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전도서

[스크랩] 지혜가 부족하여(전 10:1-4) 41강

작성자호현낙선|작성시간26.06.06|조회수1 목록 댓글 0

41 지혜가 부족하여(전 10:1-4)

 

1.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2.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3.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4.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게 우리가 겪는 현실인데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때는 안다고 할 것입니다. 맞다 하나님께서 살게 한 대로 산다고 생각이 되고 인정되고 그런 것 같은데 우리가 실제 세상에 여러 가지 문제와 부딪히며 살아갈 때에 그 사실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살게 한 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는 것이 있다는 거죠.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놓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그렇다고 하다가 예배당을 나가면서 진짜 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와 부딪히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죠. 사람들은 어떤 것을 현실로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일해서 내가 번 돈으로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을 현실로 생각합니다.

 

날마다 내가 직장을 다니고 일해서 돈 벌고 그것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 마실 것을 해결하고 여행도 다니고 이런 삶을 사는 것을 현실로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은 늘 우리 의식에서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잊혀지고 희미해져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하는 말이 그렇게 실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일한 결과는 눈에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보이지 않고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고 성경을 따라서 이야기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믿지를 못하겠다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일을 가지고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인데 그것은 마음에서 거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그 결과가 나에게 이익이 되고 좋은 결과가 주어져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사람은 본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고 생각하면 되요. 이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습성인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발생하는 모든 일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하는 일들이 나에게 이익이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 본인들이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내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죠. 그런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하나님이 살게 하는 대로 살아간다고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지요. 이것이 우매자의 특징입니다.

2.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이 각기 다른 쪽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이 다르다 무언가 바라는 것도 다르다 이렇게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했을 때 그러면 마음이 어떻게 다르냐? 지혜자의 마음은 어떤 것이고 우매자의 마음은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답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사람의 마음은 자신에게 가치가 있는 것 보물로 생각하는 귀한 것 쪽으로 마음이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혜자의 마음이 오른 쪽에 있다면 오른 쪽에 있는 것이 보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죠. 우매자는 왼쪽에 있는 것이 귀하고 보물이기 때문에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지혜자와 우매자의 마음이 각기 다른 쪽에 있다는 것은 서로가 존귀하게 정말 가치 있고 보물로 여기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죠. 그러면 오른 쪽 왼쪽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겠지요.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1~14)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을 그냥 높은 자리 또 영광된 자리 그 정도로 생각합니다. 우편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이니까 당연히 아들이신 예수님이 앉으셔야지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죠. 그렇게 우편을 해석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 다음에 2인자의 자리에 앉아계신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보좌는 왕의 자리 우편은 보좌보다 낮은 자리 2인자의 자리 그렇게 인식되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까 보좌 우편은 2인자 자리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나 그런 해석을 못하는 거죠. 예수님도 하나님이신데 성부 하나님 다음 2인자이다 그렇게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좌 우편을 영광의 자리로 인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데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앉으셨다고 합니다. 그냥 앉았다는 것이 아니고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우편에 앉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사 한 분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것이 해결되었고 그 말은 우리가 죄를 위해서 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앉으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죄를 위해서 해야 될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드리신 영원한 제사가 저주 받은 우리가 영원히 온전하게 된 것을 선포하고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로 들어간 후에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출15:6)

주의 오른 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고 원수를 부수었다고 합니다. 주의 오른 손으로 원수를 부수시고 이루어진 구원이라고 표현되고 있지요. 이처럼 주의 오른 손 오른 쪽은 인간의 힘이 개입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하나님의 심판 때에 모든 인간은 오른 편과 왼편으로 나누어집니다. 물론 오른 편은 천국이고 왼편은 지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양과 염소의 행동의 특징을 가지고 적용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양은 온순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목사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빗대어 이야기 하죠. 또 염소는 들이받기를 잘한다고 하면서 목사를 들이받는 사람을 염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해석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의 습성을 가지고 인간의 어떤 기준과 조건을 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복을 주고 벌을 준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른 편의 신자가 누구이냐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지 이러이러한 행동을 기뻐하시지 그런 사람을 구원한다는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들이 왼편으로 분리되는 인간성입니다.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자기가 용서를 받아야 할 저주 받은 인간이라는 자체를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자격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멸망 받을 조건만 있는 것이 인간인데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다고 할 때는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데 용서받았다는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라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을 두고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저주 받은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에게 가능성이 없음을 아니까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하신 일만 바라보게 되면서 그 일로 감사하고 찬송하게 된다는 자리가 오른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이 오른 쪽에 있다는 것은 죄인 된 자를 용서하신 주의 일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주의 일을 높이고 감사한 마음이 있는 것을 지혜자의 마음이 오른쪽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왼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연히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잘라먹고 대신 인간의 공로와 내 열심과 내 의로움을 집어넣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한 일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과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 상을 받고 구원을 받고자 하는 그 자리가 우매자의 마음이고 왼편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자의 마음과 우매자의 마음은 십자가로 마음이 향하느냐 아니면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두느냐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행함에 가치를 두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행한 만큼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내 행함에 가치를 두려고 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있을수록 그런 사람의 마음이 안심이 됩니다. 이만큼 내가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무언가 보상해주실 거라는 그런 기대를 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럴 뜻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우매자의 마음으로 간주 되어서 왼편으로 구분되는 염소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세계인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신데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이 있어서 다 빼버리고 밀어내버리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게 이익이 안 되고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 때문이죠. 복음도 나에게 이익이 되어야 복음다운 것으로 여기고 교회 다니는 것도 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고 이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교회에 도움이 되어야 좋은 교인들이라고 하죠. 그게 지옥으로 가는 우매자의 마음인데 함께 지옥으로 가는 교회가 이것을 신앙으로 포장을 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세상에 십자가는 그게 지옥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려고 하나님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끌려오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돕게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그런 궁리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돕지 않겠는가? 이런 인간의 방식을 끄집어내고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을 했으니 안심을 삼고 이런 것들이 자꾸 반복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그게 실제로 우매자의 마음이고 지옥가는 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관심 없겠지만 몇 달 전부터(6년 전 이야기) 암 환자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게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펜벤다졸이라고 하는 동물 구충제로 쓰이는 약성분입니다. 미국의 사업가가 그 약을 먹고 암이 완치되었다는 것이 유튜브에 올려지면서 병원에서 희망 없다고 하는 말기 암 환자들이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도 이것을 먹으면서 유튜브에 올리고 그랬다가 지금은 돌아가셨죠.

 

이 구충제를 먹은 사람들이 효과 있다는 자기 경험담을 여기저기 올리면서 더 화제가 된 것이죠. 개그맨 김철민(지금은 고인인 된)이라는 사람이 폐암 말기인데 그 약을 먹으면서 희망이 생기고 호전되었다고 하면서 그런 이야기들이 암 환자들에게 퍼졌는데 식약청에서 인체에 실험이 안 되었으니 먹지 말라고 하고 방송이 나오고 그랬죠. 이것을 어느 TV에서 방송을 하면서 과연 이것이 암을 낫게하는 구충제이냐 여기에 대해서 의사들과 인터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가 말하는데 구충제를 먹고 진통이 살아졌다는 것은 플라시보 효과일 수가 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플라시보 효과는 심리효과를 말합니다. 치료되는 약 성분이 없는데 치료된다는 심리적으로 나을 수 있다는 그런 기분과 그런 마음 상태가 도움이 되는 것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약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믿음에도 플라시보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날 카톨릭에서 면죄부를 팔았는데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 죄가 면해져서 천국 간다는 것이죠. 신부의 말을 듣고 면죄부를 산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면죄부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런 안심이 들었겠죠. 천국에 대해서는 면죄부가 있으니 불안해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천국 갑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돈 주고 면죄부 살 필요 없이 예수님이 날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을 믿으면 돈 안 들잖아요. 그것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돈도 안 들고.

 

그런데 사람들의 심리가 돈을 주고 산 면죄부가 더 신뢰가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면죄부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니 공짜로 얻은 것도 아니고 돈을 준 것이니 더욱 신뢰가 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짜로 주신 구원보다는 내가 정성을 바쳐서 산 면죄부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으로 흘러간 것이죠. 사람들이 내가 착하게 행동을 하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을 하면 복 받고 구원 받는다는 그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십일조하면 복 받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이런 말들이 믿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십일조 했고 기도했으니까 평안을 느끼는 것들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할 수가 있지요. 진짜 믿음도 아니고 평안도 아닌 그냥 느낌일 뿐인데 그것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심리효과로 가득한 곳이 지금의 교회 실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과응보라는 법칙은 인간이 만들어낸 법칙입니다. 그런 법칙을 만들어낸 것은 그런 법칙이 가장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인과응보로 끌리는 거죠. 내가 잘하면 복 받고 내가 잘못하면 벌 받고 그게 합리적이라는 거죠. 결국 복과 저주가 내가 하기에 달렸으니까 내가 교회 잘 다니고 열심히 착하게 살고 그러면 복받고 살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안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무엇을 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하겠다는 마음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하라는 것만 가르쳐달라는 것이죠. 잘하면 복 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생활 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살려고 하죠. 이게 우매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내 행위의 가치가 들어 있는 거죠.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본문 3절 보겠습니다.

 

3.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가 우매함을 말하느니라

내가 우매하다고 이야기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매한 자는 우매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우매하다는 겁니다. 지혜가 없으니까 우매함을 드러내면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들을 보세요. 자꾸 사람들의 열심과 행위에 가치를 두고 이래이래 해야만이 복 받는다는 말을 하고 있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무엇이냐 하면 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오른 편을 모르니까 우매함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우매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죠.

 

결국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가운데에서 세상에서 돈을 벌고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천국 간다고 생각하며 안일하게 살고 있는 거죠. 지혜가 부족하니까 그런 생각에 부딪히는 것도 경험을 못하는 겁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혜의 말을 듣게 되면 기존에 살아왔던 사고방식과 자꾸 부딪히게 됩니다. 무언가 이것이 다른 것 같다가 아니라 아예 다르다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게 내가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되고 자기를 제대로 보게 되는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를 모르니까 지혜의 말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말을 들어도 부딪힘이 없는 모습이 반복되는 것이죠. 그런 인간임을 여러분이 생각해보시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부딪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은 우리가 한 일을 가지고 어떤 것도 안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심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는 믿음이 담겨 있으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자가 된 것이고 하나님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 것을 섞어서 무언가 맛을 내보려고 하기 때문에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고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1절에서 이야기합니다.

 

1.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 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

향기름은 향기름 자체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향기름이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좀 더 좋은 향기를 내기 위해서 내 솜씨를 거기에다 집어넣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종교 생활이죠. 그런데 그런 인간의 것들을 죽은 파리로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은 파리라고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가치도 없어 그냥 빗자루로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죠. 인간이 향기름을 좋게 해보겠다고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게 죽은 파리처럼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착함이라는 것과 교회를 위해서 하는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로도 향기름의 향을 높이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오히려 본래의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방해되고 쓸모없는 짓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솜씨가 들어가 있는 향기름으로 보람을 느끼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을 싸잡아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르는 우매함이라고 합니다. 아가서를 보겠습니다.

 

1.솔로몬의 아가라 2.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1:1~3)

이름이 향기름 같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향기름 같아서 좋다는 것이 실감이 되십니까? 별로 실감이 안 날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자기 형편 처지를 지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지금보다도 더 좋은 환경에 살게 해주셔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있는 거죠. 이게 지혜가 부족한 거죠. 사랑을 이 땅에서 나의 형편이 잘 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주권자가 나에게 분을 일으킨다면 반발을 합니다. 뒤에 4절에 나오죠.

 

4.주권자가 네게 분을 일으키거든 너는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공손함이 큰 허물을 용서 받게 하느니라

주권자가 나에게 분을 일으킨다. 왜요? 내가 주를 잘 믿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반발을 하죠. 그런데 주권자가 분을 일으켜도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을 일으키실 때 욥처럼 우리에게 재앙이 임했다고 합시다. 이럴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는 왜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이런 반응이고 또 하나는 할 말 없습니다. 이런 반응이 있는데 둘 중 하나입니다. 왜요? 이렇게 나오는 것은 이유가 하나입니다. 인간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매함이죠. 자기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할 말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은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할 말 없는 저주 받은 피조물 저리이죠.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겁니다. 저주 받을 자리에서 할 말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 것이 주권자가 분을 낼 때 공손함입니다. 이런 공손함이 주의 용서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할 때에 용서 받은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용서함이 우리에게 어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겠습니까? 용서를 말하든 사랑을 말하든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로 시작하면 사랑 받을 자격이 없고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 나입니다. 이런 신자가 용서의 가치와 존귀함을 알게 되면 용서하신 주를 높이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럴 때 사랑이 높여지는 겁니다.

 

그 사랑의 자리에서 주께서 분을 낸다. 마땅한 거죠.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나이니까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마땅합니다 그런 공손함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 지혜자의 마음이고 그게 주의 용서함을 알고 사랑을 아는 것이 됩니다.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호3:1,2)

호세아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하신 명령인데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음녀가 된 여자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 여자는 이스라엘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사랑을 받았는데 음녀가 되어버려서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사랑이 세상에 증거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아는 자를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라고 하는 것은 나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아는 자로 나오게 되는 것이고 이것을 알았을 때에 그런 사랑이 나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 귀하게 되는 것이죠. 내 행함보다도 내가 무엇을 하든 쓸모없는 것이고 그런 나를 예수 안에 있게 하신 주의 은혜가 큰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 받은 신자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랑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어디에 있느냐?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조건이나 자격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는 빈 털털이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자가 신앙이 강한 자이거든요. 그런 자세로 주께 나오게 되는 것이 주의 사랑에 이끌림 받는 것이고 사랑에 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는 스스로 되지를 못합니다. 사랑의 역사 가운데 용서의 능력 가운데에서 그런 신앙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새로운 피조물로. 그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이고요. 교회는 십자가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게 전부입니다. 십자가로 증거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이 나에게 전부입니다. 그 하나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증거하신 사랑과 우리가 바라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우리가 지혜가 부족한 자로 우매한 말을 했고 인간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는 왼편에 마음을 두고 살아왔구나. 나는 항상 나에게 마음을 두고 살아온 우매자이구나. 이것을 알 수가 있고 이것을 알았을 때 회개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무엇으로도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마음에 못을 박아버리세요. 무엇으로도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실상과 처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로서 다 이루셨고 그러므로 우리가 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시면 예수님께서 모든 것 다 이루셨다는 것이 정말 큰 복이고 은혜임을 알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죠. 그게 사랑의 눈이 열린 신자됨인 것이고 그런 신자는 인간의 복이 왼편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오른 쪽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게 되고 지혜자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펼쳐놓고 보게 되면 어떤 말씀을 보더라도 우리가 붙들고 내려놓지 않으려는 것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철거시키면서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만 세워놓고 오직 그것만 바라보고 찬송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잠잠히 주를 바라보면서 주의 십자가가 평안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게 지혜자가 누리는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런 평안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신윤식 목사 설교 편집-산골편지 원기연)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산골 편지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