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철학, 종교, 법률

그리운 함석헌 선생님

작성자선통박영수|작성시간08.12.08|조회수91 목록 댓글 0

 

 

〈축사〉

 

그리운 함석헌 선생님

 

김 언 호 ((주)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시대에 우뚝 선 사상가를 만나다

80년대 나는 한 출판인으로서, 󰡔한국사󰡕와 같은 책들을 기획하고, 역사강좌와 역사기행을 조직하고, 지식인대회를 마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위대한 역사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만났다. 단재상을 만들어 그의 정신과 사상의 구현에 나서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분에 넘치는 영광이다. 책을 기획해서 세상의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일이란 이렇게 신나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 나는 책을 만들 수 있는 행운을 누리면서, 우리 시대에 우뚝 서는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님을 또한 만날 수 있었다. 저 열정의 80년대에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전집 전20권을 펴내는 ‘정신의 축제, 사상의 축제’를 누릴 수 있었다. 책을 만들면서 10여 년 동안 나는 선생님을 옆에서 모실 수 있었다. 그것으로도 나의 80년대는 신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만들면서 아침저녁으로 뵙고 말씀도 들을 수 있는, 고단하지만 격동하는 시대에 나는 ‘황홀한 세월’을 만끽할 수 있었던 데는 그 어떤 약간의 인연 또는 필연이 나에게 있었을까.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때 부산에서 사범학교에 다니는 큰형님이 󰡔사상계󰡕라는 잡지를 보여주면서 함석헌 선생님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뒤부터 부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매달 󰡔사상계󰡕를 기다리는 독자가 되었다. 고교 3학년 때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고 전교생 앞에서 ‘독후감’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선생님이 강연이라도 하시면 늘 달려가서 경청하는 것이었다. 1964년 3월 21일인가, 효창공원에서 열린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집회 때의 선생님 강연을 비롯해, 대광고등학교 강연, 세종문화회관 강연 등 한 시대를 뒤흔든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러 쫓아다녔다. 내가 신문사를 그만둔 후인 1977년 3월 초순, 흥사단 강당에서 선생님의 77세 탄신을 기념해서 선생님의 강연이 기획되었는데, 경찰이 강당을 폐쇄하는 바람에,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이른 봄날 선생님을 강당 바깥에 모셔서 강연을 듣는 일도 있었다. 우리들에게 함 선생님의 말씀은 축제 또는 축복 같은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선생님의 강연은 엄혹한 시대를 견디게 하는 씨들의 한판의 축제였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면 저 엄혹한 세월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우리 세대는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선생님의 글을 읽을 수 있었기에 행복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선생님의 전집을 펴낼 수 있었다니! 저 70년대와 80년대에 책 만드는 일의 고단함과 고통으로 나는 때로는 좌절하곤 했지만, 쌍문동에 있던 선생님 댁을 찾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곤 하면서 그 고단함과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 나무와 꽃을 손질해주시는 큰 사상가의 넉넉한 인품을 만나면서 말이다.

 

‘함석헌전집’은 1982년부터 7년 작업

선생님의 전집 작업은 1981년부터 진행되었다. 1979년 10월 26일의 정변에 이은 신군부의 집권과 더불어 많은 지식인들이 수난을 당했다. 신문·잡지도 통폐합되었고 언론인들은 해직되었다. 함 선생님이 1970년부터 발행하던 월간 󰡔씨의 소리󰡕도 폐간됐다. 계훈제·고은·김동길·김성식·김용준·법정·송건호·안병무 선생님 등 󰡔함석헌전집󰡕의 편집위원회는 자연스럽게 󰡔씨의 소리󰡕 편집위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다. 편집위원들은 한길사의 저자이거나 필자들이었다. 우리 출판의 책 내는 생각과 방향에 대해서 동의·성원하는 분들이었다.

1982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해 1988년에 전20권으로 완간되는 󰡔함석헌전집󰡕은 사실은 내가 전적으로 기획하고 정리하는 것이었다. 당초 전집의 간행을 주도한 안병무 박사가 건네준 원고는 사실은 10권 분량도 되지 않았다.

나는 전집을 한편으로 진행하면서 계속 자료를 찾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글을 쓰거나 강의·강연을 하신 선생님의 자료는 방대한 것이었다. 선생님도 당신이 집필한 저술들을 챙겨서 갖고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와 1960년의 󰡔사상계󰡕, 1970년대의 󰡔씨의 소리󰡕가 있어서 선생님의 글과 말씀이 이 두 잡지에 주로 실리면서 나름대로 기록되는 것이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시집 󰡔수평선 너머󰡕 등 중요한 책들은 이미 책제목이 정해져 있었지만, 나머지는 전혀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전집 각 권의 내용을 체계화시키고 제목을 정하는 것도 결국 내가 해야 했다. 전20권의 목록을 다시 본다.

 

① 뜻으로 본 한국역사

② 인간혁명의 철학

③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④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⑤ 서풍의 노래

⑥ 수평선 너머

⑦ 간디의 참모습·간디 자서전

⑧ 씨에게 보내는 편지

⑨ 역사와 민족

⑩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⑪ 두려워 말고 외치라

⑫ 6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씀

⑬ 바가바드 기타

⑭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⑮ 말씀·퀘이커 300년

사람의 아들 예수·예언자

민족통일의 길

진실을 찾는 벗들에게

영원의 뱃길

씨의 옛글풀이

 

선생님의 글과 말은 웅장한 교향악

선생님의 전집을 만들면서 나는 선생님의 글을 철저히 다시 읽게 되었다. 선생님의 글과 말씀을 읽는 것은 아름다운 음향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 나는 선생님의 글과 말을 교향악 같다고 했지만, 저 오래전에 쓴 선생님의 글도 오늘에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 있다. 선생님의 글과 말씀은 막힌 시대의 현실을 뚫어주는 정신 또는 힘이었다. 그 어느 것을 읽어도 가슴에 와 닿는 울림이 있다. 어떻게 이리도 아름다운가.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말씀을 들으면 나의 가슴엔 로망 같은 것이 스며든다. 나는 절망하지 않고 희망으로 다시 걷게 된다. 나는 책을 만들면서, 무엇보다 선생님의 글과 말을 계속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는 누구에게나 선생님의 글과 말씀을 읽어주고 싶어진다.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씨’에 대해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생각하는 씨이라야 삽니다. 씨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 씨입니다. 생각 못하면 쭉정이입니다. 씨의 은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하늘의 한 얼입니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이요 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들어야 합니다. 생각을 자꾸 좁혀 넣어야 이 듭니다. 은 물질 속에 와 있는 정신입니다. 유한 속에 와 있는 무한입니다. 시간 속에 와 있는 영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들면 삽니다.

반드시 삽니다. 생각이 각 둘이 있습니다.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 생각을 하는 것은 나는 생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둘이 본래 하나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나는 늘 경이로움을 체험한다. 그 경이로움이 나를 환상에 빠지게 한다.

 

“흙, 씨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의 부서진 것입니다. 바위를 부순 것이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흙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나옵니다. 씨가 흙 속에 떨어지기 전엔 평안 없습니다.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자아를 열지 않습니다. 마구 트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흙 속에 떨어질 때 거기서는 노래와 춤이 나옵니다. 새로 돋아나는 싹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씨도 그렇습니다. 겸손히 역사의 바닥에 내려갈 때 혼의 평안은 오고 혼이 평안을 얻을 때 거기서 우주의 영의 부름에 의한 활동이 기쁨과 영광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아이들이 서로 치고받아 그 피와 시체로 더럽혀놓은 역사의 동산을 다시 푸른 생활로 갱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불후의 명문 「들사람 얼」

선생님은 「들사람 얼」이란 불후의 명문에서는 다시 말씀하신다. 우리 민족의 힘찬 기원과 살아 움직이는 자태가 그려진다.

 

“그는 문화를 모른다, 기술을 모른다,

수단을 모른다, 인사를 모른다, 체면 아니

돌아본다. 그는 자연의 사람이요, 기운의

사람이요, 직관의 사람, 시의 사람, 독립

독행의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듣지 않는 사람, 다만

한가지 천지에 사무치는 얼의 소리를

들으려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들사람이여, 옵시사!

와서 다 썩어져 가는

이 가슴에 싱싱한 숨을 불어넣어 줍시사!

사람의 삶이 싸움인 줄을 모르나 봐!

싸움을 주먹으로 하는 줄, 무기로 하는 줄,

꾀로 하는 줄만 알고 기(氣)로 하는 것인 줄,

얼로 하는 것인 줄을 모르나 봐. 삶은 싸움

이요 싸움은 정신이다. 힘이 없고, 생각이

아니 나고, 지식이 떨어지고, 꾀가 모자라는

것은 정신이 죽었기 때문이다.

문명인의 잘못은 문명을 믿는 나머지

근본 정신을 잊는 일이다. 문명, 더구나 제

마음이 연구해내지 못하고, 남의 한 것

받아들인 문명은 분명히 혼의 힘을 해친다.

생명의 법칙은 스스로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자고 병들고 줄어져 있는 혼을

깨워 일으켜야 한다.”

 

선생님은 “모든 이름은 다 깃발이다”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민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중은 말 때문에, 의견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는 않는다.

말이야 무슨 말을 하거나, 생각이야 무슨 생각을 가졌거나 그것 때문에 같이 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이 민중의 맘씨다. 말과 생각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고 죽이는 것은 학자, 사상가, 도덕가 특히 정치가다.

그들은 힘써 이름을 내세우고 명분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염치없다. 더럽다, 타락이다, 업신여기면서도 그 손에서 얻어먹고 그 행렬에 끼여 가지 않나? 말은 지도라 하지만 사실은 따라가는 것이다. 정치가가 민중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민중이 나라를 이끌어간다. 모든 이름은 다 깃발이다.

깃발을 메는 것은 민중이요, 지도자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떤 행진에서도 깃발은 언제나 나가는 방향과 반대로 나부끼는 법이다. 민중은 깃발을 메고 나갈 뿐이요 바라고 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 무슨 글자를 썼거나 어디로 나부끼거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의 행렬을 거꾸로 타고 앉아 있다.

민중은 사회의 바닥이다. 바닥이므로 타락이요 고상이요 따로 있을 여지가 없다. 타락인 줄 알지도 못하는 것이 민중이다. 구더기를 더럽다지만 더러운 것은 구더기가 아니다. 저는 속에서 똥을 내보내면서 구더기더러 똥 속에 있다고 더럽다는 사람 저 자신이 더러운 것이지. 민중은 고를 줄도, 갈 줄도 모른다.

바다 같은 것이 민중이다.

지금은 그 민중이 말을 하는 때다.”

 

“나라는 칼로 세우지 못한다”

선생님은 “나라는 절대로 칼 끝에 세우지 못한다”고 단언하신다.

“칼 끝에 쌓아올리는 그 탑, 그 부조리, 반역사의 교만한 그 탑은 반드시 무너지고야 만다.”

“사람은 절대로 먹는 것만으로만 살지 못한다. 또 먹는다 해도 혼자나 먹는 것이 먹는 것 아니다. 골고루 먹는 것이 참 먹음이요, 참으로 밥을 바로 먹었을 때 밥은 결코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다. 정신도 함께 자란다.”

“씨아, 일어서자! 밤낮 짐승 노릇만 하겠느냐? 한번 사람답게 죽어보자!”

선생님은 늘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믿으셨다. 스스로 퀘이커가 되셨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을 ‘기독교’의 울타리에 두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 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까지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살림 속에 역사가 살아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말한 바 있지만,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선생님이 말씀하는 ‘역사’에 대해 우리는 정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럿인 가운데서 될수록 하나인 것을 찾아보자는 마음, 변하는 가운데서 될수록 변하지 않는 것을 보자는 마음,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될수록 무슨 차례를 찾아보자는 마음, 하나를 찾는 마음, 그것이 뜻이란 것이다.

그 뜻을 찾아 얻을 때 죽었던 돌과 나무가 미(美)로 살아나고, 떨어졌던 과거와 현재가 진(眞)으로 살아나고, 서로 원수 되었던 너와 나의 행동이 선(善)으로 살아난다. 그것이 역사를 앎이요, 역사를 봄이다.

역사를 참으로 깊이 알려면 비지땀이 흐르는 된마음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아는 것은 지나간 날의 천만가지 일을 뜻도 없이 차례도 없이 그저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값어치가 있는 일을 뜻이 있게 붙잡아서만 된다.

역사란 우리 현재의 살림 속에 살아 있는, 산 과거다. 역사는 새 세계관을 지어내는 풀무다. 역사란 산 과거들의 서로 서로 관계를 체계 있고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

역사란 사실과 사실이 한 개의 인간관계 고리로 맺어져 있는 한 개의 통일체다.

역사는 하나다.

하나밖에 없는 것이 역사다.

전체가 한 생명이다.”

 

선생님의 전집엔 번역도 들어 있다. 선생님의 번역은 여느 번역과 다르다. 󰡔바가바드 기타 는 선생님이 1950년 부산 피난시절부터 만난 경이로운 사상으로, 70년대에 󰡔씨의 소리󰡕에 연재하신 것인데 번역이 아니라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라고 할 수 있다. 노자·장소·기독교는 물론이고 선생님의 사상을 종합해서 새롭게 풀어내는 ‘주석’이다. 일찍이 갈릴 지브란의 문학과 사상에 주목한 선생님의 󰡔사람의 아들󰡕, 󰡔예언자󰡕는 선구적인 소개이자 아름다운 번역이라고 할 것이다. 간디에 대해 많은 말씀과 글을 남기셨지만 󰡔간디 자서전󰡕을 번역하는 선생님의 그 자세가 경이롭다.

선생님의 전집에는 그러나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선생님의 노자·장자 강의가 그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노자·장자 강의녹취를 풀게 해서 일부분을 선생님께 드려 손봐달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그 풀어드린 원고를 흡족해하시지 않았고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선생님의 제자들이 강의를 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지만, 과연 그것이 어떤 형식과 내용이 될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신 선생님은 1989년 2월 4일에 서거하셨다. 일제에 저항하면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가르치셨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저항하셨고, 그 체제를 마다하고 남쪽으로 내려왔지만 이승만과 자유당의 부패한 반민족정권에 역시 저항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권력에 앞장서서 맞섰다. 그 정신과 사상과 실천의 역정이 60년이었다.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과 실천을 글과 말씀으로 남아 있고,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함석헌사상연구회’ 만들어 3년 동안 같이 읽기

선생님이 서거하시기 전에, 선생님의 말씀과 모습을 KBS에 남기게 하는데 나는 약간의 노력을 했다. 나는 KBS 친구들에게 선생님의 모습과 육성을 KBS가 기록해놓아야 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KBS에, KBS는 국영방송이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싫어하고 좋아하고를 떠나서 함 선생님과 같은 한 시대의 사상가를 기록해놓는 일은 하나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KBS는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그램에 선생님을 세 번인가 모셔 ‘기록’으로 남겼다. 참으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선생님께 못 해드린 것이 있다. 나는 전집을 끝으로 제대로 된 출판기념회를 해드리려고 했는데, 그걸 못 해드렸다. 사실 전집 출판기념회를 안병무 박사 등 편집위원들과 의논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글들을 모아 ‘아무개 편’으로 한 권의 조잡한 책을 펴내서, 자기가 출판기념회를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꼴이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셨고 입원·퇴원·입원하시다가 서거하시고 말았다. 이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모두들 선생님의 정신적·사상적 제자일 것이다. 모두들 나서서 근사한 출판기념회를 해드리는 것이 ‘제자의 도리’였을 텐데 말이다.

나는 강남구 신사동으로 이사 가서 몇몇 친구들과 3년 동안 ‘함석헌사상연구회’를 진행하는 하나의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다. ‘함석헌사상연구회’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였지만 사실은 매달 한 번씩 선생님의 책을 소리내어 읽는 모임이었다. 우리가 펴내던 󰡔한길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나중에 아동문학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박상률 씨 등 여남은 명이 우리 출판사 회의실에 모여 선생님의 글을 번갈아 낭독하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는데, 이렇게 한 3년 하면서 우리는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과 문장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전집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창출해낸 민족적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정신사·사상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저술가·실천가가 바로 함석헌 선생님일 것이다. 반양장본으로 한 권씩 출간되어서 전20권 전집이 완성되었는데, 나는 선생님의 전집을 역사적인 문화유산으로 보존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장서본 500질 제작

우리 출판사는 1993년 5월 1일에 ‘장서본’ 500질을 제작했다. 이미 활판인쇄소가 사라져가고 있던 무렵인데,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겨우 제작해낼 수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공력을 들인 장서본을 제작하고 조금씩이라도 보급시킨 것을 지금도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선생님의 강연을 CD 8매에 수록하는 기획을 했다. 선생님의 육성연설을 독자들이 직접 들을 수 있게 말이다.

다시 1996년 1월 10일, 우리는 한길사 창사 20주년을 맞아 󰡔함석헌 선집󰡕 전5권을 출간했다. 내가 직접 편집했다. 나의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글들을 선정했는데 󰡔뜻으로 본 한국역사󰡕, 󰡔들사람 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씨에게 보내는 편지󰡕,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등이었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다시 펴내면서’라는 짤막한 글을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붙였다.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과 글은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적·사상적 자산입니다. 시대와 역사에 우뚝 서는 선생님의 삶과 실천은 우리의 굳건한 정신적 한 거점입니다. 동서고금을 거침없이 넘나들면서, 생명과 역사의 본질, 사람의 도리와 민족의 기상을 일깨운 선생님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합니다.

한길사 창사 20주년을 맞아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과 글을 뽑아서 5권으로 펴냅니다. 1901년에 태어나서 1989년에 서거하신 선생님은 바로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증언하십니다.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선생님의 실천적인 말씀과 글은 동시대 우리의 정신사·사상사의 한 줄기입니다. 이 시대에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선생님으로부터 큰 정신적·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씀과 글을 통해 지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선생님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우리의 현실입니다. 격동의 한 시기를 마감하는 전환의 시대에, 선생님을 진지하게 인식하는 작업이 우리의 정신사·사상사 모색의 일환으로 진전되었으면 합니다.

한길사는 1982년부터 1988년에 걸쳐 선생님의 전집을 총 20권으로 간행해냈습니다. 출판사로서 큰 즐거움이자 긍지였습니다. 이번의 책들은 이 전집에서 가려 뽑은 내용입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글을 읽습니다. 시대가 막혀 있을 때 시원한 선생님의 말씀과 글을 새로움을 모색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생명과 정신의 원천으로 우리는 특히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 출판사는 1982년에 선생님의 팔순을 기념해 󰡔씨·인간·역사󰡕를 펴냈다.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을 나름대로 논구해본 것이었다. 그 후 젊은 연구자들이 선생님의 사상에 대해 주목하면서 논문을 내놓고 있다.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해서 선생님의 사상을 담론하는 세미나가 계속되고 있다. 2001년 4월에는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 심포지엄과 전시회가 열렸는데 한길사는 기념사업회와 손잡고 두 권의 책으로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정리했다. 논문집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 선생󰡕에는 진덕규(정치학)·김상봉(철학)·임헌영(문학평론)·조민환(동양사상)·이거룡(인도철학)·박재순(신학)·김성수(신학)·송기득(신학)·노명식(서양사)·장일조(철학)·김경재(신학)·안병무(신학)·송건호(언론인)·유동식(신학)·송현(시인) 등 여러 전공자들의 ‘함석헌론’이 수록되어 있다.

또 한 권의 책 󰡔다시 그리워지는 함석헌 선생님󰡕에는 각계 인사들의 선생님과의 이런저런 사연을 수록하고 있다. 인간 함석헌의 모습과 함석헌 선생과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풍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나도 선생님과의 한 편의 만남을 추억하는 글을 실었다. 우리는 또 기념사업회와 손잡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 독후감 경연대회를 진행시켰다.

 

젊은 세대를 위한 ‘함석헌전집’ 준비

나는 어디 여행이라도 가면 선생님의 책 한두 권을 가방 속에 넣어 간다. 선생님의 책은 어느 대목을 펴서 읽어도 늘 싱그럽다. 때로는 밑줄을 긋는다. 그 사상도 그러하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이 빛난다. 수면(水面)이란 말을 선생님은 ‘물낯’이라고 표현하셨다.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말인가. 고(故) 이오덕 선생님이 언젠가 내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는 함 선생님 같다고. 함 선생님의 아름다운 우리말 문장에 대해 크게 한번 쓰겠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러나 그 글을 남기지 못하고 작고했다.

고 김현 선생님도 생전에 내게 말한 적이 있다. 함석헌 선생님의 ‘수사학’에 대해서 한번 써보겠다고. 김현 선생님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작고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많은 젊은이들이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과 실천, 그 아름다운 우리말 우리글에 주목해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흔적 없이 사라진 선생님의 원효로 집필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다. 지난 70년대 후반에 나는 신문사로부터 나온 뒤 선생님을 뵙기 위해 원효로에 있는 선생님 댁을 방문하곤 했다. 그때도 선생님은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가꿔가고 계셨는데, 98년쯤인가에 선생님의 그 원효로 집을 다시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놀라고 말았다. 선생님이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사시면서,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씨들과 더불어 씨의 사상을 펼치면서 불멸의 저술들을 해내셨던 그 집은 너무나 작았다. 나는 순간, 아! “Small is Beautiful”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작은 집에서 이렇게도 빼어난 저술들을 창출해내셨구나!

판자로 지어진 참으로 작은 이 집이야말로 보존되어야 할 문화유산이다!

그땐 기념사업회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선생님이 사시던 이 집을 서울시가 구입해서 기념물로 만들어달라고 서울시에 요청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대였고 서울시장은 고건 씨였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다시 갔을 때 선생님의 집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고 고층 아파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선생님의 그 무엇을 알리는 존재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황망하고 허탈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우린 이것밖에 안 되는가.

이것이 우리의 수준인가.

몇 년 전 피렌체를 여행했을 때 나는 마키아벨리의 고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고택이라 해봤자 서까래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집은 그 후 개축되었고 오직 서까래 하나를 살려놓았다. 그래도 한 사상가의 역사와 정신이 그것으로 살아남아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거처하시던 그 판잣집의 나무 조각 하나라도 남겨놓았다면, 그것이라도 어디 놔두면 얼마나 든든할까 했다. 콘크리트블록이나 벽돌이라도 몇 장 보존해두었다면 이런 안타까움은 덜 할 텐데 했다.

한 시대의 정신과 사상은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선생님 같은 사상가를 간수하고 키워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상가를 갖고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우리 사상으로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그것을 가능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

함석헌이라는 시대에 우뚝 서는 서상과 정신의 아이콘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평화운동, 같이살기 운동을 주창하시고 남과 북의 통일정신을 일깨어주신 시대의 스승을, 꽃과 나무와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동서고금을 넘나드시던 사상가를,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을 구현해 보이신 시인을, 우리는 함께 만나야 한다.

선생님이 해외여행하실 때 누전으로 쌍문동 댁이 불타는 바람에 선생님의 장서가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은 그때 불탄 책들의 흔적들을 버리지 않고 서가에 조심스럽게 다시 꽂아두셨다. 물건 하나라도, 휴지 하나라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어른이었다.

 

20년 만에 서울대학 가서 강연했소!

어느 한여름날 쌍문동의 자택으로 선생님을 뵈러 갔는데, 선생님은 그때도 꽃삽으로 꽃과 나무를 손봐주고 계셨다. 선생님은 꽃잎을 따주시면서 향기를 맡아보라 하셨다. 이 향기를 찾아 벌들이 십 리 밖에서 날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래 꽃이름이 천리향(千里香)이 되었다는 말씀이었다. 꽃을 가꾸시는 소년 같은 할아버지! 원효로에 계실 때도 그랬고 쌍문동에 계실 때도 그랬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지만, 선생님이 가꾸던 그 나무와 꽃과 선인장은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이젠 나무들이 너무 무성해 집이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파주 통일동산의 헤이리 마을에 이사 오면서 선생님이 가꾸시던 시누대 몇 그루를 캐어와 뜰에 심었다. 선생님은 이 대나무를 전라도 송광사에서 몇 그루 캐어다가 가꾸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여러 분들이 선생님으로부터 이 대나무 한두 그루씩을 분양받아 심기도 했다. 나는 이 대나무를 보면서 꽃과 나무를 가꾸던 선생님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의 정신과 사상을 생각하게 된다. 상당히 굵은 동백 한 그루도 옮겨 왔다. 선생님이 키우던 것인데, 겨울에는 꼭 온실에 넣어 보호해야 한다. 대나무도 그렇지만 동백도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을 닮지 않았는가.

나는 선생님이 키우던 은행나무를 옮겨 오려 시도했다가 못 했다. 나무가 우람해 손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었고, 입구가 좁아 포크레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동네사람들이 나무가 너무 커서 문제가 있다고 성화여서 결국 베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심어놓으신 보리수도 옮겨 오려 했지만, 그것을 아직 못하고 있다. 선생님이 가꾸던 나무와 꽃은 곧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이 아닌가.

언젠가 강연에서 선생님은 자신을 동발목 같은 존재라고 하셨다. 나락섬과 보릿가마니의 밑받침으로 쓰던 동발목. 집안엔 할아버지가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할아버지였는데, 지금은 그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이 땅의 젊은이들은 할아버지를 늘 원했다. 할아버지의 글을 읽고 말씀을 들으려 했다. 저 70년대와 80년대에 선생님이 어딘가에 가서 말씀이라도 하려고 하면 경찰은 선생님을 가시지 못하게 하곤 했다. 그런데 87년 봄 선생님은 ‘연금의 망’을 뚫고 서울대에서 강연을 하셨다. 강연 전날 밤에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로 들어갔다.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날 밤을 학교에서 지내셨고, 이튿날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강연을 했다. 경찰은 강연하는 그날 아침에 와서 선생님을 연금하려고 했는데, 전날 밤에 그렇게 서울대로 가실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20년 만에 서울대학교에서 강연을 했소.”

댁으로 찾아간 나에게 선생님은 통쾌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순간 나는 ‘협객의 사상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때로는 비호같이 행동하시는 선생님이었다. 두려움 같은 걸 모르셨다. 1961년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선생님은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그해 󰡔사상계󰡕 6월호에 실으셨다. 아무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쿠데타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들사람의 용기와 사상, 정의와 진리에 사는 협객의 사상과 용기가 아닌가.

1981년 새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홍삼을 선물로 갖고 선생님을 찾아왔다고 한다. 82년 새해에도 역시 홍삼을 갖고 찾아와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선물을 갖고 온 그 사람에게 말했다.

“작년 것도 저기 있는데…….”

선생님은 지난해에 갖고 온 그 홍삼을 선반 위에 그대로 얹어놓았다.

유신권력이 발광하던 70년대에 이철승 씨가 한동안 야당의 총재로 있었는데, 그는 중도통합론이란 걸 내세웠다. 추석이 다가오는 어느 날 원효로의 선생님 댁에 한 남자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이철승 총재 비서실에서 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때도 꽃삽을 들고 꽃과 나무를 가꾸고 계셨다.

“당장 나가!”

선생님의 벽력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당시 󰡔씨의 소리󰡕 일을 돕던 박영자 씨의 증언인데, 선생님이 그렇게 큰소리로 말씀하시는 걸 처음 보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평소 늘 조용조용히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사실 말씀도 잘 하시지 않는데, 이날 모두들 선생님의 호통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노자는 물자를 아껴 쓰라고 했는데

언젠가 선생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노자는 물자를 아껴 쓰라고 했는데, 요즘 사람들 물자를 너무 함부로 써요.”

선생님은 신문에 끼어들어오는 광고 전단지를 잘라 인쇄하지 않은 그 뒷면을 메모지로 사용하셨다. 강연에 가시거나 하면 종이에 말씀하실 내용을 메모해 가시는 것이었다. 노자의 정신을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시던 선생님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메모지들도 그날의 화재로 다 타버렸다.

다행히 나는 책을 만들면서 선생님을 사진으로 찍어두게 했다. 동아일보에 같이 일하다가 1975년에 함께 나온 사진작가 임학권 형과 중앙일보사에서 일했던 황헌만 형에게 부탁을 해서 선생님의 모습을 이렇게 저렇게 남겨두었다. 우리가 준비한 사진들과 다른 사진자료들을 사진작가 박영숙 씨가 작업해 2001년 선생님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함석헌전시회’에 낼 수 있었다. 선생님의 사진들도 역시 또 하나의 ‘문화재’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리운 함석헌 선생님! 선생님은 「압록강」이라는 짤막한 에세이에서 고향의 사상을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과 글들은 모두가 빼어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생님 글 한 편이다.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의 뿌리 같은 걸 바라보는 것 같아서다. 나는 이따금 「압록강」을 들춰보면서 선생님을 생각하게 된다.

 

“압록강에 가자.

장마 걷히어 골짜기 시냇물 맑고, 구름 뚫려 지평선에 먼 산의 모습이 푸르기 시작하는구나. 새 가을이 온다. 내 고향 산천엘 가야지.

내 집, 공산당한테 쫓기어 내버리고 나온 내 집은 압록강 가에 있다. 백두산서 시작해 천 리 넘는 길, 굽이굽이 흘러온 그 강이 마침내 황해바다로 들어가는 길, 서로 싸우는 건지 큰 가슴에 얼싸안기는 건지 내 모르지만, 밤낮을 울고 노래하고 출렁거리고 뒤흔드는 바로 그 사품에서 단물 짠물을 다 마셔가며 자라난 것이 나다.

고향이 뭐냐?

그것은 자연과 사람, 흙과 생각, 육과 영, 개체와 전체가 하나로 되어 있는 삶이다. 거기 나 남이 없고, 네 것 내 것이 없고, 다스림 다스림 받음이 없고, 잘나고 못남이 없고, 나라니 정치니 법이니 하는 아무것도 없고, 하나로 조화되어 스스로 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나는 압록강의 아들이다. 내가 나고 파먹고 자라난 용천 일대가 압록강과 황해의 서로 만나는 데서 이루어진 살진 양금 흙인 것같이 내 생각도 그 강 그 바다 대화 속에서 얻은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강가의 보금자리를 잃고 나온 지 스무 해가 되는 오늘에도 압록강 생각만 하면 내 가슴속에서 그 물결의 뛰놂과 아우성을 느낀다.”

 

2006년에 한길사는 ‘씨사상연구회’가 지난 4년 동안 발표하고 토론했던 연구논문들을 모아 󰡔씨․생명․평화: 함석헌의 철학사상󰡕을 펴냈다.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과 정신을 이제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한길사는 창립 30주년에 맞추어 선생님의 저작집을 못 냈는데, 지금 그 작업을 다시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새로 발견된 시 80여 편과 새 글과 강연들을 추가해서 25권 이상의 저작집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이 읽을 수 있게 필요한 대목엔 풀이를 달고 있다.

선생님의 전집이 간행된 지 20년 만에 다시 기획되는 저작집은 최근 함석헌 사상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킬 것이다. 연구자들의 연구를 고조시킬 것이다. 선생님의 글과 말씀은 늘 새롭게 간행되어야 한다. 아울러 저간에 발표된 선생님에 대한 연구 글들을 두루 모아 새롭게 편집해보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한길사는 선생님의 앨범을 아울러 기획하고 있다. 선생님의 활동모습을 집성시키는 일이다. 우리 역사의 치열한 현장에 늘 선생님이 계셨고,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의 모습이 그립다. 선생님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찍은 선생님 사진이 제법 많지만, 이런저런 사진들이 제공되면 선생님의 앨범은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시대정신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한국의 사상가를 넘어서 아시아와 세계에 우뚝 서는 사상가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번에 새롭게 간행될 ‘함석헌저작집’은 아시아와 세계에 우뚝 서는 사상가 함석헌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선생님의은 세계인이 읽고 연구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씨사상, 종교사상, 정치사상, 평화사상은 물론이고 선구적인 생태사상가가 아닌가.

나는 한국․일본․중국․대만․홍콩의 인문 출판인들이 참여하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참여하고 있는 출판인들에게 계속해서 함석헌 선생님의 존재와 그 사상과 실천을 말하고 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책을 통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자는 목표를 갖고 있는데,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재발견하여 아시아와 세계에 소개하는 일도 그 일환일 것이다. 오는 7월에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철학대회에서 함석헌 선생님이 다루어지는 것도 선생님을 세계의 사상가로 인식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2008.3.6.)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