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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사회

체 게바라는 누구인가

작성자선통박영수|작성시간09.05.08|조회수34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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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는 누구인가 --





나는 요즘 탱고에 관심이 많아 시간 틈틈이 검색을 한다 .

아르헨티나 ,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클릭하다보면

탱고와는 다른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다름아닌 ‘체 게바라 ’다 .



‘체 게바라 ’는 미국여행하다가 멕시코 국경근처에 가면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그의 티셔츠를 종종  만난다 .

체 게바라에 열광하는 청춘들이 내 주변에 많아  

볼  때마다 몇 장씩 사서 인생의 대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선물도 했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어들 ...연결고리를 따라가는

지식탐구 재미에 발동이 걸려  체 게바라 관련 어록들을

옮겨본다 . 인터넷 지식샘의 똑똑함에 감탄하는 순간이다 .







(코옐로 )



연금술사 작가 파블로 는 이런 말을 했다 .

“ 열일곱 살 때 나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난 체 게바라와 같은 급진적인 혁명가에 심취해 있었다. 엄격한 부모는 그런 나를 미쳤다고 판단했다. 퇴원한 뒤 내 마음은 황량했다. 부모조차 사랑해 주지 않은 자식이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약에 손댔고 자살을 시도했다. 네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이 정도면 평범한 것 아닌가.”


 

 

 

체 게바라(Che Guevara) 탄생 80주년 - 그의 삶과 혁명



사르트르가 ‘우리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평가한 체 게바라. 1928년, 그가 탄생한지 80년이 지나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41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1997년 여름, 볼리비아의 비야그란데 공동묘지에서 쿠바와 아르헨티나의 전문가들에 의해 죽은 지 30년이 지나서야 그의 유해가 발굴되었을 당시 유럽과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그를 기리고 있다. 세상을 떠난 후,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은 지지자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인지 체 게바라, 그의 삶과 혁명에 관해 돌아본다.



체 게바라는 의사이자 고고학자였으며 시인, 언론인, 아마추어 사진가 뿐만 아니라 혁명 후 쿠바국립은행의 총재까지 다양한 모습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그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바로 ‘혁명가’ 라는 타이틀일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이자 혁명이론가로서, 1960년대의 좌익급진주의자들의 영웅이 되었던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8-1967)로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Rosarino)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건축가였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아일랜드 계 귀족의 후손이었으며 어머니 세실리아 데 라 세르나는 독립전쟁 당시의 스페인 계 군인집안의 딸로 결국 그의 부모는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2살 때 천식이 발발하여 초등학교 과정을 어머니와 함께 자택학습(Home Schooling)으로 습득했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프로이드의 저서에 심취하며 당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고 좌익 파시스트가 득세한 독재국가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환멸로 ‘反 페론'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University of Buenos Aires)에 진학한 게바라는 의학을 전공하며 처음에는 자신의 지병이었던 천식에 관심을 보였으나 차츰 나병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급진적 학생운동에 가입하지 않고 관망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1년 의사시험에 합격한 이후 그는 자전거로 10개월 동안의 긴 여행에 접어들었는데 칠레에서 한때 좌파정부를 세워 대통령에 올랐다가 반혁명 혐의로 사형 당한 아옌데(Salvador Allende)를 만나기도 했으며 베네수엘라, 마이애미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이후 그는 피부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으나 ‘의사’로서의 길을 가지 않고 혁명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접한 이후 게바라는 과테말라로 건너가 혁명가로서의 본격적인 여정을 걷게 된다. 과테말라의 사회주의 정권이 전복되자 게바라는 돌아와서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잠시 동안 의사로서의 삶을 살았으나 두 달 만에 가운을 벗고 1954년 다시 멕시코로 가서 그곳에 망명해온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합류하게 된다.



카스트로 조직에 가담한 이후 게바라는 1956년 드디어 쿠바에 상륙하게 되고 카스트로의 게릴라전쟁을 도와 쿠바의 독재자 바띠스따(Fulgencio Batista)를 축출하여 ‘쿠바혁명’을 마침내 성공으로 이끌었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고 쿠바공산당을 접수함과 동시에 게바라는 쿠바의 산업부 장관(1961-1964)을 역임하는 등 ‘쿠바의 제2인자’의 위치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1965년 쿠바에서 자취를 감춘 게바라는 그 이듬해 볼리비아의 반군 지도자가 되어 나타났으나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붙잡혀 1967년 10월 9일 발레그란데(Vallegrande) 근처 이름 없는 작은 촌락 라이게라(La Higuera)에서 총살되어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란만장한 짧은 삶을 마감했다(비밀리에 매장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에야 발견되었다).



■ 혁명가로서의 여정



베레모에 우수에 찬 눈빛으로 시가를 물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인 체 게바라. 그런 고독하고 낭만적인 이미지가 우리에게는 ‘체 게바라’라는 사람에 대한 이미지와 동일시된다. 하지만 의대생이었던 체 게바라에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고 그러한 현실은 그가 고독한 혁명가로서의 길을 택하게 하였다.



청년시절 게바라는 남미 도보여행을 통해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과 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며 인간해방에 기초한 인식의 굳건한 토대를 쌓게 되었다. 1952년 1월 초에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칠레와 페루, 콜롬비아, 카라카스를 거쳐 미국 마이애미까지 8개월 간에 걸친 여행을 했다. 그는 게릴라 활동 중에 그랬던 것처럼 당시여행기간 내내 일기를 썼으며 이것이 후에 펴낸 여행기인 [나의 첫 여정 : 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까지의 오토바이 여행]이다. 이 여정을 통해 모험심 많은 한 중남미 청년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의사에서 급진적인 변혁주의자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게바라는 인생에서 두 번 안락하게 향유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버리게 되는데 그 첫 번째는 바로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볼리비아로 가서 혁명가의 길로 접어든 1953년이다. 그가 볼리비아 행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 볼리비아의 에스텐소로 대통령이 집권해 개혁을 추진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텐소로의 개혁은 게바라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조국에서 추방된 반페론주의자이자 아르헨티나의 변호사였던 리카르도 로호와의 만남을 통해 12월 과테말라 행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과테말라에서는 혁명당 소속의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이 혁신적인 정책과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는데 게바라는 아르벤스의 정책에 절실히 공감하였으며 아르벤스의 사상에 경외심을 갖고 "민중은 물질적으로 굶주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굶주려 있다"는 그의 말을 삶의 명제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미국 CIA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간섭은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며 과테말라 역시 여러 지역이 CIA의 조정을 받고 있는 군대에 의해 폭격을 받았다. 그 결과 아르벤스 정권은 붕괴되고 그는 새 정권에 의해서 수배를 받게 되어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과테말라 좌익정부의 전복을 계기로 게바라는 마르크스-레닌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미국과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과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1954년 9월 21일, 멕시코로 망명한 게바라는 이곳에서 혁명이론과 마르크스-레닌 사상, 각국의 민족해방전쟁의 전술을 탐독하며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 내전 후 망명한 스페인 및 사회주의 정치가, 사상가, 지식인들의 활동무대였다는 점에서 게바라가 혁명이론과 활동을 준비하기에 적합한 나라였다.



굶주림과 억압으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탐독하며 철저한 급진주의자로 변해간 그는 이곳에서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첫째 부인인 일다 가데아(Hilda Gadea)와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이다. 가데아는 과테말라에서 활동하다가 멕시코로 망명한 아프라(APRA) 당원 출신의 진보적인 여성으로 게바라에게 인간적, 사상적 동지로서 동반자 역할을 해주었다(하지만 게바라가 게릴라전에서의 동료였던 두 번째 부인이 된 알레이다 마르츠 델 라 토레와 사랑에 빠지며 1959년 이혼한다). 1955년 여름에는 멕시코로 추방당한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되었는데 게바라는 쿠바해방운동에 가담해 달라는 카스트로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카스트로는 그를 쿠바 진격대의 의사로 임명하게 된다.



게바라와 멕시코에 있던 망명 쿠바인들은 철저하고 강도 높은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교관은 스페인 공화군 장교 출신인 알베르토 인 바요(Alberto Bayo) 대령으로 그는 게릴라전 전투경험과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 등을 가르쳤다. 게바라는 훌륭한 전투요원으로 바요의 유망한 제자이자 그룹의 리더가 되어 이 때부터 이탈리아어로 ‘단짝'이라는 의미의 '체'(Che)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만남을 통해 쿠바 혁명의 준비가 본격화되며 그들은 1956년 11월 '그란마호(號)'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하여 쿠바 상륙까지 게바라는 이 여정을 통해 '낭만주의적 청년'에서 ‘총을 든 게릴라'로 변하게 되었다. 1960년 한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행을 통해서 나는 가난, 기아, 질병과 직접적으로 접했다. 그러나 나는 병든 아이들을 충분히 치료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내게는 충분한 약품과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계속적인 압제로 생긴 그들의 비굴한 모습을 보았다. 거기에서 내게 분명해진 것은 유명한 학자나 의학에 훌륭한 공헌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안 것이다. 이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PR, PEACE & POLITICS  장소팔  )







 


 

다음은 명언이다 .

'체 게바라'의 어록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리얼리스트(realist)란 우리말로 "현실주의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객관적 사실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이른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말은 곧,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되 그것을 맹목적으로 쫓지 않겠다는 말로 생각한다.

나아가 잘못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한 커다란 이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출처 : http://blog.daum.net/pinetree1228/9632399 

Tag : 체게바라 



네이버

집필자 : ethnos44



-체 게바라가 남긴 말--



1.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1967)



2.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농림부 장관 재직시절)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4. 이 곳은 전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콩고로 떠나기 전)



6. 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험주의자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저는 단지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온몸으로 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험주의자라는 공격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편지 중에서)



7. 나는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로 본다.

9.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인터뷰 중에서)

10.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는 것을 택하겠다.





11. 피델에게는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

(체가 죽기직전에 남긴 말 즉 유언..아내의 재혼까지 이야기하는 그의 용기..)



(출처 : '체 게바라의 명언' - 네이버 지식iN)







--체 게바라 평전 --( 알라딘 서재 )



체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를 착취해 들어오고 있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세력에 분노하고  가난과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부조리와 모순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면서 쿠바, 아프리카의  콩고, 남미의 볼리비아의 혁명에 전력을 다 한 인물이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의사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천식으로 고생하면서까지 자기 조국도 아닌 남의 나라를 위해 혁명을 선택했다  전투를 치르는 기간 중 농민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 인간다운 모습을 보면서 진정으로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과 함께한 휴머니스트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체 게바라는 전투를 하는 중에도 늘 책을 가지고 다녔고, 문맹자들이 대부분인 게릴라 들에게 글자를 모르면 왜 총을 잡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학교를 만들어 가르쳤는데, 항상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흔히 자기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약탈을

일삼는 게릴라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

체 게바라는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주장한다.  책의 첫부분에는 체 게바라가 남긴 명언 중 하나인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라는 말이 나온다. (알라딘 서재 )





-엠파스 --

--체 게바라 명언 --





행동하지 않는 명언은 쓸데없는 일이다.

Words that do not match deeds are unimportant.




이 돈키호테같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모험을 앞두고, 한마디 하겠다, 진정한 혁명은 사랑의 위대한 감각에 의해서 인도된다. 행동하지 않는 진실된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살아있는 인류의 사랑이 현실의 행동으로 변모되도록 매일 노력해야만 한다, 움직이는 힘으로서 모범으로 행동으로 봉사해야 한다.

At the risk of seeming ridiculous, let me say that the true revolutionary is guided by a great feeling of love. It is impossible to think of a genuine revolutionary lacking this quality... We must strive every day so that this love of living humanity will be transformed into actual deeds, into acts that serve as examples, as a moving force.






승리한 후 축제의 기분에 젖지 않는 삶을 살라, 그러나 패배를 넘어서서 압도하고 정복하는 삶을 살라.

Live your life not celebrating victories, but overcoming defeats.






혁명적인 삶은 혁명을 위해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적인 삶은 혁명을 위해서 기꺼이 죽는 한 인간의 가슴이다.

The revolution lives on not in words to live for it, but in one's heart to die for it.




더 많이 성취하기 위해서 너는 먼저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

To accomplish much you must first lose everything.






우리들이 목표를 위해서 기꺼이 죽지 않는 한 우리들이 살 수 있다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We cannot be sure of having something to live for unless we are willing to die for it.



 --엠파스 ,체 게바라 명언 --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 - 가슴을 울리는 혁명가의 삶 -

그리고 --영화 CHE  --

위대한 게릴라 전사의 쿠바혁명기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물 중의 한명으로 칭송받았던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의 혁명을 꿈꾸다가 쓰러진지 40년이 지났다.

그동안 게바라와 함께 쿠바에서의 혁명을 성공시킨 피델 카스트로도, 그리고 그들이 세운 정부를 그야말로 눈엣가시처럼 여긴 미국의 지도자들도 모두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피델 카스트로와 아르헨티나의 의사 출신 게릴라 지도자 체 게바라가 이끌었던 반세기 전의 쿠바혁명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게바라를 가장 증오하던 나라 미국의 스티븐 소더버그가 메가폰을 잡고 장장 4시간에 걸친 <체>를 통해 그를 다시 조명해 본다.



아르헨티나 출신이었던 체 게바라는 혁명 초기에 쿠바 출신 혁명동지들로부터 이방인으로 배척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란마 호를 타고 멕시코 만을 건너 사선을 넘는 투쟁을 하면서 그들에게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전폭적인 지지도 한 몫을 했다. 의사인 체는 평생 의사라고는 단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쿠바 민중들을 진료하면서, 그들 사이에 혁명의 대의를 전파하고 문맹퇴치를 위한 또 다른 혁명을 수행해 나간다.  --영화,-- 체 --

게바라 [Guevara, Che, 체 게바라]
출처: 브리태니커

본명은 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 6. 14 아르헨티나 로사리오~1967. 10 볼리비아.
게릴라전의 이론가·전술가.
쿠바 혁명(1956~59)에서 이름을 날린 공산주의자로 후에 남아메리카의 게릴라 지도자가 되었다.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천식을 앓았으나 운동선수와 학자로서의 재능이 뛰어났으며 1953년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서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몸소 체험했으며,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라틴아메리카를 각각 독립된 여러 국가의 집합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경제적 실체로 보았다. 또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위해 전대륙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53년 그는 과테말라로 갔다. 그곳에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진보적인 정권을 이끌고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고 있었다(이때 게바라에게 '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그것은 아르헨티나인들이 말할 때 흔히 붙이는 감탄사의 하나임). 1954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한 쿠데타로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미국이 진보적인 좌익정부에 반대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이 전세계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그의 계획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과테말라를 떠나 멕시코로 갔고, 그곳에서 쿠바인인 카스트로

형제(피델·라울)를 만났다. 카스트로 형제는 그때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며

 

쿠바의 풀겐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전복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의 군대에 합류해 1956년 11월말에 쿠바의 오리엔테 주(州)에 상륙했다.

 

그 군대는 상륙 즉시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발각되어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부상당한 그를 포함한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 산맥에 이르렀는데, 그후 그곳이 게릴라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란군은 바티스타 정부군으로부터 무기를 빼앗고, 주민들의 지지 속에 신병을 모집해 차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카스트로가 가장 신임하는 보좌관이 되었고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는 싸움에 2년이나 참여했는데, 〈쿠바 혁명전쟁 회고록 Pasajes de la guerra revolucionaria〉(1963)에 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959년 1월 2일, 승리한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들어가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운 후, 쿠바 시민이 되었다. 그는 혁명군에 가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부에서도 유능한 인사였으며

 

쿠바를 대표하는 산업대표단을 이끌고 해외에도 나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인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대 초반, 쿠바의 정책과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많은 연설과 저술을 했는데, 그때의 저술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이 쿠바식의 공산주의를 논한

〈쿠바에서의 인간과 사회주의 El socialismo y el hombre en Cuba〉

 

(1965)와 게릴라전의 교본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게릴라전 La guerra de guerrillas〉(1960)이다.

 

1965년 4월 이후 공적인 생활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후 2년간 그의 활동과 거처는 비밀에 붙여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다른 쿠바의 전사들과 함께 콩고로 가서 내전에 참전하고 있는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1966년 가을, 볼리비아로 잠입해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통솔했다. 1967년 10월 8일 이 부대는 볼리비아 육군 특별파견대에 의하여 전멸되었고,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했다.
A. A. Sinclair 글 | 朴善禧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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