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팔백스물다섯 번째
나와 너 그리고 그것
언젠가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글을 읽다가 그가 인간관계를 ‘나와 너’, ‘나와 그것’, 그리고 ‘그것과 그것’으로 구분한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의 설명으로 보면, ‘너’는 서로를 인격으로 존중하며 깊이 만나는 2인칭 관계로서 겉으로만 보면 가장 많은 관계가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가슴이 막혔습니다. 의미 있는 소통은 없고 그냥 존재하는 대상이 ‘그것’이었습니다. 대중 속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이 단지 ‘거래’를 위해 만나거나, 그저 얼굴 한 번 비치고 지나치는 대상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상대도 나를 그리 상대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나는 편리하게 만나면서 상대에게는 관심 있게 만나 달라고 요구하는 게 우리의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럽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며 병든 이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모든 이를 ‘나와 너’로 상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제거하려 했고, 군중은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대로 외치며 먹을거리를 주는 예수만 기억할 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를 너희의 ‘당신’으로 영접하라”고 외쳤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했다고 고백합니다. 또 많은 이가 그렇게 해서 성도聖徒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와 너’ 2인칭의 관계가 아니라 ‘저 높은 곳에 계신’ 3인칭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자기를 2인칭으로 대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예수처럼 대접받기를 원하는 신도들이 많아 목사님은 오늘도 피곤하다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