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복을 누리려면 (삼하 6:6-11)
6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이 시간에 “말씀의 복을 누리려면” 이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한 구절만 소개하면 신15:4에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했습니다.
시 1편도 그렇고, 계1:3도 그렇고 모든 은혜와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함에서 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결과는 그 말씀을 대하는 자에 따라 복으로도 다가올 수도 있지만 화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법궤를 잘 모셨더니 복을 받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법궤를 잘못 대하다가 블레셋 곳곳에 재앙이 임하고, 감당 못하겠다 가져가라 하니까 다윗이 그것을 이스라엘로 옮겨 오다가 소가 뛰니 궤가 넘어지지 않게 붙들다가 제사장 웃사가 죽고 그래서 다윗도 포기한 법궤였습니다.
법궤가 무엇일까요? 삼하6:2에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상징한 궤입니다. 이 법궤 속에는 만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이 기록된 돌비 이 3가지가 들어있습니다. 명칭은 법궤 증거궤 언약궤로 불리는데, 법 증거 언약이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므로 법궤인 말씀을 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럼 말씀의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말씀을 복음의 진리 안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장 삼상 5장을 보면 법궤로 인해서 블레셋이 아수라장이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삼상5:6-9에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그래서 가드로 옮겼더니 가드에서도 독한 종기가 나고 큰 환난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다시 에그론으로 옮기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고통에 대해서 삼상5:11에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인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갔다가 온갖 재난을 당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법궤에 대해서 뭘 알겠습니까? 이처럼 성경을 볼 때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복음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겉모양만 보고 율법의 관점에서만 보면 큰 고통의 산물이 되고 맙니다. 율법에 자기 죄가 비쳐오니 견딜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알지 못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부리려 왔다가 더 무거운 정죄를 당하고, 정죄로서 끝납니까? 정죄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영육 간의 저주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지 못했을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절규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신약을 먼저 이해하고 구약을 봐야 합니다.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봐야 성경이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를 모를 뿐 아니라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율법만 믿는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하셨듯, 복음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종에 고통 당하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그 영혼의 고통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를 구하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했습니다.
이걸 모르고 성경 보다가 사탄에게 눌린 사람도 있습니다. 율법이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선지서나 계시록을 보다가 그 두려움에 책을 덮어버리기도 합니다. 그 진리가 복음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피의 복음을 발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이 복이 되려면 변형하거나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6-7절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다윗이 왕으로 즉위하자 맨 먼저 한 일은 엘리 시대에 블레셋에 빼앗겼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불미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법궤를 수레로 실어오다가 소가 뛰자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셔서 죽은 것입니다.
소가 뛰어 법궤를 보호하려고 한 것인데 왜 웃사를 죽이셨을까요? 법궤는 본래 수레에 싣는 것이 아니요 손으로 만지는 것도 아닙니다. 법궤에 고리가 달렸는데 그 고리에 긴 채를 꿰어 제사장들이 어께에 매야 합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이처럼 성경을 사람의 방법으로 접근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믿음을 죽였습니까? 가령 성서고등비평이 그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역사성 합리성을 살펴 받자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문서가 어떻게 생겨나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것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가려내려다 성경을 난도질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결과 부활도 천국도 이적도 동정녀 탄생도 모두 전설 속의 이야기로 바뀌고 성경에서 믿을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유주의 신신학 따라가면 그 영혼은 죽습니다. 그것이 바로 웃사의 사건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작은 두뇌로 하나님의 말씀을 맘대로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은 선한 동기에서도 안 됩니다. 웃사의 행동이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재앙을 불러 왔듯 이와같이 성경을 불신자들에게 쉽게 소개하기 위해서 철학이나 과학을 곁들이다가 본질을 왜곡하기도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중세기의 스콜라철학이 그것입니다. 스콜라 철학은 교회의 가르침을 합리화하여 과학적 형식으로 제시하려 한 것인데 그 결과 진리가 과학과 철학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과학과 철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호소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중세기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전2:1-5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했습니다. 말씀이 복이 되려면 변형하거나 가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말씀이 복이 되려면 그 말씀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9-11절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한 말씀이 있습니다.
웃사가 법궤를 붙들다 죽자 다윗이 두려워 시온으로 옮겨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습니다. 다윗이 3만의 군사까지 동원해서 엄격하고 거룩하게 옮겨오려고 했지만 사람이 죽었으니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맡은 오벧에돔이 복을 받습니다. 여기에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먼저 “오벳에돔”의 뜻입니다. "오벧에돔"은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결합된 이름으로 오벧 (עֹבֵד, Obed)은 "섬기는 자", "종", "봉사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봉사,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돔 (אֱדֹם, Edom)은 "붉다"라는 뜻으로 에서의 별명이기도 하며, 에서의 나라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상징적으로 에돔은 우리 육신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오벧에돔은 우리의 몸과 마음 다 드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복 받는 비밀입니다. 그래서 출20:5-6에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셨습니다.
막12:29-31에도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성경의 핵심을 깨달아서 그대로 행하면 오벧에돔처럼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다윗도 두려워한 법궤를 오벧에돔이 맡았는데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바로 그런 마음으로 법궤를 맡았다는 것은 생명 걸고 맡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 걸면 은혜와 복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 사랑 예배 주일성수 십일조 말씀 찬송 기도 봉사 전도 감사 등에도 목숨 거시기 바랍니다.
대상26:4~8에 오벧에돔이 복을 받은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여덟 아들과 손자들까지 62명이 복 받은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으로 미루어 첫째는 자손의 복이었습니다. 잉태하지 못해 가문이 끊길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 많은 자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62명이 큰 용사, 큰 갑부, 큰 능력, 큰 권세자가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대상26:15절을 보면 그와 그의 자손들이 성전 곳간의 문지기였다고 했는데 거기는 국가의 부요가 다 들어있는 엄청난 보물창고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생명 걸고 지키면 하늘 보배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말씀의 약속을 믿으면 믿는 대로 다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선 말엽에 경상도 산골에 사는 한 청년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양에서 과거를 보다가 외국 선교사를 만나 예수 믿는 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서는 보라는 과거는 안 보고 예수쟁이가 되어 돌아왔다고 매도 때리고 핍박이 대단했습니다. 부모의 핍박을 견디다 못한 청년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가 말만하면 네 소원 다 들어줄 테니 말만하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이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청년이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최초로 한 말은 “아버님! 어머님! 예수 믿으세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도대체 예수가 누구기에 그토록 네 마음을 빼앗아 갔는지 어디 나도 한번 믿어보자”하고 온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이 청년이 바로 저 유명한 황수관 박사의 할아버지입니다. 황수관 박사님은 자신의 가문을 자랑스러워 하면서 나의 할아버지는 아브라함처럼 우리 집안의 복의 근원이 되셨기 때문에 그 결과 내가 3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는 특권을 누리고 이렇게 복을 많이 받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다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시대의 오벧에돔을 찾고 계십니다. 성경을 알아야 복이 옵니다. 또 성경을 믿어야 복이 옵니다. 그리고 성경을 행해야 복이 옵니다. 성경에 목숨을 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경을 가감하거나 변형하지 말고, 철학과 과학으로 재단하지 말고, 성경에서 복음을 발견하고 그 말씀 그대로 생명 걸고 믿고 지켜서 구원받고 오벧에돔처럼 영육 간에 복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