의 지문이 없어질 정도였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그토록 기도했지만 사법고시를 못하고 어머니가슴을 조이게 했던 못난 아들이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조여 온다. 회갑 년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도 조상님께 기도 드리고, 이튿날 논에서 볏단을 옮기시다가 고혈압으로 넘어져 돌아 가셨다. 
연락을 받고 서울역에서 제일 빠른 기차를 타고 김천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고향집에 도착했다. 응급실로 모시기 위해 택시를 대기 시켜놓고 어머님 얼굴을 정확하게 30분 뵙고 운명하셨다. 당년 61세, 회갑 년 음력 9월 25일 새벽 3시 30분이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앞이 캄캄했었다.
평소 존경하던 아버님과 사랑하던 아들딸과 며느리 등 가족모두를 남겨놓고 하직하셨다. 목을 놓고 한없이 울었다. 군사정권시절 큰아들인 필자는 밤낮으로 민주화 투쟁을 하던 가장 어렵고 힘든 때였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해드리지 못한 불효를 용서받을 길이 없었다. 그런 못난 아들이지만 아마 지금도 저승에서 어떤 역할이 있다면 분명 자식을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
너무 원통하게 돌아가셨기에 꿈에라도 좋고 어디에서나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좋은 곳에 가시도록 무당을 모시고 굿을 했다. 무당의 뜻에 따라 대나무 가지를 필자가 잡았지만 신이 내리지 않아 느낌으로도 만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어머님이시다. 상당수 사람들이 세상에서 존경하는 분은 어머니일 것이다.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자식들이 대체로 성공한 분들이 많다.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였다. 올바른 표현인 것 같다.
어머니는 대학생 며느리를 보았다고 무척 좋아하셨다. 흔히들 ‘고부간 갈등’ 운운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며느리를 딸보다 더 사랑하셨다. 한 번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며느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주고 떠난 어머니를 못 잊어 한다. 가끔 좋은 음식상을 받으면 눈시울을 붉히며 ‘어머님 계시면 참 좋을 텐데’ 하며 아쉬워한다.
사랑을 듬뿍 받은 며느리는 존경하는 어머님 제사상을 정성껏 차린다. 평소 좋아하시는 조기며 각종 음식물을 며칠 전부터 하나씩 정성 드려 준비한다. 평소 못다 드린 효도를 조금이라도 갖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둘째, 세상 살아가는 원칙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르쳐 주셨다. 원만한 인간관계에 대한 가치관이나 철학 등 학술적인 논리성은 떨어지겠지만 귀가 아프도록 우리들에게 강조하셨고, 몸소 실천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매사에 감사하게 생각하라. 인간으로 건강하게 태어난 것 등 모든 것들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라. 서로 입장 바꾸어 생각하라. 작은 불만을 토로하면 상대방 입장에서 서로 바꾸어서 생각해면 이해가 된다. 자신이 좀 손해 봐야 된다고 하셨다.
또 사랑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먼저 마음을 비우고 진솔되게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은 눈치가 있다. 척 보면 아니까, 진실해야 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라. 세상은 공평하다. 나보다 못한 것 지만 다른 것은 나보다 몇 배 나을 수 있다. 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베풀라고 강조하셨다.
또한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칭찬에 인색하지 말라. 칭찬에는 고래도 춤을 춘다. 남의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라. 내겐 단점이 더 많다. 손님을 귀하게 대접하라. 손님은 빈손이 없다. 빈손으로 오는 것 같지만 자기 먹을 복을 가져오니까, 오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해야 복이 온다. 집에 손님이 많이 찾아와야 부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더불어 열정을 가지고 한 길로 당당하라. 이 세상엔 쉬운 게 없다. 한 우물을 파라. 무슨 일을 하던 일관성 있게 미칠 만큼 몰두해야 한다. 혀끝에 도끼 있으니까, 말을 적게 하고 남의 말을 귀 담아 잘 들어라. 입은 하나고 귀는 둘이다. 말은 한 번 더 생각해서 적게 하고 조심 해야 한다.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들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오래간다고 하셨다.

셋째, 희생봉사 정신으로 멋진 인간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기틀을 잡아준 분이다. 늘 하신 말씀이 하루가 좋으려면 목욕을 하고, 평생 즐겁게 살려면 봉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일가친척이나 동네에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있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봉사를 한다. 지금은 희미한 추억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결혼식을 시골마을 신부 집 마당에서 지냈다. 모든 혼수품이며 손님접대용 음식을 집안과 동민이 모여서 다함께 준비한다.

결혼식 날 연지곤지 찍은 신부와 신랑이 닭을 올려놓은 혼례상을 가운데 두고 홀기(笏記)에 따라 마주보고 절을 한다. 북향(北向)재배(再拜)하면 북쪽을 향해 절을 두 번 한다. 이런 혼례식을 마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장난기있고 재미난 절차 등을 거친다.
지금은 기억도 희미하지만 결혼식 후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간다. 상가(喪家)도 지금처럼 장례식장이 아니라 자기 집 마당에 상을 치른다. 고향마을 초롱 계에서 맡아서 다 준비한다.
이런 저런 행사에 늘 부모님이 앞장서 봉사를 한다. 이런 것을 보고 자란 탓인지 봉사한다는 게 너무 재미있고 신바람이 난다. 필자가 40여 년간 불우청소년과 지체장애인을 위한 봉사 등 이런 저런 것 등이 합해져서 ‘대한민국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부모님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크신 사랑, 높은 은혜, 이제야 효(孝)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김일랑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찌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하는 송강(松江) 정철의 글귀가 가슴을 때린다.
 내가 자식을 키워 부모 은공(恩功)을 알 때 쯤 되면,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고 떠나 버려, 그때 가슴을 쳐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 시대, 우리 모두 효(孝)를 가슴에 되 새겨야 할 말씀이다. 
 

성산이씨 집성촌


용흥동(龍興洞)성주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대가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각동을 리(里)로 개정함에 따라, 용흥리가 되었다. 대가면의 동북부에서 넓은 평야와 이천(伊川)으로 성주읍과 인접하였으며, 용전(龍田)[용포], 용계촌(龍鷄村)[잉기촌], 서치미[서치뫼(棲稚山) · 연포(蓮浦) · 이포(伊浦)], 율포(栗浦)[율리(栗里)]로 이루어져 있다.

용전은 성산이씨 동성마을이며, 이 마을에는 1878년(고종 15) 경암(警菴) 이진호(李晋琥) 8형제의 우의를 기리는 팔우당(八友堂)이 있다. 용계촌은 이웃 마을 용전(龍田)의 ‘용(龍)’자와 마을 앞을 흐르는 계천의 ‘계(溪)’자를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마을 앞 이천변(伊川邊)의 넓은 들이 북쪽으로 트여 안온하고 한적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서치미는 성산이씨의 동성마을이며, 여러 재실이 있다. 성산인 이견수(李堅守)의 후손 기국(杞菊) 이중화(李重華)를 추모하는 기국재(杞菊齋),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경학에 능한 봉산(鳳山) 이탁(李琢)을 추모하는 봉산재(鳳山齋), 연호(蓮湖) 이달현(李達鉉)을 추모하는 연호재(蓮湖齋)가 있다. 율리는 17세기 말 이진영(李震英)이 개척하였는데, 당시 밤나무가 무성하여 율리라고 하였다. 19세기 초 이정화(李廷和)가 친족들이 사는 이웃 마을이 모두 ‘포(浦)’자를 넣어 부르고 있다고 하여 이 마을에도 ‘포’자를 넣어 율포로 개칭하여 현재는 모두 율포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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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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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익상 | 작성시간 13.06.14 제가 태어난곳이 용계촌 258번지랍니다.
    용흥1구라고도 하며 성주군에 속해 있다가 국민학교 3학년때 대가면에 편입되어 성주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대가국민학교로 전학을 하였답니다.잉기촌이라고도 하며 잉기촌-용전(성산이씨집성촌)-서치미-율포로 나누어 지며 율포옆이 솟질로 기국공 5세손 대경공 묘소가 그곳에 있답니다.
  • 작성자대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6.14 성산이문 집성촌 마을! 정말 자랑스럽습니다.총무님 고향이시기도 하고요.
    항상 성산이문을 위하여 수고하시는 총무님(아재)건강 잘 챙기세요
    건강이 제일이니까요?^^^
  • 작성자솔마루 | 작성시간 19.09.28 고향이 초전면
    (칠선리)이고 외가댁이 서치미라는 것도 어머니 성이 성산이씨저랑 같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저랑 같으시네요. 외가를 검색하다가 알게되었는데 읽는 내내 서치미 마을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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