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저에게는 이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 세계는 물질적인 것이다

작성자선통박영수|작성시간09.01.05|조회수143 목록 댓글 0

1. 저에게는 이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 세계는 물질적인 것이다

 

1796년 프랑스 천문학자 라쁠라스(1749∼1827년)는 자기의 저서 ≪세계계해설≫에서 태양계 기원에 관한 성운가설을 내놓았다. 이 가설에 의하면 태양계는 회전하고 있는 기체성운의 변화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가설은 태양계의 형성원인을 물질자체에서 찾았으며 하느님의 역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후 라쁠라스는 이 책을 나뽈레옹에게 바쳤다. 나뽈레옹이 그에게 ≪라쁠라스선생, 듣는 말에 의하면 세계를 탐구하는 당신의 이 대작에서는 세계의 창조자에 대하여 한마디로 언급하지 않았다면서요?≫하고 묻자 라쁠라스는 시원스럽게 ≪폐하, 저에게는 이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뽈레옹과 라쁠라스는 다 철학자가 아니지만 구경세계는 신이 창조한 것인가 아니면 본래부터 있는 것인가, 세계는 정신의 산물인가 아니면 본래부터 있는 물질적 세계인가 하는 중요한 철학문제를 이야기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늘 말하는 세계의 본원문제이다. 과거 일부 철학자들은 이 방면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을 본체론이라 불렀다.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에서 이것은 철학기본문제의 첫째 측면의 내용에 속한다.


세계의 본원에 대한 탐구는 오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것을 오랜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인류사회의 초기에 문화가 일정한 수준에까지 발전하여 물질과 정신이란 이 두가지 현상을 어느 정도로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벌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물질과 정신이란 이 두자지 현상 중에서 어느 것이 선차적인가, 물질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현상이 있는가, 세계의 본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관에 대한 사람들의 흥취는 바로 여기로부터 점차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현실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것이 중대한 이론적 의의와 실천적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세계관을 수립할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실천이 심화되고 과학이 발전되고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끊임없이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과 새로운 과학성과에 대하여 어떠한 세계관의 방향에 따라 그것을 설명하고 개괄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나서게된다.

 

그렇다면 세계의 본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예로부터 두가지대답밖에 없다. 하나는 세계의 본원을 정신이라고 하면서 세상만물을 모두 정신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론적 일원론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의 본원을 물질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형형색색의 현상을 모두 물질의 각이한 운동형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적 일원론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려 한다.

 

관념론은 세계의 본원을 정신이라고 인정한다
역시 나뽈레옹의 질문으로부터 이야기해 보자. 나뽈레옹은 재위하고 있을 때 천주교를 국교로 봉하였다. 그는 라쁠라스가 조물주를 깡그리 잊어버린데 대하여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실은 천주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인정하며 이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의 성경에는 하느님이 6일동안에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그럴듯하게 서술되어 있다.


즉 하느님이 6일동안에 빛, 공기, 땅, 바다, 식물, 해, 달, 별, 물고기, 새, 집집승, 벌레, 들짐승을 만들어 내고 나중에 자기의 모양대로사람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며 7일만에는 모든 만물을 다 만들고 휴식하였다는 것이며 하느님이 세상만물을 다 만들어 낸 그날이 바로 세계가 개창된 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적나라한 창세설이다.


철학관념론은 세계의 본원에 대한 문제를 대답할 때 종교처럼 그렇게 신의 깃발을 들고 나오지는 않지만 관념론은 그 어떤 것이나 다 세계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부터 산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관념론도 일종 창세설이다.
물론 이렇다 해서 관념론과 종교가 구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일종 이론으로서의 관념론은 종교신화에 비해 훨씬 더 정밀하지만 그 본질로 말하면 역시 일종 창세설이며 이론화한 창세설에 불과한 것이다.


예컨대 고대희랍의 유명한 관념론철학자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7년)에 의하면 현실세계는 원래부터 있는 이념이 낳은 것이며 세계는 이념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문앞에 있는 나무는 나무라는 이념의 그림자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집이라는 이념의 그림자이다. 예컨대 세계의 일체 사물은 모두 이념에서 산생된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을 놓고 보면 그의 철학은 변증법적 사상이 풍부하여 매우 보귀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념론은 종교의 창세설과 별다른 구별이 없다. 그에 의하면 세상만물이 나타나기 전에 벌써 독립적인 정신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인간의 정신이 아니라 절대정신이라고 하는 우주의 정신이다. 절대정신이 일정한 단계까지 발전하여서야 선후로 자연계와 인류사회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송조때의 관념론철학자 주희(1130-1200년)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적이 있다. 그는 ≪이(이)는 사(사)에 앞서 존재한다≫고, 즉 세상만물이 나타나기 전에 벌써 이가 존재하였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가장 근본적인 이를 태극(태극)이라고 하였으며 태극을 조물의 중추로 보면서 세상만물이 모두 그것에 의하여 산생된다고 인정하였다.


플라톤, 헤겔, 주희의 철학에서는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고 그 대신 이념, 절대정신, 태극이 등장하였다. 까놓고 말하면 그것들은 이론화한 하느님으로서 조물주의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이념, 절대정신, 태극, 하느님 등등은 동일한 것으로서 모두물질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때문에 정신을 세계의 본원이라고 승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종교미신에로 끌고 갈 수 있다. 무엇때문에 아직도 귀신을 믿고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는가? 사상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유물론의 도리를 모르며 물질을 떠나 정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데 그 중요한 원인이 있다. 레닌은 ≪철학적 관념론은 다만 은폐되고 분석된 귀신담에 지나지 않는다.≫(≪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레닌선집≫, 제2권  233쪽)고 말하였다.


관념론과 종교가 모두 정신을 세계의 본원이라고 긍정하는 이점으로 볼 때 그것들은 공통적인 세계관과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관념론은 다 정신을 세계의 본원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 신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념론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위에서 말한 플라톤, 헤겔, 주희 등 관념론자들이 말하는 정신은 인간의 주관적 정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른바 객관적정신인 것이다. 이자들은 이 정신을 인간의 주관적의식이라고 인정하며 세상만물도 주관적관념론이라고 부르는데 그 황당성은 객관적 관념론에 못지않다.


영국의 대주교이며 저명한 철학자인 버클리(1684-1753년)가 바로 전형적인 주관적 관념론이다. 그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공식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외계의 사물이란 바로 내가 감각한 것이며 나의 감각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관적 관념론철학은 우리 나라에도 존재하였다. 명조 때의 왕양명(1472-1528년)은 송조, 명조 시기의 주관적 관념론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전부의 철학은 ≪마음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로 개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달, 해... 등을 망라한 세상만물은 모두다 그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관적 관념론은 도리에 전혀 맞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유아론에 빠지게 된다. 즉 세계가 자기의 감각 속에만 존재하는 이상 세계에는 자기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우리는 주관적 관념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자. 세계의 모든 것이 다 그대의 감각에 불과하다면 그대가 세상에 출생하기 전에, 다시 말하여 그대의 감각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그대를 낳은 부모도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보다시피 주관적 관념론과 객관적 관념론은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세계는 본질상에서 정신적인 것이며 정신은 물질을 생산하고 물질을 결정하며, 정신은 세계의 본원이고 일차적인 것이며 물질은 정신에서 파생된 것이고 이차적인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전도한 것이며 세계의 본래면모를 근본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관념론철학은 과학과 상용되지 않을 뿐더러 상식과도 배치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그림의 떡으로는 배를 채우치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사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 어떤 정신적인 것으로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준다. 관념론철학자들은 사물을 정신의 산물로, 의식자체로 보면서 아주 성수가 나서 말하지만 정작 배가 고플 때에는 결코 자기의 의식으로, 정신으로 배를 채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 관념론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다. 자기의 관념론을 자기의 실생활에서 그대로 관철하려는 관념론자가 있는가? 없다. 이럴 때면 그들은 철학이론과 생활실천은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라고 변해할 수 밖에 없다.

 

유물론은 세계의 본원을 물질이라고 인정한다.
관념론철학에서 묘사한 것과는 정반대로 세계의 본원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다.
관념론철학자들이 여러가지 괴상한 창세설을 내놓을 때에 유물론철학자들도 탐구와 사색을 거쳐 자기의 견해를 내놓았다. 플라톤과 같은 시대에 희랍에는 자연철학자로 불리우는 철학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연을 열심히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그들은 천변만화하고 다종다양한 물질형태 속에서 세상만물을 낳는 한가지 또는 몇가지 시원물질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만물은 시원물질에서 생산되고 나중에는 다시 그것에로 돌아간다는 이것이 원시적인 자연발생적 유물론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자연계의 만물이물을 떠나서는 생장할 수 없는 것을 관찰하고 세계의 본원을 물이라고 인정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또 공기, 불 등을 세계의 본원이라고 인정하였다.


≪만물이 통일되어 있는 우주는 어떠한 신이나 어떠한 사람에 의해서도 창조된 것이 아니고 합법칙적으로 타오르며 합법칙적으로 끼치는 영원히 산 불이었으며 산 불이며 또 산 불일 것이다.≫


이 말은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약 540∼기원전 약 480년, 470년 사이)의 명언이다. 우리 나라 고대의 5행설에서는 금, 목, 수, 화, 토를 세계의 본원으로 보았다. 서주 말년에 사백은 ≪그러므로 선왕은 토와 금, 목, 수, 화를 혼합하여 백물을 만들었다.≫(≪국어 ·정어≫)고 말하였다. 춘추시기 ≪관자(管子)의 ≪수지편(水地篇)≫에는 ≪물이란 무엇인가? 만물의 본원이다.≫라고 쓰여있다. 오늘에 와서 볼 때 세계에 대한 이런 소박한 유물론적 사상의 묘사는 유치한 점도 있지만 과학수준이 극히 낮았던 고대에 신령에 의거하지 않고 자연계 자체에서 세계의 본원을 탐구한 것은 아주 고귀한 것이다. 유물론은 그후의 발전에서 여러가지 부동한 형태들이 나타났지만 세계의 본원은 물질이라는 것, 물질이 일차적이고 의식이 이차적이라는 것을 승인하는 면에서는 모두 일치한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도 세계의 본원은 물질이며 세계는 통일적인 물질세계라고 인정한다. 이 결론은 추측이나 추리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장기간의 실천에 근거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성과를 개괄하고 유물론의 철학사상을 발전시킨 기초에서 과학적인 논증을 거친 것이다.


먼저 천체로부터 이야기해보자. 서두에서 우리는 라쁠라스가 자기의 저서 ≪세계계해설≫에서 태양계의 기원을 상술할 때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 관점이 하느님의 창세설과 일치하지 않아 나뽈레옹의 의문을 자아냈다는 것을 말하였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다음과 같은 관점, 즉 땅 위에 있는 인간세상 밖에도 하늘 위에 신령세계가 있으며 하느님이 거기서 살면서 우주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인정하는 관점이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관념론철학은 하느님의 주소를 노골적으로 제출하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물질적 세계 외에 또 비물질적 세계가 있다고 인정한다. 16세기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1473∼1543년)의 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구중심설을 부정하였으며 하느님이 천체의 운행을 주재한다는 신화를 깨뜨려버렸다.

 

19세기에 과학자들은 스펙트럼분석을 천문관측에 응용하여 기타의 천체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화학원소에 의하여 구성되었다는 것, 우주천체에서의 원자, 분자의 발사와 흡수도 지면에서와 동일한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천체가 지구와 근본적인 구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지금 우리는 은하계를 관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00억광년에 달하는 먼 은하계외 성운 및 각종 형태의 성단도 관측할 수 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곳은 모두가 물질적 세계이며 신령이 있는 천당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주공간은 텅 빈 것 같지만 기실은 실물 입자와 마당으로 충만되어 있다. 실물입자와 마당은 이미 알고 있는 자연계물질의 두가지 기본형태이다. 실물입자와 마당은 이미 알고 있는 자연계물질의 두가지 기본형태이다. 실물입자는 불연속형태로 나타나며 그것들간의 상호작용은 마당을 통하여 전달된다. 전기마당, 자기마당, 전자기마당, 인력마당 등은 모두 마당의 다른 형태이다. 마당은 연속형태로 나타난다. 이 두 가지 기본형태는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일정한 조건에서는 또 상호전화할 수 있다. 비물질적이고 허무한 신비세계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복잡한 물질적 현상이다. 역사적 조건의 제한으로 하여 사람들은 오랫동안 생명의 기원을 해석하는 면에서 곤란을 느끼었다. 종교와 관념론은 바로 이 기회를 타서 비물질적인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하느님이 생명을 창조하였다고 떠들어댔다.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는 오늘도 계속 연구하여야 할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생명은 물질적인 것이며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젓은 의심할 바 없다. 현대자연과학이 증명하다시피 생명은 핵산과 단백질의 존재방식이며 생명의 출현은 형성초기에 탄산가스, 메탄, 질소, 수증기, 암모니아 등 성분을 포함한 원시대기가 있었다. 원시대기는 태양자외선, 번개 등 에너지의 작용에서 아미노산, 탄수화물, 퓨린 등 유기물을 생성하였으며 이러한 유기물은 발전을 거쳐 또 단백질, 핵산을 형성하였으며 단백질과 핵산은 발전과정에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신진대사의 기능을 가진 원시생명을 형성하였다. 발견된 화석에 근거하여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30여억년 전에 생명이 기원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대자연과학은 본세기 50년대에 원시지구조건을 모의하여 아미노산을 합성하는데 성공하였다. 60년대에 우리 나라에서는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결정우이도소(結晶牛?島素)란 단백질을 인공적으로 합성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이 충분히 말해주다시피 생명의 출현은 아무런 신비로운 점도 없는 것이다.
창세설에 의하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도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이 증명하다시피 지금의 모든 생물의 종은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쳤다. 생물은 발전과정에서 생존에 적응되지 않는 것은 도태당하고 생존에 적응되는 것은 보유되며 후대를 번식한다. 이런 과정이 바로 자연도태이다. 자연도태는 생물진화의 주요한 요소이다. 기린이 오늘날 세계에서 키가 제일 큰 동물로 된 것은 결코 하느님이 귀여워하면서 기린에게 긴 목을 선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린자체가 변화 발전한 결과이다.

 

 기린은 나뭇잎을 먹고 사는데 낮은 곳의 나뭇잎을 다 먹어버린 후 높은 곳의 나뭇잎을 먹자면 목이 길어야 한다. 자연도태에 의하여 목이 긴 종이 보유되고 발전하여 지금의 기린으로 진화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급생물은 저급생물로부터 진화된 것인데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헉슬리(1825∼1895년)는 동물과 인류의 관계를 연구하고 맨처음으로 사람과  원숭이는 조상이 같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1860년 6월에 옥스퍼드대학에서는 진화론과 신창론과의 치열한 논전이 있었다. 한 권세있는 주교는 성경의 교의와 배치된다고 진화론을 한바탕 욕설하고 난 다음 헉슬리에게 ≪당신에게 묻고자 합니다. 꼬리없는 원숭이와 친족관계를 발생한 사람이 당신의 할아버지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할머니입니까?≫라고 도전적으로 말하였다.

 

헉슬리는 엄정하게 주교를 반박하면서 ≪사람은 자기의 조상이 꼬리없는 원숭이라고 해서 수치로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일찍이 말한 바이지만 다시 한번 중복하는 바입니다≫라고 정중히 선고하였다. 과학적인 진화론은 반과학적인 신창론을 격파하였다. 사람은 고대유인원으로부터 진화된 것이다. 노동은 이런 전변을 촉진하는 결정적 조건이었다. 엥겔스는 ≪노동이 인간자체를 창조하였다.≫(≪자연변증법≫,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3권, 508쪽)라고 지적하였다.


더욱 복잡한 물질의 운동형태인 인류사회는 물질세계의 장기적발전의 산물로서 주위의 자연계와 서로 통일되어 있다. 관념론자들은 사회 생활을 신이 배치한 것으로 보거나 사회의 존재와 발전을 모두 사유에 기초한 것으로 본다. 이왕의 유물론철학자들도 번잡하고 복잡한 의식형태에 눈이 가리워 사회적 생활에서 노는 사회물질적 생활조건의 결정적 역할을 똑똑히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물론의 원리를 사회생활에 철저히 운용하여 물질적 향리품의 생산은 전반 사회 생활의 기초라는 것, 사회의 정신적생활이 사회의 물질적 생활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생활이 사회의 정신적 생활을 결정한다는 것, 모든 사회적 현상은 결국 물질적 원인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런 문제들은 후에 전문으로 토론하기로 하자.


요컨대 세계는 그 본질로 보아 물질적인 것이다. 물질의 구체적형태는 또 다종다양하여 비생물적인 물질형태도 있고 생물적인 물질형태도 있으며 사회적인 물질형태도 있다.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한가지 물질형태가 다른 한가지 물질형태로 전화할수 있다. 그러나 물질이 어떻게 전화하든지간에 그 총량에는 아무런 증가나 감소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물질은 곧 그 자체가 존재하는 원인으로서 창조될 수도 없고 소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불멸의 법칙, 에너지보존 및 전화의 법칙에 의하여 실증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주의를 위해 물질적 부를 창조한다거나 인간기적을 창조한다고 늘 말하는 것은 근거없는 재부를 창조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던 물질을 창조한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정한 조건에서 물질의 구체적 형태를 개변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농사를 짓는 것은 방법을 대어 햇빛, 수분, 이산화탄소, 비료 등 물질형태를 보다 효과적으로 단백질과 기타 영양의 물질형태로 전화시키는 것이다.


세계는 통일된 물질세계이므로 물질을 제거하면 아무것도 없게된다. 관념론은 정신을 더없이 높은 지위에 올려놓고 정신을 세계의 본원이라고 인정하는데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정신자체도 물질의 산물이다. 정신은 물질의 장기적 발전에 의하여 사람의 두뇌가 나타난 때에야 생산된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물질에 앞서 본원으로 될리 만무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류가 있기에 정신현상이 있으며 지구와 태양은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벌써 존재하였다는 이 공인하는 사실로써 관념론의 황당성을 폭로한다.


인류의 연령을 약 300여만년이라고 하면 지구의 연령은 45억년을 초과하며 태양의 연령은 60억년 좌우나 된다. 인류의 연령은 우주의 무한한 역사에 비하면 짧디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정신이 결코 세계의 본원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 않는가?


물질이 세계의 본원이다-이것은 세계의 본원에 대한 유일하게 정확한 대답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필연코 이 과학적 결론에 새로운 논증을 계속 제공하여 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세계의 본원에 관한 인식이 이제는 끝났다는 말이 결코 아니며 유물론과 관념론간의 대립이 이제는 없어졌다는 말도 결코 아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관념론도 늘 수법을 바꾸어 과학성과를 왜곡함으로써 유물론을 반대할 것이다. 지난날에도 그러하였고 오늘도 역시 그렇다.


예를 들면 현대과학은 정보문제를 내놓았다. 정보과학은 근년에 와서 조종학, 정보이론, 계산기과학 등 과학을 기초로 하여 나타난 새로운 과학이다. 정보과학의 주요한 임무는 정보의 성질 및 정보의 이용과 처리에 관한 일반적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다. 정보에 대한연구를 진행한지 오래지 않기 때문에 그 본질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지금 과학자들 가운데는 이러저러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원래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관념론은 이 기회를 타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공격을 급급히 발동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정보는 물질, 의식과 병렬되는 더욱 광범위한 세번째 개념으로서 유물론과 관념론간의 대립을 소멸하는 것을 자기의 천직으로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정보의 개념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무근거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말들은 황당무계한 말들이다.

 

기실 사람들은 정보에 대하여 그리 생소하지 않다. 우리들이 흔히 쓰는 ≪달무리가 서면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안다≫, ≪한마디로 사람들을 놀래운다≫는 성구들은 모두가 정보의 전달을 말하는 것이다. 물질세계의 온갖 사물은 다 자기의 부동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특징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때문에 우리들은 언제나 정보의 망망한 대해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보에 대한 접수와 처리를 떠나서는 세계를 감지할 수 없고 생존할 수도 없다. 좁은 뜻에서 말한다면 정보란 곧 소식이며 통신의 내용이다. 넓은 뜻에서 말한다면 정보는 물질의 존재방식 또는 운동상태이며 이런 방식, 상태의 정식화이다. 정보의 천변만화는 물질의 존재방식과 운동상태가 무한히 풍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보는 각종형태의 물질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속성이며 물질계통사이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형식이다. 정보는 물질을 떠나 독립 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류가 나타난 후 사람은 의식이 있기 때문에 정보의 전달에 대하여 관념적 성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의식도 사람의 두뇌라는 물질의 기능일 따름이다.


총적으로 말하여 세계의 본원에 대한 대답은 물질이 아니면 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유물론적 일원론이 아니면 관념론적 일원론이다. 이것을 제외한 제3종의 대답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철학에 이원론이라는 것이 있지 않는가고 묻는다. 그렇다. 철학사에는 이원론의 관점이 있었다. 이 관점은 정신과 물질이 각각 독립하여 있으면서 다같이 세계의 본원으로 된다고 인정하였으며 정신이 물질을 낳는 것도 아니고 물질이 정신을 낳는 것도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데카르트(1596-1650년)가 바로 그 전형적 대표자이다. 그는 세계의 기초로 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한가지는 정신의 실체인데 그것은 사유할 수는 있으나 체적이 없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물질의 실체인데 그것은 사유할 수는 없으나 체적이 있으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양자는 서로 의존하지도 않고 결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는데 보기에는 어느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는것 같지만 물질이 세계의 유일한 본원이라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관념론에로 넘어가고 말았다. 데카르트는 물질과 정신이란 두가지 실체의 내원에 대하여 대답할 때 양자가 모두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보다시피 이원론은 유물론과 관념론 밖에 독립하여 있는 철학파벌이 아니다.

 

물질이란 인간의 의식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 존재이다.
일체 유물론자들은 세계의 본원이 물질이라는 것을 모두 승인한다.
그런데 이 물질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문제에 대한 인식도 장기적인 발전과정을 거쳤다. 변증법적 유물론철학이 산생되어서야 과학적 물질관이 확립되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이지만 고대의 소박한 유물론철학자들은 물질의 이러저러한 구체적 형태를 세계의 본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물질의 개별적 형태일 뿐이므로 모든 물질을 개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때에도 일부 철학자들은 구체적 물질형태로부터 그 어떤 일반성을 띤 특성을 추상하여 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고대희랍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시원기초는 고정적인 한계, 형태, 성질이 없는 무한자(无限者)이며 만물은 이것으로부터 생기고 또 이것에로 돌아간다고 인정하였다. 저명한 유물론철학자 데모크리토스(약 기원전 460-기원전 370년)는 원자론의 학설을 제출하고 세계는 원자로 구성되었으며 원자는 분할할 수 없는 가장 작은 물질입자라고 인정하였다. 이는 확실히 빛나는 사상이지만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자연과학의 발전은 원자론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였다. 17∼18세기의 영국, 프랑스 등 나라의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뉴톤의 고전역학에 기초하여 각이한 원자들이 각이한 비례로 결합되어 만물을 구성하며 원자는 우주의 벽돌이며 분할할 수 없는 가장 작은 물질단위이며 원자의 성질은 물질의 불변하는 속성이라고 인정하였다. 이런 기계적 유물론 물질관은 근대물리학에 기초하였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소박한 유물론보다 한걸음 전진하였지만 그 사유방법에서는 형이상학적 결함이 뚜렷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을 다 분할할 수 없는 작은 결점, 즉 원자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것은 물질형태의 일부 특성만 포착하고 물질의 각종 형태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은 포착하지 못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자도 분할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사회 생활분야에서 물질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관념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실천은 물질적 활동인가 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기계적 유물론의 물질관은 더구나 정확한 해석을 줄 수 없었다. 기계적 유물론자는 이러한 점에서 유물론을 끝까지 관철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역사분야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창시한 과학적 유물론의 학설은 기계적 유물론의 결합을 극복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물질이란 이 개념은 물질의 어느 한가지나 몇가지의 구체적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연계와 사회의 모든 물질적 현상을 망라한 모든 물질영역과 물질형태의 공통한 본질에 대한 개괄이어야 한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실체 물질이란 다름아닌 온갖 실체의 총제이며 그 개념은 이 총체로부터 추상된 것이다.≫(≪자연변증법≫,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3권, 556쪽)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기의 유물론적 입장을 표명할 때 일반적으로 세계관과 인식론의 견지에서 오직 이런 견지에서만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을 서로 대치시켰으며 물질을 의식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의 총체로 보았던 것이다. 만약 문제를 이렇게 보지 않는다면 유물론의 원칙을 사회역사분야에 관철시킬 수 없을 뿐만아니라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일부 새로운 자연현상에 대하여 정확한 해석을 주기 어렵다.


예를 들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물리학에서의 새로운 발견들은 기계적 유물론의 물질관에 대한 한차례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자연과학자들은 원래 원자는 구조도 없고 더 분할할 수도 없다고 인정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원자내부에 또 전자가 있으며 원자가가장 작은 단위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리하여 관념론은≪물질이 소멸되었다느니, 유물론이 파탄되었다≫느니 뭐니 하고 허튼 소리를 쳤다. 기계적 유물론의 물질관은 관념론의 진공을 당해낼수 없었다. 이 중요한 시각에 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과학적 유물론의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동시에 그들의 학설을 발전시켜 물질에 대한 과학적 정의를 내렸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지각되며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면서 우리의 감각에 의하여 복사되고 촬영되고 반영되는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레닌선집≫, 제2권, 162쪽)
이 정의는 물질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특성-객관적 실재성을 포착하였으며 따라서 세계관, 인식론 및 방법론 면에서 인간의 실천활동과 과학연구에 정확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자연과학자들도 이 방향을 장악하여야만 대자연의 비밀을 탐색하고 물질의 구조와 특성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전진의 길을 잃지 않게 된다.


물질은 마르크스주의유물론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계의 진정한 통일성은 그 물질성에 있다. 그리고 이 물질성은 요술사의 두세마디 문구에 의하여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자연과학의장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발전에 의하여 증명되는 것이다.≫(≪반듀링론≫,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한문판, 제3권, 33쪽)


정황은 바로 이러하다.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여 볼 때 인간은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면에서 매우 긴노정을 걸어왔다. 그러나 물질세계는 무한한 것이므로 인식도 끝이1 없다고 인정하였지만 20세기 초부터 물질구조에 대한 자연과학의 연구는 원자층을 돌파하고 소립자층에 도달하여300여종의 소립자를 발견하였다. 소립자도 역시 기본이 아니다. 과학은 바야흐로 다음 층, 즉 콰크(층자)를 탐색하고 있다. 이런 층들과 입자들은 그 형태가 다종다양하고 특성도 각기 다르지만 그것들의 객관적 실재성은 개변할 수 없다. 현대물리학에서는 반물질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글자풀이에 매달려 그것을 물질에 대한 부정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기실은 전혀 이런 것이 아니다. 반물질이라는 것은 반입자로 구성된 물질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반물질의 원자는 반원자핵(즉 반양성자와 반중성자의 집합체) 및핵 밖에서 운동하는 양전자로 이루어졌다. 최근 몇해 동안에는 고에너지가속장치를 핵반응에 이용하여 반중양성자와 반헬륨핵을 제조하였다. 이것은 우주에 반입자로 구성된 실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것을 설명한다. 입자와 반입자의 차이는 다만 전하의 부호, 자극의 거리 등 구체적 특성과 관련되며 기타 허다한 특성은 같다. 반물질은 철학적 범주가 아니며 물질과 상반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반물질도 마찬가지로 물질의 일종 구체적 형태이다. 이와 같은 과학적 발견은 물질관문제에 있어서 관념론의 허황한 이론을 심대하게 타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유물론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당성을 더욱 더 실증하고 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물질적 세계이다. 이 세계를 제외하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 ≪망망한 앞길 멀기도 하여라, 내 오르내리며 찾고야 말리.≫ 사람들은 세계의 비밀과 인생의 의의를 부단히 탐색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탐색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이 물질적 세계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하느님이 편안히 사는 에덴낙원도 없거니와 신선들이 거주하는 화려한 궁전도 없는 것이다. 천당은 바로 이 물질적 세계에 있다. 사람들의 이상, 희망, 행복도 이 물질적 세계에 기탁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를 될 수 있는대로 아름답게 개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천직이며 우리 인생의 보람이다. 포부가 있고 기개가 있는 우리 청년들은 꼭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며 분발노력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적 4개 현대화의 실현을 위하여, 더욱 더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기여할 것이다.


세계의 물질성을 승인하며 세계가 통일된 물질적 세계라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세계관의 기초이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