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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이식 장군의 사우(祠宇) 전경

작성자피카소|작성시간10.08.23|조회수302 목록 댓글 0

 

 

 

 


 

진주 봉산사(鳳山祠)는
130만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성지(聖地)이다.

비록 고구려는 망했어도
그 후예들은 1400여년이란
기나긴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고구려 명장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시조(始祖)로 모셔
이 곳 사당을 지켜 왔고
같은 후손들임을 자랑삼아
히마다 3월 10일(음)에는
봄제사를 모시고 있다. 

 

 

         

- 봉산사(鳳山祠) 구내에 있는 강이식(姜以式) 장군 사적비 -

 

백두대간의 정기가 남쪽으로 뻗은 경남 서남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지닌 천년고도 진주. 일찍이 고려 때 이인로는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라고 극찬할 만큼 아름다운 진주는,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추었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다.

비봉산은 진주의 진산(鎭山)이다. 풍수지리에서 산맥 중 음양이 모이고 산수의 정기가 응집된 곳을 혈이라 하는데, 그 혈장 있는 명당(明堂)의 뒤에 있는 산을 진산이라고 한다. 곧 진주의 정기가 응집된 곳이 바로 비봉산이다.
이 비봉산 자락에는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 장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봉산사라는 사당이 있다. 봉산사에 영정이 모셔진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姜以式)장군은 고구려 병마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에 수문제가 침략할 야욕으로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왕은 군신을 모아 놓고 이에 회답할 것을 논의 할 때 그는 이와 같은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이 이에 수긍하고 싸울 것을 명하자 군사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臨楡關)에서 수나라 군사 30만을 단번에 격퇴하고, 603년에 수양제가 군사 100만으로 다시 침략할 때 중신회의에서 요동성 일부를 떼어주고 강화할 것을 논의 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을지문덕과 함께 요동성 살수(청천강) 등의 싸움에서 수군을 대파하는 등 공을 많이 세웠다. 그의 후손인 강진이 진양(진주)후에 봉해지며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 금천, 안동, 백천 등 9본이 있으나 모두가 대종인 진주 강씨의 지파로서 현재 진주 단일 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진주 강씨의 시조 강이식은 모든 강씨의 도시조가 된다.

강이식 묘소는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 앞에 있으며, 음력 4월 10일에 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봉산사(경남 진주시 상봉서동 871-1)에서 제사를 지낸다.

<윤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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