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작성자선통박영수|작성시간08.12.25|조회수263 목록 댓글 0


그림_홍재승 ⓒ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살던 때

‘위대한 영도자’와 ‘인민의 벗’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을 중국 혁명의 아버지자 위대한 영도자로 평가하는 중국 공산당은 비록 마오쩌둥이 만년에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지만, 생애 전체를 보면 중국 혁명에 대한 공적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과오보다 공적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1979년에 펼친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 실용주의 노선을 이어가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견해다.


6·4톈안먼(1989) 당시까지 중국 청년들의 ‘사상 영도자’로 추앙된 리쩌허우(李澤厚)는 《고별혁명》에서 마오쩌둥을 단순하게 파악하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이는, 마오쩌둥이 성향이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며, 그이의 행사와 술수를 어느 관점 하나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사실 마오쩌둥은 매우 정열이 넘치는 이상주의자이자 대장정의 승리가 입증하듯, 중국의 도가, 법가, 유가, 음양가 같은 전통 사상의 핵심에 통달한 뛰어난 책략가였다. 그런가 하면 언제나 둘레 인물들에게 각별히 조심하여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흑막을 드리웠고, 그이들이 긴장과 두려움을 놓지 않도록 수준 높은 심리전을 펼칠 줄 알았던 술수가로 그려지기도 한다.


유교 전통이 뿌리 깊은 나라에서 국가의 재상은 “위로 한 사람을 섬기고 아래로 만인을 거느린다(一人之下, 萬人之上)”고 하였다. 우리는 평생을 마오쩌둥 뒤에 서 있던 한 사내를 기억한다. ‘신중국’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바로 그이다.

 

위로는 마오쩌둥 한 사람을 모셨지만 자신은 모든 사람 위에서 군림하지 않고,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스며든 인물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중국 톈안먼 광장에 서 있는 그이의 추모비를 읽어보자. ‘인민의 총리로서 인민이 사랑했고, 인민의 총리로서 인민을 사랑했으며,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이어졌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위대한 영도자’로 신처럼 되었던 마오쩌둥 밑에서 평생을 ‘2인자’로 살았던 저우언라이였지만,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인민의 벗’이라는 친근한 정감이다.

낡은 중국과 새로운 중국의 갈림길


중국 근대사는 아편전쟁(1840)과 함께 시작된다. 그 뒤 태평천국의 난(1851~1864)을 거치면서 청나라의 전통 질서는 급속히 무너져 갔고, 지식인은 전통문화와 그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받고 있었다. 그러나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주도한 변법자강운동(1898)이 실패로 돌아가고, 쑨원이 이끈 신해혁명(1911)까지 꺾이자 지식인의 전통문화에 대한 공격과 비판은 온 중국을 뒤덮게 된다. 당시 천두슈, 리다자오, 후스, 루쉰 들은 새로운 중국을 세우기 위해 낡은 전통 가치와 제도를 맹렬히 공격하며 인민의 깨달음을 촉구했다. 특히 청년들에게 진보적이고 실용적인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배우고 익혀 신중국 건설을 주도해 나갈 것을 역설했다.


1893년 후난성 샹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마오쩌둥은 신해혁명이 폭발한 직후 신군에서 반년 동안 일반 병사로 복무하고, 1914~1918년에 후난 제1사범학교를 다녔다. 혁명단체인 신민학회를 조직한 것은 졸업 전이었고, 그 즈음에 천두슈가 주편한 잡지 ≪신청년≫에 〈체육문화의 연구〉(1917)를 발표하여 글에 빠져 나약해진 유교적 가치관을 비판했다. 1918년 고향인 후난 장샤에서 신민학회를 세워 청년들의 육체 단련, 애국심, 도덕적 각성을 촉구했다. 전통문화의 핵심인 군신, 부자, 부부 관계의 혁명적 변화를 요구한 것도 이때다. 중국 현대사의 시작인 5·4운동(1919)은 이와 같이 청년들의 각성과 더불어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폭발한 최초의 대규모 대중운동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전통 가치를 타파하고 청년의 이데올로기적 각성과 ‘인민대중의 대동단결’로써 신중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하는데, 이때 ‘인민’ 개념을 처음 내놓고 인민대중의 역사적 사명과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이의 인민주의적 성향은 신중국(1949) 이후에도 이어져 결국 문화대혁명이라는 급진적인 사상개조운동으로 이어졌다. 훗날 마오쩌둥을 직접 만나 취재하여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스노우(Edgar Snow)의 말을 빌리면, 마오쩌둥은 천두슈, 리다자오 같은 5·4 주역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5·4 당시에는 아직 자유주의, 민주적 개혁주의,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들이 공존하는 사상의 혼돈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8년 리다자오와 천두슈가 조직한 ‘마르크시즘 연구회’에 참가한 뒤로 이론과 실천 두 측면을 통일해 진정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이 1920년 여름이다. 그해 마오쩌둥은 후난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세웠다.


1920년은 마오쩌둥뿐만 아니라 저우언라이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다. 저우언라이는 1898년 중국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저장성 사오싱에 사는 백부 밑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1913년 텐진 난카이중학에 입학하였다. 1917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1919년 5·4운동이 폭발하자 텐진으로 돌아와 학생 시위에 동참하였고, 1920년에 체포되었다. 그해 가을 석방되어 근로 장학생 자격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면서 그이는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듬해 7월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자 유럽 지부의 조직책을 맡는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삶과 사상

마오쩌둥의 ‘후난 보고’와 농촌혁명론


중국 공산당은 ‘동방 우회작전’을 내세운 레닌이 이끄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고 1921년에 창당되었다. 마오쩌둥은 창당대회에 참가한 뒤 장샤로 돌아와 후난성 책임자로서 노동운동과 당 세력을 늘리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 1923년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국공합작을 결정하였고,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가입하여 농촌 공작에 종사한다. 1926년까지 그이는 천두슈가 이끄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충실히 따랐으나, 국공합작의 상징인 쑨원이 1925년에 죽고, 공산당의 노동자, 농민운동에 불만을 드러내던 국민당 우파가 장제스(蔣介石)의 쿠데타를 계기로 반공 정책을 강화하자, 그이는 〈후난 농민운동 고찰 보고〉(1926)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에서 마오쩌둥은 짧은 기간 안에 중국 농촌 지역에서 농민 수억 명이 폭발하듯 봉기할 것이며, 이들 혁명적인 세력은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으므로 모든 혁명 정당은 혁명적인 농민의 힘을 조직하고 농촌 혁명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민운동과 농촌 혁명을 강조한 마오쩌둥의 견해는 레닌이 주장한 노농연맹을 기본으로 따른 것이다. 특이한 점은 그이가 도시 노동자의 구실을 인정하면서도 중국 현실에서는 농촌 혁명이 더 중요하며, 농민 계급도 도시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혁명과 진보 세력이 될 수 있다고 파악한 점이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그이가 주장한 농촌혁명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7년 국공합작이 무너지자 취치우바이(瞿秋白), 리리싼(李立三) 들의 노선을 좇아 일어난 대도시 중심의 무장봉기는 장제스 군대의 철저한 탄압을 받았으며, 결국 대도시의 공산당 세력은 거의 무너져 버렸다. 그 뒤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마오쩌둥의 〈후난 농민운동 고찰 보고〉와 같이 농촌 혁명의 성격으로 전환되어 갔다.

장시소비에트·대장정·연안


1927년 난창폭동을 시작으로 추수기에 장시, 광둥, 장쑤, 후난 등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후난폭동을 지휘하였으나 실패했고, 패잔군 일천 명을 이끌고 후난과 장시의 접경지역에 있는 징강산(井崗山)으로 퇴각했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농촌 혁명 전략을 세우고 ‘징강산 투쟁’을 시작한다. 이 전략 내용은 농민의 지지를 업고 홍군(紅軍)을 조직하고 혁명 근거지를 세운 다음, 유격 전술로 지구전을 펼침으로써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여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그이의 대중노선과 조직노선은 이렇듯 농민 대중의 지지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장시 소비에트 시대에 마오쩌둥이 내놓은 농촌 혁명 전략은 처음부터 당내의 반대와 비판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드넓은 농촌 지역과 농민이 있는 중국에서, 그리고 국민당의 탄압으로 대도시의 공산당 세력이 무너져 가는 상태에서 마오쩌둥이 세운 농촌 투쟁 전략은 공산주의 운동의 명맥을 지키는 하나뿐인 방법이었다. 마침내 마오쩌둥과 주더 들은 1931년 11월에 루이진을 수도로 하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는 데 성공하였고, 마오쩌둥의 농촌 혁명 전략을 쫓아 장시 소비에트의 세력을 넓히는 데 주력한다.
1934년 9월에 마오쩌둥과 주더는 장제스의 소탕 작전에 맞서 만리장정(萬里長征)을 결행한다. 장제스 군대와 지방 군벌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며 대륙을 종·횡단한 끝에 그네들은 1935년 가을 산시성(陝西省)에 도착한다. 그 유명한 ‘옌안시대’가 이때부터다. 잘 알려진 대로 중국 공산당 운동의 역사에서 옌안시대는 큰 전환점이다. 장제스의 끈질긴 소공작전으로 위기를 맞은 공산당은 일본군이 대륙 침략을 드러내자, 모든 세력이 연대하여 항일투쟁에 나서라는 드높은 중국인의 열망과 민족주의에 힘입어 다시 살아날 계기를 맞이했다. 마침내 “중화민족의 새로운 정치, 새로운 경제, 새로운 문화” 창조를 목표로 하는 중국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른다.


옌안시대에 마오쩌둥은 많은 책을 지어 자기 사상의 체계로 삼고 중국화하는 데 몰두하였다.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부터 〈모순론〉(1937), 〈실천론〉(1937), 〈변증법적 유물론〉(1939) 같은 철학책을 써 마르크시즘을 중국 체제에 맞추었고, 〈항일게릴라전의 전략문제〉(1938), 〈지구전론〉(1938),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1939), 〈신민주주의론〉(1940) 들을 지어 중국 혁명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신민주주의론〉(1940)에서 마오쩌둥은 중국의 반식민지, 반봉건적 상태를 한층 더 체계를 세워 분석하고,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 자본가들까지 아우르는 드넓은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신민주주의 혁명’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이 주장한 통일전선론과 신민주주의론은 새롭고 독특한 이론은 아니지만, 레닌의 견해를 중국의 현실에 맞춰 광범위한 계층의 지지를 얻고 마르크시즘을 중국화했다는 데 값어치가 있다. 그이는 언제나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추구하였고, 보편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중국 형편에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이런 관심이 이론으로 체계를 갖춘 것이 그이가 주장한 ‘모순론’과 ‘실천론’이다.

모순론


마오쩌둥 사상의 중심은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본 법칙, 또는 사회와 자연계의 기본 법칙인 모순의 운동 법칙에 있고, 〈모순론〉은 그 가운데 핵심이다. 마오쩌둥은 먼저 모순의 보편성을 말한다. 자연계와 사회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물은 모순이 내재하며, 모순은 자연계와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이처럼 모순은 두루 널리 미치지만, 모든 모순은 질에서 서로 다른 특수성을 지니며, 따라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해결하고, 인민대중과 봉건제도 사이의 모순은 민주혁명으로 해결하며······ 낡은 과정과 낡은 모순이 없어지고 새로운 과정과 새로운 모순이 생기면 모순의 해법도 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모순의 특수성과 다른 해법을 논하면서 마오쩌둥은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따로 보고, 무엇이 주요모순인가에 따라 혁명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이 주요모순이며, 그 밖의 모순들은 부차적 모순이다. 그러나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한 중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중국 민족의 모순이 주요모순이고, 중국 사회 여러 계급 간의 모순은 부차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모순론〉은 어떤 논리에 맞는 기준으로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역사 형편과 그 변동에 따라 때에 맞게 정치, 정략으로 주요모순을 규정하고, 그에 따라 정책과 노선의 변화를 합리화한다. 마오쩌둥 〈모순론〉의 요점은 무엇보다 모순의 특수성을 드러내어 마르크시즘을 중국화하는 점에 있다. 훗날 1957년에 마오쩌둥은 모순이 사회 발전과 변화의 원동력이자 긍정 요소이며, 어떤 사회도 모순이 존재하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모순이 생기므로 “인민 내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실천론


마오쩌둥이 1937년에 쓴 또 다른 논문이 〈실천론〉이다. 스노우는 마오쩌둥이 ‘모순론’보다 ‘실천론’을 더 중시하였다고 한다. ‘실천론’은 객관 세계의 현상에 관한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하는가를 중심에 놓고 지식과 실천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규명한다. 마오쩌둥은, 인간의 인식 과정은 감각기관을 통해 바깥 세계의 현상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게 형성된 인식은 다음 단계로 논리에 맞고 이론 같은 차원에서 현상의 체계를 잡아 파악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곧 첫째 단계에서 실천을 하면서 인식한 단편적인 지식이 둘째 단계에서 논리 대로 체계가 세워지고 이론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이론은 셋째 단계인 검증 단계에서 사회에서 실천해 보고 그것이 옳은지 틀린지를 시험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이론은 실천하면서 형성되고, 실천은 이론으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이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 관계를 설명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마오쩌둥은 이론이 없는 실천은 경험주의의 오류를 범하기 쉽고, 반대로 실천이 없는 이론은 교조주의의 과오를 낳는다고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마오쩌둥은 중국의 현실과 혁명적 실천 과정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적인 마르크시즘’ 또는 ‘공허한 마르크시즘’을 배격하고, 동시에 두루 맞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론을 무시하고 중국의 현실만을 강조하는 경향도 비판하였다. 중국이라는 구체적 투쟁에 적용할 수 있는 마르크시즘, 즉 중국에 맞는 마르크시즘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오쩌둥 사상은 1942년에 일어난 ‘정풍운동’을 거쳐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지도 이념으로 자리 잡는다.

저우언라이의 투쟁과 인품


1920년대에 쑨원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은 삼민주의(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에 반제국주의·반봉건군벌이란 내용을 담고, 소련과 연대하고, 공산당을 인정하며, 노동자와 농민 원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3대 정책을 내세워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성립시킴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펼쳤다. 저우언라이는 그해 여름 프랑스에서 귀국하자마자 쑨원이 이끄는 국민혁명에 참가한다.(국민혁명은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이 광둥에서 일으킨 혁명이다. 중국 공산당이 협조하고 소련이 지원했다.)


그러나 1926년 3월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안에 있는 공산당원들을 체포하면서 국민정부 내부의 좌우 대립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그 배경은 노동자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금융매판자본과 제국주의 열강이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권하고 혁명운동을 반대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1927년 3월 상하이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켜 상하이를 장악하고 장제스의 북벌군과 맞붙었으나,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악명 높은 우익 테러 조직 ‘백의사’를 동원하여 공산주의자를 숙청해 나갔다.


이런 가운데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중국 공산당을 탄압하려는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1차 국공합작은 갈라졌다. 저우언라이는 테러를 피해 우한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그 뒤 중국 공산당은 우한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국민당내 좌파 인사들과 긴밀히 협조했고, 그 가운데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좌파 인사들은 결국 공산당과 헤어졌고, 저우언라이는 난창봉기(1927. 8)를 일으켰으나 다시 국민당 군대에 쫓겨 상하이로 도피한다.


초기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았고, 당내 주류는 혁명 전술 교리에 바탕을 두고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도시 혁명에 힘을 쏟았으나 큰 피해만 입고 실패를 거듭했다. 이 시기까지 저우언라이는 농민 혁명을 주장하던 마오쩌둥과 대립했다. 그러나 상하이를 떠나 주더와 마오쩌둥이 세운 혁명의 근거지, 장시 소비에트로 옮기면서(1931) 마오쩌둥을 이해하게 된다. 본래 저우언라이는 정통 레닌주의에 바탕을 두고 ‘도시에서 노동자의 무장봉기’를 주장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른바 ‘전보 공산주의’를 통해 중국 소비에트화 노선을 좇았지만, 결국 공산당은 장제스 정부의 ‘소공작전’에 밀려 대장정(1934)에 오르게 된다.


이로부터 저우언라이는 자신에게 부족한 지도자 자질을 마오쩌둥에게서 발견하고, 그해 군 위원회에서 아직 이름 없는 부하였던 마오쩌둥을 홍군 사령관으로 추천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저우언라이는 이듬해(1935) ‘쭌이 회의’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으며, 죽을 때까지 마오쩌둥의 노선을 지지하였다.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것과, 나아가 중국 혁명이 성공한 밑바탕에는 이와 같은 저우언라이의 됨됨이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우언라이는 농촌의 생활을 세세하게 파악한 마오쩌둥의 치밀한 노력과 농민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마오쩌둥의 능력에 주목했고, 그것을 과감히 인정할 줄 아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다


1936년 겨울에 장제스가 공산당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독려하기 위해 북방의 군벌 장쉐량을 찾아 시안으로 갔다가 오히려 붙잡혀 연금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죽이지 말라고 군벌들에게 요청하는데, 여기서 저우언라이의 지략과 긴 안목을 볼 수 있다. 저우언라이는 군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 대가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제2차 국공합작(항일통일전선)을 성립시킨다. 이를 발판으로 그이는 중일전쟁(1937~1945)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나아가 중국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마오쩌둥은 그 뒤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면 언제나 저우언라이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하게 보이던 1949년 7월, 마오쩌둥은 이후 ‘신중국’의 정치 형태는 인민 민주 독재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신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 소시민, 그리고 민족자본가들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반동 계급에 대해서는 혹독한 인민 독재가 실시되었다. 인민 독재에서 공산당의 과제는 인민의 국가기관을 강화하고, 공산당의 지도 아래 중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착실하게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 정권은 토지개혁, 항미원조운동, 반혁명분자 숙청, 국민 경제 부흥 같은 대규모 투쟁을 수행하면서 계획에 따른 경제 건설을 추진하고, 사회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 정권이 정치,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을 갖춘 1953년, 중국 정부는 스탈린의 경제 발전 모델에 바탕해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동시에 농업, 수공업, 상업 등 경제구조를 사회주의로 개조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빠른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에 대하여 몇몇 지도자들 사이에서 반대가 조금 있었으나, 마오쩌둥은 그이들이 주장하는 ‘보수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집단화한 국유화와 같은 사회주의 개조는 개체 경제의 굴레에서 대중의 생산력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55~1956년 중국 공산당 정권은 농촌 사회에서 합작화운동을 강화하였고,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를 강행함으로써 사실상 사회주의 개조를 마무리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한 말, 말, 말

“마르크시즘과 레닌주의를 글자 그대로 학습해서는 안 되며, 마르크스와 레닌이 문제를 관찰하고 해결한 관점과 방법을 학습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중국 사회에서 무산계급은 가장 높은 자각과 가장 높은 조직성을 갖춘 계급이기는 하지만, 그들끼리 모인 계급 세력으로는 승리할 수 없으며 ······ 여러 다른 형편에 놓여 있는 모든 혁명적 계급, 계층과 통일전선을 조직해야 합니다.”
― 마오쩌둥, 1938년 10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 형식으로 발표한 <신단계론>

“우리는 당내에서 계몽운동을 발동하여 우리 동지들의 정신을 주관주의와 교조주의의 어리석음에서 해방되도록 하고, 동지들에게 주관주의, 종파주의, 교조주의를 배격하자고 호소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일본 상품인 것 같다. 왜냐하면 오직 우리의 적들만이 우리가 이 나쁜 것들을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라고, 우리가 계속 어리석음에 빠져 있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배격하자는 외침은 일본 상품을 배격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 마오쩌둥, 〈당의 작풍을 바르게 하자〉(1942. 2.1.) 《마오쩌둥 문집》

“전국에 걸친 승리를 쟁취해 낸 것, 이것은 만리장정을 끝낸 우리의 첫걸음일 뿐입니다. 이 첫걸음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더라도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더 자랑스러운 것은 그 다음에 디딜 걸음입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 중국 인민민주혁명의 승리를 본다면, 지금 이것은 긴 연극에서 짧은 서막과 같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연극은 반드시 서막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서막은 아직 절정부가 아닙니다. 중국혁명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 이후의 노정은 더욱 길고, 그 작업은 더욱 위대하며, 더욱 고단합니다. 이 점을 지금 당내 인사들에게 분명히 말하니, 동지들이 앞으로도 계속 겸허하고 근신하고 방종하지 않는 작풍을 유지하도록 힘쓰고, 동지들이 계속 힘써 투쟁하는 작풍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제7차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 보고문>(1949. 3. 5.), 《마오쩌둥 문집》

“모든 간부들과 모든 인민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사회주의 대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경제는 뒤떨어진 나라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려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고생스럽게 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속에는 힘들게 절약하고 낭비를 반대하는 근검한 건국 방침까지도 포함된다.”
―마오쩌둥, 〈인민의 내부 모순을 정확히 처리할 것에 관하여〉(1957. 2. 27.), 《마오쩌둥 문집》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공산주의 사업에 바쳐 인민의 괴로움을 근심으로 삼고, 세계의 앞날을 염원으로 삼아야 한다.”
―저우언라이, 〈다섯 개의 관문을 지나서〉(1963. 5. 29.), 《저우언라이 선집》

“우리들 국가 간부들은 인민의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므로 군중과 고락을 함께하고,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만약 향락을 추구하거나 고생을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뒷문으로 도망치거나 예외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은 군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저우언라이, 〈관료주의에 반대한다.〉(1963. 5. 29.), 《저우언라이 선집》

“중국인은 거의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한다. 이렇게 큰 나라가 문화로 세계에 공헌할 수 없다면, 그리고 경제가 얼른 발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계 인민들에게 면목이 없을 것이고, 또 우리 조상들에게도 면목이 없을 것이다.”
―저우언라이, 〈지식분자의 개조 문제에 관하여〉(1951. 9. 29.), 《저우언라이 교육문선》

“우리는 어떠한 문제를 대하든 간에 모두 반드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솔직담백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해서는 결코 안 되며, 알지 못하는 것을 반드시 아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 저우언라이, 〈지식분자 문제에 관한 보고〉(1956. 1. 14.), 《저우언라이 선집》

“사람은 언제나 남의 단점과 자기 장점을 쉽게 발견한다. 그러나 반대로 남의 장점과 자신 단점을 많이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자신을 진보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진보를 또한 도울 수 있다.”
―저우언라이, 〈지식분자의 개조문제에 관하여〉(1951. 9. 29), 《저우언라이 교육문선》

“다른 나라에도 자본가 세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자본가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소시민계급이 존재하고 있고, 계속해서 새로운 자본가가 나타나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계급이 오랫동안 존재할 것이며 ······ 계급과 계급 사이의 투쟁이 이어지고 반동 계급이 살아날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마오쩌둥, 1962년 9월 중국 공산당 제8기 10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연설문 <사회주의 사회에도 계급은 존재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어떤 조건에서 인간의 사상은 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스스로 발전시키고 심지어 결정적인 구실까지 한다. 대중들이 선진 사상에 물들기만 하면, 그것은 사회 발전을 추진하는 강력한 힘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낡은 사상을 완전히 깨뜨리고 새로운 사상을 폭넓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마오쩌둥, 〈올바른 사상은 어디에서 오는가〉(1966)


후세에 끼친 영향

마오쩌둥의 유산들


1966년 마오쩌둥은 중국의 계급투쟁 형세를 극단으로 평가하면서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였다. 문화혁명은 린뱌오와 장칭, 두 ‘반혁명 집단’의 조종 때문에 더욱 광폭해져 마오쩌둥의 예상과 통제를 크게 벗어났고, 이후 10여 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파괴와 손실을 가져왔다. 마오쩌둥은 젊은 날의 화려했던 영광과 말년의 오욕을 모두 가지고 1976년 9월 9일 세상을 떠났다. 마오쩌둥의 사망과 문화혁명 4인방을 숙청한 1976년은 중국 공산당 정치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덩샤오핑을 비롯하여 문화혁명 기간 동안 박해를 받던 실용주의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복권되면서 마오쩌둥의 사상과 공적에 대하여 거센 비판이 일어났다.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단 하나 뿐인 기준이라는 주장과 함께 마오쩌둥 사상을 신비스럽고 교조주의처럼 만든 좌파의 오류를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대중들의 ‘사상해방’을 촉구하였다. 특히 계급투쟁과 사상혁명을 강조한 마오쩌둥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계급투쟁을 끝내자고 선언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실용주의 지도자들이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하며 벌인 재평가운동은 1981년 6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1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건국 이래 당의 작은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결의’를 보면 중국 공산혁명 과정(1921~1949)과 사회주의 개조를 완결한 1956년 제8차 전당대회까지 이룬 마오쩌둥의 공로는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이후에 마오쩌둥은 여러 가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1957년 반우파 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그리고 1966년 문화혁명은 당과 인민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으며, 마오쩌둥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마오쩌둥이 주장한 계급투쟁 이론, 계속혁명론, 그리고 자본주의의 부활에 관한 경고 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 정신에도 어긋나며, 이와 같은 사상적 오류 때문에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재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실용주의 지도자들은 중국 사회에서 계급간의 모순은 사실상 주요한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나날이 커져가는, 인민의 물질과 문화 욕구와 사회 생산의 모순”이야말로 주요한 모순이라고 선언하면서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4대 현대화 달성이 당과 국가의 최대 최고 목표라고 선언하였다.
마오쩌둥 사상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에서 독특한 평등주의, 인민주의, 주의주의(主意主義)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 특히 사회주의 이전 단계에서 계급투쟁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마오쩌둥 사상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차이가 있다.


정통 마르크시즘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회에서 집단소유제와 전인민 소유제를 실현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과 계급 간의 대립 모순은 사실 의미가 없어진다. 마오쩌둥은 여기에 의문을 내놓는다. 마오쩌둥은 소유제를 사회주의처럼 바꾼다고 해서, 계급과 계급투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의 주장으로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적 의식과 태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8등급 임금제, 노동에 따른 분배, 화폐경제 정책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자산계급이 나타날 수 있으며, 자본주의가 부활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투쟁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모순과 대립보다 안정과 조화를 강조하는 스탈린의 정치경제학은 유물변증법의 기본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또한 계급은 소유제 정도에 따라서 결정될 뿐만 아니라 개인과 집단이 지니고 있는 의식과 태도도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될 수 있으므로 사상 개조 운동은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하며, 특히 대중의 사상혁명은 거대한 힘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문화혁명과 같은 사상 개조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마오쩌둥은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마오쩌둥이 했던 주장은 정통마르크시즘의 계급 이론과, 당과 엘리트 계층이 앞장서는 ‘위에서 이끄는 혁명’을 통하여 물질적인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레닌과 스탈린의 주장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급진성은 이제 혹독하게 비판받는 대상이 되었고, 이제는 당과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 중국 인민들 가운데서는 다시 마오쩌둥을 따르거나 지지하고 심지어 신처럼 생각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급속한 ‘성장’의 그늘에 가리워 남보다 못하다는 박탈감에 젖은 최소 8억 명 이상인 소외층에게, 마오쩌둥의 ‘사회적 평등’, ‘정치 우선’이란 이상주의가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인가. 중요한 점은 ‘모두 함께 빈궁하던’ 평등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다.


리쩌허우가 한 흥미로운 해석도 있다. 오늘날 중국이 시장경제 사회가 되고 기회와 우연성이 급격히 늘면서 중국인들은 개인의 운명과 미래, 경제적 성공 여부를 내다보기 어렵게 되었으며, 어떤 신 같은 존재가 보호해 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콩, 타이완과 다르게 종교를 없앤 지 수십 년이 지난 대륙인들은 어떤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좋을지 망설이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마오쩌둥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리쩌허우가 말한 것처럼 마오쩌둥은 신기하고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살아 있을 때 이미 반쯤 신처럼 되었으니 지금은 정식으로 신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우언라이가 남긴 것


마오쩌둥을 영도자로 세우고 스스로 2인자가 된 ‘중국 공산당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는, 암으로 투병하던 삶의 마지막 5년을 혁명기보다 더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이는 27년 동안 중국의 총리로서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상륙하는 지점이 인천이 될 것을 정확히 내다보았고, 1955년 반둥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이루어지게 만들어 제3세계를 지도하는 힘을 갖추게 되었으며, ‘문화대혁명’의 재난을 추스렸다.


그리고 1972년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는 서곡이 된 닉슨과 마오쩌둥의 회담을 성사시키고, 1975년 월남전을 끝내게 한 ‘파리회담’을 이끌어 냈다. 더욱이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4대 현대화’를 주장하여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저우언라이는 20세기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들을 풀다가 1976년 1월 8일 78세로 고단한 삶을 마쳤다.


저우언라이의 죽음 소식을 들은 중국인의 슬픔은 황하를 넘고 양자강보다 길게 흘렀으나, 권력을 뺏는 데 눈이 먼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여전히 저우언라이 비판을 계속하면서 중국인들의 애도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1월 15일, 4인방의 근거지였던 상하이에서 저우언라이 추도회가 열리던 그날 아침, 바다에 떠 있던 선박들은 저우 총리의 사망 시각인 오전 9시 57분부터 30분 동안 한꺼번에 기적을 울리는 불법 시위를 용감하게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3월 말부터 저우 총리를 기리는 추도 시위와 행진이 이어지더니, 4월 4일 톈안먼 광장에는 2백만이 넘는 시위대가 모여 마침내 ‘제1차톈안먼항쟁’이 일어났다. 시위는 다음 날 무참히 진압되었고, 덩샤오핑은 3일 뒤 생애 세 번째로 실각했다. 그러나 6개월 뒤에 장칭을 비롯한 4인방도 체포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덩샤오핑은 ‘오뚝이’라는 별명처럼 다시 일어나 중국의 경제 발전을 훌륭히 이끌었다. 덩샤오핑은 비록 겉으로는 마오 주석을 따른다고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저우언라이의 뜻을 이어 받은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평생 충성을 다한 대상 또한 마오라기보다 마오의 등에 업힌 광대한 중국의 인민들이었다.


중국과 유교 전통이 같은 한국이지만, 우리의 현대 정치사는 결코 ‘새롭지’ 못했다. 흔히들 20세기 한국 정치에서 2인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김종필을 꼽는다. 하지만 그것은 암울한 한국의 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는 말일 뿐이다. 중국의 2인자 저우언라이 탄생 100주년이었던 1998년 3월 5일,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그날 여의도에서는 ‘김종필 총리’ 임명동의안을 놓고 여당과 야당이 머리 터지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현재 중국의 영토는 한국 영토 면적의 약 96배에 달하므로 두 나라의 규모와 조건은 크게 다르다. 국토는 그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규정하는 중요한 조건이고, 이러한 규모와 조건을 가진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정치 ‘2인자’로서 총리라는 자리와 의미는 한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에 불과하며, 본래 맡은 구실까지 다르지는 않다. 총리는 지도자를 보좌하여 인민대중의 생명과 권익을 지키고 늘려야 할 사람이고, 따라서 현명하고 청렴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저우언라이의 삶과 투쟁에서 우리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매우 드문 정치가를 만날 수 있다.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신영복 선생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고대 주나라의 주공과 ‘신중국’의 저우언라이를 함께 말한 것은 참으로 뜻깊게 다가온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