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한 믿음 (엡 4:15-16)
이미지 - 축통이의 편지에서발췌
이 시간에 “장성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3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는 유아적 단계입니다. 물질적인 것, 육신의 보이는 것만 구하거나 매우 이기적인 초보적 단계입니다. 마치 아기가 자기 필요에 따라 '으앙'하고 울기만 해도 부모가 알아서 필요를 채워 주듯 문제가 있을 때만 하나님께 울음을 터뜨립니다. 영혼과 내적인 성장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주님은 그저 내가 요구하는 것을 채워주는 해결사로만 이해되는 자기중심적인 단계입니다.
좀 더 자라면 청소년의 단계가 옵니다. 이 시기는 응석이 통하지 않는 때입니다. 교육을 의무로 받아야 하며 자신의 주장과 행동과 개성 앞에 제재가 가해집니다. 이 때 학업 국방 결혼 직장 등등 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희망이 있는 시기입니다. 이처럼 영적 청소년기에는 훈련과 연단의 기간입니다.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새로워져야 할 것도 많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며 내가 죽고 변화되는 시기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년의 단계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주님과 결혼 상태가 되는 단계입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장성한 수준에서야 비로소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중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결혼이 무엇입니까? 내 중심이 아니라 서로의 중심으로 사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풍비박산이 납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수준에 이르면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나는 그의 아내임을 내 영혼으로 느낍니다. 주님의 임재로 오는 그 행복감은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장성한 믿음으로 자랄까요?
1. 말씀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벧전2:2에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의 양식 먹고서 믿음이 자라고 뜻이 주님과 같아져야 합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체험도 좋습니다. 그런데 체험을 주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필요한 영적 교훈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20:30-31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3년 반 동안 데리고 다니시면서 온갖 기적과 이적을 보이시며 교훈하신 것과 같습니다. 기사 이적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바로 믿고 말씀에 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마술사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의 사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기도도 잘 들어주시고 체험도 많았는데 지금은 웬일인지 체험도 주시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지극히 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의지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풍랑 위를 걸어가는 베드로와 같이 체험보다 말씀을 의지하는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믿으면 말씀 그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완악한 유대인들은 체험만 구했습니다. 그토록 말씀하셔도 표적만 구합니다. 그러자 마12:39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책망하셨습니다. 바로 아세요. 체험은 의심을 떨어버리고 말씀에 서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악할수록 별 체험을 다 시킵니다.
그렇다고 이적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또 온전히 말씀을 믿고 또 그 말씀 안에서 안식하며 행하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핍박이 오고 장애가 와도 의심하지 않으며 죽으면 죽으리라 말씀에 살고 말씀에 죽는 사람이 장성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2. 장성한 믿음은 사랑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곧 사랑의 성장입니다. 살후1:3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이처럼 믿음과 사랑은 정비례합니다. 믿음이 크면 사랑도 크고 사랑이 크면 믿음도 큽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구하면서 사랑하지 못하면 그 믿음은 자랄 수 없습니다.
엡4:15에도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찬송을 해도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장성의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100% 순수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임하실 때 좌우 정승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잘못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자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에 관한 설이 많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지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자라지 못하면 가룟 유다도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랑이 없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 자식지간은 혈연관계이자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걸 알지 못하고 어느 누가 날마다 의식화시켜 “너희들 권리를 찾아라. 인간은 평등한 것인데 부모는 높임을 받으려고 하고 너희들은 맨날 섬기기만 해야 하느냐? 부모가 매를 들거나 부당하게 교육하려 들거든 서슴없이 경찰에 고발하라. 등등” 의식화 교육을 시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웬수를 키우는 것입니다.
요즘 교육현장이 그렇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마땅치 않으면 아이들이 교사를 고발하면 사법기관에서 교사를 잡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교사를 고발할 권리도 있고, 학교에서 집회할 권리도 있으며, 마땅치 않는 교육은 거부할 권리도 있고,,, 얼마나 사회주의 교육감들이 아이들을 버려놓았든지 버릇없는 아이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학생이 선생을 존경하지 않으면 어떻게 교육 다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 때는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좀 안다는 사람들이 온갖 조항을 들먹이며 “권리를 찾아라. 이제는 바보가 되지 말고 자기의 권리를 찾아라. 불 이익 당하면 절대 가만 있지 말라. 혼자가 안 되면 힘을 모아 줄 것이다. 등등” 천사의 본분과 신앙은 어디 가버리고 서로 약점 따라 잡아주고 죽이는 험악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약점을 보면 돕는 천사가 아니라 도리어 약점을 발견하면 죽입니다. 사랑이 없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는 천사입니다. 따지지 말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해야 주님의 제자입니다. 사랑하는 모습이 장성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장성한 믿음은 성령 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행2장을 보면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2:41-47) 갓 예수 믿은 사람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더니 하나님을 위해 사는 천국의 알곡이 되었습니다.
옛날 영국과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조지 위필더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들마다 설교하실 때 자기가 좋아하는 18번 설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필더 목사님의 18번 설교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설교를 듣고 한 청년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그 청년은 목사님의 자원비서를 자청하고 날마다 목사님의 가방을 들고 부흥회를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목사님께서 가는 곳마다 계속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를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는 설교를 한 70번 정도 듣고 난 어느 날, 이 청년이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시는 목사님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설교 몇 번이나 한 줄 아십니까? 자그마치 70번이나 하셨습니다.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시겠습니까?” 이때 조지 위필더가 청년에게 한 말이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왠 줄 아느냐? 네가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조지 위필더가 말하는 거듭남은 현대신학의 중생 개념이 아니라 변화되는 성화까지를 암시하는 개념입니다. 칼빈도 그렇고 과거의 신학자들은 거듭남을 예수 믿어 생명 얻는 그 순간만이 아니라 신앙 전반에 걸친 폭 넓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거듭 났을 뿐 아니라 더욱 거듭나서 변화 받기 위해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다가 모두들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학적 개념은 잘 정리했을지 모르지만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장성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자라야 합니다. 말씀과 사랑과 성령 안에서 자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말씀을 보고 배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하여 성령 충만 받아 영적으로 온전히 장성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