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역사, 자료

[스크랩] 권서 (성경을 전하는 행상인)

작성자호현낙선|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권서 (성경을 전하는 행상인)            

삼일운동 기간에는 일부 권서는 지방의 연락책으로 민족 운동에 참여했다.

일제 10년간의 무단 통치 하에서 민중의 고통을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민족의 독립 문제를 고민하던 권서들이야말로

한 지역의 지리와 사정에 누구보다 꿰뚫어보는  사람들이었다.

 

1920년 영국성서공회의 연례보고서를 보자.
 
한 해 동안 권서 사역은 특별히 어려웠다.

어떤 권서는 ‘독립’ 운동에 연계되었기 때문에 체포 되어 경찰의 엄한 조사를 받고 있고,

몇 명은 아직 감옥에 있다.

여러 주 동안 권서 활동은 침 체되었다....

경찰은 이 집 저 집 혹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는 사람들을 매우 의심한다.

왜냐 하면 그들이 불온문서를 퍼뜨리거나 ‘위험한 사상’을 전파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일본 순사들은 “권서들을 이집 저집으로 따라 다니면서 방문했던 집 사람들에게

왜 성 경을 샀느냐”고 물었고

“ 성경을 사지 않으면 나라에서 잘 돌보아줄 것이다 ”라고 공공연하 게 말했다.

  

 한국인 권서에 대한 경찰의 방해는 만주에서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권서들은 꾸준히 성경을 반포했고,

투옥되는 권서들로 인해 일반인이 권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 다.

따라서 삼일운동 이후

일부 권서들은 해외에서 본격화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자 나 전달자 역할을 했고,

이는 성경 반포와 독립 운동이 결부된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민 족운동에 깊이 관여한 권서들의 이름과 활동을 밝히는 작업은

아직 숙제로 남아있다.

다만 《대한성서공회사 2》에서는 확인되는 23명의 명단과 간단한 활동만 정리해 놓았다.

 사도행전적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했던

 

‘아름다운 발’의 복음꾼 권서들은

독립운동의 정보 전 달, 군자금 모집 등에 참여한 독립군이 되었고,

이근식처럼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4. 성경 완역 첫 희년(1960)의 역사의식
 
기념 예배
     1960년 4월 성서완역 희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있었는데,

당시의 인식과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오늘 제2희년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려고 한다.

1960년 4월 2일 대한성서공회 는

“한국어 성서 완역 희면 기념 예배”를 정동감리교회에서 드렸다.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는 설교에서

1910년에 국가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구한국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던 종교사상, 윤리사상, 사회사상, 정치사상”도 무너졌는데,

하나님께서 성경전서를 선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배후에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한경직 목사는 당대 의제 였던 민주주의의 기초도 성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백낙준 총장은 교회 일치, 민족의 통일, 민주주의 수립을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치사를 보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복음을 밝혔던 권서들의 이야기

조선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복음화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여기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더불어 영적 황무지를 일구는 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성경보급과 복음전파에 목숨 걸었던

 

‘권서들’의 공로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권서들은 초기 한국교회에 밀려든 모진 시련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돌밭을 일구어낸 믿음의 용사들이었다.

권서(colporteur)는

목이나 어깨에 봇짐을 메고 물건을 운반하는 행상인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일반적으로 “성경책이나 전도책자 등을 사서 읽도록 권하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 최초의 권서는 “한국교회의 요람”이라는 소래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던 서상륜이다.

그가 1882년 10월 경 최초로 존 로스역 한글성경을 한반도에 들여와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서 한국교회의 터전이 일구어지기 시작했다.

권서들은 ‘추수군의 기쁨’보다는 ‘뿌리는 자의 사명’에 보다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내한선교사들은 가는 곳곳마다 권서들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 놓은 복음의 터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한 선교사들이 빠른 기간에 복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추수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송도에서 사역하던 콜리어 선교사는 1902년 지난 5년간의 활동으로 307명의 교인을 얻었는데, 이들 중 70%가 권서들의 열매였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내한 선교사들은 권서들의 활동으로

당시 편만해 있던 자신들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이 크게 누그러졌음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베시 선교사는 “우리 권서들에게는 평범한 일이 없고 또한 쉬운 일도 없다.

그들의 사역은 모든 선교사역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전도사역의 척후병 역할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전진하는 십자군의 공병이요 지뢰제거반이다.

이들은 적대적인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더 빨리 전파하려고 길을 예비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권서의 길은 신앙의 확신 없이는 걸을 수 없는 길이었다.

도처에는 온갖 경멸과 모욕 그리고 핍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과 무지, 허세, 미신 등을 통해

이 땅의 사람들을 통치하던 흑암의 세력은

‘광명의 사자’로 파송된 권서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서양귀신에 들렸다면서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터져 피 범벅이 되기는 예사였다.

심지어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권서들은 온갖 조롱과 멸시, 핍박과 환난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권서들이 가진 복음의 확신을 흔들거나

복음에 대한 열정을 사그라지게 할 수 없었다.

핍박의 강도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권서들의 열정은 더욱 빛을 내었다.

한번은 유석현 권서가 남천에서 성경을 팔고 있는데

깡패들이 “더러운 예수쟁이! 저리 꺼져" 하며 시비를 걸어왔다.

 

그리고 그를 사정없이 구타하더니만 옷을 벗기고 칼로 죽이려고 위협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당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또 올 것이다.

만일 당신들이 날 죽인다고 해도 다른 권서들이 올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격랑의 시기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생활필수품도 아닌 성경을 판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라의 주권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위태로웠고,

백성들의 생활은 헐벗고 굶주림이 찌들어 애처로웠다.

이런 백성들에게는 “한 권의 성경보다 한 줌의 쌀”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권서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 민족의 살 길이며,

이 땅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줄이라는 것을 확신했기에

온갖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권하고 또 권하면서 말 그대로 악착같이 성경을 팔았다.

권서들은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성경을 무료로 배부하지는 않았다.

돈이 없으면 곡식이나 생선, 계란, 옷, 성냥 등을 받고 성경과 교환하였다.

그러한 것도 없으면 자신들이 대신 지불하고 성경을 건네주기도 했다.

이에 대해 홉스 선교사는 “우리는 한국 사람들이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공짜로 주면 귀히 여기지 않고 성경을 잘 읽지도 않습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안교철 권서의 감동적인 체험을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나는 오늘 한 가난한 여인에게 성경을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계란이라도 하나 주면 성경을 팔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하루에 한 끼 먹고 사는 데 오늘은 그것도 먹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불쌍해서 돈을 대신내고 성경을 사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성경을 받아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잠시 후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동전을 내밀면서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책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돈을 이웃집에서 빌려왔습니다.

책값으로 받아 주십시오.’ 내가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그 여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권서들이 열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성경을 팔러 다닌 것은 이윤추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크리스토교 복음만이 어둠과 절망에서 고통당하는 이 땅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에 한 권의 성경을 파는 데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름도 빛도 없지만 묵묵히 주님께 헌신했던 그들 덕택에

복음의 불길은 민족의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번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자양분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그 자양분을 보충해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거의 아우성의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제 권서들이 품었던 십자가의 정신으로 다시 씨를 뿌리야 할 때인 것 같다.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대탐구 한국의 성경②] 조선末 배포 주역 '권서'

 

"하나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지금까지 제가 한 복된 소식이 이 책 안에 있습니다. 자, 성경책 한번 보세요." "돈이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슈."

"아이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보리쌀도 괜찮고 계란도, 짚신도 좋습니다."

"글쎄, 나는 글을 모른다니까요."

"아, 그럼 제가 글을 가르쳐 드리지요."

 

봇짐에서 ㄱ, ㄴ, ㅏ 등 갖가지 한글조각을 꺼낸 사람은 친절하게 한글을 가르쳐 주고

보리쌀 반 되를 받고 성경책을 팔았다.

"제가 다음 장날 다시 올 터이니 성경을 잘 읽어보시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성경번역의 주인공은 서양선교사였지만

, 조선 민중들에게 성경을 전해준 것은

권서(勸書, Colporteur, 책을 권하는 사람)였다.

이들은 성경배포의 주역으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도활동을 펼친 숨은 '영웅'이다.

 

◇ 성경번역자가 배포까지=1880년대 당시 조선은 외국 종교 서적의 유입을 엄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존 로스는 1882년 3월 김청송을 통해 한글성경 배포가 가능한 만주 서간도부터

우선 보급했다.

 

백홍준과 그의 친구들도 의주 지역에서 무보수로 성경전달자 역할을 자청했다.

로스는 의주에 있는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성경을 요청하자

그 해 서상륜을 영국성서공회의 권서로 파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권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서상륜의 서울지역 권서활동은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2년간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상인이나 중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신자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성하도 1883년 평양에 들어가 성경을 전했는데

이것은 토머스 목사의 순교 이후 17년 만에 재개된 전도로 의미가 깊다.

이성하가 서울에서 활동하던 서상륜에게 전해준 400권의 복음서는

서울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초기 권서들은 로스, 매킨타이어와 함께 성경을 번역한 조선인들이었다.

이응찬과 백홍준, 서상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수세자들은 로스와 함께 성경번역에 참가했고

그 성경을 직접 조선으로 가져와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조선 땅에서 씨를 뿌리기도 전에

김을 매고 '추수'까지 하는 즐거운 상황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보다 몇 년 앞서 성서공회는 은둔의 왕국에 들어갔고

로스의 열정적인 노력에 의해 한글판 신약성서가 만들어졌다.

그 책들은 장돌뱅이와 권서들, 그리고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통해

평양을 거쳐 서울까지 들어갔다…

선교사들은 의주와 평양에서 말씀에 의해 정결하게 된 적지 않은 신자들을 발견하였다."

(털리 선교사의 'Ping Yang in Korea', 1895)

 

◇ 교회사에 유례없는 성경배포=선교사들이 실제적 활동을 하기 이전에

벌써 권서를 통해 2만권에 이르는 성경과 크리스토교 소책자가 배포됐다.

이것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없는 일로

조선인의 문화수용 능력과 개신교의 주체적 출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서들은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이 가본 적이 없는 마을에 들어갔다.

그리고 길이든 여관이든 들이든 집이든 대화가 될 만한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어디서든 성서의 말씀을 이야기하면서 할 수 있는 대로 성서와 단편을 판다.

 

권서들의 활약으로 마을 전체가 선교사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 마을에 한번 들러주세요. 우리 믿는 이들을 하나로 모아 교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는 벌써부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이런 급박한 호소에 선교사들이 부응하지 못할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운지 말할 수 없다.'(번커 선교사의 'Bible Society Record', 1911)

 

성경보급을 통해 조선에는 이미 잠재적인 크리스토교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으며,

이런 바탕 위에 1887년 새문안교회와 정동제일교회가 세워졌다.

 

권서들은 전국을 돌며 교회를 세웠다.

하디 선교사는 "남감리회가 1896년 이래로 약 12년간 개설한 225개의 교회가

대부분 권서들에 의해 이뤄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권서들은 전도자나 조사(helper)를 거쳐 신학교에 진학해 목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 부흥운동의 불쏘시개 '권서'=

초기 권서들은 종교적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년) 이후 성경배포를 위한 여행이 자유로워졌다.

당시 권서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등

국가적 위기에 따라 사회적 불안이 종교적 욕구를 유발시킨 데다

각 교파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기 때문이다.

 

성경보급은 성경연구 모임인 사경회 운동으로 연결됐다.

1890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불붙기 시작한 사경회는

권서들이 전한 '예수셩교젼셔'가 촉매제가 됐다.

 

조선 땅에는 1907년 이후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권서들이 활동했다.

영국성서공회와 미국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1940년까지 활동한 권서의 수는 2000여명으로 추정된다.

권서제도는 대한성서공회의 감독 아래 1972년까지 운영됐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는 "한국크리스토교 초창기에는 교회와 목회자가 많지 않아

성경과 복음을 전한 권서의 역할이 무척 컸다"면서

"숱한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권서들은 자신의 사역에 충실해 초기 한국교회 부흥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크리스토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Bible Lovers)라고 불렀다.

1891년의 미 북 감리교 선교부의 연례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

    "There is crying need for hurrying on the translation as fast as possible."

성경말씀을 읽기를 원하는  조선크리스토교 인들이 선교사들에게

새번역을 서둘러 달라고 ‘울부짖는 요구’를 한다는 기록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이름없이 성경을 반포한 이들이 수천명 있었는데 이들이 권서(勸書)인들이다.

 

권서들은 등에 ‘복음짐’(성경책)을 지고

부르튼 발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성경을 보급했다.

그들이 다니다가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 발견되면

그 곳에서 밤을 새며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2.권서의 임무와 선발


권서는 그 사역의 특성상 사명감이 투철하고 믿음이 좋으며

특히 책판매에 탁월한 소질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권서의 선발조건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격심한 육체 노동에도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갖춘 자.

②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특심한 열정을 소지한 자.

③주위로부터 칭찬을 받는 덕망을 갖춘 자.

④돈의 유혹에 잘 빠지지 않는 자.

⑤한문을 잘 알고 어느 정도의 지 식 수준을 갖춘 자 등이었다.

 

권서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처음에 무슨 말부터 전도를 시작할 것인가? 하는 실전 판매 전략을 교육받았다.

또 상류 지식층을 상대하기 위해서 논어, 맹자 등 중국 고전을 배워야 했다.

미신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 과학적인 지식도 배웠다.

무엇보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

필요한 경우 성경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당시 윤성근이라는 권서는 말씀을 얼마나 많이 외우고 있었는지

'살아있는 성구사전'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연해주 지방에서 활약 한 권서 안용환은 러시아 정교회 소속인

두 젊은이와 진화론을 가지고 토론을 해서

마침내 이들을 복음에 굴복시켰다.

그 결과 그 지방 20가구 중 10가 구의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다.

 

이 곳에서는 본래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드리는

'합동제사의식'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의 반이 신자가 됨에 따라 자연히

이 제사가 사라져 버렸다.

 

구춘경 권서가 쓴 글에 의하면 권서는 다음과 같은 마음 자세로 사명에 임해야 했다.

 

①우리가 파는 책은 하나님의 묵시로 된 성경이며,

    사람들이 읽고 구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②겸손과 존경심으로 사람을 대할 것이며 온유하고 화평한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③핍박 을 받더라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

④숙식할 때에는 교우나 불신자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식비를 넉넉하게 갚아야 한다.

⑤상대방이 귀하든 천하든 각기 그 처지에 맞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⑥찬송가를 열 심히 연습하여 아름다운 찬송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⑦책값은 반드시 목사에게 솔직히 밝히고 접수해야 한다. 등이었습니다.

 

1908년에 권서 1인 당 월평균 성경판매량은 70권이었다.

 

그런데 권서들에 대한 조직적인 훈련 을 시킨 후에는 현저하게 성경판매량이 늘어나서

1913년에는 297권으로 4배나성장하였다.

임선호라는 권서는 일주일만에 성경 323권을 팔았고, 하루에 최다 60권을 팔기도 하였다.

 

3.권서들의 활동상황


권서들은 매일 아침 7-8시까지 찬송과 기도, 성경공부을 갖고

오전 9시부터 둘 씩 짝을 지어 판매활동을 시작하였다.

 

하루에 100-150권의 책을 '복음궤짝' 이라 불리던 상자나 봇짐에 넣어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조금 여유가 있는 권서는

당나귀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걸어다녔으며

점심은 아침에 준비한 찬밥과 짠지로 말씀을 읽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후 주위 환기, 흥미유발,

구매욕구 유발, 구매결심의 4단계 판매전략에 따라 판매를 하였다.

 

원칙적으로 퇴근 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판매와 전도에 열중하다보면 밤 9시를 넘겨 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저녁식사 후에는 다 시 '사랑방 전도모임'을 가졌고

개종자가 생기면

근처 교회에 연결시켜주고 그 지역을 담당하는 권서가 계속해서 그들을 돌보아 주었다.

 

권서들은 자기가 책임 맡은 구역은 한 곳도 빼지 않고 모두 다녔습니다.

사람 들이 밀집한 장터나, 교도소, 병원, 나환자 수용소, 매춘굴, 도박판, 아편소굴, 궁궐, 나룻터, 학교, 심지어는 산중의 절간까지 그들은 하루 평균 20Km 이상 걸 어다녔다.

 

특히 권서들이 즐겨 찾는 곳이 닷새에 한번씩 서는 장터였다.

그들은 장터 한 구석에

성경과 카렌다(달력), 쪽복음, 교리문답 등을 펼쳐놓고 찬송 을 부르며 열심히 성경을 팔았다.

부모 손잡고 장에 따라온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주고는 이들을 감동시켜 성경을 팔기도 하였다.

해질녘이 되면 술에 취한 장꾼들을 피해 여인숙으로 가서 그 곳에서 성경을 팔았다.

그러나 격동기 가난한 백성들에게 생활 필수품도 기호품도 아닌 성경을 판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땅을 본격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땅과 곡식마저 빼앗기니 헐벗고 굶주림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런 백성들에게는 한권의 성경 보다 한 줌의 쌀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러나 권서들은

"사람이 떡으로 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를 외치며

확신있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예 한글을 가르 쳐서라도 성경을 팔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조선의 백성들을 구원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지독하게, 끈질기게, 악착같이 성경을 권하고 팔았다.

권서들은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성경을 무료로 배부하지는 않았다.

돈이 없으면 곡식이나 생선, 계란, 옷, 성냥등을 받고 성경과 교환하였다.

이에 대해서 홉스선교사는 이렇게 썼다.

"우리 는 조선 사람들이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공짜로 주면 귀히 여기지 않고 성경을 잘 읽지도 않습니다."

 

권서들은 가난과 무지와 미신과 서양종교에 대한 나쁜 선입관 등으로

많은 경멸 과 모욕과 핍박을 받았다.

서양귀신에 들렸다며

마을 사람들이 던지는 돌 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피로 물들기도 하였다.

산속을 헤메다가 산적을 만나거나 호랑이, 반달곰에게 찢기기도 하고

시장터에서 몰매를 맞기도 하였다.

산골마을을 심방하다 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동사하기도 하였다.

일본순사에게 독립군 첩자로 오인 받아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김창모 권서같은 사람은 일본순사에 의해 독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들 은 형편없는 식사에 더럽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객사에서 자야 했다.

그들 이 겪은 고통과 어려움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순직하거나 병들거나 일찍 은퇴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석현 권서는 남천에서 성경을 팔고 있는데 깡패들이 시비를 걸었다.

"더러운 예수쟁이! 저리 꺼져" 깡패들은 그를 죽이 고자 그의 옷을 벗기고 칼로 위협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또 올 것입니다.

만일 당신들이 날 죽이면 다른 권서들이 올 것이요.'

 

안교철권서는 자신이 경험한 감동적인 체험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 는 오늘 한 가난한 여인에게 성경을 권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계란이라도 하나 주면 성경을 팔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하루에 한끼 먹고사는 데

오늘은 그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불쌍하여 내가 돈을 내고 성경을 사 줄테니 읽어보라고 했다.

성경을 받아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던 그 여인은 잠시 후 동전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책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 이 돈을 이웃집에서 빌려왔으니 책값으로 받아 주십시오.

 

" 내가 한사코 괜찮다 고 했지만 그 여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처럼 아무리 가난해도 반드시 대금을 지불하던 풍토는

결국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자립할 수 있는 영적 환경 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권서들은 하루100리 길을 걸어 성경 하나를 팔고 나서

차디찬 꽁보리밥에 짠지 하나를 얹어서 도시락을 먹을 때는 참으로 꿀맛이었다.

때로는 하루 종일 한 권도 팔지 못한 채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언제나 스피릿이 충만했다.

 

열 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희생적인 노력으로 일한 권서들의 수고는 점점 열매를 맺었다.

1914년 대구에서 미국 선교사 블레어가 성경공부반을 열어 교인들에게 어떻게

   크리스토교를 믿게 되었는가 물어 보았다.

 

그때 50명 중 12명은 개인전도를 통해, 2명은 교회에 놀러왔다가, 2명은 전도지를 보고,

그리고 20명 은 권서가 전해준 복음서를 읽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1902년 송도에 서 콜리어 선교사는 5년 간의 활동으로 307명의 교인을 얻었는데

이중 70%가 권서들의 열매였다고  말했다.

 

클라크 선교사는 자신과 함께 권서 한덕니씨를 가리켜

'나의 별'과 같은 권서라 고 칭찬하였다.

그는 한덕니의 하루 행적을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오늘도 10마일 정도의 산골마을을 방문하고 왔다.

 

 나는 그에게 오늘은 몇 집이 나 갔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교사님! 오늘은 기껏해야 30집 밖에 못 갔습니다.

선교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단지 책만 팔고 그냥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쉽지요.

그러나 저는 책을 산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러 갈 때마다

권서들이 피와 땀으로 일궈논 사명의 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권서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권서들은 외국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을 없애주고 현지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세례요한'적 사명을 감당하였다.

 

베시선교사는 권서들의 공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 권서들에게는 평범한 일이 없고 또한 쉬운 일도 없다.

 

그들의 사역은 모든 선교사역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고 전도 사역의 척후병 역할이다.

그들은 영원히 전진하는 십자군의 공병이요 지뢰 제거병들이다.

이들은 이 적대적인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더 빨리 전파하려고 길을 예비하고 있다."

 

권서 중에는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인권서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형제들이 들어갈 수 없는 부엌과 바느질방을 개척하였다.

 

용기종기 모여 앉아 남편 흉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여인들에게

부인권서들은 다림질도 도와주고 함께 파도 다듬으면서 복음을 전했다.

 

당시 여인들은 글을 모르는 경우 가 많았기 때문에

부인권서들은 하루 종일 성경을 읽어주고 저녁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부인은 150명에게 글을 가르쳤고 10,110에 게 성경을 읽어주었고

13,066권의 성경을 판매하였다.

 

원다비다 부인은 과부에다가 자식도 없이 주막에서 일하며

막걸리와 담배로 한 많은 인생을 살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권서 부인들의 전도로 거듭나 모은 재산을 몽땅 드려 성경과 찬송가를 사서 나누어주었다. 그 여인은 65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70 세 이상까지 여름 장마와 겨울의 폭설을 견디고 산간지대를 다니면서

3천명에게 설교하고 1,750권의 성경을 판매하여 '평화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처럼 권서들이 수고한 결과 1908-1940까지

한국의 전체 성경 보급의 85%가 권서들의 '부르튼 발'과 '복음짐'에 의해

이루어졌다(참고1938년은 940,416 권).

 

선교사 그리어슨은 이렇게 말했다.

 "권서들의 사역을 들어보면 마치 사도행전의 한 장을 읽는 것 같다."

이처럼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께 충성한 권 서들로 인해

무지와 가난과 우상숭배의 나라 한국은 점점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술고래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성황당을 섬기던 무당이 신자가 되었으며, 승려까지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다.

고통과 환난을 감내하며 적극적으로 복음사역에 투신했던

권서들의 피땀어린 희생 덕택에 한 국 교회는 점점 견고히 서고 부흥할 수 있었다.

권서들이 이처럼 열악한 환경과 싸우면서 열심히 성경을 팔러 다닌 것은

결코 어떤 이윤을 얻고자 하는 사업적인 목적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말씀만이 어둡고 절망적인 조선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생명선임을 믿었기에

한 권의 성경을 파는 데 그들의 목숨 을 걸었다.

 

로마서 10: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삼천리 방방곡곡을 "성경보따리"를 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부르트고 찢긴 권서들의 발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발이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처럼 묵묵히 주님에게 헌신한 권서와 같은 사람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인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창골산 봉서방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