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서양인 귀화자
朴燕 : Park Yeon (Jan Weltevree) : 박연 (1595~)
‘하멜 표류기’에 관련한 이야기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 외에도 이야기로써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상인출신인 하멜이 원래 목적지인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는 도중 풍랑을 맞아 제주도로 오면서 시작되는 그의 조선이야기. 그의 책 ‘하멜 표류기’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박연’이라는 인물이다. 하멜을 포함한 총 36명의 네덜란드 상인들이 제주도에 잠시 머물렀을 무렵, 서울에서는 조정의 명으로 한 사람의 통역인을 포함한 압송단을 제주도로 파견한다. 그 한 사람의 통역인이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인물 ‘박연’, 네덜란드 이름 ‘얀 벨테브레 (Jan Weltevree)’ 라는 인물이다.
‘하멜 표류기’에서는 하멜 일행과 박연간의 첫 만남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10월 29일 오후 무렵, 우리 측 서기와 일등항해사, 그리고 하급선의가 제주 목사에게 불려가게 되었다. 그 곳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는 긴 붉은 수염을 기른 한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제주 목사는 우리에게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에 대해 맞춰보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는 ‘우리와 같은 네덜란드 인이 아니냐.’고 답하였다. 이에 목사는 웃으며 ‘그는 우리와 같은 조선인이랍니다.’라며 설명해주었다. 그는 약 57,8세로 보였는데 놀라웠던 것은 그가 모국어를 거의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처음에 그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약 한 달간 함께 생활하자, 그는 다시 모국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박연’ 아니, ‘얀 벨테브레’라는 인물은 어떤 이유에서 머나먼 조선 땅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일까. 1595년 네덜란드 항구 도시이자 암스테르담 북부지역에 위치한 ‘드 레이프 (De Rijp)’에서 태어난 그는 VOC의 선원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VOC 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줄인 말로, 16~17세기 무렵 유럽 열강들의 왕성한 아시아 진출로의 욕구를 알 수 있다. 벨테브레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일본, 중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과 교역을 하고자 유럽 열강들은 수많은 항해를 해왔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쇄국정책’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로 가기까지의 험난한 여정들은 유럽인들로부터 하나의 두려움이자, 동경으로 자리잡아왔다. (당시의 항해선들은 근대 항해선들에 비해 난파당하기도 쉬웠을 뿐만 아니라, 지도의 잘못된 표기 및 항해술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먼 거리를 항해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칼 항해선과 마주할 시에는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마저 감수해야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럽 열강 중에는 유일하게 일본과의 교역을 맺은 네덜란드는 다른 열강들보다 한 발짝 빠르게 아시아로의 진출을 꾀할 수 있었다. 덕분에 네덜란드 국적의 상인들의 아시아로의 항해가 잦아지게 되었는데.
1626년 3월 17일, 당시 30대 초반이던 ‘얀 벨테브레’는 ‘홀란디아 (Hollandia) 호’룰 타고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중간 경유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우베르케르크 (Ouwerkerek) 호’로 갈아탄다. 1627년 7월 경, 타이완에서 나가사키로 향하던 우베르케르크 호는 도중 중국 민항선 한척을 나포하게 되는데, 이 중국 민항선에 옮겨 탄 16명의 선원 중 한 명이 바로 벨테브레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벨테브레가 타고 있던 민항선은 폭풍으로 인해 난파되고 만다. (당시 중국 민항선에 있던 화물을 빼앗은 후 그 선원들을 노예로 파려는 계획을 세운 VOC 선원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선원 16명을 민항선에 태웠다. 폭풍으로 인해 선원과 민항선을 포함한 화물들을 잃게 된 우베르케르크 호의 사람들은 지나가던 포르투칼 선박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역으로 공격을 입어 우베르케르크 호는 불태워지게 된다.)
오랜 시간 표류하던 중, 벨테브레가 타고 있던 중국 민항선은 조선의 제주도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켈파르트 (Quelpaert)’ 섬으로 알려져 왔던 제주도는 이미 네덜란드 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던 섬이었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 선박에서 내린 3명의 네덜란드인 선원들은 결국 조선에 남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데릭 히츠버츠 (Dirck Gijsbertz)’, ‘얀 버바스트 (Jan Verbaest)’ 그리고 ‘얀 벨테브레 (Jan Weltevree)’ 였다. (남은 13명의 선원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 땅을 밟은 이 3명의 선원들만을 남긴 체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선내에 있던 중국인 선원들이 오히려 이 네덜란드인 선원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설도 존재한다.)
조선에 남게 된 3명의 네덜란드인들은 1627년 제주도에서 서울로 이송되게 된다. 조선의 법에 따라, 조선에서 여생을 마쳐야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 그들은 이에 수긍한 후, 조선 정부의 명에 의해 조선의 관직 그리고 이름을 얻는다. 처음에는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던 벨테브레 역시, 이에 수긍하고는 조선 이름 ‘박연’으로써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무장선이었던 동인도 회사의 선박에서 일 해온 그들은 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훈련도감에 고용된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새로운 삶도 잠시, 곧이어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인해, 벨테브레를 제외한 버바스트 그리고 히츠버츠 이 두 사람은 전사하고 만다. 당시 벨테베르 나이 41세의 일이다.
병자호란이 진압된 이후, 벨테브레. 아니, 박연은 조선의 무관으로써 성실하게 살아간다. 조선인 여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자식으로 두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무관으로써 유럽식 포를 조선에 소개하는 등, 무기 개발에도 힘써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홍이포 (紅夷砲)’ 였다.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마저 겪어야 했던 조선 입장으로써 벨테브레가 소개한 유럽의 무기들은 정말 중요한 재산이었다.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 벨테브레는 무기 제조뿐만 아니라, 조선 땅에 유입된 외국인들을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그는 이 외국인들을 관리하는 동시에 조선의 문화 그리고 풍습을 이들에게 알리고, 통역을 도와왔다. 이 때 만난 사람이 바로 ‘헨드릭 하멜 (Hendrik Hamel)’, 우리에게는 ‘하멜 표류기’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효종 11권 4년 8월 6일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하멜과 벨테브레의 만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於是, 朝廷命上送于京師。 前來南蠻人朴燕者見之曰: “果是蠻人。” 遂編之禁旅, 蓋其人善火炮。 或有以鼻吹簫者, 或有搖足以舞者。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이처럼, 당시 조선 정부에 있어 벨테브레의 역할은 매우 컸다. 외국인들 간의 교류뿐만 아니라, 신형 무기 제조 및 유럽 문물을 조선에 소개함으로써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 정부가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말년에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는 벨테브레, 그는 조선 최초의 서양인 귀화자로써 지금까지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참고로 원산 박씨의 시조는 바로 이 벨테브레이다.)-퍼온글 출처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