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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작성자선통박영수|작성시간08.12.03|조회수148 목록 댓글 0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어판 서문

 

원래 이 소책자는 보다 큰 책의 한 부분이었다. 1875년 경에 베를린 대학 강사 오이겐 뒤링박사는 갑자기 그리고 대단히 요란스럽게 자기가 사회주의로 전향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독일 민중에게 상세히 작성한 사회주의 이론 뿐만 아니라 빈틈없는 실제적 사회 개혁안까지 제공하였다. 여기서 그가 자기 선행자들을 공격해 나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공격의 예봉은 맑스에게 돌려졌고 그는 자기의 분노를 있는 대로 맑스에게 퍼부었다.

이것은 독일사회당 내의 두 분파 - 아이제나흐파와 라쌀파 - 가 마침 합동하여 당이 비상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자기의 모든 역량을 경주할 가능성도 역시 갖게 된 마당에서 있은 일이었다. 독일사회당은 급속히 하나의 세력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을 하나의 세력으로 되게 하자면 이제 막 전취한 통일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다. 그런데 뒤링 박사는 공공연히 자기 주위에다 종파를, 즉 장래에 나오게 될 별개의 당의 핵심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싫든 좋든 우리에 대한 도전에 응하며 싸움에서 결판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확실히 시끄러운 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독일 사람들에게는 본래 놀라웁게 무거운 ≪철저성≫ - 이를 철저한 심오성이라고 하건 심오한 철저성이라고 하건 아무래도 좋다 - 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가 새로운 학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서술할 때에는 언제나 우선 그것을 하나의 전체, 포괄적인 체계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그는 논리학의 제일 원리나 우주의 기본법칙들이 결국은 바로 새로 발견된, 일체를 완결짓는 그와 같은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태고로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여야만 한다. 이 점에서 뒤링박사는 상술한 바와 같은 민족적 풍모의 표본을 보여 주었다. 바로 완전한 ≪철학체계≫ - 정신철학, 도덕철학, 자연철학, 역사철학 - 완전한 ≪정치경제학 체계와 사회주의체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판적 정치경제학사≫ - 그 무게와 내용에 있어서 다같이 묵직한 4×6배판의 두터운 세 권, 일반적으로는 종래의 모든 철학자들과 경제학자들, 특수하게 맑스를 반대하는 논증에 동원된 세 군단(軍團) - 이는 실로 가장 완전한 ≪과학의 변혁≫을 수행하려는 시도이다 - 바로 이것이 내가 상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부터 복본위제(復本位制)에 이르기까지, 물질과 운동의 영원성으로부터 도덕적 제관념의 과도적 성질에 이르기까지, 다윈의 자연도태로부터 미래사회의 청년 교양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일체의 대상을 취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쨌든 나의 논적의 전체 포괄적인 체계는 논쟁 과정에서 이 모든 각종 대상에 대한 맑스와 나의 견해를 종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연관성이 있는 형태로 전개할 기회를 나에게 주었다.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이 과업에 착수케 한 주된 이유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과업은 어느 모로 보나 고 마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나의 답변은 처음에는 라이프찌히에서 발행되는 사회당 중앙기관지 ≪전진≫에 연재 논문의 형식으로 발표되었다가 그 후 ≪오이겐 뒤링씨가 일으킨 과학의 변혁≫이라는 책으로 되어 나왔다. 그 제2판은 1886년에 취리히에서 나왔다.

지금 프랑스 하원 릴 선거구 대의원인 나의 친우 폴 라파르그의 간청으로 나는 이 책의 세 개 장을 정리하여 한 소책자를 편찬하였다. 그는 이것을 번역하여 1880년에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표제로 출판하였다. 이 프랑스어 원본이 폴란드어판과 스페인어판의 대본으로 되었다. 1883년에 나의 독일 친우들이 이 소책자를 원어로 출판하였다. 그 후 이 독어판을 대본으로 해서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덴마아크어, 네덜란드어, 루마니아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리하여 이 영어판까지 합하면 이 소책자는 10개국어로 보급된 셈이다. 1848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우리들의 ≪공산당선언≫과 맑스의 ≪자본론≫도 포함하여 어느 한 사회주의적 서적도 그처럼 여러번 번역된 적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일에서 이 소책자는 총부수 약 2만부에 달하는 4판을 거듭하였다.

부록 ≪마르크≫는 독일의 토지소유의 발생 발전사에 관한 약간의 초보적 지식을 독일사회당 내에 보급시킬 목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당시 이것은 독일사회당이 이미 도시노동자를 완전히 전취할 전망이 보이고 또 농업노동자와 농민을 장악할 과업이 당 앞에 나섰던 만큼 더욱 필요하였다. 이 부록을 이 번역판에 넣은 것은 모든 튜튼 종족들에 공통 한 시초의 토지소유형태와 그 붕괴사가 영국에서는 독일에서보다 한충 덜 알려져 있는 것을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막심 코발레프스키가 내놓은 가설에는 언급하지 않고 원문을 그 본래의 형태대로 두었다. 이 가설에 의하면, 마르크 성원들 사이에서 경지와 목초지의 분배가 실시되기 전에는 수 세대를 포괄하는 가부장적 대가족 공동체(아직도 존재하는 남슬라브의 대가족제가 이에 대한 실례로 될 수 있다)에 의한 이 토지의 공동경작이 진행되었는데 그 후 공동체가 커져서 공동경영을 하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것으로 된 뒤에야 비로소 공동체 토지의 분배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코발레프스키 설은 완전히 옳은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논의중에 있다.

이 소책자에서 사용한 경제학 용어는 그것이 새로운 것인 한 맑스의 ≪자본론≫ 영어판의 용어와 일치한다. 우리는 ≪상품생산≫이라는 것을 물품이 생산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교환의 목적으로도, 즉 사용가치로서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생산되는 경제발전단계로 이해한다. 이 단계는 교환을 위한 생산이 시작된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하에서야 비로소, 다시 말하면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노동자들 - 자기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는 일체의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사람들 - 을 고용하고 생산물의 판매가격에서 비용을 초과하는 부분을 자기 주머니 속에 넣는 조건 하에서만 비로소 완전한 발전에 도달한다. 중세기로부터 시작하는 공업생산의 역사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한다. 즉 1) 수공업 - 소수의 수공업적 장인과 많지 않은 직인 및 도제들, 여기에서는 노동자마다 완제품을 생산한다. 2) 매뉴팩춰 - 여기에서는 보다 많은 노동자들이 넓은 한 사업장에 모여서 분업의 방법으로 완제품을 생산한다. 즉 노동자마다 어느 한 부분의 작업만을 수행하며 따라서 생산물은 그들 전부의 손을 순차로 거친 후에라야 완성된다. 3) 현대 공업 - 여기에서는 생산물은 어떤 동력으로 운전되는 기계에 의해서 생산되고 노동자의 역할은 기계의 작용에 대한 감독과 조절에 국한된다.

나는 이 소책자의 내용이 대부분의 영국 독자들의 노여움을 사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대륙에 사는 우리들이 영국 사람들의 ≪점잔을 빼는≫습성, 다시 말하면 영국 사람들의 속물근성을 다소라도 고려하였더라면 오히려 더 좋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소책자는 우리의 소위 ≪역사적 유물론≫을 옹호하여 쓴 것이다. 그런데 ≪유물론≫이라는 말은 영국 독자들의 압도적 다수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다. ≪불가지론≫은 그래도 괜찮지만 유물론은 전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래 모든 근대 유물론의 본고향은 바로 영국이다.

유물론은 본래 영국이 낳은 아들이다. 이미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는 ≪물질은 과연 사유할 수 없는가?≫고 물은 바 있었다. 그는 이러한 기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신의 전능에 호소하였다. 즉 그는 신학 자체로 하여금 유물론을 설교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뿐 만 아니라 그는 유명론자였다. 유명론은 영국 유물론자들에게 주요 요소중의 하나이며 또 일반적으로 유물론의 최초의 표현이다.

영국의 유물론과 현대의 모든 실험과학의 진짜 선조는 베이컨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연과학이 진정한 과학이며 감성적 경험에 의거하는 물리학이 자연과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아낙사고라스와 그의 호모이 오메레스, 데모크리투스와 그의 아톰을 베이컨은 권위있는 것으로서 자주 인용한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감각은 틀림없는 것이며 모든 지식의 원천이다. 과학은 곧 경험과학이며 이성적 방법을 감성적 소재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귀납, 분석, 비교, 관찰, 실험은 이성적 방법의 주요한 제 조건이다. 물질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속성은 운동 - 비단 역학적 및 수학적 운동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오히려 물질의 충동, 생명력, 긴장 또는 야코브 뵈메의 표현을 빈다면 물질의 고뇌(Qual)*로서의 운동이다. 물질의 본원적 형태는 물질에 내적으로 고유한, 개별화하는, 특수한 차이를 낳는 살아 있는 본질력이다.

* ≪Qual≫ - 이것은 철학적 희롱이다. 문자 그대로는 어떤 행동에도 충동하는 고뇌, 고통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신비주의자인 뵈메는 이 독일어에다 라틴어 qualitas(질)에서 오는 그 어떤 의미도 포함시키고 있다. 뵈메의 ≪Qual≫ 은 외부에 기인하는 고통과는 반대로 사물, 관계 또는 이 관계에 종속된 인격의 자연적 발전에서 발생하고 또 이번에는 이 발전을 촉진하는 하나의 능동적인 원리이다.

유물론은 그 최초의 창시자인 베이컨에게는 아직 전면적 발전의 맹아를 소박한 형태로 내포하고 있다. 물질은 자기의 시적인 감성적 섬광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미소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경구의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베이컨의 학설 자체는 이와는 반대로 아직 신학적인 불철저 성으로 충만되어 있다.

유물론은 그 후의 발전에서 일면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 흡스는 베이컨의 유물론을 체계화한 사람이다. 감성은 그 환한 빛을 잃고 기하학자의 추상적인 감성으로 전화하고 있다. 물리적 운동은 역학적 운동 또는 수학적 운동의 희생물로 되고 기하학이 주요과학으로 선포되고 있다. 유물론은 인간에 적대하는 것으로 되고 있다. 인간에 적대하는, 육체 없는 정신을 그 자체의 영역에서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은 스스로 자기의 육체를 죽이고 금욕주의자로 되지 않으면 안된다. 유물론은 하나의 오성적인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것은 무자비한 철저성을 가지고 오성의 모든 결론을 발전시키고 있다.

만일 우리의 감성이 우리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라면 - 라고 흡스는 베이컨으로부터 출발하여 논의한다 - 관념, 사상, 표상 등등이 모든 것은 많으나 적으나 그 감성적 형태를 벗어난 물질계의 환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과학은 이 환영에다 다만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동일한 이름이 여러 환영에 적용될 수 있다. 심지어는 이름의 이름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감성적 세계를 모든 관념의 원천으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말이 말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우리에게 표상되는 언제나 개별적인 존재물 이외에 또 어떤 보편적인 존재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비물체적 실체란 비물체적 물체라는 것과 동일한 모순이다. 물체, 존재, 실체는 모두 동일한 실재적 관념이다. 사유를 사유하는 물질로부터 사유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 물질은 모든 변화의 주체이다. 무한이라는 말은 주어진 어떤 크기에 다 무한히 더해 나아갈 수 있는 우리 정신의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 오직 물질적인 것만이 지각되며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오직 나 자신의 존재만이 확실하다. 온갖 인간적 정욕은 종식 또는 시작되는 역학적 운동이다. 충동의 대상 -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선(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힘과 자유는 동일한 것이다.

홉스는 베이컨을 체계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식과 사상이 감성의 세계에 기원한다는 베이컨의 근본원리를 그 이상 더 상세히 논증하지는 못하였다.

로크는 인간 이성의 기원에 관한 자기의 저작에서 베이컨과 흡스의 원리를 논증하고 있다.

흡스가 베이컨의 유물론의 유신론적 편견을 제거한 것처럼 콜린즈, 도드웰, 카우아드, 하틀리, 프리스틀리 등등은 로크의 감각론이 갖고 있던 최후의 신학적 한계를 제거하였다. 이신론은 적어도 유물론자에게 있어서는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간편한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근대 유물론의 기원이 영국에 있다는데 대해서 맑스는 이상과 같이 썼다. 오늘날 영국인들이 자기 조상들에 대한 이러한 찬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베이컨, 흡스, 로크가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빛나는 학파들의 조상이었다는 것은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이 학파들은 독일인과 영국인이 프랑스인에 대하여 육지에서 또 바다에서 거둔 모든 승리에도 불구하고, 18세기를 주로 프랑스의 세기로 되게 하였다. 그것도 18세기 말엽을 찬란하게 장식한 프랑스 혁명 - 우리들은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아직껏 이 혁명의 결과를 섭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8세기 중엽에 교양 있는 외국인이 영국에 이주하였을 때 무엇보다도 그를 놀라게 한 것은 - 그럴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 영국의 ≪점잔을 빼는≫ 중류계급의 종교적 맹신과 우매였다. 우리들은 그 당시 모두 유물론자, 또는 적어도 매우 급진적인 자유사상가였으며, 그러한 만큼 영국의 교양있는 인사들 거의 전부가 가지각색의 엉터리같은 기적을 믿고 있다든가 버클랜드나 맨텔 같은 지질학자들조차 자기 과학의 자료를 왜곡하면서까지도 세계창조에 관한 모세의 신화에 과히 큰 타격을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교양없는 대중, 당시의 표현대로 하면 ≪불결한 군중≫, 즉 노동자들, 특히 오웬의 뒤를 따르는 사회주의자들에게로 가야 그래도 종교 문제에서 감히 자기 자신의 이성에 입각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 영국은 ≪개화되었다≫. 1851년의 박람회는 섬 나라로서의 영국의 폐쇄성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영국은 음식과 풍습 및 관념에서 점차 국제화되어 갔다. 그것은 나로서는 대륙의 일부 풍습이 영국에서 전반적으로 보급된 것처럼, 영국의 일부 풍습도 대륙에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데까지 이르렀다. 의심할 바 없는 한가지 사실은 올리브유(1851년까지는 귀족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것이다)가 보급되면서부터는 종교 문제에서 대륙의 회의론이 불가피하게 보급된 점이다. 그 결과 불가지론은 아직 영국 국교회처럼 숭상되지는 않았으나 존경을 받는 점에서는 세례파(洗禮派)와 거의 같은 지위에 있었으며 어쨌든 ≪구세군≫보다는 한 등급 높은 지위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러한 무신앙이 늘어가는 것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저주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 새로 생긴 관념이 외국산이 아니며 다른 허다한 일용품과 마찬가지로 독일제(Made in Germany) 라는 상표가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것은 옛 영국산이라 는 것, 그러한 관념의 영국 창시자들은 200년이나 이전에 오늘의 그들의 후손들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위안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사실 불가지론은 랭카셔의 의미심장한 용어로 표현한다면 ≪수줍은≫ 유물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가지론자의 자연관은 철두철미하게 유물론 적이다. 전 자연계는 법칙에 지배되며 외부에서 오는 어떠한 작용도 절대로 배제한다. 그러나 - 하고 불가지론자는 조심스럽게 부언한다 - 우리는 우리가 아는 세계 밖에 어떤 최고실재자가 존재하는가 않는가 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고. 이러한 보류조건은 나폴레옹이 라플라스에게 왜 천문학자인 그대의 천체역학에는 조물주가 전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느냐고 물은 데 대해 그는 ≪나에게는 그러한 가설이 필요가 없었다≫고 당당히 대답한 그 시기에는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주발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조물주나 전능 자의 존재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존하는 우주 전체에서 배제된 그 어떤 최고실재자를 용인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일 뿐더러 나의 생각으로는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될 것이다.

또한 우리 불가지론자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는 재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 하고 그는 부언한다 - 우리의 감각기관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하여 지각되는 사물의 정확한 모상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써 아는 가? 또 계속하여 불가지론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그가 사물 또는 사물의 속성에 대해서 말할 때 그가 실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가 확실한 것은 전혀 알 도리가 없는 그러한 사물 자체 또는 사물의 속성 자체가 아니고 다만 그것들이 그의 감각기관에 일으키는 인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갖 논증의 방법만 가지고서는 논박하기 곤난한 견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논증하기 전에 벌써 행동하고 있었다. ≪처음에 행동이 있었다≫ 인간의 활동은 이러한 곤란을 인간의 지혜가 알아차리기 훨씬 전에 그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푸딩의 좋고 나쁨은 먹어 보아야 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우 리에게 지각되는 그 속성에 따라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 이용하는 순간 -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감성적 지각의 진위(眞僞)를 정확한 시험에 붙이는 것이다. 만일 그 지각이 틀린 것이었다면 그 사물을 이용하려던 우리의 판단도 역시 틀린 것으로 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려던 온갖 시도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한다면, 즉 만일 그 사물이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표상에 상응하며 또 그 사물의 사용에서 기대하였던 결과를 준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 그 때에는 우리는 이 범위 내에서 사물과 그 속성에 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의 밖에 존재하는 현실과 일치하고 있다는 긍정적 증명을 가지게 된다. 이와 반대로 만일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에는 우리는 대개 얼마가지 않아서 이 오류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시험의 기초로 되었던 지각 그 자체가 불완전하고 피상적이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실정에 맞지 않아서 엉뚱한 것을 지각하게 되었던가 - 이것을 우리는 ≪그릇된 추리≫라고 부른다 - 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제대로 발전시키고 이용하는 한, 또 우리의 활동을, 정확하게 획득하고 이용된 지각에 의하여 설정되는 그런 한계 내에 유지하는 한 우 리는 언제나 우리의 행동의 긍정적 결과로서 우리의 지각과 지각되는 사물의 대상적 본성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확증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과학적으로 검열된 우리의 감성적 지각이 우리의 뇌수에다 외계에 관하여 그 본질상 현실과 어긋나는 표상을 발생시킨다든가 또는 외계와 외계에 관한 우리의 감성적 지각 사이에는 고유한 불일치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경우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신칸트주의적 불가지론자가 나타나서 ≪물론 우리가 사물의 속성은 아마 정확히 지각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감각과 사유의 어느 과정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사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는 이미 오래 전에 헤겔이 대답을 주었다. 즉 만일 당신들이 사물의 속성을 모두 알아냈다면 당신들은 사물 자체도 알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남는 것은 다만 그 사물이 우리와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 뿐이며, 당신들의 감각기관이 이 사실까지 확인하자 당신들은 그 사물을 남김 없이 모두 파악한 것이다. 즉 칸트의 저 유명한, 인식할 수 없는 사물 자체를 파악한 것이라고.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첨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칸트의 시대에는 자연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아직까지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대개 자연 사물의 배후에 아직 신비스러운 사물 자체의 존재를 용인할 수 있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 이 파악할 수 없었던 사물은 점차 과학의 거대한 진보의 결과 이미 파악되고 분석되었을 뿐더러 더 나아가서는 재생산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만들 수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현 세기 전반기의 화학에서는 유기물질이 그러한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점차 화학적 원소로써 유기적 과정의 도움 없이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현대 화학은 어떤 물체이건 그 물체의 화학적 구성만 안다면 그 원소로써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아직 최고의 유기물질,소위 단백질의 구성을 정확히 알기까지에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가 수세기 후에 가서도 이 지식에 도달해서 그것에 의하여 인조단백질을 만들 수 없으리라고 생각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만일 우리가 여기까지 도달한 다면 우리는 또한 유기적 생명도 재생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그 최저형태로부터 최고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두 단백질의 정상적 존재형태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불가지론자는 그 형식적인 유보조건을 마련해 붕은 다음에는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가 이미 틀림없는 유물론자로서 알하며 또 행동한다. 그는 필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즉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물질이나 운동 또는 오늘날의 말로 말하면 에네르기는 창조할 수도 없고 소멸할 수도 없으나 우리는 양자가 모두, 우리가 모르는 어느 순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할 하등의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러나 당신들이 어떤 기회에 물질이나 운동에 관한 이러한 승인을 이용하여 그를 반대하려고 들면 그는 즉시 당신에게 침묵을 강요할 것이다. 그는 유심론의 가능성을 추상적으로는 인정하나 구체적으로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또 알 수 있는 한에서는 우리의 창조자나 지배자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물질이나 에네르기 역시 창조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서 사유는 에네르기의 한 형태, 뇌수의 한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요컨대 물질적 세계는 불변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는데 귀착된다 등등. 이와 같이 불가지론자는 그가 과학을 하는 사람인 한에 있어서는, 그가 그 무엇을 알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그의 과학 밖에서는, 그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는 그는 자기의 무지를 희랍어로 번역하여 불가지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쨌든 한 가지만은 의심할 수 없다. 즉 내가 설혹 불가지론자라 하더라도 나는 이 소책자에 서술되어 있는 역사관을 ≪역사적 불가지론≫이라고 부를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종교적인 사람들은 나를 비웃을 것이요, 불가지론자들은 분개해서, 당신은 우리들을 놀리려고 하는 것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른 여러나라 말로도 그러하듯이 영어로도 ≪역사적 유물론≫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세계사 과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견해, 즉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 원인과 결정적 동력을 사회의 경제적 발전에서, 생산방식과 교환방법의 변화에서 또한 이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사회의 서로 다른 계급으로의 분열과 이 계급들 상호간의 투쟁에서 찾는 견해를 표시하려 한다 하더라도 영국의 점잔을 빼는, 독일어로는 속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과히 격분하지 말았으면 한다.

만일 내가 역사적 유물론이 점잔을 빼는 영국 속물들에게도 유익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면 아마 사람들은 나에게 더 한층 너그럽게 대해 줄 것이다. 앞에서 나는, 약 사오십 년 전에 영국에 이주 한 교양있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영국의 점잔을 빼는 중류계급의 종교적 맹신과 완고성으로 밖에 달리는 볼 수 없는 그런 것으로 인해 몹시 불쾌해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이제 당시의 점잔을 빼는 영국 중류계급이 결코 외국 인텔리의 눈에 뜨이듯이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었다는 것을 밝혀보려 한다. 이 계급의 종교적 경향에는 이유가 있다.

유럽이 중세기를 벗어났을 당시에는 도시의 신흥 부르조아지가 그 혁명적 요소였다. 그들이 중세기적 봉건체제 내부에서 전취한 공인된 지위는 그들의 팽창력으로 보아 이미 너무나 왜소한 것으로 되었다. 부르조아지의 자유로운 발전은 봉건제도와는 벌써 양립할 수 없게 되었으며 봉건제도는 붕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봉건제도의 국제적 대중심은 로마 천주교 교회였다. 로마 천주교 교회는 봉건적 서유럽 전체를 그 모든 내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일대 전일체로 통일하였는데, 이 전일체는 한편으로는 분립파적인 희랍교의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는 회교의 세계와 대립되어 있었다. 로마 천주교 교회는 봉건체제를 신의 은혜의 후광으로 둘러쌌다. 이 교회는 봉건제를 본따서 그 자체의 위계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이 교회는 최대의 봉건영주였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천주교회의 모든 소유지의 적어도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매개 나라들에서 속세의 봉건주의와 투쟁하자면 우선 이 교회와 같은, 그 봉건주의의 신성한 중앙조직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르조아지의 번영과 함께 일보일보 과학의 거대한 성장이 이루어졌다. 천문학, 역학, 물리학, 해부학, 생리학이 다시 연구되었다. 부르조아지는 그 공업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해 물체의 속성과 자연력의 발현형태를 연구할 과학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까지 과학은 다만 교회의 온순한 종이었으며 따라서 신앙에 의해 규정된 한계를 그로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것은 다른 아무 것으로도 될 수 있었으나 과학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과학은 교회를 반대하여 일어섰다. 부르조아지는 과학을 필요로 하였으니 만큼 이 봉기에 참가하였다.

이상에서 나는 성장하는 부르조아지가 현존 교회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던 두 가지 점에 언급한 데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는데는 충분할 것이다 즉 첫째로는 천주교 교회의 권위를 반대하는 투쟁에 가장 많이 참가한 것은 바로 이 계급,즉 부르조아지였다는 것, 둘째로는 봉건제도를 반대하는 온갖 투쟁은 당시에 있어서는 종교적인 분장을 하고 우선 교회에 돌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투의 첫 함성을 울린 것은 대학이나 도시실업가들이었지만 그 강력한 반향은 불가피하게 농촌주민대중인 농민들 - 이들은 이미 도처에서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자기들의 종교적, 세속적 봉건영주들과 치열한 투쟁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 속에서 울려나왔다.

봉건제도를 반대하는 유럽 부르조아지들의 큰 투쟁은 3대 결전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첫째 결전은 소위 독일의 종교개혁이었다. 반(反)교회 폭동으로의 루터의 호소에 호응하여 두 개의 정치적 봉기가 일어났다. 즉 처음에는 1523년의 프란쯔 폰 지킹겐의 지도를 받은 하충귀족의 봉기였고 그 다음에는 1525년의 대농민전쟁이었다. 이 두 봉기는 모두 다 주로 이해관계가 가장 깊었던 도시 부르조아지의 우유부단성 때문에 진압되었는데, 이 우유부단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 없다. 그 이후 투쟁은 개별적 군주들과 황제의 중앙권력간의 분쟁으로 퇴화하였으며 그리하여 독일은 그 후 200년 동안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유럽 국민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쨌든 독일에다 하나의 새로운 종교를, 바로 절대군주제가 필요로 하는 종교를 수립하였다. 독일 동북지방의 농민들은 루터파로 개종하자마자 자유민으로부터 농노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가 실패한 곳에서 캘빈이 승리하였다. 그의 교리는 당시의 부르조아지의 가장 과감한 부분의 요구에 순웅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정설은 경쟁이 진행되는 상업의 세계에서 성공과 파산이 개인들의 활동이나 수완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는 의존하지 않는 사정 여하에 있다는 사실을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어떤 개인의 의사나 행동이 아니라≫ 강력한, 그러나 알 수 없는 경제력의 ≪자비심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래의 모든 상업통로와 상업중심이 새로운 것에 의하여 내몰렸고 아메리카와 인도가 발견되고 가장 숭상되어온 경제에서의 신조 - 금 은의 가치 - 까지도 동요․붕괴되는 경제적 변혁의 시대에 있어 특히 그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캘빈의 교회제도는 철두철미하게 민주주의적이었으며 공화주의적이었다. 그런데 이미 신의 왕국도 공화주의화되었는데 지상의 왕국이 왕․승정․영주에 종속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독일의 루터파가 독일 군소군주들의 수중에 있는 유순한 도구로 되었다면 캘빈은 네덜란드에 공화국을,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에 위력있는 공화당들을 창건하였다.

부르조아지의 두번째 대봉기는 캘빈주의를 자기의 완성된 투쟁이론으로 보았다. 이 봉기는 영국에서 일어났다. 도시 부르조아지는 봉기의 첫 봉화를 올렸고 농촌 지방의 자유농민(요우맨)은 그것을 승리하게 하였다. 기묘한 현상이지만 3대 부르조아혁명에 있어서 전투부대는 언제나 농민이다. 그리고 승리를 전취한 후 그 승리의 경제적 결과 때문에 틀림없이 영락하고마는 계급도 바로 농민들이다. 크롬웰 이후 100년이 지나서 영국 요우맨은 완전히 소멸하다시피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요우맨과 도시 평민들이 참가함으로써 비로소 투쟁은 끝까지 철저히 수행되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찰스 1세가 교수대에 오르게까지 되었다. 심지어 당시 이미 충분히 성숙한 승리의 열매만이라도 부르조아지가 거두어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목적보다 훨씬 더 멀리 혁명을 이끌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1793년의 프랑스에서도, 1848년의 독일에서도 바로 그러하였다. 사실 이러한 것이 부르조아사회의 발전법칙의 하나인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혁명적 활동이 지나치게 진행되자 불가피하게 반동이 닥쳐왔는데, 이 반동은 또 그것대로 역시 자기의 목적보다는 더 멀리 나아갔다. 여러 차례의 동요가 있은 후 마침내 새로운 중심이 확립되고 그것이 그 후 발전의 출발점으로 되었다. 속물들이 ≪대반란≫이라고 명명한 영국 역사의 그 위대한 시기와 이 시기에 이어 일어난 여러 투쟁은 자유주의적 역사 기술에서 ≪명예혁명≫이라고 부르는 1689년의 비교적 사소한 사건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새로운 출발점이란 곧 신흥 부르조아지와 종전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자들간의 타협이었다. 후자는 당시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귀족으로 인정되고 있었으나 벌써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 최초로 부르조아화하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루이 필립의 경우에는 오랜 시일이 지 나서야 비로소 그러한 길을 걸었다. 영국을 위해서는 다행하게도 구봉건 귀족들은 장미전쟁에서 서로 살륙하였다. 그 후계자들 역시 대부분 이 그 옛 가문들의 후손들이기는 하나, 그 혈통은 매우 먼 방계였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관습과 경향은 봉건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훨씬 더 부르조아적이었다. 그들은 화폐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지대를 증가하는데 착수하여 수백의 소차지농을 토지에서 몰아내고 그들을 양과 바꾸어 놓았다. 헨리8세는 교회 소유지를 분여하거나 헐값으로 방매함으로써 새로운 부르조아적 지주를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17세기 말까지 부단히 계속되어 온 대소유지 몰수도 그것이 후에 졸부(猝富)와 반(半) 졸부들에게 분여되자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귀족≫은 헨리7세 시대 이래 산업 발전에 저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거기에서 이익을 보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또 대토지소유자들 가운데에서도 정치경제적 동기에서 금융부르조아지나 산업부르조아지의 지도자들과 협력하는데 동 의하는 층들이 항상 있었다. 이리하여 1689년의 타협은 용이하게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전리품 즉 관직, 한직, 고액의 봉급 등이 일정한 조건 밑에 명문 토지귀족의 몫으로 제공되었다. 그 조건이란 금융계, 산업계 및 상업계의 각 중간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충분히 고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이해관계는 이미 그 당시 충분히 강력한 것이었으며 결국 바로 이것이 그 나라의 전반적 정책을 결정하고 있었다. 물론 어떤 개별적인 문제에서는 알력도 있었으나 귀족적 과두 정치는 자기들의 경제적 번영이 산업 또는 상업 부르조아지의 번영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부르조아지는 영국 지배계급을 구성하는, 비천하지만 공인된 일원으로 되었다. 다른 모든 지배계급들과 함께 부르조아지도 방대한 근로인민대중을 억압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상인이나 공장주는 자기의 점원, 자기의 노동자, 자기의 하인들에 대해 양육자 - 주인의 지위 또는 얼마 전까지도 아직 영국에서 불려지고 있던 바와 같이 ≪타고난 상전≫의 지위를 스스로 차지하게 되었다. 상전은 그들에게서 될수록 질 좋은 노동을 될수록 많이 짜내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상전은 그들에게 적당한 복종심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자신이 종교적이었다. 그의 종교는 그에게 기치 - 전에는 이 기치를 들고 그가 왕과 영주들을 타파하였던 것이다 - 를 제공하였다. 얼마 안가서 그는 이 종교가 자기의 타고난 하인들의 의식을 개변시켜, 헤아릴 수 없는 신의에 의하여 그들에게 군림하게 된 주인의 명령에 순종케 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간단히 말하면 영국 부르조아지는 이 때부터 ≪하층 사람들≫, 생산자인 방대한 인민대중을 억압하는데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 억압에 적용된 수단의 하나가 곧 종교의 감화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부르조아지의 종교적 경향을 강화한 또 하나의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영국에서의 유물론의 개화였다. 이 무신론적인 새 학설은 비단 경건한 중간신분을 공포에 빠뜨렸을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더군다나, 부르조아지도 포함한 교양없는 대중에게는 충분한 만족을 주었던 종교와는 반대로 학자나 교양있는 사람들에게만 적합한 철학이라고 표명해 나섰다. 홉스와 함께 이 학설은 왕의 전능을 옹호하고 나섰으며 절대군주제더러 이 튼튼하기는 하나 심술궂은 녀석인 인민을 억압할 것을 호소하였다. 흡스의 후계자들 - 볼링브루크, 샤프츠베리 등등 - 의 경우에도 역시 새로운 이신론적 형태의, 유물론은 여전히 귀족적인 비전 (秘傳)적 학설이었다. 따라서 유물론은 그 종교적 이단성 뿐만 아니라 그 반(反)부르조아적인 정치적 연계의 탓으로 부르조아지의 증오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귀족적인 유물론과 이신론에 대립하여, 한때 반스 튜어트 왕조 투쟁을 위한 기치와 전사를 공급하였던 바로 그 신교파들이 이번에도 진보적 중간계급의 주요 전투력을 제공하였으며 또 현재까지도 아직 ≪대자유당≫의 기본골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유물론은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데까르트 철학에서 파생한 또 하나의 유물론 철학 학파와 만나 그것과 합류하였다. 프랑스에서도 역시 유물론은 최초에는 순전히 귀족적인 학설이었다. 그러나 그 혁명적 성격은 곧 나타났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그들의 비판을 종교적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대의 일체의 과학적 전통, 일체의 정치제도를 비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론의 보편적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을 택하였다. 즉 그들은 백과전서파라는 이름을 얻게 한 방대한 저작 ≪백과전서≫에서 지식의 모든 대상에다 대담하게 자기들의 이론을 적용하였다. 바로 이와같이 하여 유물론은 이러저러한 형태로 - 공공연한 유물론으로서 또는 이신론으로서 - 프랑스의 교양 있는 모든 청년들의 세계관으로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것은 대혁명 당시에는 영국 왕정파들에 의해 세상에 나타나게된 이 학설이 프랑스 공화파들과 과격파들에게 이론적 기치를 제공하며 ≪인권 선언≫의 대본을 제공하는데까지 이르렀다.

프랑스 대혁명은 - 부르조아지의 세번째 봉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의상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공개적인 정치적 지반에서 투쟁을 진행한 최초의 봉기였다. 그것은 또한 투쟁이 한 교전측, 즉 귀족의 완전한 멸망과 다른 교전측, 즉 부르조아지의 완전한 승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끝까지 진행된 최초의 봉기이기도 하였다. 영국에서는 혁명전의 제도와 혁명 후의 제도간의 계승적 연계 또는 대토지소유자와 자본가 간의 타협은 재판의 판례가 계승되고 봉건적 법률 형태가 정중히 보존된데서 표현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와 반대로 혁명은 과거의 전통을 종국적으로 타파하고 봉건주의의 마지막 흔적마저 청산해버렸으며 민법전에서 구로마법 - 이것은 맑스가 ≪상품생산≫이라고 부르는 경제적 발전단계에서 나오는 법률적 제관계의 거의 완전한 표현이다 - 을 근대 자본주의적 관계에다 교묘하게 적응시켰는데 이 혁명적인 프랑스 법전은 지금에 있어서도 아직 다른 모든 나라들 -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 에서 소유권법을 개혁할 때 모범으로까지 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될 것이 하나 있다. 즉 영국의 법률은 자본주의사 회의 경제관계를 여전히 야만적인 봉건적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으며 이 언어와 이 언어가 표현하는 사물의 관계가 마치 영어철자법과 영어 발음의 관계 - 한 프랑스인의 말에 의하면 런던이라고 쓰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발음한다는 것이다 - 와 같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대신 이 영국의 법률이야말로 대륙에서는 절대군주제의 지배하에 완전히 소멸하여 지금껏 아직 아무데서도 완전히는 다시 전취되지 못하고 있는 개 인의 자유, 지방 자치, 재판에 의하지 않는 일체 외부간섭에 대한 완전한 보장 - 한마디로 말해서 고대 게르만적 자유의 좋은 것을 수 세기동안 순수한 형태로 보존하여 왔으며 그것을 아메리카와 식민지들에 이식한 유일한 법률인 것이다.

영국 부르조아로 돌아 가자. 프랑스혁명은 그들에게, 대륙 왕국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의 해상무역을 파괴하고 그 식민지를 탈취하며 해상 경쟁자인 프랑스인의 최후의 야망까지도 말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었다. 이것이 영국 부르조아가 혁명과 싸우게 된 이유의 하나였다. 둘째 이유는 이 혁명의 방법이 그들에게는 도무지 비위가 맞지 않았다는 그것이다. ≪범죄적≫인 폭력정치 뿐만 아니라 부르조아지의 지배를 극단에까지 추진하려는 그 시도 자체가 벌써 그러하였다. 실로 영국 부르조아는 귀족이 없이는 전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귀족은 부르조아에게 예의범절(교사에게 알맞는 예의범절)도 가르쳐 주었고 유행도 고안해 주었고 또 국내 질서 유지자인 군대와 새 식민지, 새 시장의 정복자인 함대에 장교를 공급해 주었던 것이다. 하긴 부르조아지 가운데도 역시 진보적 소수파가 있었다. 그들은 타협에서 별로 이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비교적 부유치 못한 부르조아지로 구성되어 있었던 이 소수파는 혁명에 동정적 태도를 보이고는 있었으나 의회에서는 무력하였다.

이리하여 유물론이 프랑스 혁명의 신조로 되면 될수록 미신적 영국 부르조아는 더욱 굳게 자기의 종교를 고수하였다. 파리의 폭력정치 시대는 인민이 종교를 잃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유물론이 프랑스에서 그 인근으로 전파되어 유사한 이론적 제 조류 특히 독일철학에 의하여 지지되면 될수록 또 유물론과 일반적으로 자유사상이 실지 대륙에서 교양 있는 사람이 필수적 표지로 되면 될수록 영국의 중류계급은 자기들의 잡다한 종교적 신앙을 더욱더 완강히 고수하게 되었다. 이들의 신조가 아무리 현격하게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명확히 표현된 종교적 기독교적 신조들이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승리를 확립하였을 때, 영국에서는 워트, 아크라이트, 카트라이트 등등에 의하여 경제력의 중심을 완전히 옮겨놓은 산업혁명이 개시되었다. 부르조아지의 부는 이제는 토지귀족의 부보다 비할 바 없이 더 급속히 증대되어 갔다. 부르조아지 자체의 내부에서도 금응귀족이라든가 은행가들은 공장주들에 비해 점차 뒤로 물러가게 되었다. 1689년의 타협은 그후 점차 부르조아지에게 유리하게 변천되어 갔으나 그래도 역시 그것은 이미 그 당사자들의 역량관계에 맞지 않게 되었다. 이들 당사자의 성격도 역시 변하였다. 1830 년의 부르조아지는 전세기의 부르조아와는 아주 판이하였던 것이다. 아직 귀족이 틀어쥐고 있던 정치권력, 귀족들이 새로운 산업부르조아지의 요구에 대항하고 있던 이 정치권력은 새로운 경제적 이해관계와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귀족에 대한 투쟁을 또다시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새 경제적 세력의 승리로써만 종결될 수 있었다. 1830 년의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선거법 개정이, 모든 반항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의회에서 부르조아지는 공인된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곡물법이 폐지되어 부르조아지 특히 그 가장 활동적인 부분인 공장주들이 토지귀족에 비해 단연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르조아지의 최대의 승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그것은 부르조아지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획득한 최후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그 후에 거둔 그들의 모든 승리는 새로운 사회 세력, 처음에는 그들과 동맹해서 행동하였으나 후에는 그들의 경쟁자로 나타난 이 세력과 나누지 않으면 안되었다.

산업혁명은 공장주라는 대자본가계급을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훨씬 더 수가 많은 공장노동자계급도 만들어 냈다. 이 계급은 산업혁명이 생산 부문을 하나씩 점차 포괄해 나감에 따라 수적으로 부단히 늘어갔다. 그 수의 증가와 함께 그 역량도 역시 증대되어 이미 1824년에는 그렇게 버텨오던 의회도 이 역량에 못이겨 부득이 결사금지법을 폐지하지 않을 수 없게까지 되었다. 선거법개정운동 당시 노동자들은 개혁파의 급진적인 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1832년 법령에 의해 그들이 선거권을 박탈당하였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 써넣어 부르조아지의 강력한 반곡물법동맹에 대립하여 독립적인 차티스트 당을 조직하였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최초의 노동당이었다.

그 후 1848년 2월과 3월에는 대륙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 혁명들에서 노동자들은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적어도 파리에서는 자본 주의사회의 견지로서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요구들을 들고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뒤이어 전반적 반동이 닥쳐왔다. 맨 처음에는 1848년 4월 10일의 차티스트의 패배, 다음에는 동년 6월의 파리 노동자 봉기의 진압, 또 이탈리아, 헝가리, 남부 독일에서의 1849년의 실패, 끝으로 1851 년 12월 2일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파리 정복. 이리하여 잠시나마 노동자들의 요구라는 도깨비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렀던가! 그러기에 영국 부르조아는 벌써 전부터 평민들에게는 종교적 굴레를 씌워 둘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 바 있었는데, 이러 한 모든 것을 겪고 난 후에는 그 필요성이 얼마나 통절히 느껴졌겠는가! 이리하여 그들은 대륙 형제들의 조소는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해 마다 하충계급들에 대한 복음전도비로서 수천 수만금을 계속 지출하였던 것이다. 자기 자신의 종교기관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그들은 당시 종교적 투기업의 최대 조직자인 죠나단 형제에게 호소하여 미국에서 리바이벌리즘 (종교부활운동),무디와 상키 등을 수입하였다. 나중에 그들은 구세군의 위험한 원조를 받아들이는데까지 이르렀는데, 구세군은 원시기독교의 선전수법을 부활시키고 빈민들을 신의 선민(選民)으로 보며 종교적 방법으로 자본주의와 투쟁하고 그리하여 지금 이 사업에 현금을 지출하고 있는 부자들에게 앞으로는 극히 치명적으로 될 수 있는 원시 기독교적 계급투쟁의 어떤 면들을 발전시키고 있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부르조아지가 정치적 권력을 - 적어도 장기간에 걸쳐서 - 봉건귀족이 중세기를 통해서 장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발전법칙의 하나로 인정해도 좋을 듯하다. 봉건제도가 완전히 근절된 프랑스에서조차 부르조아지가 한 계급 전체로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극히 짧은 기간 밖에 안된다. 1830년부터 1848년에 이르는 루이 필립 시대에는 부르조아 지의 극소부분이 지배하고 있었음에 불과하였다. 훨씬 더 많은 부르조아지가 심한 가격제한으로 선거권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공화국 당시, 즉 1848~1851년에는 부르조아지 전체가 지배하였으나 그것도 겨우 3년 간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조아지의 무능력은 제2제정에 길을 열어 주었다. 오늘 제3공화국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부르조아지는 한 계급 전체로서 20년간 국정을 장악하여 왔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명백한 몰락의 징표를 나타내고 있다. 부르조아지의 장기적인 지배는 지금까지는 다만 미국처럼 봉건제도가 있은 적이 없고 사회가 처음부터 부르조아적 기초 위에 수립된 그러한 나라들에서만 가능하였다. 그런데 프랑스나 미국에서조차 부르조아지의 후계자인 노동자들은 벌써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고 있다.

영국에서는 부르조아지가 단독으로 권력을 장악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1832년에 부르조아지가 승리하였을 때에도 정부의 모든 요직은 거의 귀족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부유한 중류계급이 이것을 묵인하는 그 온순성은, 그 후 언젠가 자유주의적인 대공장주 W. A. 포스터가 브래드포드의 청년들에게 연설하는 것을 듣기 전까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 연설에서 청년들에게 출세를 위해서는 역시 프랑스어를 배워야 한다고 간곡히 타일렀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대신이 되써 프랑스어가 적어도 영어와 같은 정도로 필요한 사회에 갑자기 들어서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여졌던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또 사실 당시의 영국 부르조아는 일반적으로 전혀 교양없는 엉터리 출세자들이었으며 실무적 민첩성이 가미된 섬나라다운 편협성이나 섬나라다운 자부심과 다른 자질을 필요로 하였던 정부의 고급관직은, 싫든 좋든 모두 귀족에게 맡겨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 또 영업 면에서도 민족 배타주의적 자부심은 극히 서투른 조언자였다.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일반 공장주는 영국인으로서 자기 나라 말 이외의 다른 나라 말로 말하는 것은 치사한 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외국의 ≪가련한 녀석들≫이 영국에 이주해 와서 그의 생산들을 외국에 내다파는 수고를 덜어 주는 것을 어느 정도 자랑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해서 대개는 독일 사람인 이 외국인들이 영국 대외 무역 - 수출 뿐만 아니라 수입도 역시 - 을 대부분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영국인의 직접적인 대외무역은 점차 식민지, 중국, 미국 및 남미에 국한되고 있다는 것을 영국의 일반 공장주는 도대체 모르고 있었다. 이 독일인들이 해외의 다른 독일인들과 무역하고 이 해외의 독일인들은 점차 전 세계적으로 되는 일대 상업식민지망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은 더구나 모르고 있었다. 이리하여 40년 전에 독일이 수출을 위한 생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 독일 상업 식민지들은 독일이 그렇듯 단기간 내에 곡물 수출국에서 일류 공업국으로 전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약 10년 전에는 영국 공장주들이 불안에 사로잡혀 자기들의 대사와 영사들에게 어떻게 되어서 자기들은 고객(顧客) 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는가를 물어 보았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이구동성 다음과 같다. 즉 1) 당신들은 당신들의 고객의 말을 배우지 않고 고객이 당신들의 말로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2) 당신들은 고객의 욕망, 관습, 취미를 만족시키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고객이 당신들, 영국식대로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다.

오늘까지도 신문지상에 ≪중류계급의 교육≫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영국 부르조아지가 아직도 최상의 교육을 받을 만큼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고 자기들의 분에 맞는 어떤 좀 더 얕은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곡물법이 폐지된 이후에도, 승리를 거둔 사람들, 즉 콥덴, 브라이트, 포스터 같은 사람들이 정부의 온갖 공직에서 제외되었다가 2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개혁에 관한 새 법령에 의해 그들에게 내각의 문이 열려졌다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아니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영국 부르조아지는 자기들이 사회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감정에 몹시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자신과 인민의 돈으로 장식용의 건달계급을 부양해 두었다가 공적 의식(儀式)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이들로 하여금 국민을 그럴듯하게 대표하게 한다. 그리고 부르조아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결국은 자기들 자신이 만들어낸 이 특권적인 집단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을 때에 부르조아는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류계급이 토지귀족을 아직 채 권력에서 결정적으로 몰아내기도 전에 역사무대에는 새로운 경쟁자, 즉 노동 계급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차티스트 운동과 대륙 혁명 이후에 닥쳐온 반동, 그리고 또 1848년부터 1866년에 걸친 영국 공업의 전대미문의 번영(이 번영은 보통 자유무역 하나만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훨씬 더 큰 원인은 철도, 대양 기선 - 일반적으로 교통 기관의 거대한 발전에 있는 것이다)으로 노동자들은 또다시 자유당에 종속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그들은 차티 스트운동 이전처럼 이 자유당의 급진적인 진영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선거권에 대한 노동자측의 요구는 꺾을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을 지도하고 있던 휘그당이 아직도 겁을 집어먹고 있을 때 디즈레일리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토리당에 유리한 기회를 포착하여 그는 도시 선거구에다 독립 주택을 가지고 있는 각 개인의 선거권(세대주 선거권)에 관한 법령을 실시하는 동시에 선거구를 개정하였다. 그 후 얼마 안가서 비밀투표제가 확립되고 나아가서 1884년 에는 세대주 선거권이 모든 구에 화장되고 군에도 실시되었으며 또 선거구가 재할당되어 그 결과 선거구는 어느 정도 상호간 균형이 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선거에서 노동계급의 세력이 비상히 커져 지금 노동자들은 150 내지 200의 선거구에서 유권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전통에 대한 존경을 가르치는 학교로서는 의회제도보다 더 좋은 학교가 없다. 중류계급은 죤 맨너스경이 농담으로 ≪우리의 오랜 귀족≫이라고 부른 집단을 숭배와 공경의 마음으로 우러러 보았는데, 당시 노동자들도 역시 당시의 소위 ≪보다 나은 계급≫인 부르조아지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또 사실 15년 전의 영국 노동자들은 모범적인 노동자들이어서 고용주의 지위에 대한 그들의 극히 존경하는 태도라든가 자기들의 권리를 요구할 때의 그들의 자제와 겸손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우리 독일 강단 사회주의자들이 자기 동포인 우리 독일 노동자들의 고칠 수 없는 공산주의적, 혁명적 경향 때문에 받은 상처에 대한 위안거리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 부르조아는 우수한 실업가들로서 독일 교수들보다는 앞을 내다볼 줄 알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노동자들과 권력을 나누었을 따름이었다. 차티스트운동 당시 그들은 튼튼하기는 하나 심술궂은 녀석들인 인민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부르조아지는 인민헌장의 요구의 대부분을 부득이 용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은 국법으로 되었다. 이제는 인민을 도덕적 수단으로 얽매어두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런데 대중에게 영향을 추는 첫째 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역시 종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관리국에서 승려가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부르조아지는 교회의식(儀式)으로부터 ≪구세군≫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종교선동에 더욱 더 비용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대륙 부르조아들의 자유사상과 종교적 무관심에 대한 점잖은 영국 속물들의 승리가 닥쳐왔다.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미 반란적으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에 감염되어 있었을 뿐더러 또 극히 확고한 이유에서였지만, 권력탈취 수단 선택에 있어서의 준법성이라는 것에 그렇게 구애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이 튼튼한 녀석들은 참으로 거기에서는 나날이 더 심술궂게되어 갔다. 프랑스나 독일의 부르조아들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자기들의 자유사상을 슬그머니 내버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이것은 마치 보라는듯이 담배를 입에 물고 갑판 위를 거닐던 젊은이가 배멀미를 점점 더 느끼게 되자, 피우던 담배를 남몰래 내던지는 것과 같았다. 종교를 냉소해 오던 자들이 한사람 한사람씩 점차 외면으로는 경건한 체하면서 교회와 그 교리와 의식(儀式)에 대해서 존경하는 태도로 말하게 되었으며 또 피치 못할 경우에 한해서는 자기들 자신이 그 의식을 지키게까지 되 었다. 프랑스 부르조아는 금요일마다 고기를 먹지 않았고 독일 부르조아는 일요일마다 장황한 신교 설교를 듣느라고 교회 의자에 얼이 빠져 앉아 있었다. 부르조아들은 그들의 유물론 때문에 궁지에 빠졌다. ≪종교는 인민을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 - 이것이 사회를 완전한 파멸로부터 구원하는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수단이다. 그들 자신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들은 종교를 영원히 파괴하기 위해 그들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이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영국 부르조아가 비웃으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는 시기가 닥쳐왔다. 즉 ≪바보들 같으니라구, 그런 것 쯤이야 벌써 200년 전에라도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었는걸!≫

그러나 나는 영국 부르조아의 종교적 우둔도, 대륙 부르조아의 뒤늦게 시작된 개종도, 더욱 높아가는 프롤레타리아의 밀물을 결코 억제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전통 - 그것은 커다란 장애물이며, 그것은 역사의 타력(惰力)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동적인 것일 따름이며 따라서 소멸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도 역시 언제까지나 자본주의의 방벽으로 될 수는 없다. 우리의 법률적, 철학적 및 종교적 관념이 일정한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적 관계의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관념적 파생물이라면, 이러한 관념들은 경제적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동한 후에는 오래 동안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초자연적인 계시(啓示)를 믿든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종교적 설교도 멸망해가는 사회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승인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실지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들은 여러가지 전통에 젖어 있다. 무엇보다도 우선 부르조아적 전통, 예컨대 당은 보수당과 자유당의 두 당만이 있을 수 있다느니. 노동 계급은 강대한 자유당에 의해 그 해방을 획득해야 한다느니 하는 널리 보급된 편견에 젖어 있다. 다음으로는 노동자들의 전통에 젖어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한 시기의 시초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다. 이에 의하면 지난 날의 많은 노동조합들에서는 정식으로 견습기간을 마치지 않은 노동자들은 모두 조합에서 배제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노동조합이 모두 그 자체의 파업 파괴자들 을 양성하교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계급은 전진하고 있다. 이것은 교수 브렌타노씨까지도 그의 강단사회주의자 동료들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면서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계급 - 영국에서의 모든 것이 그러한 바와 같이 - 은 때로는 동요하며 때로는 암중모색적인 거의 성과없는 시도를 하면서 천천히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노동계급은 어떤데서는 사회주의란 말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품으면서도 그러나 점차 그 본질을 받아들이면서 움직이고 있다. 노동계급은 움직이고 있으며 그 운동은 더욱 확대되어 여러 노동자층을 하나하나씩 휩쓸고 있다. 지금 운동은 런던 이스트엔드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혼수상태에서 각성시켰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새로운 힘이 얼마나 커다란 자극을 노동계급에서 주었는가를 보았다. 비록 이 운동의 진행이 조급한 비평가들의 요구에는 미처 따라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비평가들은 노동계급이야말로 영국의 국민성의 가장 우수한 면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또 영국에서는 어느 하나의 진보도 일단 전취된 다음에는 결코 상실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옛 차티스트의 아들들은 상술한 여러 원인에 의해 기대에 어그러지는 바가 있다고 할지라도 손자들은 아마도 그들의 조부들에 비해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 노동계급의 승리는 한갖 영국에만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영국, 프랑스, 독일의 공동노력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에서는 노동운동이 모두 영국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다. 독일에서는 벌써 그 승리가 도래할 시기를 확정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고 있다. 최근 25년 간에 독일 노동운동이 이룩한 성과는 유례없는 것이다. 그것은 갈수록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다. 독일 부르조아지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 훈련, 견고성, 정력이 가련할 정도로 부족위며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독일 노동계급은 그러한 모든 성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약 400년 전에 독일은 유럽 부르조아지의 최초의 대봉기의 출발점이었다. 오늘날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독일이 또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최초의 대승리의 무대로 되리라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1892년 4월 20일 프리드리히 엥겔스

 

1892년 런던에서 발행된 엥겔스의 노작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영어판에 처음으로 발표. 동시에 1892 - 1893년에 잡지 ≪신시대≫에 독문으로 발표. 영어판에 의하여 인쇄 잡지와 대조 원문은 영어

 

 

 

1. 프랑스 사회주의

 

현대 사회주의는 그 내용 면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한편으로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유산자와 무산자,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계급 대립과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을 지배하고 있는 무정부 상태를 관찰한 결과다. 그러나 현대 사회주의는 그 이론의 형식 면에서 처음에는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계몽 사상가들이 제기한 원칙들을 더 철저하게 발전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새로운 이론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도, 비록 그 뿌리가 물질적 토대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우선은 과거에 쌓여 온 사상의 재료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다가오는 혁명을 위해 사람들의 머리를 깨우쳐 주던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 스스로 아주 혁명적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종류가 어떻든간에 외적 권위는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종교, 자연관, 사회, 국가 제도 등 그 모든 것들을 가장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모든 것이 이성의 심판 앞에서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단념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유하는 오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단 하나뿐인 척도가 되었다. 헤겔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세계가 머리로(거꾸로 - 역자) 서게 된 시대였다. 처음에는 인간의 두뇌와 두뇌의 사유를 통해 발전한 명제가 모든 인간 행위와 사회 관계의 기초로 승인되기를 요구하고 나섰다는 의미에서 그랬으나, 나중에는 이 명제들에 모순되는 현실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사실상 뒤집어엎어 졌다는 더 넓은 의미에서 그랬다. 과거의 모든 사회 형태와 국가 형태, 온갖 전통적 관념은 불합리한 것으로 인정되어 헌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세계는 지금까지 한갖 편견에 근거를 두어 왔으며, 과거의 모든 것들은 동정받고 멸시당할 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해가 솟았고, 이성의 왕국이 닥쳐왔다. 이제부터 미신, 부정, 특권, 압박은 영원한 진리, 영원한 정의, 자연 자체에서 나오는 평등, 박탈할 수 없는 인권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 이성의 왕국이란 부르주아 왕국의 이성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 법질서로 실현되었다는 것, 평등이란 결국 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이었고,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언된 것은 부르주아적 소유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성 국가 - 루소의 사회 계약론 - 는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모든 선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그들에게 설정한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봉건 귀족과 나머지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등장한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과 아울러, 착취자와 피착취자, 게으른 부자와 일하는 가난뱅이 사이의 일반적 대립이 있었다. 바로 이런 사정으로 부르주아 출신자가 어떤 개별 계급의 대표자로서가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는 생겨날 때부터 그 자체의 대립물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중세 동업 조합의 장인이 현대의 부르주아로 발전함에 따라, 동업 조합 직인과 조합 외의 날품팔이 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로 발전했다. 대체로 부르주아지가 귀족과 투쟁하는 데서는 당시의 갖가지 근로 계급의 대표자로 자처할 권리가 어느 정도 있었으나, 대규모의 부르주아 운동이 있을 때마다 그 발전 정도야 어찌 됐든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 격인 계급의 독자적인 운동이 함께 일어나곤 했다. 독일의 종교 개혁과 농민 전쟁 당시의 재세례파와 토머스 뮌처의 운동, 영국 대혁명 당시의 수평파의 운동,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바뵈프의 운동이 그러했다. 미숙한 계급의 이러한 혁명적 무장 봉기에는 이에 상응하는 이론적 진출이 뒤따랐다. 즉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이상적 사회 제도를 공상적으로 서술하는 글들이 나타났고, 18세기에는 벌써 직접적인 공산주의 이론(모렐리, 마블리)이 나타났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벌써 정치적 권리의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에까지 넓어져 나갔다. 계급적 특권뿐만 아니라 계급적 차별 자체까지도 폐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새로운 학설은 맨 처음에는 모든 향락을 금하는 금욕적인 스파르타식 공산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생 시몽, 푸리에, 오언이라는 3대 공상가가 나타났다. 생시몽은 프롤레타리아적 경향과 함께 부르주아적 경향에 아직 의의를 어느 정도 부여하고 있었으며, 오언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한 나라에서, 그리고 그러한 생산으로 생겨난 대립들의 자극을 받아 계급 차별 철폐안을 프랑스 유물론과 직접 연결해 체계화했다.

 

이 세 사람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이 그 무렵에 역사적으로 발생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로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몽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선 어떤 특정한 사회 계급을 해방하려 하지 않고 단번에 모든 인류를 해방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왕국은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이 주장하던 이성의 왕국과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계몽 사상가들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 부르주아 세계 또한 봉건제나 과거의 모든 사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것 또한 쓰레기통에 내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참된 이성과 참된 정의가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지 못한 이유는 오직 그것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은 천재가 나타나서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지만 전에는 그럴 만한 천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천재가 지금 나타나, 바로 지금 진리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결코 역사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결과나 피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며 순전한 요행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천재는 500년 전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500년에 걸친 인류의 오류와 투쟁,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18세기 철학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로서 이성에 호소했다. 그들은 이성 국가, 이성 사회를 세울 것을 요구했으며, 영원한 이성에 모순되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없애길 요구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영원한 이성이란 실은 바로 당시 부르주아로 발전하고 있던 중산 시민의 이상화된 오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으로 그 이성 사회와 이성 국가가 이룩되었을 때, 이 새 제도는 이전까지의 제도에 비해 매우 합리적이기는 했으나 절대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성 국가는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다. 루소의 사회 계약론은 공포 정치 시대에 실현되었는데, 오히려 자기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믿지 못하게 된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집정 정부를 매수하는 데서, 그리고 나중에는 나폴레옹 전제 정치에 비호를 청하는 데서 피난처를 구했다. 약속되었던 영원한 평화는 끊임없는 침략 전쟁으로 대치되었다. 이성의 사회도 그리 잘되어 가는 편이 아니었다. 빈부 대립은 전반적 번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첨예해졌다. 즉 이 대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던 동업 조합 등의 특권이 폐지되었고, 이 대립을 얼마간 누그러뜨리던 교회의 자선 시설이 폐지되었다. 이제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소유의 자유≫가 이루어졌지만, 이 자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 대자본과 대토지 소유자 사이의 세찬 경쟁에 압도되어 자신의 자그마한 소유를 바로 이 대부호들에게 팔아넘기는 자유를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는 소부르주아나 소농민의 경우에는 소유를 잃는 자유가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 진행되는 공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근로 대중의 가난과 궁핍이 사회 존립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 칼라일의 말에 의하면, 현금이 더욱더 이 사회를 연결하는 유일한 요소가 되어 갔다. 범죄 건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멀건 대낮에 파렴치하게 저질러지던 이전의 봉건적 죄악이 뿌리뽑히지 않은 채 밀려나기는 했지만, 그 대신 과거에는 오직 비밀스럽게 일어나던 부르주아적 죄악이 그만큼 더 성행하게 되었다. 상업은 더욱더 사기가 되어 갔다. ≪박애≫라는 혁명적 표어는 경쟁에서의 사기와 질투로 실현되었다. 폭력적 억압 대신에 매수가 나타났고, 칼 대신에 돈이 사회 권력의 가장 주된 지렛대가 되었다. 초야권(初夜權)은 봉건 영주에게서 부르주아 공장주에게로 넘어갔다. 매음이 유례없는 규모로 늘어났다. 결혼 자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법적으로 승인된 매음 형태였고 매음의 공식적 가면이었으며, 무수한 간통으로 보충되었다. 한마디로 ≪이성의 승리≫로 채워진 사회․정치 제도는 계몽 사상가들의 눈부신 약속에 비하면 쓰라린 환멸을 자아내는 하나의 희화였다. 다만 이 환멸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나타나게 되었따. 1802년에 생 시몽의 ≪제네바 편지≫가 나왔고, 1808년에 푸리에의 처녀작 - 그의 이론의 기초는 이미 1799년에 세워졌지만 - 이 나왔으며, 1800년 1월 1일에 로버트 오언이 뉴라나크의 관리를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은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공업은 영국에서 겨우 생겨났을 뿐이며 프랑스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대공업만이, 한편으로는 생산 양식의 변혁, 즉 생산 양식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없애라고 절박하게 요구하는 충돌 - 대공업에 의해 형성된 계급들 사이의 충돌뿐만 아니라 대공업에 의해 나타난 생산력과 교환 형태 사이의 충돌 - 을 발전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 속에서 그와 같은 충돌을 해결할 수단도 제공한다. 따라서 1800년에는 새 사회 제도에서 발생하는 충돌들이 아직 겨우 일어나기 시작했던 만큼, 이러한 충돌을 해결할 수단의 발전 또한 아주 미미했다. 비록 공포 정치 시대에 파리의 무산 대중이 한때 권력을 빼앗아 부르주아지 자체를 반대하는 부르주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무산 대중은 당시의 정세에서 자기들이 오랫동안 지배할 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계급의 맹아로서 이제 겨우 일반 무산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직은 독자적인 정치 행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프롤레타아리아트는 억압과 고통을 받는 계층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계층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기껏해야 외부나 위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정세가 사회주의 창시자들의 관점을 규정했다. 미숙한 자본주의적 생산 상태, 미숙한 계급 관계에 상응하여 미숙한 이론이 나왔다. 발달하지 못한 경제 관계 속에 아직 가려져 있던 사회적 과제의 해결책을 머리 속에서 꾸며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회 제도는 오직 결함만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러한 결함을 없애는 거싱 사유하는 이성의 과제였다. 더 완전한 사회 기구의 새로운 체계를 발명하고, 선전을 통해서 할 수 있다면 모범적인 실천 사례를 보여 줌으로써 이를 외부로부터 현존 사회에 강요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새 사회 제도는 처음부터 공상에 그칠 운명을 지니고 있었으며, 세밀하게 작성되면 될수록 더욱더 순수한 환상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된 이 같은 측면들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자. 이제 와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이 환상을 잘난 듯이 들춰내, 이러한 ≪환상≫에 비해 자기 자신의 사고 방식이 건전하다고 뽐내는 따위는 문필가 나부랭이들에게나 맡겨 두자. 우리는 오히려 환상의 껍질을 뚫고 곳곳에서 솟아 나오는 것이기에 속물들로서는 볼 수 없는 그 천재적인 관념의 맹아와 천재적 사상을 반기는 바다.

 

생 시몽은 프랑스 대혁명의 아들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아직 30세도 되지 않았다. 혁명은 이제까지의 특권적인 유한 신분 - 승려와 귀족 - 에 대한 제3신분, 즉 생산과 생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국민 대중의 승리였다. 그러나 제3신분의 승리는 이 신분 가운데 일부분의 승리에 지나지 않으며, 제3신분 가운데 사회의 특권층인 유산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탈취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이 부르주아지는, 일단 몰수되었다가 다음에는 매각된 귀족과 교회의 소유지를 가지고 투기하고 군수품 조달자로 국민을 속여 혁명 과정에서 급속히 발전했다. 집정 정부 시기에 바로 이 투기꾼들이 지배함으로써 프랑스와 혁명을 파멸에 이르게 했으며, 마침내 나폴레옹에게 쿠데타의 구실을 주었다. 그래서 생 시몽의 머리 속에는 제3계급과 특권 계급 사이의 대립이 ≪근로 계층≫과 ≪유한 계층≫ 사이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유한 계층이란 이전까지의 특권 계급의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생산이나 상업에 참가하지 않고 금리로 생활하는 모든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근로 계층≫이란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주, 상인, 은행가들도 다같이 일컫는 말이었다. 유한 계층이 정신적으로 지도하고 정치적으로 지배할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혁명을 통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로 확증되었다. 또 생 시몽이 보기에는 무산자 또한 이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공포 정치 시대의 경험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누가 지도하며 지배해야 할 것인가? 생 시몽의 견해에 의햐면 그것은 새로운 종교적 유대로 결합된 과학적 산업이었는데, 이 종교적 유대란 종교 개혁 이래 혼란된 종교 사상을 통일할 사명을 지닌, 필연적으로 신비적이며 엄격히 신분적인 ≪신(新)기독교≫였다. 그리고 과학이란 곧 학자였으며, 산업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적극적인 부르주아․공장주․상인․은행가였다. 물론 이러한 부르주아는 일종의 공무원, 즉 사회 전체의 신임을 받는 자라야 했으나, 노동자에 비하면 그들은 명령권과 경제적 특권이 있는 지위를 누려야 하는 것이었다. 은행가로 말하면, 바로 그들이야말로 신용을 조절함으로써 사회적 생산 전체를 조절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에서 대공업이, 따라서 동시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이 아직 생겨나는 과정에 있던 시기에 전적으로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 시몽은 특히 강조해 말하기를, 자기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다수이며 가장 가난한 계급≫의 운명에 우선 관심을 가진다고 했다.

 

생 시몽은 이미 ≪제네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노동해야 한다.

 

그는 이미 그 책에서, 프랑스에서 나타난 공포 정치의 지배가 무산 대중의 지배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무산 대중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보라, 당신들의 동지들이 프랑스를 지배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굶주림을 빚어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을 하나의 계급 투쟁, 그것도 단지 귀족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으로서만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지와 무산자 사이의 투쟁으로 이해한 것은 1802년으로서는 아주 천재적인 발견이었다. 1816년에 생 시몽은 정치학을 생산의 과학이라고 선언했으며, 정치학이 경제학에 완전히 흡수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기서는 경제 상태가 정치 제도의 기초라는 견해가 아직 맹아적 형태로밖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물건에 대한 관리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상, 즉 최근에 그렇게도 많이 거론된 ≪국가 폐지≫에 관한 사상이 벌써 명백하게 표명되고 있다. 또 생 시몽은 동시대인을 능가하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연합군의 파리 입성 직후인 1814년과 백일 천하 시기인 1815년에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 나아가 이 두 나라와 독일의 동맹이 유럽이 평화적으로 발전하고 번영하기 위한 유일한 담보라고 선언하고 있다. 1815년에 프랑스 사람들에게 워털루의 승자인 영국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말한데는 실로 크나큰 용기와 역사적 선견지명이 필요했다.

 

생 시몽의 경우에 그 식견이 천재적인 해박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의 견해가 후대 사회주의자들의 엄밀한 경제 사상을 빼고는 거의 모든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다면, 푸리에에게서 우리는 현존 사회 제도에 대한, 진짜 프랑스적인 기지와 심각한 분석이 결합된 비판을 접하게 된다. 푸리에는 부르주아지, 혁명 전 그들에게 열광하던 예언자들, 그리고 혁명 뒤 그들에게 매수된 아첨꾼들의 본질을 잡아낸다. 그는 부르주아 세계의 모든 물질․정신적 빈곤을 용서없이 폭로하고, 이것을 이성만이 지배하는 사회라느니 모든 이에게 행복을 줄 문명의 수립이라느니 하는 과거 계몽 사상가들의 휘황 찬란한 약속, 또 인간의 끝없는 완성 능력이니 뭐니 하는 그들의 선언과 대립하면서 당대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허황된 주장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요란스러운 공치사에 비해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지적하고 이러한 공치사가 완전히 파탄한 데 대해 신랄하게 비웃었다. 푸리에는 비평가일뿐만 아니라, 언제나 낙천적인 성격으로 말마임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풍자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혁명이 쇠퇴하면서 성행하던 투기적 사기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상업 활동에 나타난 일반적인 소상인 근성을 비웃는 문구로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한층 더 훌륭한 솜씨로 남녀 관계의 부르주아적 형태와 부르주아 사회의 여성의 처지를 비판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여성 해방의 정도는 곧 일반적 해방의 자연적 척도라는 사상은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푸리에의 위대한 면은 사회사에 관한 그의 견해에서 가장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의 사회사의 모든 과정을 야만, 가부장제, 미개, 문명이라는 네 발전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가 말하는 문명이란 오늘날의 이른바 부르주아 사회, 따라서 16세기부터 발전하고 있는 사회 질서와 일치하는 것인데,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문명 제도는 모든 시대에 단순한 형태로 감행되던 갖가지 죄악에다 복잡하고 애매하고 양면적이고 위선적인 존재 형태를 부여한다.

 

또 문명은 ≪악순환≫과 모순에 의해 움직이며, 문명은 이 모순을 늘 재생산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건 또는 가식으로건 이루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결과에 이른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문명 시대에 빈곤은 부 그 자체에서 생겨난다.≫

 

는 것이다.

 

푸리에도 동시대인인 헤겔과 마찬가지로 능란하게 변증법을 파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인류의 끝없는 완성 능력이라는 공론(空論)을 반대하여, 역시 변증법적으로 역사 단계에는 상승선과 함께 하강선도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견해를 인류 전체의 장래에 대해서도 적용하고 있다. 칸트가 자연 과학과 지구가 앞으로 멸망한다는 사상을 끌어들인 것과 같이, 푸리에는 역사관에 인류의 장래 멸망이라는 사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혁명의 폭풍이 프랑스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영국에서는 조용했으나 그에 못지않은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증기와 새로운 작업기는 매뉴팩처를 현대식 대공업으로 바꾸었으며, 그리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기초를 변혁했다. 매뉴팩처 시대의 더딘 발전 과정은 생산에서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시대로 급변했다. 사회가 대자본가와 무산 프롤레타리아로 더욱 급속히 분열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는 구시대의 안정된 중간 계급 대신에 몹시 불안정한 수공업자와 소상인 등의 불안한 대중, 즉 주민 가운데 가장 유동적인 부분이 동요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산 방식은 아직 그 상승 발전의 첫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것은 아직 정상적인, 정당한, 당시의 조건에서 있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생산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에 벌써 무서운 사회적 재해를 낳고 있었다. 즉 대도시 빈민굴로 부랑민들이 밀집하고, 출신 성분과 가부장적 풍습과 가족 관계 등에서 온갖 전통이 파괴되고, 특히 부녀와 아동의 노동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나며, 완전히 새로운 환경 속으로 - 즉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농업으로부터 공업으로, 안정된 생활 조건으로부터 날마다 달라지는 불안한 생활 조건으로 - 갑자기 들어가게 된 근로 계급이 대량으로 타락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때 29세의 한 공장주가 개혁가로서 등장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순진하고도 고상한 품성을 지녔으며 보기 드물게 타고난 지도자였다. 로버트 오언은 인간의 성격이 타고난 체질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의 일생, 특히 그의 발육기의 여러 환경 조건의 산물이라고 하는 유물론적 계몽주의의 학설을 채택했다. 오언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업 혁명을, 단지 흐린 물에서 고기 잡기 좋듯 졸부가 되기에 알맞은 무질서와 혼돈으로밖에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오언은 산업 혁명을 자신이 동경하는 사상을 실현하여 이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기에 좋은 기회로 보았다. 맨체스터에서 이미 그는 5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의 지배인으로서 이 사상을 적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800년부터 1829년까지, 그는 지배인인 동시에 동업자의 한 사람으로서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의 커다란 방직 공장을 관리하는 데서도 똑같은 노선을 취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하여 오래지 않아 그의 이름이 전유럽에 알려질 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 뉴라나크의 주민은 점점 늘어나 2500명에 이르렀고, 처음에는 아주 잡다하고 대부분 몹시 타락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오언은 이를 완전히 모범적인 주민 집단으로 변화시켰다. 여기서는 폭음, 경찰, 형사 재판, 소송 사건, 빈민 구제와 자선 사업 등등이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좀 더 인간에 알맞은 환경에 두고 특히 자라나는 세대를 잘 교육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오언이 창안한 유치원이 뉴라나크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거기서는 2세 이상의 어린이들을 받았는데, 어린이들은 이 유치원에서 어찌나 잘 지냈던지 부모들이 그 애들을 집으로 데려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언의 경쟁자들은 자기 노동자들에게 매일 13시간 또는 14시간 작업할 것을 강요했는데, 뉴라나크에서는 노동 시간이 10시간 반밖에 디지 않았다. 면화 공황으로 하는 수 없이 4개월간 휴업하게 되었을 때에도 휴업 노동자들에게 임금의 전액을 계속 지불했다. 그런데도 공장의 가치는 2배 넘게 늘어났고 끝까지 소유자에게 많은 이득을 보장했다.

 

그러나 오언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 준 생활 조건도 그의 눈에는 아직 인간에 알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나의 노예였다.

 

그가 말한 것은, 자신이 뉴라나크 노동자들에게 만들어 준 비교적 좋은 조건이란, 자유로운 생산 활동은 제쳐놓고라도 그들의 성격과 지능을 올바르고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아직 대단히 불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2500명의 노동 부대는 사회를 위해, 불과 반세기 전에는 60만 명을 가지고서야 겨우 생산할 수 있었던 대량의 현실적 부를 만들어 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2500명이 소비하는 부와 60만 명이 소비했을 부의 차액은 어디로 갔느냐고.

 

대답은 명백했다. 그 차액은 기업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5%의 이자와, 그 밖에도 30만 파운드가 넘는 이득을 얻은 공장 소유주들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이 사실은 뉴라나크에서보다 훨씬 더 크게 영국의 다른 모든 공장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 새로운 부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을 타도하고 귀족적 사회 제도의 원칙을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힘은 노동자 계급의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 성과도 반드시 노동자 계급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만 개인의 부유와 대중의 예속화에 봉사해 온 데 지나지 않은 이 새로운 강대한 생산력이 오언에게는 사회 개조의 기초로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은 반드시 모든 이의 공동 재산으로서 모든 이의 공동 복리를 위해서만 쓰여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순전히 실무적인 원칙 위에서, 말하자면 상인적 계산의 결과로서 오언의 공산주의가 생겨났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실천적 성격을 언제 어디서나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1823년에 오언은 공산주의 이민지를 창설하여 아일랜드의 빈궁을 없앨 안을 작성하고, 거기에 필요한 투자액, 매년 지출과 수입 예상액에 관한 상세한 계산서를 덧붙였다. 오언은 미래의 제도에 대한 자기의 마지막 계획에서 평면도와 정면도, 조감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적 세목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깊은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일단 그의 사회 개조 방법이 채용된다면 심지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도 그 세목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로 옮아 간 것은 오언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가 단순히 박애주의에 머물렀던 동안, 그는 오직 부와 칭송과 존경과 명예를 거두었을 뿐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명성 높은 사람이었다. 그와 비슷한 사회적 처지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ㅏ 정치가들과 군주들까지 그의 말에는 호의를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들고 나타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사회 변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큰 장애물, 즉 사적 소유, 종교, 현존 결혼 제도였다. 이러한 장애물과 투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기가 공적인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언은 이 점을 고려해서 그 장애물에 대한 자신의 가차없는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예견했던 그대로 되었다. 공적인 사회에서는 내쫓기고 신문에서는 묵살되었으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희생하여 미국에서 실시해 본 공산주의적 실험에 실패한 결과 가난해진 오언은 직접 노동자 계급에 의거하여 그들 속에서 30년 동안이나 확동을 계속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진행된 모든 사회 운동과 이 사회 운동의 모든 실제 성과는 오언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1819년에는, 5년간에 걸쳐 그가 애쓴 덕택에 공장에서의 여성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최초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는 영국의 모든 노동 조합이 하나의 노동 총동맹으로 결집한 제1차 대회의 의장이었다. 또 그는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사회 조직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적 방책으로, 한편으로는 협동 단체(소비 조합과 생산 조합)를 조직했다. 이것은 그 뒤 적어도 상인이나 공장주들이 사회적으로 전혀 필요없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노동자 시장을 조직했는데 여기서는 노동 시간 한 시간을 단위로 하는 노동 증권으로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었다. 이 시장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뒤에 나타난 프루동의 교환 은행의 선구자였으며, 그 차이점은 전자가 모든 사회악에 대한 만능약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 전체를 훨씬 더 급진적으로 개혁해 나갈 하나의 첫 조치로 제시되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이 공상가들의 사고 방식은 19세기 사회주의 사상을 오랫동안 지배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지금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바이틀링을 포함한 이전의 독일 공산주의는 이 사고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사회주의는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표현으로서, 발견되기만 하면 그 자체의 힘으로 전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시간과 공간과 인류 역사 발전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그것이 발견될 것인가는 실로 순전히 하나의 우연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절대적 진리와 이성과 정의도 각 학파의 창시자에 따라 서로 다르며, 각 학파 창시자의 절대적 진리․이성․정의의 특수한 형태는 그 학파 창시자의 주관적인 오성․생활 조건․인식의 넓이와 사고의 발전 정도에 따라 제약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절대적 진리들간에 충돌이 있을 때 이 충돌은 그 서로간의 차이를 마멸시킴으로써만(즉 절충과 타협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고 방식에서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 영국의 대다수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머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특수한 종류의 절충적이고 평균적인 사회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나올 수 없었다. 이 절충적 사회주의는 갖가지 분파 창시자들의 더 온건한 비판적 논평, 경제학적 명제와 미래 사회관이 마구 뒤섞인, 갖가지 색채로 가득 찬 혼합물이었다. 이 혼합물은 그 각 구성 부분이 논쟁의 물결 속에서 마치 시내의 조약돌처럼 그 날카로움을 잃으면 잃을수록 더욱 쉽게 얻어진다.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만들려면 우선 그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독일 철학

 

그런데 18세기의 프랑스 철학과 나란히, 또 그것에 뒤이어 헤겔에게서 완결되는 근대 독일 철학이 발전했다. 이 근대 독일 철학의 가장 위대한 공적은 사유의 최고 형식인 변증법 논자들이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박식한 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변증법적 사유의 가장 본질적인 형식들을 연구했다. 반대로 근세 철학은 그 가운데 변증법의 탁월한 대표자들(예를 들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이 있기는 했으나, 특히 영국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으로 점점 빠져 들어갔다. 18세기의 프랑스인들 또한 적어도 그들의 특수한 철학적 노작들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이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에 지배되고 있었다.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상기하면 된다. 여기서는 간단히 이 두 사고 방식의 본질을 논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자연이나 인류 역사 또는 우리들 자신의 정신 활동을 가만히 고찰해 볼 때, 우리 앞에 우선 나타나는 것은 연관과 상호 작용의 끝없이 복잡한 화폭이다. 거기에서는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발생하고 소멸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전체를 보게 되며 부분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둔다. 우리는 바로 무엇이 운동하고 이행하며 연관 속에 있는가에 대해서보다도 운동과 연관 자체에 더 많은 주의를 돌리게 된다. 원시적이고 소박하기는 하나 본질상 정확한 이 세계관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고유한 것으로, 그것을 비로소 명백하게 표현한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다. 그는 모든 것은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끊임없이 발생과 소멸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견해가 현상들의 화폭 전체의 일반적 성격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기는 하나, 이 화폭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는 화폭 전체도 명료하지 않다. 이 부분들을 인식하자면 그것을 자연적 또는 역사적 연관에서 개별적으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 과학과 역사 연구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다. 그런데 이 과학 부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는 부차적인 위치밖에 차지하지 못했으며,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리스 인들은 우선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적 또는 역사적 자료가 어느 정도 수집된 뒤에야 비로소 비판적 취사 선택, 비교, 또 이에 따른 강(綱), 목(目), 종(種)으로의 구분에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밀한 자연 연구의 실마리는 처음에는 오직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그리스 인들에게서, 다음에는 중세기의 아라비아인에게서나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참된 자연 과학은 15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시작되었으며, 그때부터 그것은 점점 가속적으로 끊임없이 성과를 거두었다. 자연을 개별 부분으로 분해하는 것, 유기체의 내부 구조를 다양한 해부학적 형태에 따라 연구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최근 400년간에 자연 과학의 발전이 거둔 거대한 성과의 기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방법은 동시에, 자연 사물과 자연 과정을 커다란 총체적 연관 밖에서 고립적으로, 따라서 운동이 아니라 정지 상태에서,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서, 산 것으로서가 아니라 죽은 것으로 고찰하는 습관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베이컨(Bacon)과 로크가 자연 과학으로부터 철학에 도입한 이러한 인식 방법은 최근 수세기의 특별한 편협성, 즉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을 만들어 냈다.

 

형이상학자가 보기에 사물과 그것이 사유 속에 반영된 영상, 즉 개념은 하나하나씩 또 따로따로 연구되어야 할 개별적이며 변하지 않고 고정된, 한번 주어지면 그만인 대상이다. 형이상학자는 절대적인 대립 가운데서 사고한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라. 무엇이든지 이를 벗어난 것은 악에서 나오느니라.≫(마태 복음 제5장 제37절)이다. 형이상학자가 보기에 사물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어느 한 가지다. 마찬가지로 또 사물은 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것일 수는 없다. 긍정과 부정은 절대적으로 서로 배제하며, 원인과 결과 또한 서로 고정된 대립 속에 있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이른바 상식적인 사고 방식이므로, 언뜻 보기에는 아무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 상식은 벽으로 둘러싸인 가정 생활에서는 대단히 존경할 만한 동반자일 것이나, 넓은 영역에 나서 보면 아주 놀라운 모험을 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인식 방법은 대상의 성격에 따라, 넓든 좁든 어떤 영역 안에서는 정당하고 또 필요하기조차 할 것이나, 얼마 안 있어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 한계를 넘으면 그것은 일면적이고 국한되고 추상적인 것이 되며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인식 방법은, 개별 사물때문에 그것들의 상호 연관을 보지 못하고, 그것들의 존재 때문에 발생과 소멸을 보지 못하며, 그것들의 정지 상태 때문에 운동을 잊어 버리고, 나무만 보지 숲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는 어떤 동물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나, 좀더 정밀하게 연구할 때는, 태아 살해가 살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 합리적인 한계를 발견코자 헛되이 애써 온 법률가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대단히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된다. 생리학은 죽음이 돌발적이고 순간적인 현상이 아니라 대단히 긴 과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만큼, 죽음의 순간 또한 규정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생물체가 각 순간마다 같은 것이며, 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 순간마다 외부에서 섭취한 물질을 동화(同化)하고 자체로부터 다른 물질을 배설하며, 또 각 순간마다 유기체의 어떤 세포들은 죽고 새 세포들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는 이 유기체의 물질은 완전히 갱신되어 다른 원자로 바꾸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체는 언제나 같은 것이면서도 같은 것이 아니다. 좀더 면밀히 연구해 볼 때 우리는 또한, 어떤 대립물의 양극 - 긍정과 부정 - 은 서로 대립하면서 동시에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들은 그 둘 사이의 모든 대립에도 불구하고 서로 침투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개별적인 경우를 세계 전체와의 일반적 연관에서 고찰하자마자, 원인과 결과는 계속 그 위치를 바꾸는 보편적 상호 작용 가운데서 서로 겹치고 얽히게 된다. 즉 여기서 또는 지금은 원인인 것이, 거기서 또는 그때에는 결과가 되며, 또는 이와 반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과 이러한 사고 방법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유의 틀에는 맞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사물과 그것의 개념적 반영을 주로 상호 연관에서, 연쇄에서, 운동에서, 발생과 소멸에서 파악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변증법으로 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정은 변증법 자체의 고유한 연구 방법을 확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자연은 변증법을 검증하는 시금석이다.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할 점은, 현대 자연 과학은 이러한 검증을 위해 아주 풍부하고 나날이 늘어나는 재료를 제공했으며, 그리하여 자연계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는 것, 자연계는 영원히 똑같고 늘 되풀이되는 순환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역사를 거친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다윈을 들어야겠다. 그는 현재의 모든 유기체, 즉 식물과 동물, 따라서 인간 또한 수백만 년 계속된 발전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형이상학적 자연관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변증법적으로 사유할 줄 아는 자연 과학자는 손꼽을 만큼 적기 때문에 이룩한 성과와 인습적인 사고 방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현재 이론적 자연 과학을 지배하고 있는 끝없는 혼란, 교사나 학생, 필자나 독자를 다같이 절망에 빠뜨리는 끝없는 혼란은 모두 이런 충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그 발전에 관한, 인류 발전에 관한, 따라서 또 이 발전이 인간 두뇌에 반영되는 것에 관한 정확한 관념은 오직 변증법적 방법으로써만, 발전과 소멸, 즉 전진적 변화와 퇴행적 변화 사이의 일반적 상호 작용을 계속 고찰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근대 독일 철학은 처음부터 바로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칸트는 뉴턴의 - 이른바 맨 처음의 충격이 한번 가해진 뒤에는 - 태양계를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즉 선회하는 성운(星雲)에서 태양과 모든 유성들이 생겨나는 과정으로 바꿈으로써 자신의 과학적 활동을 개시했다. 이때 그는 벌써 태양계의 발생이 장래의 필연적 멸망을 전제로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견해는 반세기 뒤에 라플라스에 의해 수학적으로 입증되었으며, 또 반세기 뒤에는 작열하는 가스 덩어리가 밀도를 각각 달리해 우주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분광기에 의해 증명되었다.

 

이 근대 독일 철학은 헤겔의 체계에서 완성되었다. 헤겔의 위대한 공적은, 그가 처음으로 자연․역사․정신적 세계 전체를 한 과정으로, 즉 끊임없는 운동․변화․전화․발전으로 보았으며 또 이 운동과 발전의 내적 연관을 해명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이제 인류의 역사가 오늘의 성숙한 철학적 이성이 심판 앞에서 그저 일률적으로 단죄되고, 될수록 빨리 잊혀야 할 무의미한 폭력의 조잡한 혼돈으로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반대로 인류 역사는 인류 자체의 발전 과정으로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제 이 과정의 모든 미로 속에서 그 연속된 단계들을 추적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우연성 속에서 이 과정의 내적 합법칙성을 증명하는 것이 사유의 과제가 되었다.

 

우리는 헤겔의 체계가 스스로 내세운 이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괘념치 않아도 좋다고 본다. 이 체계의 역사적 공적은 이 과제를 제기한 점에 있다. 이런 과제를 혼자서 해결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헤겔은 생 시몽과 함께 당시 가장 해박한 사람이었으나, 어쨌든 그는 첫째로 자기 자신의 지식이 지닌 피할 수 없는 한계로 말미암아, 둘째로 범위와 깊이에서 또한 국한되어 있는 그 시대의 지식과 견해로 말미암아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 밖에 또 세번째 사정이 있었다. 헤겔은 관념론자였다. 즉 그가 보기에는 우리 두뇌의 관념이 많든 적든 현실의 사물과 과정의 추상적인 반영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과 그것의 발전이란 다만 이미 세계가 생겨나기 전에 어딘가 존재하고 있던 ≪이념≫이라는 것이 현실화하여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머리로(거꾸로) 세워졌고, 세계 현상의 현실적 연관이 헤겔에 의해 아무리 정확하게 또 천재적으로 파악되었다 해도 그의 체계의 세세한 부분에서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전 인수 격이고 인공적이며 허구적인 것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왜곡된 것으로 될 수밖에 없는 점이 많이 있었다. 헤겔의 체계 자체는 하나의 거대한 유산(流産)이었으나, 그 대신 그러한 체계로서는 마지막의 것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아직 구원할 수 없는 내적 모순으로 앓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인류 역사를 하나의 발전 과정으로 보는 견해, 즉 이른바 절대적 진리의 발전을 통해서 지적 완결에 이르렀다고 보지 않는 견해가 이 체계의 본질적인 전제로 되어 있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체계가 바로 이 절대적 진리의 완결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역사에 관한, 전체를 포괄하며 마침내 완결된 인식 체계라는 것은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 법칙과 모순된다. 변증법적 사유의 기본 법칙은 외부 세계 전체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세대가 바뀜에 따라 거대하게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독일 관념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유물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단순히 18세기의 형이상학적인, 따라서 전적으로 기계적인 유물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과거의 모든 역사를 소박한 혁명적 태도로 간단히 배척해 버리는 것과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역사를 인류의 발전 과정으로 보고 이 과정의 운동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자기 과업으로 삼는다. 18세기의 프랑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헤겔의 경우에도 자연이란 뉴턴이 가르친 영원한 천체들과 린네가 가르친 변하지 않는 유기체의 종(種)들로 이루어진, 똑같고도 제한된 원 안에서 운동하는 늘 변하지 않는 하나의 총체라고 보는 자연관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연관과는 반대로 현대 유물론은 자연 과학의 최신 성과를 개괄한다. 이에 따르면 자연도 또한 시간상의 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천체 또한 환경이 적합하여 거기에 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생겨나며 또 소멸한다. 그리고 순환은 -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한 - 끝없이 더 거대한 규모로 된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경우에도 현대 유물론은 본질상 변증법적이어서 다른 과학 위에 군림하는 철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물과 사물에 관한 지식 사이의 일반적 연관 속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밝힐 필요가 모든 개별 과학 앞에 제기됨에 따라, 이 일반적 연관에 관한 과학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게 된다. 그래서 종래의 온갖 철학 가운데서 아직 독자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은 사유와 사유 법칙에 관한 학문, 즉 형식 논리학과 변증법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자연과 역사에 관한 실증 과학 속에 동화되고 만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자연관은 변혁은 필요한 실증적 인식 재료가 연구에 의해 제공됨에 따라서만 일어날 수 있었으나, 역사관에 결정적 변혁을 일으키게 한 역사적 사건들은 이미 훨씬 전에 일어났다. 1831년 리용에서 노동자 폭동이 처음으로 일어났고 1838~1842년에는 최초의 전국적 노동 운동인 영국 차티스트들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한편으로는 대공업이,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 전에 쟁취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가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계급 투쟁이 유럽 선진 국가들에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여러 사실들은 자본의 이해 관계와 노동의 이해 관계가 같다느니, 자유 경쟁의 결과로 반드시 전반적 조화와 민중의 전반적 복지가 찾아 온다느니 하는 부르주아 경제 학설의 모든 허구성을 더욱더 명료하게 폭로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또 비록 아주 불완전하기는 하나 이러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표현한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아직 청산되지 않은 낡은 관념론적 역사관은, 물질적 이해 관계에 기초를 둔 계급 투쟁을 알지 못했으며, 대체로 어떤 물질적 이해 관계도 알지 못했다. 생산과 모든 경제 관계는 ≪문화사≫의 부차적인 요소로서 단지 부차적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종래의 모든 역사를 새로 연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시 상태를 뺀 과거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사회 계급들은 해당 시기의 생산 관계와 교환 관계, 한마디로 말하면 그 시대의 경제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 따라서 해당 시기의 사회 경제적 구조가 실재적 토대를 이루며, 어떤 역사적 시기의 법률․정치적 제도와 종교․철학적 및 그 밖의 견해의 상부 구조 전체는 결국 이 토대를 바탕으로 설명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헤겔은 역사관을 형이상학에서 해방해 변증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이었다. 이제 관념론은 마지막 피난처인 역사관에서조차 내쫓기고 유물 사관이 수립 되었으며, 이전과 같이 인간의 존재를 그의 의식에서 설명하는 대신에 인간의 의식을 그의 존재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회주의를 이러저러한 천재적 두뇌의 우연한 발견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생겨난 두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투쟁이 낳은 필연적 결과로 보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임무는 되도록 완전한 사회 제도를 구상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계급들과 그들 사이에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하는 역사․경제적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으며, 그 과정에 의해 조성된 경제적 상태에서 충돌을 해결할 수단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 사회주의는, 프랑스 유물론자들의 자연관이 변증법이나 최신 자연 과학과 양립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유물 사관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이전의 사회주의는 비록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결과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끝장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나쁜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전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는 피할 수 없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에 격분하면 할수록, 이 착취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는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제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발생이 그 역사적 연관에서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역사적 시기에는 필연적이라는 것, 따라서 그 몰락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 생산 양식의 내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잉여 가치의 발견으로 이루어졌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의 점유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이 생산 양식으로 실현되는 노동자 착취의 기본 형태라는 것, 자본가는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상품 시장에서 갖는 가치를 그대로 다 지불하고 사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 노동력에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거기서 짜 낸다는 것, 그리고 이 잉여 가치가 결국은 유산 계급에 의한 축적을 통해 계속 늘어나는 자본량의 원천이 되는 가치액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어떻게 수행되며 또 자본은 어떻게 생산되는가가 설명되었다.

 

이 두 가지의 위대한 발견 - 유물 사관과 잉여가치로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니는 비밀을 폭로한 것 - 은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 발견으로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이 과학을 모든 세세한 부분에 걸쳐서 또 모든 상호 연관 속에서 앞으로 더욱 완성해 나가는 것이 문제다.

 

 

3. 영국의 정치경제학

 

유물 사관은 생산, 그리고 생산에 뒤따르는 생산물의 교환이 온갖 사회 제도의 기초를 이룬다는 명제에서 출발하며 역사상의 모든 사회에서 생산물의 분배라든가, 또 이와 함께 계급이나 신분으로 사회가 분열되는 것 등은 무엇이 어떻게 생산되며 그 생산물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변동과 정치 변혁의 궁극 원인은 인간의 두뇌 속에서, 즉 영원한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늘어가는 이해 속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생산 양식과 교환 방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하며, 철학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경제에서 찾아야 한다. 현존 사회 제도들이 합리적이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든가 또는 ≪이성은 의미 없게 되고 행복은 고통이 되었다.≫든가 하는 견해가 퍼져 가고 있다는 것은, 생산 양식과 교환 방식에 어느덧 변동이 일어나서 지난 시기의 경제 조건에 적합하던 사회 제도가 이제는 이미 이 변동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타난 그 재앙을 없애기 위한 수단도 또한 이 변화된 생산 관계 자체에 - 많건 적건 발전한 형태로 - 틀림없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수단을 두뇌 속에서 생각해 낼 것이 아니라, 두뇌의 힘을 빌려 현존하는 생산의 물질적 사실들 속에서 발견해 내야 한다.

그러면 현대 사회주의는 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지금은 거의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현존 사회 제도는 오늘날의 지배 계급인 부르주아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 이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고 불려 오는 부르주아지의 고유한 생산 양식은 봉건 제도 안의 지방․신분적 특권이나 사람들 서로간의 인격․예속적 관계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 제도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부르주아적 사회 제도, 즉 자유 경쟁, 이주의 자유, 상품 소유자의 평등권 등 요컨대 부르주아적 행복의 나라를 수립했다. 이제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증기와 새로운 작업기가 낡은 매뉴팩처를 대공업으로 변화시킨 이래 부르주아지의 관리로 조성된 생산력은 유례없는 속도와 미증유의 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찍이 매뉴팩처와 그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수공업이 동업 조합이라는 봉건적 질곡과 충돌하게 된 것처럼, 대공업도 더 높은 발전 단계에 이르러서는 자기를 틀어박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는 좁은 틀과 충돌하게 된다. 새로운 생산력은 이미 그것의 부르주아적 이용 형식을 벗어날 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 양식 사이의 이 충돌은 결코 인간의 원죄와 신의 공정성 사이의 충돌처럼 한갖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만 생겨난 충돌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즉 우리 밖에서, 이 충돌을 담당하고 수행하는 그 사람들 자신의 의사나 행동으로부터 독립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현대 사회주의는 이 사실상의 충돌이 사유에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먼저 이 충돌 때문에 직접 고통받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머리 속에 반영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충돌이란 어떤 것인가?

 

자본주의적 생산이 출현하기 전, 즉 중세에는 생산자가 자기의 생산 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데 기초를 둔 소생산이 곳곳에 존재했다. 즉 농촌에는 자유롭든 예속적이든간에 소농(小農)의 경영이 있었고 도시에는 수공업이 있었다. 노동 수단 - 토지, 농기구, 작업장, 손도구 - 은 개인의 노동 수단으로서 오직 혼자 쓰는 것만을 고려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작고 빈약하고 제한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노동 수단은 일반적으로 생산자 자신의 것이었다. 이 분산된 소규모의 생산 수단을 모으고 통합하여 그것을 생산의 현대적인 강력한 지렛대로 바꾸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담당자인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부르주아지가 15세기 이래 단순 협업, 매뉴팩처, 대공업 등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생산 단계에 걸쳐 이 역할을 역사적으로 수행해 온 정형을 마르크스는 ≪자본론≫제4편에서 상세히 묘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 마르크스가 같은 책에서 입증한 바와 같이 - 생산 수단을 각 개인이 사용하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사람들의 집단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즉 사회적 생산 수단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그 제한된 생산 수단을 강력한 생산력으로 바꿀 수 없었다. 물레․베틀․조잡한 망치 대신에 방적기․방직기․증기 망치가 나타났으며, 개인 작업장 대신에 수백 수천 노동자의 공동 노동이 필요한 공장이 나타났다. 생산 수단과 마찬가지로 생산 자체도, 일련의 분산적 행동에서 일련의 사회적 행동으로 바뀌었으며, 생산물도 각 개인의 생산물에서 사회적 생산물로 바뀌었다. 현재 공장에서 나오는 실․옷감․금속 제품은 많은 노당자들의 공동 노동의 산물로서, 그것이 마침내 완제품이 되어 나오기까지는 많은 노동자들의 손을 차례로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물품들에 대해서 ≪이것은 내가 만들었다. 이것은 내 생산물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아무런 계획 없이 점점 생겨난 분업이 생산의 기본 형태인 곳에서는, 분업은 반드시 생산물에다 상품의 형태를 부여한다. 이 상품의 상호 교환, 즉 구매와 판매를 통해 개별 생산자들은 자신의 갖가지 욕망을 채울 수 있다. 중세의 현편이 바로 그러했다. 예컨대 농민은 농산물을 수공업자에게 팔고 그에게서 수공업 제품을 사다 썼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 생산자들, 즉 상품 생산자들의 사회에 새로운 생산 양식이 끼어들게 되었다. 이 생산 양식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자연 발생적이고 무계획적인 분업의 한가운데다가 개별 공장 안에 조직된 계획적 분업을 확립했다. 개인적 생산과 나란히 사회적 생산이 나타났다. 이 둘의 생산물은 같은 시장에서 판매되었고 따라서 가격은 대체로 거의 같았다. 그러나 계획적 조직은 자연 발생적 분업보다 강력했다. 사회적 노동을 적용하는 공장은 분산된 소생산자들보다 생산물을 더 싸게 생산했다.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은 한 부문 한 부문씩 연달아 패배당하고, 사회적 생산이 모든 낡은 생산 방식을 변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의 이러한 혁명적 성격은 거의 의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품 생산을 강화하고 확대하려는 수단이 되었다. 사회적 생산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상품 생산과 상품 교환의 일정한 공간, 즉 상인 자본, 수공업, 임금 노동과의 직접적 연관에서 생겨났다. 사회적 생산 그 자체가 상품 생산의 새로운 형태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상품 생산에 고유한 점유 형태는 이 생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보존되었다.

 

중세에 발전한 바와 같은 소상품 생산 형태에서는, 노동 생산물이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각 생산자들은 자신이 소유한 원료, 때로는 자신이 생산한 원료로 자신의 노동 수단과 자신의 손 또는 자기 가족의 손을 사용하여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산자에게는 자신의 생산물을 점유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생산물은 자연히 그의 것이 되었다. 따라서 생산물의 소유권은 자기 자신의 노동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노력이 이용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보통 부차적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며, 또 번번이 임금 이외의 다른 방도로도 보상되었다. 동업 조합의 도제와 직인은 생계를 꾸리고 보수를 얻기 위해서보다는 독립적인 장인 자격을 얻으려고, 즉 자기 자신의 수련과 준비를 위해 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산 수단이 대규모 작업장과 매뉴팩처에 집중되어 사실상 사회적 생산 수단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생산 수단과 생산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생산 수단과 생산물처럼 취급되었다. 과거에 노동 수단의 소유자가 생산물을 점유했던 것은, 그것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생산물이고 다른 사람의 보조적 노동은 예외였기 때문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생산물이 이미 자신의 생산물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사람의 노동의 생산물인데도 노동 수단의 소유자가 그것을 계속 점유했다. 그리하여 생산 수단을 실제로 가동한 사람, 실제로 이 생산물을 생산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가가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을 점유하게 되었다. 생산 수단과 생산은 본질에서 사회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개별 생산자의 사적(私的) 생산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각자가 자기 생산물의 소유자로서 그것을 시장으로 가지고 나오는 그러한 점유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다. 생산 양식은 이러한 점유 형태의 전제를 폐기하고 있는데도 아직 그러한 점유 형태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생산 양식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게 하는 바로 이 모순에 현대의 모든 충돌의 맹아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결정적인 모든 생산 부문과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모든 나라들에서 새로운 생산 양식의 지배가 더욱 우세해 가면 갈수록, 따라서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을 몰아내 버릴수록,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와의 상호 모순 또한 더욱 날카롭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들이 맨 처음 나타났을 때 임금 노동이라는 형태가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임금 노동은 단지 예외로서 부업․보조․과도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 일용 노동에 고용되는 농업 노동자도 아주 빈약하나마 근근이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동업 조합의 규약은 오늘의 직인도 미래에는 장인이 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산 수단이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자본가의 손안에 집중되자 사태는 급변했다. 개별 소생산자의 생산 수단과 생산물은 더욱더 가치가 떨어졌으며, 개별 생산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전에는 예외로 또는 부업으로 존재하던 임금 노동이 생산 전체에 걸쳐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기본 형태가 되었다. 이전에는 부업이던 것이 지금은 생산자의 유일한 직업이 되었다. 간혹 고용되던 노동자가 이제는 종신 고용 노동자가 되었다. 게다가 종신 고용 노동자의 숫자도, 이와 함께 진행된 봉건 질서의 붕괴, 봉건 영주에 예속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산, 농토에서 농민을 추방하는 운동 등등으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의 손안에 집중된 생산 수단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노동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생산자로 완전히 분리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상품 생산자들, 즉 개별 생산자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끼어들었는데, 그들 사이의 사회적 연계는 그들의 생산물의 교환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 기초를 둔 사회의 고유한 본질은 생산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는 점이다. 각자는 자신이 우연히 가지게 된 생산 수단으로, 교환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제각기 생산한다. 그 누구도 자신이 생산하는 생산물이 얼마나 시장에 나타날지, 그 생산물에 대한 수요자가 얼마나 될지 알지 못하며, 또 그 누구도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이 실제로 요구되는지, 그 생산물의 생산비가 보상될지, 그리고 도대체 그것이 팔리게 될지 알지 못한다. 사회적 생산을 지배하는 것은 무정부성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생산 형태에도 그러하거니와 상품 생산에도, 내적으로 고유하며 그것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자체의 특수한 법칙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무정부성을 박차고 바로 이 무정부 상태 속에서, 이 무정부 상태를 거쳐 관철되어 간다. 이 법칙은 사회적 연관의 유일한 형태인 교환에서 나타나며, 개별 생산자들에게는 하나의 강제적인 경쟁 법칙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이 법칙은 처음에는 심지어 생산자들 자신도 모르며, 오직 오랜 경험을 통해 차츰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법칙은 생산자들을 무시하고 생산자들에 맞서서, 그들의 생산 형태에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관철되어 간다. 생산물이 생산자 자신을 지배한다.

 

중세 사회, 특히 그 처음 몇 세기 동안은 생산이 주로 자체 수요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생산자 자신과 그 가족의 수유만을 충족시켰다. 농촌에서와 같이 신분적 종속 관계가 존재하던 곳에서는 생산이 봉건 영주의 수요도 충족시켰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어떤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생산물은 상품의 성격을 띨 수 없었다. 농민의 가족은 먹고 입고 쓰는 도구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을 생산했다. 그들이 팔려고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자체 수요와 봉건 영주에게 바치는 공물 이상의 잉여물을 겨우 생산하게 된 뒤부터였으며, 이러한 잉여물이 판매용으로 사회적 교환에 투입되면서 상품이 되었다. 물론 도시의 수공업자들은 처음부터 교환을 위해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자체 수요에 필요한 물건을 대부분 자기 자신이 만들었다. 즉 그들은 채소밭과 조그마한 밭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유림에서 가축을 방목했다. 그 밖에 이 공유림은 그들에게 건축 재료와 연료를 공급해 주었다. 여자들은 아마, 양모 등으로 실을 뽑았다.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즉 상품 생산은 이제 겨우 생겨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래서 교환과 시장은 제한되어 있었고, 생산 방식은 정체되어 있었으며, 지방은 외부에 대해 봉쇄되어 있었고, 지방 단위의 범위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다. 농촌에는 마르크 공동체, 도시에는 동업 조합이 있었다.

 

그런데 상품 생산이 확대되고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나타나면서, 이전에는 잠자고 있던 상품 생산의 법칙이 더 공공연하게, 또 더 강력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낡은 연계는 흔들리고 묵은 장벽은 부수어졌으며, 생산자들은 더욱더 분산되고 독립적인 상품 생산자로 바뀌어 갔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명백히 드러났으며 더욱더 첨예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을 강화하는 데 쓴 중요한 도구는 무정부성의 정반대물이었다. 그것은 모든 개별 생산 작업장에서 생산을 날이 갈수록 더욱더 사회적 생산으로 조직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지난날의 평온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갖가지 생산 부문에 침투하여 그 부문에서 지난날의 생산 방법을 몰아냈다. 수공업에 침투해서는 지난날의 수공업을 쓸어 없앴다. 일터는 전쟁터가 되었다. 지리상의 대발견과 이에 뒤이어 이루어진 식민지 쟁탈로 판로는 몇 배로 넓어졌고 수공업의 매뉴팩처화가 촉진되었다. 투쟁은 이미 각 지방의 개별 생산자들 사이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지방 단위의 싸움은 또 전국적 투쟁으로까지, 17세기와 18세기의 상업 전쟁으로까지 발전했다. 마침내 대공업과 세계 시장의 발생은 이 투쟁을 보편화하는 동시에 유례없이 격렬하게 만들었다. 개별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나 모든 생산 부문들, 또는 모든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나 다 마찬가지로, 존망의 문제는 그것들이 자연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유리하게 작용하는 생산 조건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진 자는 용서 없이 없앤다. 이것은 자연에서 사회로 - 수십 배나 더 난폭하게 - 옮아 온 다윈의 개체 생존 투쟁이다. 동물의 자연적 상태가 인류 발전의 절정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은 개별 공장들의 생산의 조직화와 전사회의 생산의 무정부상 사이의 대립으로 재생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본래부터 거기에 내재하는 모순의 이러한 두 가지 현상 형태에서 벗어날 길 없이 ≪악순환≫하면서 운동한다. 푸리에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이 ≪악순환≫이다. 그러나 당시의 푸리에로서는 물론 이 순환의 둘레가 ㅈ머점 좁아진다는 것, 생산의 운동은 오히려 나선형으로 진행되어 유성의 운동처럼 반드시 중심과 충돌하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아직 볼 수 없었다.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이 원동력은 인류의 대다수를 차츰 프롤레타리아로 바꾸는데, 이번에는 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결국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끝장내고야 만다.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이라는 이 원동력은, 대공업에서 사용하는 기계를 끝없이 개선할 가능성을 개별 산업 자본가에 대한 하나의 강제 법칙, 즉 멸망하고 싶지 않거든 자신의 기계를 끊임없이 개선하라고 명령하는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게 한다. 그러나 기계의 개선으로 인간 노동의 일정한 양은 필요 없게 된다. 기계의 적용과 보급이 몇몇 기계 노동자가 수백만 손노동자를 내쫓는 것을 뜻한다면, 기계의 개선은 더욱더 많은 기계 노동자들 자신이 내쫓김을 뜻하며, 결국은 노동자의 공급이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평균 수요를 뛰어넘게 됨을 뜻한다. 유휴 노동자 대중은 내가 이미 1845년에 이름붙인 바와 같이 진짜 산업 예비군을 형성한다. 이 산업 예비군은 생산이 전속력으로 돌아갈 때는 생산에 이용되다가도, 그 다음에 반드시 뒤따라오는 공황 때에는 길거리로 쫓겨난다. 노동자 계급과 자본 사이의 생존 투쟁에서 항상 족쇄처럼 노동자 계급의 발에 매달리는 이 산업 예비군은, 임금을 늘 자본의 요구에 맞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임금 조절기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기계는 노동자 계급을 반대하는 자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노동 수단은 늘 노동자의 손안에서 생활 수단을 빼앗게 되며, 노동자의 생산물은 자신들을 노예로 만드는 도구가 된다. 그 결과, 노동 수단의 경제적 이용은 동시에 애초부터 노동력의 가장 무자비한 낭비가 되며, 노동의 정상적인 기능 조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된다. 또 노동 시간을 줄이는 데 강력한 수단인 기계는 노동자와 그의 가족 모두의 생명을 자본의 가치 증식을 위한 잠재적 노동 시간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한 부문의 과도한 노동은 이 계급의 다른 부문이 완전한 실업에 빠지는 조건이 되며, 한편 소비자를 찾아 전세계를 헤매는 대공업은 자기 나라 안에서는 노동자 대중의 소비를 기아 상태의 최저 한도에 국한시켜 놓음으로써 자기 나라 안의 시장을 파괴한다. ≪상대적 과잉 인구, 즉 산업 예비군을 늘 자본 축적의 규모 및 활력과 균형을 이루도록 유지하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망치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윗돌로 못박아 놓은 것보다 더 튼튼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묶어 놓는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상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낳는다. 따라서 한쪽 극에서 부가 쌓이는 것은 동시에 반대쪽 극, 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계급측에서 빈곤, 노동의 고통, 예속, 무지, 야수화, 도덕적 타락이 쌓이는 것이다.≫(마르크스, ≪자본론≫, 671쪽)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이와 다른 생산물의 분배 방식을 기대하는 것은, 전지와 연결된 전극이 물을 분해하지 않고 양극에는 산소, 음극에는 수소가 생겨나지 않기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극도로 높아진 현대 기계의 생산 능력이 어떻게 하여 개별 산업 자본가들로 하여금 사회 안에서 생산의 무정부성 때문에 자신의 기계를 계속 개선하여 생산력을 계속 높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는가를 우리는 보았다. 자본가에게는 자기의 생산 규모를 늘릴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로 강제 법칙이 되는 것이다. 대공업의 거대한 팽창 능력 - 여기에 비하면 가스의 팽창력 같은 것은 어린애 장난감이다. - 은 이제 공업을 질․양적으로 확장하려는 욕망, 어떤 반작용도 고려하지 않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반작용을 형성하는 것은 대공업 생산물에 대한 소비, 판로, 시장이다. 그런데 이 시장의 팽창력은 밖으로나 안으로나 훨씬 작은 힘으로 작용하는 완전히 다른 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 시장의 확장은 생산의 확대에 보조를 맞출 수 없다.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며, 이 충돌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곧바로 파괴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새로운 ≪악순환≫을 낳는다.

 

사실 맨 처음 전반적 공황이 일어났던 1825년부터 공업계 전체와 상업계, 모든 문명 국가들과 또한 그들에 종속되어 있는 어느 정도 미개한 나라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 교환은 대략 10년에 한 번씩 탈선하고 있다. 산업은 정체하고, 시장에는 판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생산물 더미가 넘쳐나고, 현금은 유통에서 자취를 감추고, 신용은 끊기고, 공장은 멈추고, 노동자들은 자기가 생활 수단을 너무 많이 생산한 탓으로 온갖 생활 수단을 잃고, 파산에 파산이 잇따르며, 경매가 연달아 일어난다. 침체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어 생산력과 생산물이 많이 낭비되고 파괴되다가 마침내 가격이 어느 정도 폭락해 쌓여 있던 많은 상품이 팔리게 되면서부터 차츰 생산과 교환의 운동이 다시 시작된다. 이 운동은 차츰 빨라져서 평보가 속보가 되고, 공업의 속보는 구보로 넘어가며 이 구보는 또 발광적인 질주가 되어, 공업․상업․신용및 투기를 휩쓰는 하나의 완전한 장애물 경주가 된다. 이러다가 결국은 목숨을 건 몇 차례의 도약 끝에 다시금 공황의 깊은 구렁텅이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이 또다시 되풀이된다. 1825년 이래 우리는 이러한 순환을 이미 다섯 번이나 겪었으며, 현재(1877년) 그것을 여섯번째로 겪고 있다. 이러한 공황의 성격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으므로 푸리에가 최초의 이러한 공황을 과잉에서 오는 공황, 즉 ≪과잉 공황≫(crise plethorique)이라 한 것은 이 공황 전체의 본질을 찌른 표현이었다.

 

공황 때에는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점유 사이의 모순이 폭력적으로 폭발하기에 이른다. 상품의 유통은 한동안 멈추고, 유통 수단 - 화폐 - 은 유통의 장애물이 되고, 상품 생산과 상품 유통의 모든 법칙은 거꾸로 작용한다. 경제적 충돌은 절정에 이른다. 생산 방식이 교환 방식에 반항해 일어선다.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사회적 조직이 마침내 이 조직과 나란히, 또 그 위에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의 생산의 무정부성과 상응할 수 없는 발전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 이 사실은 공황 때에 많은 대자본가들과 더 많은 소자본가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자본의 폭력적 집중으로 말미암아 자본가들 자신에게도 명백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모든 기구는 그 자체가 만들어 낸 생산력의 중압을 받아 멈추게 된다. 그것은 이미 생산 수단이 모조리 자본으로 바뀔 수 없게 되며, 생산 수단들이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는 한편, 노동자의 예비군도 어쩔 수 없이 이로 인해 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생산 수단, 생활 수단, 자본의 처분 밑에 있는 노동자들, 즉 생산과 일반적 부(富)의 모든 요소가 남아돌아 가게 된다. ≪과잉이 빈궁과 결핍의 원천이 된다.≫(푸리에)는 것은 바로 과잉 자체가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의 자본화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수단이 우선 자본으로, 즉 인간 노동력의 착취 도구로 되지 않고서는 작용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한편으로 하고, 생산과 생활 수단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둘 사이에는 후자를 자본으로 바꾸어야 할 필연성이 마치 유령처럼 서있다. 바로 이 필연성만이 생산의 물질적 공간과 인적 공간이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며, 바로 이 팔연성만이 생산 수단의 작용을, 즉 노동자가 노동하고 생활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한편으로는 더 이상 생산력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력 자체가 이러한 모순을 청산하고 자본으로서의 모든 속성에서 해방되어 사회적 생산력으로서의 성격을 실제로 승인받으려고 더욱 힘차게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힘차게 자라나는 생산력이 자본주의적 성격에 반항하게 되고 그 사회의 본성을 승인해야 할 필연성이 커지면서, 자본가 계급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더욱 자주 생산력을 사회적 생산력으로서 다루게 된다. 신용의 끝없는 팽창을 수반하는 산업 호경기나 자본주의적 대기업을 파괴하는 공황 자체나 모두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갖가지 주식 회사 형태로 많은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생산 수단과 교통 수단 가운데 어떤 것들, 예컨대 철도와 같은 것은 원래 어떠한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도 배제할 만큼 아주 방대하다. 그러나 어떤 발전 단계에 이르면 이 형태도 충분하지 않게 된다. 어떤 한 나라의 같은 산업 부문의 모든 대생산자들은 생산을 통제할 목적으로 트러스트라는 하나의 연합체로 통합된다. 그들은 생산되어야 할 총액을 정하고 그것을 서로간에 할당하며, 또 미리 결정된 판매 가격을 적용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이러한 트러스트는 일단 부진한 상태에 빠지기만 하면 대부분 허물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욱더 집중화된 사회화를 가져온다. 즉 한 산업 부문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통일성을 갖춘 대주식 회사로 되어, 국내 전쟁은 이 한 회사의 국내 독점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예컨대 1890년에 영국 알칼리 생산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이 생산은 48개의 대공장 모두를 합동한 뒤 단일한 중앙이 지도하는 자본금 1억 2000만 마르크의 단 한 회사의 손안으로 넘어갔다.

 

트러스트에서는 자유 경쟁이 독점으로 돌아서고, 자본주의 사회의 무계획적 생산은 닥쳐올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적 생산 앞에 굴복한다. 물론 처음에는 다만 자본가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다. 그러나 착취가 이러한 형태를 취하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 노골적인 것이 되어 무너지고야 만다. 얼마 안 되는 금리 생활자 무리들이 사회 전체를 공공연히 착취하는 이러한 트러스트들이 지배하는 생산을 오랫동안 감수할 인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트러스트가 있건 없건간에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공식 대표자인 국가는 생산에 대한 지도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국유화의 필요성은 우편, 전신, 철도와 같은 대규모 교통 수단에서 우선 나타난다.

 

공황이 부르주아지가 현대 생산력을 더 이상 관리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대규모 생산 기업이라든가 교통 수단이 주식 회사나 트러스트의 손안으로 넘어가거나 또는 국가 소유로 넘어간 것은 생산력 관리에 부르주아지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자본가가 하던 모든 사회적 기능을 지금은 고용 사무원들이 하고 있다. 자본가 자신에게는 수입 긁어모으기, 이권 따내기, 그리고 또 각종 자본가들이 서로 자본을 쟁탈하는 증권 거래소 놀음밖에는 다른 아무런 사회적 활동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노동자들을 내쫓았는데 지금은 바로 자본가 자신을 내쫓고 있다. 물론 내쫓긴 그들은 아직 산업 예비군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과잉 인구를 형성할 뿐이다.

 

그러나 주식 회사라든가 트러스트의 손안으로 옮아 가는 것도, 국유화도 생산력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없애지는 못한다. 이 점은 주식 회사나 트러스트의 경우 아주 명백하다. 한편 현대 국가도 또한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창설한 것으로, 노동자나 개별 자본가들의 침해를 받지 않도록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일반적 외부 조건을 보호하려고 만든 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국가는 그 형태가 어떻든 본질은 자본주의적 기관이고 자본가들의 국가이며 이념상의 총자본가다. 그것이 생산력을 더 많이 자기 소유로 장악하면 할수록 더욱더 완전한 총자본가가 될 것이며, 더욱 많은 국민을 착취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로 프롤레타리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뿌리뽑히기는커녕 오히려 극단으로 이르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절정에 이르자 번혁이 일어난다. 생산력의 국가 소유는 충돌을 해결하지는 못한나, 그것을 해결할 형식적 수단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오직 현대 생산력의 사회적 본질이 사실상 승인되고 따라서 생산, 점유 및 교환 방식이 생산 수단의 사회적 성격에 적응하게 될 때에만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회가 사회적 관리를 뺀 다른 어떤 관리 방법으로도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생산력을 공공연히, 그리고 직접 장악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금은 생산자 자신을 거역하며,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 법칙으로서 생산 방식과 교환 방식을 주기적으로 뒤흔들어 놓으면서 폭력적으로 또 파괴적으로만 관철되고 있는 생산 수단과 생산물의 사회적 성격이 그때에는 생산자에 의해 완전히 의식적으로 이용되어 혼란과 주기적 파탄의 원인이 아니라 생산 자체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작용하는 힘도 자연의 힘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려하지 않는 한 맹목적으로, 폭력적으로,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그 작용․방향․영향을 파악한다면, 그것을 더욱 우리의 의사에 복종시키고 그것을 이용해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오직 우리들 자신에 좌우된다. 오늘날의 강력한 생산력으로 말하자면 특히 그렇다. 우리가 이 생산력의 본질과 성격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한 -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옹호자들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 - 생산력은 우리를 거역하고 우리를 반대해 작용하며, 이미 상세히 서술된 바와 같이, 그 동안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일단 그 본질이 파악되자마자 그것은 연합된 생산자들에게 장악되어 악마 같은 명령자에서 온순한 하인으로 바뀔 수 있다. 둘 사이의 차이는 벼락이 칠 때 번개불에 담긴 전기의 파괴력과 전신이나 아크등의 길들인 전기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며, 화재의 불과 사람에게 유익한 불 사이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생산력이 마침내 인식된 그 본질에 알맞게 다루어질 때에는, 생산의 사회적 무정부성은 없어지고 사회 전체와 그 개별 성원의 수요를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생산이 사회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절될 것이다. 그때에는 생산물이 우선 생산자를 노예화하고 다음에는 점유자까지도 노예화하는 자본주의적 점유 방식은 없어지고, 현대적 생산 수단의 본질 자체에 기초를 둔 새로운 점유 방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생산을 유지하고 늘리는 수단인 생산물을 사회가 직접 점유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과 향락의 수단인 생산물을 개인이 직접 점유하는 새로운 점유 방식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국민의 대다수를 더욱더 프롤레타리아로 바꿈으로써, 자멸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변혁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 낸다. 사회화한 대생산 수단을 더욱더 국유화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자체가 그것을 변혁할 길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우선 생산 수단을 국유화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끝장내며 그와 함께 모든 계급 차별과 계급 대립, 따라서 국가로서의 국가도 끝장낸다. 지금까지 계급 대립 속에서 운동해 왔고 또 하고 있는 사회에는 국가가 필요했다. 즉 착취 계급의 외적 생산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특히 해당 시기의 생산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억압 조건(노예제, 농노제 또는 봉건적 예속제, 임금 노동제)에 피착취 계급을 폭력적으로 얽매어 두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했다. 국가는 사회 전체의 공식 대표자였고, 사회 전체가 눈에 보이는 하나의 단체로 집약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그러했던 것은 오직, 국가가 해당 시기에 스스로 사회 전체를 대표했던 계급의 국가인 한에서만 그러했다. 즉 고대에는 노예 소유자인 자유민들의 국가였으며, 중세에는 봉건 귀족의 국가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부르주아지의 국가인 것이다. 국가가 마침내 사회 전체의 대표자가 되면, 그 자체가 쓸모 없게 된다. 억압해야 할 모든 사회 계급은 없어지고, 계급 지배와 함께 오늘날의 생산의 무정부성에서 비롯된 개체 생존 투쟁과 이러한 투쟁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폭력도 없어지게 되면 그때에는 억압해야 할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억압하기 위한 특별한 힘으로서의 국가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국가가 참으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최초의 행위 -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 수단을 장악하는 것 - 는 동시에 국가로서의 마지막 독자적인 행위다. 그때에는 사회 관계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간섭은 한 분야 한 분야씩 점점 필요 없게 되어 가다가 자기 스스로 잠들고 만다. 인간에 대한 관리 대신에 물건에 대한 관리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도가 나타난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민 국가라는 문구, 한동안 선동 수단으로서 존재할 수는 있었으나 결국 과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 문구는 바로 이를 근거로 하여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는 하루아침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도 또한 이를 근거로 하여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이래, 개인이나 어떤 학파를 막론하고 사회가 모든 생산 수단을 장악하는 것을 미래의 막연한 이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실제 조건이 갖추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역사적 필연성이 되었다. 다른 온갖 사회 진보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계급들의 존재가 정의니 평등이니 하는 것과는 모순이라는 의식이나 또는 계급을 없애려는 단순한 의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경제적 조건의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계급들로, 즉 착취 계급과 피착치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분열된 것은 종래의 충분하지 못한 생산 발전이 낳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사회적 총노동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의 총량이 모든 이의 필수적인 생활 수단 총량을 겨우 뛰어넘는 정도인 동안, 따라서 노동이 대다수 사회 성원의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시간을 뺴앗는 동안, 그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계급들로 분열된다. 전적으로 강제 노동에 종사하는 이 방대한 다수와 함께, 직접적인 생산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 관리․국가 사무․재판․과학․예술 등과 같은 사회의 공동 사무를 맡아보는 계급이 형성된다. 따라서 분업의 법칙이 바로 계급 분열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계급들이 형성될 때 폭력․약탈․강제․기만이 적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또 권력을 빼앗은 지배 계급이 근로 계급을 희생시켜 자기의 지위를 다지며 사회에 대한 지도를 대중에 대한 강화된 착취로 바꾸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처럼 계급 분열에는 역사적 정당성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단지 특정 시기, 특정 사회적 조건에서만 그러했던 것이다. 그것은 생산이 충분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것인 만큼 현대의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면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실 사회 계급의 소멸은 비단 이러저러한 지배 계급의 존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온갖 지배 계급의 존재, 따라서 계급 분열 자체도 하나의 시대 착오로 만들고 하나의 폐물로 만드는 역사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계급의 소멸은, 특정한 사회 계급이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점유하며 그와 함께 정치 지배권도 점유하고 교육과 정신적 지도를 독점하는 것이 필요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경제․정치적 그리고 정신적 발전에 장애가 되는 그러한 높은 생산 발전 단계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단계에 이르렀다. 부르주아지의 정치․정신적 파산은 그들 자신에게까지도 거의 비밀이 아니며, 그들의 경제적 파산도 10년마다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다. 공황이 닥칠 때마다 사회는 자기가 이용할 수 없는 생산력과 생산물의 중압 때문에 허덕이며, 또 소비자가 부족한 탓에 생산자는 아무것도 소비할 수 없다는 불합리한 모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현대 생산 수단의 고유한 팽창력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채워 놓은 질곡을 타파한다. 생산 수단에서 이 질곡을 벗겨버리는 것이야말로 곧 생산력으로 하여금 계속 또 언제나 급속히 발전하게 하며 따라서 또 생산 자체를 실제로 끝없이 성장시키는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화는 비단 생산에 대한 현존하는 인위적 장애물을 없앨 뿐만 아니라,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생산의 동반자로서 공황 때에 절정에 이르곤 하는 생산력과 생산물의 대대적인 낭비와 파괴 또한 없애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현재 지배 계급과 그 정치 대표자들의 터무니 없는 사치와 낭비를 없앰으로써, 전체를 위해 많은 생산 수단과 생산물을 절약하게 한다. 사회적 생산에 의해 사회의 모든 성원에게 충분하고도 나날이 개선되는 물질적 생활 조건뿐만 아니라 그들의 육체․정신적 능력을 전면적이고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활용하게 해 줄 가능성, 지금 비로소 그러한 가능성이 달성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사회가 일단 생산 수단을 장악하게 되면 상품 생산이 없어지고 따라서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없어질 것이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으로 대체된다. 개체 생존 투쟁은 끝난다. 그리하여 인간은 비로소 - 어떤 의미에서는 궁극적으로 - 동물계를 벗어나며, 야수적인 생존 조건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 조건으로 넘어간다. 인간을 둘러싸고 지금껏 그들을 지배해 온 생활 조건을 이제는 인간이 지배하고 통제하게 되어, 인간은 처음으로 자연에 대한 현실적이며 의식적인 지배자가 된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사회적 결합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간을 지배하는 외적인 자연 법칙으로서 인간에 대립해 오던 인간 자신의 사회적 행동 법칙이, 이제는 인간의 의해 아주 능숙하게 적용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지배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연과 역사에 의해 위로부터 강요된 것으로서 인간에게 대립해 오던 인간의 사회적 결합이 이제는 인간 자신의 자유로운 일이 된다.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 오던 객관적이며 외적인 힘이 인간 자신의 통제를 받게 된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할 것이며, 이 순간부터 비로소 인간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사회적 원인들은 인간이 바라는 결과를 더욱더 훌륭히 가져오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 인류가 비약하는 것이다.

 

결론으로서 우리가 논술한 발전 과정을 간단히 종합하자.

 

1. 중세 사회 소규모의 개인 생산, 생산 수단은 개인용으로 마련된 것이어서 원시적이며 불편하고 조악하며 비효율적이었다. 생산자 자신이나 그의 봉건 영주가 생산물을 직접 소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직접 소비를 초과하는 잉여물 생산이 있는 경우에만 이 잉여물이 판매되어 교환되게 된다. 따라서 상품 생산은 겨우 발생 과정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상품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을 맹아로 내포하고 있다.

 

2. 자본주의 혁명 우선 단순 협업과 매뉴팩처에 의해서 수행된 공업의 변혁. 종래 흩어져 있던 생산 수단이 대작업장으로 집중된다. 따라서 또 개인적 생산 수단이 사회적 생산 수단으로 바뀌나 그것은 대체로 교환 방식에까지는 미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종래의 점유 형태는 여전히 작용한다. 자본가가 등장한다. 그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로서 생산물도 점유하여 그것을 상품으로 바꾼다. 생산은 사회적 행위가 되나, 교환과 그와 동시에 생산물의 점유는 여전히 개인적 행위, 개개인의 행위로 남는다. 사회적 노동의 생산물이 개별 자본가에 의해 점유된다. 바로 이것이 기본 모순이며, 여기로부터 현대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그 모든 모순이 흘러 나온다. 이 모순들은 대규모 공업에서 특히 선명하게 나타난다.

 

(ㄱ) 생산자와 생산 수단의 분리, 노동자들은 평생토록 임금 노동을 해야 할 운명에 놓인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대립.

 

(ㄴ) 상품 생산을 지배하는 법칙이 대대적으로 발현되고 그 작용이 강화된다. 걷잡을 수 없는 경쟁. 각 개별 공장 안의 사회적 조직과 생산 전체의 사회적 무정부성 사이의 모순.

 

(ㄷ) 한편으로는 기계의 개선. 이것은 경쟁으로 말미암아 각 공장주에 대해 하나의 강제 법칙이 되며, 동시에 또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의 축출이 끊임없이 격화하는 것을 뜻한다. 즉 산업 예비군이 생겨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의 끝없는 확장. 이것 또한 각 공장주에 대해 하나의 강제적인 경쟁 법칙이 되었다. 이 둘로부터는 생산력의 유례없는 발전, 수요에 대한 공급의 초과, 과잉 생산, 시장의 범람, 10년마다 되풀이되는 공황, 악순환. 즉 한편에서는 생산 수단과 생산물의 과잉을 보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와 생활 수단을 잃은 노동자의 과잉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생산과 사회 복지라는 두 축은 결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는, 생산력과 생산물이 미리 자본으로 바뀌는 조건에서가 아니면 생산력이 작용하는 것도 생산물이 유통되는 것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산력과 생산물의 과잉이 바로 그 자본화를 방해한다. 이 모순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진다. 즉 생산 양식이 교환 방식에 반역한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관리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ㄹ)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의 부분적 승인, 자본가 자신의 어쩔수 없는 승인, 생산과 교통의 거대 기구가 처음에는 주식 회사 소유로, 다음에는 트러스트 소유로, 그 다음에는 국가 소유로 된다. 부르주아지는 필요 없는 계급이 되고 그들의 사회적 기능은 모두 고용 사무원들이 수행한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 모순의 해결.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권력을 장악하고, 이 권력의 힘으로 부르주아지의 손안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회적 생산 수단을 사회 전체의 소유로 만든다. 이러한 행위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 수단을 자본이라는 종래의 속성에서 해방하며 그것의 사회적 본질이 완전히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부터는 예정된 계획에 의한 사회적 생산을 할 수 있게 된다. 생산의 발전으로 각종 사회 계급이 더 이상 계속 존재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 착오가 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이 사라짐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권위도 시들어 버린다. 드디어 자기 자신의 사회적 존재의 주인이 된 인간은 그 결과로 자연의 주인,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 즉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세계 해방의 위업을 수행하는 것, 이것이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사명이다. 이 변혁의 역사적 조건, 따라서 또 그 본성 자체를 연구하여 이 위업을 수행할 사명을 지닌 오늘의 피억압 계급에게 그들 자신의 위업의 조건과 본질을 깨우쳐 주는 것, 이것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임무다.

 

 

1880년 1-3월 선보름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집필

1880년 3월 20일, 4월 20일, 5월 5일 잡지 ≪사회주의 연단≫, 제3, 4, 5호에 발표.

1880년에 파리에서 프랑스어 단행본, ≪F. Engels≫로 발표

1891년 독일어판에 의해 인쇄

1880년 프랑스어판과 대조

원문은 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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