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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스크랩] [종려주일] 우리의 왕 예수 (슥 9:9-10)

작성자호현낙선|작성시간26.06.06|조회수1 목록 댓글 0

우리의 왕 예수 (슥 9:9-10)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시간에 “우리의 왕 예수”라는 제목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고난 받으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다스리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지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영하는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었다 해서 종려주일(Palm Sunday), 혹은 무리가 호산나 외쳤다하여 호산나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왕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에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 잘 가르쳐줍니다.

 

1.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여기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다른 누구의 왕이 아니라 네왕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왕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대로 구원의 예수 뿐 아니라 나의 왕 되신 그리스도이심까지 믿어야 합니다. 그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이후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믿다가 강력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약 3세기에 이르는 로마에 의한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인들은 다른 왕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믿는 것은 영적인 것이지 지상의 왕을 거부하는 것 아닙니다. 도리어 기독교인들은 황제와 국가에 대해 더욱 충성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성도들은 목숨을 바치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왕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이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생이요 천국이요 신앙훈련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왕을 거절하면 처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눅 19장을 보면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람을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 하나이다 민원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민원은 허사가 되고 그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는데 그가 한 일은 그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원수들을 끌어다가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왕정시대에 역적은 무섭게 다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믿을 뿐 아니라 그를 따르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7:21-23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공의로운 왕입니다.

 

공의롭다는 것은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선악 간에 공정하게 보응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왕은 국가의 최고통치자로서 나라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인데 악을 방치하고 선이 고통당하게 모른 체한다면 그것은 왕으로서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행복합니다.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간신들의 말을 듣고 정치를 잘못하고 충신들을 죽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은 필요 이상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을 하여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얼마나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시며 도탄에서 구원해 주시는 선한 왕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성령으로 임하시는 주님으로 늘 충만하면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 함이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악이 사라지고 악령은 떠나갑니다. 사탄이 다스리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구원의 왕이십니다.

 

구원을 베풀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노샤’ 즉 ‘구원받았다’(saved)는 뜻입니다. 과거형입니다. 이 말은 즉 이미 받은 구원을 누리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되 충만히 임하시면 구원을 누립니다. 그래서 사12:3에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했고, 벧전1:8-9에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1세기 유다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B.C 333년에 두로와 블레셋이 알렉산더에게 차례로 점령되었을 때 유다는 신기하게도 그 침략을 면하였습니다. 그 때 유다인들이 엎드려 기도할 때 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알렉산더를 두려워말고 대제사장은 나가 그를 영접하라.” 그래서 유다는 모든 성문을 열고 알렉산더를 맞았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대제사장은 예복을 입고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 금판을 단 관을 쓰고 알렉산더를 맞았습니다.

 

성문을 닫고 싸울 태세가 되어야 할 나라가 성문을 열어놓고 이게 알렉산더가 볼 때 보통 일입니까? 그 자체로도 무언가 느끼게 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도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오는 동안 꿈을 꾸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지 말고 돌아가라.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봤을 때 그가 꿈에 보았던 대제사장이었으므로 기뻐 달려와서 하나님의 이름에 입을 맞추고 유다백성을 축복하며 모세의 율법대로 신앙생활을 계속할 것을 권장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 우리 왕으로 섬기면 세상의 어떤 왕도 우리를 해할 수 없으며 영육 간에 주님이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4.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의 왕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대에는 존귀한 자도 나귀를 탔지만 말이 수입되는 솔로몬 이후에는 왕들이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겸손한 왕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은 높은 데가 아니라 낮은 데로 임하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막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탄은 달려들어 강압하고 자유를 빼앗지만 주님은 강압하는 왕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겸손하여 그의 말을 존중하고 통치를 받는 자에게만 다스리십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권세를 위임 받은 교회이지만 여러분이 교회를 존중해 주고 따르므로 교회의 통치가 여러분에게 작용할 뿐입니다. 이처럼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왕이신 예수여 우리를 다스려 주소서 하며 예수님이 성령으로 다스려주시기를 날마다 사모해야 다스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사모하는 자의 예수님이십니다.

 

5.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나귀 타신 모습은 정복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은 겸손하셔서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인격적이십니다. 이것이 악신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평화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 통치 하에서 평화를 외치며 패권주의 행보를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문화 종교 치안 안보 생명 다 보장하고 자유를 줄 터이니 우리에게 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보전치 못하리라 위협했습니다. 이 로마식 평화는 노예적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하늘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으면 마음의 전쟁이 사라집니다. 외부적인 평안도 허락해 주십니다. 그래서 10절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에 우리의 왕으로 우리 마음에 입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들이고 높이고 순종하고 복종하십시다. 높이십시다. 겸손하십시다. 사랑하십시다. 충성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평화의 왕 예수님께 구원과 평화와 거룩과 천국으로 다스림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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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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