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가 닥치면 부디 ‘두 가지 상(二常: 정상, 무상)과 두 가지 인(二因: 인연, 인과)’의 약을 복용하세요
작성자정토행(淨土行)작성시간25.09.05조회수160 목록 댓글 16나무아미타불 ()()()
고뇌가 닥치면 부디
‘두 가지 상(二常:정상, 무상)과
두 가지 인(二因: 인연,인과)’의
약을 복용하세요
글: 종도법사
정토종 편집부 번역
1. 괴로움은 정상正常적인 것입니다
'사바娑婆'란 '참고 견디다(堪忍)'라는 뜻입니다.
이미 사바세계에 왔으니 당연히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참고
견뎌야 합니다.
제왕과 재상에서부터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걸인에 이르기까지,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누구라도 이 괴로움을
면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인생은 괴로움이다'라고
하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판정이자, 지극한
자비로 깨우쳐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근거 없이
품고 있는 헛된 집착과 바람을
깨뜨려 주시니, 이는 털끝만큼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 일들이 많아도, 그 본질을 파고들면
괴로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마치 황련(黃連, 깽깽이풀의
뿌리줄기) 가루로 여러 가지
사탕 모양을 만든 것과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달콤해 보이지만, 맛보면
오히려 쓰고 먹을수록 더욱 씁니다.
고통이 인생에서 늘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되면, 번뇌를 만났을 때
예상치 못한 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담담해집니다.
그러면 괴로운 일 자체 외에 다시 불평하는 마음, 헛되이 바라는 마음, 회피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처럼 고통 위에 또 다른 고통을 더하는 것은, 무의미한 고통을 더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괴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더 큰 괴로움을 멈출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괴로움은 수많은 파생물들을
만들어 냅니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괴로움은 사실
괴로움 자체에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2. 괴로움은 무상無常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영원한 것은
결국 다하게 되고, 높은 것은
반드시 떨어지며,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살아있는 자는
죽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고통은 정상적인 일이지만,
고통 또한 무상합니다.
푸른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바뀌고,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고, 아침이
오고 저녁이 가는 것 모두가
무상함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무상함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가보옥(賈寶玉: 소설 홍루몽의
남주인공)은 자견(紫鵑: 임대옥의 시녀)이 무심코 임대옥(林黛玉: 홍루몽의 여주인공)이 곧 가부賈府를
떠나 소주蘇州로 돌아갈 것이라고
떠보자, 그 한마디에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이 자극을 받아 결국
정신이상을 일으켜 "거의 반쯤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무상한 이별의 고통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무상함에도 많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대지를 덮어도
결국 무상함이 찾아와 해가 뜨고
낮이 됩니다.
폭우가 쏟아져 홍수와 재앙을
일으켜도 결국 무상함이 찾아와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져 홍수가
그칩니다.
천지의 시간은 무상함으로 인해
사계절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무상함으로 인해 태어나고,
어렸다가 건장해지고, 건장했다가
늙고, 늙었다가 죽고, 옛사람이 가면
새사람이 또 태어납니다.
만사가 다 그러하거늘,
어찌 고뇌만 예외이겠습니까?
눈앞의 고뇌가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일단 무상이 닥치면 고뇌는 구름이나 연기처럼 흩어지고, 적은 친구로
변하며, 소원했던 관계는 친밀하게
바뀌고, 원한은 사랑이 될 수 있으며,
장벽은 능히 허물 수 있고, 패망은
재생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함의
공덕이 아니겠습니까?
괴로움이 이미 무상할진대, 어찌
항상 괴로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3. 괴로움은 인연因緣입니다
인연관(因緣觀: 인연에 대한 관점,
이해)은 성도문聖道門만의 독특한
이론이 아니라, 모든 불법의 기초
사상이자 기본 이론입니다.
불도를 배우는 사람이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얼마나 깨닫느냐에 따라,
마음속의 자유롭고 여유로운 정도도
그만큼 달라집니다.
(혜정상인)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 인연에 따라 사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세상은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니, 너무
집착할 필요 없습니다."
일은 본래 간단하지만, 감정이 복잡해지면서 일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사람이 인연의 시각으로 수많은 사건들의 흥망성쇠를 바라볼 수 있다면, 감정을 사건에 지나치게 섞어 넣는 것을 크게 피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을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휘몰아치고, 사라지고, 허망해지는 뿌리 없는 구름과 안개처럼 바라볼 수 있다면, 진정으로 차분하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이고,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경에는 교훈을 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목수와 화가가 있었는데,
둘 다 기술이 뛰어났습니다.
목수는 나무로 여인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단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나무 여인은 걸을 수도 있고
움직일 수도 있었으며, 손님을 맞아
술을 따르고 차를 내오는 등 모든
일을 척척 해냈습니다.
단지 말을 할 수 없었죠.
어느 날 목수가 화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는, 일부러 그 나무 여인에게
손님을 대접하게 했습니다.
술과 음식을 바치는 나무 여인을 본
화가는 그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진짜 여자라고 착각하고는 욕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 목수는
화가에게 "이 여인을 남겨둘 테니
함께 자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화가는 크게 기뻐하며 잠들기 전
나무 여인을 불렀지만, 여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화가는 여인이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하여 다가가 손을 잡았고, 그제야 비로소 진짜가 아닌 나무 인형임을
깨달았습니다.
화가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며 생각했습니다.
'이 목수가 나를 속였으니, 나도
복수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이에 그는 벽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림 속 자신은 목에 밧줄을 매고 목매달아 죽은 모습이었고, 그림을 완성한 뒤에는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 목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손님이 목매달아 죽은 것을 보고는
크게 놀라 황급히 칼을 찾아
밧줄을 끊으려 했습니다.
그때 화가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크게 웃었고, 목수는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화가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속였고, 나도 당신을
속였으니, 주인과 손님 둘 다 샘샘입니다. 이제 누구도 누구에게 빚진 것이
없죠."
부처님께서 이 이야기를 마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속이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이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나무 여인과 그림은 모두 무정에
속하며 모두 허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마음과 영혼이 있고
육신을 지닌 유정(중생)은 반드시
진짜일까요?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정말 진실일까요?
사실 그 본질은 다를 바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와 그림이 모여 있는 것일 뿐이며, 각자의 인연과 업력에 따라 당신이
나를 속이고 내가 당신을 속이는,
서로를 속이는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염불하는 사람이 만약 항상 이 이치를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과 타인을 비춰본다면, 번뇌의 비눗방울은 바늘 끝에 닿는 순간 터져버릴 것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통과 재앙을 건넌다(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철저하게 '관자재觀自在'하게 되기는 어렵겠지만,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집착을
줄이고 망상을 덜어내어 어느 정도의
고통과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4. 괴로움은 인과因果입니다
선도 대사께서는『반주찬般舟讚』(아래 원문은『법사찬』이 아닌
반주찬의 내용. 아마 종도 스님께서
착오하신 듯.)에 기록하셨습니다.
중생이 처음 극락세계에 이르러 아미타불을 뵙고는, “부자父子가 서로 맞이하여 함께 큰 법회에 들어가, 곧바로
육도의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을 묻네.”
라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육도의 괴로움을 이야기하며 저마다 "합장하고 슬픔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합니다."
이때 아미타부처님께서 의미심장하게 대중에게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으니 남을 원망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마음속으로
남을 원망하게 됩니다.
마치 모든 만남에는 다 이전의 원인이
있고, 모든 행동에는 다 그 결과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인과因果를 돈독하게 믿을 수 있다면, 괴로움이 닥쳐도 근심하지
않고, 번뇌를 만나도 원망하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마땅히 '근기에 대한 깊은 믿음(機深信)'을 갖춘 염불인은 자신이 죄악생사범부罪惡生死凡夫라는 것을 깊이 믿어야 합니다.
'죄악'은 사실상
'최악(最惡: 최고로 악함)'입니다.
항상 마땅히 자신의 죄가 다른 사람보다 세 배는 더 무겁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결코 억지로
꾸며낸 말이 아닙니다.
즉 (혜정상인께서 정토종종풍(속제 제3조)에서 세우신(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악함이
남보다 더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최악이라면, 마땅히 가장
큰 괴로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나는 가장 악한 사람이니, 가장
괴로운 결과를 맛보고,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나는 가장 악한 사람이니, 남을
평가하거나, 따지거나, 비판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마음은 걱정 없이 평온합니다.
- '나는 가장 악한 사람인데, 어찌 복이 있어 하는 일마다 성공하겠는가?'
모든 일이 불공평해도 마음은
걱정 없이 평온합니다.
- '나는 가장 악한 사람이니, 마땅히
가장 낮은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괴로움을 달게 받아들이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염불하는 이는 이미 소멸된 괴로움이
대해의 물과 같고,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은 털끝에 맺힌 물방울과도
같습니다.
생사의 큰 근심은 이미 사라졌으니,
나머지 고통은 모두 뿌리도 힘도
없는 것이, 마치 저무는 해, 봄날
꽃샘추위, 가을 낙엽, 꺼져가는
숯불과 같습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비록
괴로워도 오히려 즐겁습니다.
이는 마치 내일이면 풀려날
죄수와 같습니다.
비록 풀려나기 전날 밤 모기에 물려
고생하지만, 내일 자유를 얻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매우 즐거워 모기에
물리는 것조차 기쁘게 여깁니다.
이는 왕생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비록
즐거워 보여도 여전히 괴로운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염불하는 이는 평소에 업이 성취되어
(평생업성), 언제든 죽을 수 있고,
걸음걸음마다 왕생을 구하니, 죽음이라는 가장 큰 괴로움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데, 하물며 눈앞의 구름과 연기 같은 고통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