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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1권 해제 (2) 에르네스트 만델 ;강성윤(교육위원장) '정세와노동' 2005.7.
2. 자본론의 방법
자본론의 목적(1절의 주제―역자)은 그 자체로 맑스가 자신의 주저(主著)에 적용한 인식 방법인 유물론적 변증법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맑스가 자신이 행한 노동이 바로 이것(유물론적 변증법―역자)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본론 1권의 프랑스어 초판 편집자인 모리스 라샤트르(Maurice Lachatre)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이 방법을 경제문제의 연구에 적용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1) 또한 자신이 직접 쓴 ?자본론? 1권의 독일어 2판 후기에서 맑스는 변증법적 방법의 사용이 ?자본론?의 본질적 차이(differentia specifica), 즉 자본론을 여타의 모든 경제분석들과 구분해주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1)
변증법적 방법이 경제문제들의 연구에 적용되었을 때, 경제현상들은 서로 분리되어 파편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기본이 되는 지배적인 생산양식 주위에, 그리고 그 생산양식에 의해, 구조화된 하나의 집합적 총체로서 내재적 연관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 총체는, 특정한 주어진 운동법칙―이 법칙들은 또한 그것의 기원과 불가피한 소멸과도 관련되어 있다―에 의해 규제되는 것으로서, 그 모든 측면과 현상들에서 분석된다. 주어진 생산양식의 이러한 운동법칙들은, 그 구조 자체의 본질을 규정하는, 구조의 내적 모순들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주어진 경제구조는 동시에 이 모순들의 통일과 투쟁―양자 모두는 이 경제구조가 겪는 끊임없는 변화를 규제한다―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적응, 개량의 집적과 자기방어를 통해 주어진 생산양식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양적인) 변화들(진화)은, 급작스런 도약에 의해 다른 구조, 즉 새로운 생산양식을 낳는 (질적인) 변화들(혁명)과 구별된다.
맑스는, 프랑스 혁명에 고무되어 변증법적 사고를 근대 세계로 밀어넣은 독일 철학자 헤겔에게 자신이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변증법적 조사와 인식의 방법을 헤겔의 그것과 뚜렷하게 대비시켰다. 헤겔의 변증법은 관념론적이다: 기본이 되는 운동은 절대정신의 그것이다; 물질적 실재는 이념적 본질의 외적 현상일 뿐이다. 그와는 반대로, 맑스에게 있어 변증법은 유물론적인 것이며, ‘관념적인 것은 물질세계가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2) 역사의 기본 운동법칙은 주어진 사회 구조 속에서 스스로의 물질적 현존을 생산하는 실재하는 인간의 것이다. 사고의 발전은, 비록 많은 매개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 기본 운동에 조응하며, 그것을 반영한다. 따라서 맑스가 그것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작동을 이해하게 된 과학적 사고과정은 그 자체로 그 생산양식, 즉 부르주아 사회와 그 모순들의 산물이다. 단지 부차적으로만 이것은 많은 인문과학과 이데올로기―독일 고전철학,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수사(修史)학과 정치학,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의 발전의 산물로 파악될 수 있다. 오직 부르주아 사회와 그 모순들의 성장만이,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이 맑스로 하여금 이 학문들을 그의 특유한 방식과 방향대로 흡수, 결합하고 변형시킬 수 있게 하였다. 운동의 논리로서 변증법은 자연이건 사회이건 또는 인간의 사고이건 간에 모든 운동, 모든 진화는 ‘변증법적’이라 불리는 특정한 일반적 형태를 따른다는 것을 전제한다.3) 엥겔스와 레닌은 모두, ?자본론? 1권이 구성된 바로 그 방식에서, 이 일반적인 변증법적 방법의 놀랄만한 적용을 보았다; 따라서 레닌은, 비록 맑스가 그가 계획했던 변증법에 관한 짤막한 논문을 쓴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우리에게 유물론적 변증법을 경제현상에 적용한 ?자본론?을 남겼다고 썼다.4)
그러나 맑스의 변증법이 유물론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직관이나 선입관, 신비로운 도식이 아니라, 과학적 자료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조사(탐구)의 방법은 발표(서술)의 방법과 달라야만 한다. 경험적 사실들을 먼저 수집하고, 현재 수준의 지식을 완전히 숙지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졌을 때에만 재료의 변증법적 재구성을 통해 주어진 총체성에 대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만약 이 과정이 성공적이라면 그 결과로 이 물질적 총체,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인간의 사고 속에서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라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함정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problem- blindness)’이다. 맑스가 헤겔로부터 이어받은, 그리고 변증법적 조사 방법의 일부를 이루는 현상과 본질의 구별은,5) 다름아니라 연속되는 현상들의 층을 관통하여 왜 이러한 현상들이 특정한 방향과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설명하는 운동법칙에 이르고자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기존의 해답이나 속류적인 ‘증거’만을 볼 때 끊임없이 문제를 찾아내는 것―문제를 불러내는 것! 이것이 경제학의 혁명적 혁신자로서 맑스의 주된 미덕 중 하나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자인 맑스에게 ‘본질’과 ‘현상’의 구별은 결코 ‘현상’이 ‘본질’보다 덜 ‘현실적(real)’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치의 운동은 최종적으로(in the last analysis) 가격의 운동을 결정한다(determine); 그러나 유물론자 맑스는, 가격은 그것이 최종적으로 가치운동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어떤 ‘맑스주의자’도 비웃을 것이다. ‘본질’과 ‘현상’의 구분은 결정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 최종적으로 인식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현실성의 정도가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총체로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 ‘기초적 본질’, 즉 ‘가치법칙’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전적으로 불충분하다. ‘본질’과 ‘현상’을 모든 중간단계의 매개적 연관들을 통해 통합하여, 어떻게, 그리고 왜 ‘본질’이 다른 형태가 아니라 특정한 구체적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현상들’은 그 자체로는 우연적이지도 않고 자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하며, 자기 차례에 맞게 설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설명이 새로운 신비의 층을 관통하여 다시 우리를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특정한 경제조직 형태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보다 가깝게 해 주는 것이다. ‘본질’과 ‘현상’을 재통합해야 하는 이러한 필요를 무시하는 것은,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현상들을 피상적이고 경험주의적인 관찰자로부터 숨기는 경향이 있는 기본적인 힘들과 모순들을 간과하는 것만큼이나, 비변증법적이며 신비화시키는 태도이다.
자본론이 상품생산의 기본 범주들, 즉 자본주의적 경제생활의 ‘기본단위’(기초 세포)인 상품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하는 방식은 이 유물론적 변증법의 적용모델로 종종 인용되어 왔다. 맑스 자신은 그가 기본 개념―가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일반화된 상품생산에 기초한 유일한 경제조직인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에 있는 기본적인 물질적 현상―상품―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6)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맑스의 방법이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하는’7)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불완전하다. 사실상, 그는 물질적 구체로부터 시작하여 이론적 추상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맑스가 이론적 분석에서 구체적 총체성을 재생산하는 것을 돕는다. 온전히 훌륭하게 전개된 구체는 항상 수많은 이론적 ‘추상들’의 결합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학적 노력 앞에 놓여 있는 물질적 구체, 즉 현실의 부르주아 사회는 이 노력을 최종심급에서 규정하며, 이론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실질적인 준거점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사고 속에서 재생산된 이 구체적 총체성이 현실의 물질적 총체성에 근접할 때에만 사고는 진정으로 과학적인 것이 된다. 일견 ?자본론? 1권을 지배하는 운동은, 상품과 그 내적 모순들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의 축적과 그 붕괴에 이르는, 경제적 ‘범주들’의 운동인 것처럼 보인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주 제기되었다: 이 운동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추상적 개관인가, 아니면 첫 번째 상품생산의 출현으로부터 서구의 완전히 발전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이르는 현실의 역사로부터 이 운동의 본질을 불명확하게 할 뿐인 모든 부차적이고 결합된 형태들을 걸러낸, 현실의 경제적 발전의 지극히 단순화된 반영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단순히 ‘예’ 또는 ‘아니오’로만 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본주의 사회들에서 상품들은 우연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기본과정의 주변부에서 생산되었으며, 따라서 맑스가 ?자본론?에서 장엄하게 밝혀낸 ‘가치법칙’의 충격적이고 무서운 논리가 전개될 수 있도록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상품생산이 경제생활의 기본적이고 지배적인 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즉 노동력과 노동도구가 상품이 되는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론? 1권의 분석이 역사적이 아니라 논리적(변증법적 논리에 기반한)이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변증법은 모든 현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어떤 것도 영원하거나 완전히 끝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본의 역사적 세포가 동시에 자본의 논리적 분석의 열쇠인 것이다: 계통발생론(phylogenesis)과 발생학(embryology)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 매일의 자본주의적 생활에서 행해지는 자본축적에는 원시적 자본축적의 몇몇 측면들이 재생산된다: 그와 같은 원시적 자본축적이 없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논리적 분석은 결국 역사적 발전의 몇몇 기본적인 경향들을 반영한다. ‘경제적 범주들’의 가장 단순화된 현상형태들 (물질적 존재, 즉 인간 정신에 의해 인식되고 단순화된 물질적 실재의 단순한 형태들) 은 또한 종종 그것들의 원시적인, 즉 기원적 형태이다. 이러한 해석이 아무리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역사적 분석과 논리적 분석의 통일이 맑스와 엥겔스가 자신들의 방법을 이해했던 방식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8)
베른슈타인으로부터 포퍼, 그리고 오늘날의 강단 경제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맑스가 헤겔로부터 빌어온 변증법적 방법이 본질적으로 ‘쓸모없고’, ‘형이상학적이고’, 심지어 ‘신비적이기까지’ 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들이 생산되었다.9) 이러한 비판자들의 시각이 갖는 실증주의적 편협성은 역으로 그 정반대의 것, 즉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 맑스가 획득할 수 있었던 넓은 역사적 시야와 선명한 통찰력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언으로 귀결된다. 그 방법 덕분에 맑스의 ?자본론?은 이후의 혹은 오늘날의 어떤 경제분석 저작과 비교하더라도 거인의 위치에 놓여 있다. ?자본론?은 결코 정부가 무역수지 적자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기 위한 안내서로 쓰여진 것도 아니며, 스미스 씨가 그의 마지막 1,000톤의 철에 대한 구매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과 같은 시장의 흥미진진한 사건들에 대한 약간 진부하기는 하지만 유식한 설명을 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그 무서운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였을 때, 노동, 기계, 기술, 기업의 규모, 인구의 사회적 구조, 경제성장의 불연속성, 그리고 노동자들과 노동의 관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 성취는 진정으로 인상적이다. 맑스의 장기적 예측―자본축적의 법칙, 기술진보의 가속화, 노동생산성과 노동강도의 가속적 증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증대, 경제활동인구의 절대다수가 노동력의 판매자로 전환된 것, 이윤율의 하락, 잉여가치율의 증대,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경기침체,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불가피한 계급투쟁,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혁명적 시도의 증대―이 역사에 의해 놀랄만큼 확증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장기적 운동법칙을, 수천가지의 '불순물‘과 부차적인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그의 능력 때문이다.10)
이러한 평가는 두 측면에서 도전받아 왔다. 맑스의 비판자들이 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단순히 그가 발견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이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그 법칙들을 두 개의 잘못 진술되고 과도하게 단순화된 공식들로 환원시킴으로써 행해진다 (아래 주 12)를 보라) : ‘노동계급의 점진적 궁핍화’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경제공황.’11) 좀더 복잡한 반대는 이 ‘법칙들’을 ‘과학적인 예측’과 명확히 구분되는 ‘무조건적인 역사적 예언’이라고 부르면서, 이 ‘법칙들’의 성립가능성 혹은 과학적 성격을 부정하는 칼 포퍼에 의해 제기되었다. 포퍼는 ‘과학의 통상적인 예측은 조건적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모종의 변화(예컨대 주전자 속의 물의 온도의 변화)가 다른 변화(예를 들면 물이 끓는 것)를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2) 포퍼는 과학적 이론들과 달리 ?자본론?의 가설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자본론?의 과학적 성격을 부정한다.13)
이것은 명백히 유물론적 변증법의 본질에 대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는데, 레닌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물론적 변증법은 그 인식 내용을 향상시키기 위해 실천을 통한 부단한 검증을 요구한다.14) 실제로 경험이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보여주었더라면, 즉 더 많은 자본주의적 산업이 발전하고, 평균적인 공장들의 크기가 점점 더 작아지고, 새로운 기술에 점점 덜 의존하게 되고, 자본이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해 더 많이 공급되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공장의 소유자가 되고, 임금의 더 적은 부분이 소비재를 구입하는 데 쓰여지는 (그리고 더 많은 부분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구입하는 데 쓰여지는) 것을 보여주었더라면 맑스의 분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쉬울 것이다. 덧붙여, 만약 수십년 동안 경제변동도 없고, 노동조합과 노동자 협회가 대규모로 사라진다면(이 모든 것은 노동자들이 점점 더 자신들의 생산수단과 생산조건을 통제하게 됨에 따라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이 사라지는 것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누구라도 진정으로 ?자본론?은 쓰레기이며 그것이 출판된 지 한 세기 이후의 현실 자본주의 세계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하는 데 무참히 실패했다고 말할 것이다. 1867년 이래의 실제 역사를 한편으로는 맑스가 예측했던 바와 비교해 보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다른 대안적인 ‘운동법칙’과도 비교해 보는 것으로, 맑스의 이론적 성취가 얼마나 괄목할만한 것이며 역사의 실험적 검증에 강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15)
― 다음호에는 “3. 자본론의 계획”과 “4. 자본론 제1권의 계획”이 연재됩니다. -------------------------------------------------------------------------------- 1) 맑스가 1872년 3월 18일자로 모리스 라샤트르에게 보낸 편지(김호균 옮김,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 1990, p. 193); 프랑스어판 서문?(칼 맑스 저, 김수행 옮김, ?자본론? I(제2개역판), 비봉출판사, 2001, p. 21)을 보시오. 1) 다음을 보시오, 자본론 I(제2개역판), pp. 19-20. 2) 같은 책, p. 19. 3) 엥겔스가 1891년 11월 1일자로 콘라드 슈미트에게 보낸 편지, 김호균 옮김,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 1990, pp. 259-60. 4) 레닌, ‘Plan of Hegel's Dialectics (Logic)', Collected Works, Vol. 38, p. 319. 5) ‘속물과 속류경제학자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즉 그들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관계들의 직접적인 현상형태만이 반영되지 이들의 내적 연관은 반영되지 않는다는 데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보여질 것이네. 덧붙여 말하건대, 후자의 경우라면 도대체 과학이란 무엇에 필요하겠는가?’ (맑스가 1867년 6월 27일자로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김호균 옮김,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 중원문화, 1990, p. 155). 또한 ?자본론? III(제1개역판), p. 378을 보시오. 6) 칼 맑스, ‘Randglossen zu A. Wagners “Lehrbuch der politischen Okonomie”’, MEW 19, pp. 364, 368-9 (영어 번역 Theoretical Practice, No. 5, London, 1972 또는 ‘Marginal Notes on Adolf Wagner's Lehrbuch der politischen Okonomie', MECW 24, p. 531 이하). 7) 칼 맑스 저, 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I, 백의, 2000, p. 71. 반대로 레닌(앞의 책 p. 171)을 보라: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사고는 … 진리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그것에 더 가까워진다.’ D. I. 로젠버그는 30년대 초반에 쓴 ?자본론? 전 3권에 대한 코멘트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했다. 맑스의 추상들은, 그것들이 구체적 경제 형태와 관련된 것만큼이나 그리고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구체적이다. 그것들은 결코 임의적이거나 선험적인 추상이 아니다. (러시아 원문의 스페인어 번역을 보라. Seminario de 'El Capital', Escuela Nacional de Economia, UNAM, Mexico, Cuaderno I, p. 46.) 8) 이 주제 및 이와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들 중에서 다음을 보시오: Otto Morf, Geschichte und Dialektik in der politischen Okonomie, Frankfurt, 1970; Eval!d Vasiljevic Iljenkov, La dialettica dell' astratto e del concreto nel Capitale di Marx, Milan, 1961; Karel Kosik, Die Dialektik des Konkreten, Frankfurt, 1967; 진드리히 젤레니 저, 이기홍 옮김, ?맑스의 방법론?, 까치, 1989; Leo Kofler, Geschichte und Dialektik, Hamburg, 1955, etc. 9) 예컨대, 유진 폰 뵘-바베르크, ?마르크스와 마르크스 체계의 종언?, 이인호 편역, ?노동가치론 논쟁?, 학민사, 1985, pp. 98-100;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 저, 강신준 옮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한길사, 1999, pp. 91-115; 칼 R. 포퍼 저, 이명현 옮김, ?열린 사회와 그 적들? II, 민음사, 1982, pp. 122-3; 바실리 레온티에프, 'The Significance of Marxian Economics for Present-Day Economic Theory', Am-erican Economic Review Supplement, March 1938, reprinted in Horowitz, Marx and Modern Economics, London, 1968, p. 95, etc. 10) ‘맑스의 성취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에서 경제이론에 대한 이러한 기술적 공헌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 공헌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경향에 대한 그의 빛나는 분석에 가려진다. 그 내용들은 진실로 인상적이다: 증대하는 부의 집중, 소규모와 중규모 기업들의 급속한 제거, 경쟁의 점진적 제한, 끊임없는 기술진보와 이에 수반하는 지속적으로 증대하는 고정자본의 중요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히 중요한, 주기적인 경기순환의 감소하지 않는 진폭―현실화된 일련의 탁월한 예언들에 대해 가장 세련된 현대의 경제이론조차도 이에 맞서 무언가 보여줄 만한 것이 없다.’ (레온티에프, 앞의 글, p. 94.) 11) 이러한 과도한 단순화의 전형적인 예가 폴 사무엘슨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을 두 가지(!)로 환원시킨다: ‘노동계급의 궁핍화’와 ‘자본주의 하에서 독점의 심화’, 그리고 첫 번째에 대해서는 ‘그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결론내리고, 두 번째에 대해서는 ‘30년 동안 맑스의 이 예언은 옳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다음 70년 동안 기업집중에 대한 가장 주의깊은 연구들에 의해서는 지지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나서 맑스가 ‘자본주의적 발전에는 경기변동이 점점 더 심화되는 불가피한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라는 마지막 언급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된다. (폴 A. 사무엘슨, ‘Marxian Economics as Economics',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57 (1967), pp. 622-3). 12) 칼 포퍼 저, 이한구 옮김, ?사회과학의 예측과 예언?, ?추측과 논박―과학적 지식의 성장? 2, 민음사, 2001, p. 183. 13)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II, 제13장 전체(원저에서는 23장), 특히 pp. 307-8. 14) Lenin, 앞의 책, p. 319: '인식의 모든 이러한 계기들(단계들, 국면들, 과정들)은 실천에서 검증받으며, 이 검증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면서, 주관에서 객관으로 나아간다…’ 15) 이 터무니없는 가설,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운동법칙에 대한 기막힌 잡설이 빌프레도 파레토의 맑스의 가치이론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제공되었다. 맑스의 노동가치이론이 이미 정해진 결론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파레토는 여자 재봉사가 자신의 기계, 자신의 생활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Introduction a K. Marx Le Capital, extraits faits par P. Lafargue', in Marxisme et economie pure, Geneva, 1966, pp. 47-8). 그의 예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차치하면, 이 반모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하면, 그리고 그 결과로 자신들의 노동생산물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들을 시장에서 판매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이윤(잉여가치)을 전유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150년 동안의 산업발전이 이와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19세기 말까지도, 파레토가 이와 같은 가설을 그 명백한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 전개할 수 있을 만큼 ‘열린’ 문제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맑스의 통찰력이 갖는 심오함을 더더욱 강조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