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혐오
Miso-Testimony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 고 장자연
2020년 3월 7일은 장자연 사후 11년째 되는 날이다.
이 책은 2019년 3월 7일 이후 1년 동안 윤지오의 증언을 통해 형성된
진실 공통장의 양상을 그려 보여주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증언 및 증언자에 대한 혐오와 탈진실의 경향이
어떻게 발생해 나오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지은이 조정환 | 정가 22,000원 | 쪽수 464쪽
출판일 2020년 3월 7일 | 판형 사륙판 무선 (130*188)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총서명 Virtus, 아우또노미아총서 67
ISBN 978-89-6195-228-6 03300 | CIP제어번호 CIP2020005065
도서분류 1. 정치학 2. 철학 3. 사회학 4. 경제학 5. 사회과학 6. 여성학
봉준호의 <기생충>은 ‘냄새나는 사람’에 대한 혐오를 다룬다. “의심병이 정말 많은 사람”이 윤지오에 대해 처음부터 느꼈던 이질감, 이상함, 의문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또 정착되는가? 윤지오가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며 “증인이 아니다”라는 방향이다. 이 혐오의 감각 양식 속에서 냄새나는 존재가 개, 돼지나 벌레이지 인간이 아니듯이, 이상한 여자는 증인일 수 없다. 항쟁하는 사람, 증언하는 사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혐오의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을 넘는 사람들’이며 ‘선을 넘어오는 견딜 수 없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권력과 체제는 이들의 이 움직임을 견딜 수 없는 냄새로 경험하고 혐오로 대응한다.
― 본문 중에서
『증언혐오』 간략한 소개
2009년 3월 7일 신인배우 장자연은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된 문건(증언조서)과 리스트(증언리스트)를 남긴 지 일주일 만에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윤지오는 신인배우 장자연의 후배이자 동료 배우였다. 윤지오는 언니 장자연의 고통 및 죽음과 관련하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2018년까지 13번에 걸쳐 증언했다. 2018년에 윤지오는 국민들의 진상규명 요구에 부응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하여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세 차례 더 증언하였다. 총 23만 5,796명의 시민들이 “고 장자연의 한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라며 국민청원을 통해 장자연 사건의 진상규명을 국가에 요청했고 그 청원이 검찰 과거사위원회와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결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책 『증언혐오』(그리고 이와 동시에 출간하는 『까판의 문법』)은 2019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지 5년이 되는 날에 시작된 증언선 윤지오호의 침몰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1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연구의 결실이다. 이 두 책은 하나의 사건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증언혐오』는 사람들을 위한 증언자의 증언증여와 증언자를 위한 후원자의 화폐증여에 의해 형성된 진실 공통장을 중심에 놓고 이에 대한 혐오의 경향이 변호사, 기자, 작가 등의 전문가 집단과 SNS 등에서 발생하는 모습을 그렸다. 『까판의 문법』은 공통장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이 반공통장, 즉 까판의 논리가 사회 전체의 주류 담론으로 발전하면서 공통장을 해체하는 과정과 이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방식의 테크놀로지를 분석한다.
‘다중’(多衆)이라는 새로운 탈근대 주체성 개념의 주창자인 저자는 『예술인간의 탄생』에서 다중이 예술가이기를 요구받고 있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경향을 분석한 바 있다. 또 저자는 『인지자본주의』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물리적 신체에 대한 착취를 넘어 예술가, 연예인, 지식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인지노동을 비정규적 방식으로 착취/수탈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증언혐오』에서 저자는 이제 우리 시대 다중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는 비정규직 연예 노동자가 어떤 사회적 체험을 겪고 있고 어떤 운명에 처해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저자는 장자연의 동료배우였던 비정규직 연예노동자 윤지오가 연예노동 과정에서 겪었던 폭력의 체험을 서술함과 아울러 자신보다 더 어려웠던 비정규직 연예노동자였던 장자연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을 계기로 위험한 증언자의 소임을 맡게 된 과정을 살핀다. 저자는 이 소임을 맡은 후 윤지오가 증언자이자 다중이자 예술인간으로서 지지자, 연대자들과 함께 일구었던 진실 공통장을 문학적 필치로 그려냄과 동시에 바로 그것을 계기로 가해권력으로부터 가해지는 반동들, 즉 탈진실과 가짜진실의 공세에 주의를 돌린다. 저자는 ‘증언혐오’라는 표제로 요약된 증언에 대한 왜곡, 조작, 비난, 협박의 실상을 통해 증언자가 우리 시대에 겪는 비극적 체험을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폭력성의 한 양상으로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도 저자는 예술인간 다중들이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공통으로 찾고 다듬어 나가야 할 공통진실의 지평이 어떤 것인지를 더듬는 작업을 놓치지 않는다.
『증언혐오』 상세한 소개
2019년 4월 16일 공격이 시작되다, 윤지오 씨 말은 100% 진실일까요?
2019년 4월 16일까지 권력형 성폭력에 대해 증언하는 증언선 윤지오호는 나름대로 순항을 하고 있었다. 악성 댓글, 인신공격 등의 장애물이 없지 않았지만,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그의 증언이 2018년 미투의 아우라 속에서 많은 사람을 증언에 대한 격려, 용기에 대한 감복, 진실에 대한 공명으로 직조된 진실 공통장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은행과 국민은행에 짧은 기간 6,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낸 것은 증여를 통해 이 증언진실의 공통장을 지켜내려는 다중의 열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월호 5주년을 맞는 이 날 4월 16일에 증언선 윤지오호는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딪힌다. 그것은 「윤지오 씨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는 김수민 작가의 포스팅이었다. 증언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암시를 넘어 증언자의 핵심 진술을 부정하고 증언자의 인격을 의심하는 주장을 담은 글. 이 글의 주장들은 근거가 취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증언의 영향력이 컸던 바로 그만큼 언론과 다중의 큰 주목을 받았다.
2019년 4월 23일과 26일, 박훈 변호사의 고소 고발
불과 일주일 만인 4월 23일과 26일에 그 역시 시인이기도 한 박훈 변호사가 이 쟁점을 고소·고발이라는 사법의 무대로 가져갔다. 김수민 작가를 대리하여 윤지오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고 그 자신이 윤지오를 다시 사기 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시민사회 내에서 있었을 법하고 또 있어야만 했던 모든 토론 가능성들은 일거에 봉쇄되었다. 토론의 여지는 사법 세계로 넘어가 버리고 다중들은 그 결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구경꾼의 위치로 밀려났다. 요컨대 문화와 정치의 문제를 법률이 대체해 버린 것이다. 공자적 인치(仁治)의 공간을 한비자적 법치(法治)의 논리가 덮쳐 버렸다고 할까? 이로써 ‘누가 왜 장자연을 죽게 만들었는가?’라는 사회적 물음은 급격하게 ‘윤지오는 사기범죄자인가?’라는 사법적 물음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으로 증언선 윤지오호는 항행의 동력을 잃게 되었고 전자의 물음이 찾고 있었던 장자연에 대한 가해권력들은 이 센세이셔널한 후자의 물음 뒤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게 되었다.
윤지오의 증언은 다중지성의 현상 형태다
이 책 『증언혐오』, 그리고 동시에 출간하는 『까판의 문법』은 2019년 4월 16일 이후 증언선 윤지오호의 침몰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1년여에 걸친 집중적인 연구의 결실이다. 오랫동안 전문지성과 구분되는 다중지성의 자율성에 관해 탐구해온 저자는, 약 7개월간에 걸쳐 다양한 경로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하고 면밀하게 검토했다. 2009~2010년 관련자 진술조서, 증언자 윤지오의 인터뷰, 김수민과 윤지오의 카톡 대화록, 과거사위원회, 검찰, 변호사, 언론사 기자, 극장주 등과 증언자가 나눈 소통자료, 후원통장 거래 내역, 윤지오에 대한 고소고발장들, 이에 대한 경찰과 검찰의 처분결과통지서, 윤지오 인스타그램과 댓글들, 박훈·김대오·김수민·justicewithus를 비롯한 윤지오 반대자 측의 페이스북·유튜브·인스타그램 등의 SNS 기록들과 댓글들, 과거사위원회의 심의결과 자료, 관련 언론보도 등이다.
증언자 마녀사냥은 반복되고 있다
증언자가 거짓말쟁이로 내몰리는 경우는 윤지오 전에도 있었다. 이와 매우 유사한 것이 홍가혜의 경우이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직후에 홍가혜는 해경의 구조 소홀에 관한 인터뷰 증언을 했다가 언론에 의해 허언증 환자로 매도된 후 “해경 명예훼손”이라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지난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이 1, 2심에 이어 최종적으로 홍가혜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김용호 기자와 『조선일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홍가혜가 승소하여 각 1,000만 원, 6,000만 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권력을 고발하는 증언의 힘을 무력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권력이 애용하는 것은 증언을 두고 진위 논란을 벌이는 것보다 증언자를 범죄자로 만들어 사법처리하는 방법이다. 경찰과 검찰은 이 과정에서 가해권력과의 공모 유혹에 빠져든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 대항한 촛불집회 당시 권력의 금융정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제시했다가 구속되었고 역시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미네르바’도 다중지성 범죄화의 희생자였다. 당시 검찰의 수사권과 공소권 남용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드높았던 것은 바로 이 공모에 대한 비판이다.
탈진실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다중지성의 범죄화 문제를 탈진실 현상이라는 미디어철학의 문맥 속에 위치 짓고, 이것을 증언혐오라는 정치심리학적 맥락과 결부시켰다. 윤지오의 증언을 거짓말로 만들고 증언자를 혐오하는 데로 나아가는 과정은 탈진실 현상의 하나이다. 그런데 탈진실 현상은 한덩어리의 과정이 아니라 여러 경향과 동력이 뒤섞여서 만들어 내는 현상형태이다.
저자에 따르면 탈진실 현상은 근대의 훈육사회가 만들어온 진실체제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 이는 근대의 진실체제가 권력 동기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다. 진실권리를 독점한 전문가·지식인이 법학으로 범죄자를 규정하면 권력은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전문가·지식인이 정신병리학으로 정신병자를 규정하면 권력은 그들을 정신병원에 가둔다. 이 독점적 진실주체들은 자신들이 규정하는 진실을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진실이라는 의미에서의 객관적 진실로 주장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타당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진실일 뿐이라는 점은, 소위 그 객관진실이 권력으로 인해 피치자의 위치에 놓인 다수의 사람들을 고통 속에서 살게 하는 권력의 무기라는 사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자각을 통해 비로소 드러났다. 객관진실 체제에 깊이 포섭되면 될수록 삶이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은 각자의 특이한 진실을 말하는 비전문가·비지식인 다중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진실과 권력의 근대적 동맹체제는 지식인·전문가의 진실독점권을 거부하고 그 스스로 진실주체로 나서고자 하는 탈근대적 다중의 출현에 의해 흔들리게 되었다. 탈진실 현상의 첫 번째 동력은 이것이다.
정동적 전환(affective turn)이 탈진실 현상의 동력이다
탈진실 현상의 두 번째 동력은 다중 주체의 탈진실 경향에 대한 위로부터의 대응 과정에서 출현했다. 객관진실·보편진실로부터의 탈주라는 다중의 운동은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의 냉정한 분석과는 다른 진실장치와 진실공간을 필요로 했다. ‘지성에서 정동으로!’라는 기치로 표현되는 정동적 전환은 이 필요를 충족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것은 객관진실의 체제가 진실구축 과정에서 정동을, 배제해야 할 불순물로 간주해 왔던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동은 신체의 감각기관으로 유입된 외부자극 중에서 행동의 필요에 따른 취사·선택이 이루어진 후 운동으로 표현되지 않고 신체 내부에 남은 잔여로서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정동적 전환이란 신체의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여성, 흑인, 난민 등 다양한 유형의 소수자들이 이러한 전환을 주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동(情動) 대신 선동(煽動)을 무기로 삼는 권력
‘지성에서 정동으로!’의 전환 운동이 상대적으로 근대 진실체제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지성에 대한 경계, 비판, 거부의 경향을 갖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지성에 대한 이 부정적 분위기를 역이용한 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은 구래의 ‘진실 = 권력’ 체제 대신 거짓을 선동하여 그것을 권력 유지와 재창출의 도구로 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진실에 대한 부정이라는 방향에서 첫째의 탈진실 현상과 유사하지만, 이러한 탈진실은 진실과 대립하는 거짓을 진실의 자리에 놓고(반진실) 정동이 아니라 선동을 반진실의 대안진실 체제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광범위한 가짜뉴스 상황은 첫 번째의 탈진실 운동에 대한 권력의 반동적 흡수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이다. 그리고 전(前)다중적인 군중과 대중은 권력의 이 반진실적 선동의 지지대로 소환된다. 트럼프로 대표되는 탈진실의 이 두 번째 동력에 대해 새로운 유형의 파시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통진실 체제가 필요한 이유
탈진실 현상의 세 번째 동력은 바로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한 의식적 대응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객관진실에서 벗어나고 자 한 첫 번째의 탈진실 동력을 두 번째의 탈진실 동력인 반진실=가짜진실=대안진실 흐름에 맞서 발전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다중의 공통진실 동력이라고 부른다. 한국에 소개된 탈진실 관련 문헌들은 다시 전문가·지식인의 권위를 회복시키려는 복고적 노력을 탈진실 현상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이를 위해 이 문헌들은 첫 번째의 탈진실 경향의 동력이었던 정동적 전환과 다중을 공격한다. 이러한 문헌들은 두 번째의 탈진실 경향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진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것으로는 유효하지만 탈진실 현상 속에 깃들어 있는 혁명적 힘을 거세한다는 점에서는 반동적이다.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새로운 행동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정동적 전환은 끊어내야 할 질환이 아니라 안고 가야 할 에너지이다. 또 다중은 전문지식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상관없이 이미 명확한 진실 주체로 부상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진실 문제에 대한 일정한 방관을 보였던 정동적 전환을 정동-진실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에 따르는 다중의 특이한 정동들을 행동적 필요에 따르는 지성과 연합하여 객관진실 체제도 반진실 체제도 아닌 공통진실 체제로 발전시킴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장자연 리스트를 매장하려는 사람들은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멸시를 보인다
장자연이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고 썼을 때 그가 주의를 돌린 것도 고통이었다. 고통에 대한 앎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그것은 당사자나 그 고통을 공동으로 경험한 사람들, 또 주의를 기울여 그 고통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결코 주관적이거나 비실재적 혹은 허구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통은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고통에 대한 앎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의 기울임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실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이 사건을 주의 깊게 연구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주요한 발언자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주로 박준영, 박훈, 최나리, 김대오, 서민 등 변호사·기자·교수 등의 직함을 가진 이 전문가들은 증언자들이 겪는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장자연의 위 문구는 증언 그 자체가 고통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진실진술임을 보여준다. 윤지오의 증언도 장자연을 죽게 만든 사람들을 밝혀 처벌받게 해달라는 분노의 정서를 수반한다. 분노는 고통의 정동이 표현되는 한 방식이다.
전문가들에게서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실재에 대한 무관심은 언론이 두루 공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일보』, TV조선이나 SBS처럼 이 사건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언론이 유독 고통이나 실재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오히려 실재에 반하는 반진실을 유포하고 증언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보도와 방송을 좋은 보도, 좋은 방송으로 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외에 많은 다른 언론도 10년 전의 진술조서 등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증거자료들조차 직접 조사하기를 외면한 채, 전문가나 경찰이 하는 이야기들을 센세이셔널한 방식으로 받아써 내는 것이 보도의 당연한 윤리인 것처럼 행동했다. 이로써 언론은 자기 자신을 진실의 기관이 아니라 풍문의 기관, 대안진실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자율 공통장
박근혜 퇴진 촛불 공통장과 반가부장주의 미투 공통장은 검찰이 지금까지 시민들의 공통관념(상식)에 반하여 처리한 사건들에 대한 재수사를 요구했다. 장자연 사건도 그중의 하나였다. 국민을 대의하여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고 장자연 배우의 동료 배우였던 윤지오에게 증언을 요청했다. 그 증언 요청은 10년 전 검찰이 무혐의 처분해 버린 가해권력자들을 다시 역사의 법정, 시민의 법정으로 불러내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에 관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윤지오가 주저 끝에 이 증언 요청에 응하자마자 응원하는 반응만큼이나 강력하게 협박하는 반응이 댓글, DM, 취재 행동, 사고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증언자에 대한 이 신변위협에 국가가 책임 있는 응답을 하지 않는 순간에 나타난 것이 증언자 윤지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자율적인 증여 행동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신한은행 통장은 정확히 그 증여 공통장의 실재성을 가늠하게 만드는 상징장소이다. 이것은 공감, 인정, 격려, 연대의 정동 공간이었다.
다른 공통체/공동체의 구축은 자율적 증여 공통장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현재적 투쟁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투쟁은 증여 공통장에서 서로 분절되어 있는 개개인들이 횡적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서로를 발견하는 것이 출발점일 것이다. 아래로부터 자율 공통장들이 소규모의 공동체들로 발전하고 이것들이 서로 연합할 때 그것들은 대의 공동체인 국가 공동체를 통제할 수 있는 섭정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율 공통장들은 국경에 한정되지 않는 힘이다. 국가 공동체는 국경에 한정되지 않는 자율 공통장들의 공동체적 잠재력에 의거하여 비로소 국가 주권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며 탈국가적이며 전 지구적인 인류 공통장의 일국적 기관으로 기능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
1장 「예술인간 공통장」은 윤지오의 증언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어떤 입장,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한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다 죽어간 사건에서 가해권력의 입장과 피해자 및 증언자의 입장이 갈라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을 보는 두 종류의 눈, 두 종류의 전략」의 주요 주제이다. 사건을 과거의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현재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 사이의 차이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과거사 조사’를 둘러싼 두 가지 시간성의 투쟁에 대해」의 핵심 주제이다. 이어지는 두 편의 글은 이러한 입장을 초월해 있는 것처럼 간주되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가 가해자의 입장, 가해자의 시선과 동조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살핀다. 「윤지오 증언에 대한 반발 공세의 역사적 위치와 성격」이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장자연과 윤지오의 증언을 촛불항쟁과 촛불혁명, 그리고 미투로 이어진 21세기 한국의 아래로부터 봉기의 역사 속에 위치시킨 후, 「공통장 감수성의 징후와 예술인간-예술체제의 동선」에서 그 흐름을 예술인간 공통장의 형성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한다.
“영리하게”라는 단어는 김수민이 맥락에서 잘라낸 카톡 대화 캡처를 공개한 후 윤지오의 증언을 의심하는 키워드로 이용되었다. 2장 「공통장 다중과 영리함의 문제」에 실린 글들은 이 말이 전체 대화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명하고 그 말이 갖는 긍정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집중한다. 많은 사람들이 김수민이 토막토막 절취한 카톡 캡처에 고의적으로 부여한 이미지에 따라 윤지오가 영리하게 돈을 벌려고 했다고 오해하곤 하지만 윤지오가 말한 “영리하게”의 의미는 그와 정반대이다. 그것은 10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드러나지 않고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영리하게” 증언하는 것인가, 라는 증언 전술의 맥락 속에 분명하게 위치 지어져 있다. 이러한 설명을 보충하기 위해 저자는 30여 년 전 내가 겪었던 유사한 경험을 덧글로 덧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3장 「장자연 리스트의 진실」은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은 먼저 장자연 리스트가, 장자연이 피해자이기 전에 먼저 그리고 윤지오에 앞서,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증언자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어지는 「통계와 경험담이 뒷받침하는 윤지오 증언의 진실성과 신빙성」은 장자연과 윤지오의 증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여러 사람의 경험담과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상황적 진실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홍가혜의 투쟁과 윤지오의 투쟁」은 진실한 증언도 거짓 보도, 가짜뉴스 등 반진실의 장치들에 의해 허언(거짓말)으로 매도되고 사법적 처벌을 받는 사례가 드물지 않음을 홍가혜의 사례를 통해 예시한다. 반진실의 장치들이 증언자의 진실을 묻어버리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어지는 두 편의 글은 윤지오가 마녀사냥을 당하기 전에 무엇을 증언했던가를 독자들께 상기시키고 그 증언이 장자연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 왜 결정적으로 중요한지를 분석한다.
유장호는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한 인물이다. 장자연이 문건을 작성할 때 함께 있었고 장자연이 쓴 편지글 형식의 글을 장자연으로부터 직접 받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장호가 아니라 그로부터 문건과 리스트를 받아 읽었을 뿐인 윤지오에게 진실증언의 짐이 지워지고 있는 것은 유장호가 일관되고 신빙성 있는 진술 태도를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유장호에 대한 두 편의 글은 진실을 말하기도 하고 또 말을 바꾸기도 하는 그의 진술과 진술 전략을 어떤 관점에서 독해하는 것이 진실 찾기에 필요한 방법인가에 대해 살핀다. 이어지는 「‘장자연 리스트’ 논란과 그 성격에 대해」는 유장호·윤지오·김대오의 10년 전 진술을 종합할 때 장자연 리스트는 없다는 김대오의 주장이 허구이고 “윤지오가 리스트를 봉은사가 아니라 수사기관에서 봤다고 했다”는 김수민의 말도 거짓 주장임을 논증한다. 덧글을 포함하여 이어지는 세 편의 글은 장자연 사건 재수사가 어떻게 불발되었는가를 논증한다. 그 핵심은 장자연과 윤지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상납을 강요받았다”는 말에서 강요를 삭제한 후 그것을 ‘성상납을 했다’는 의미로 오독하는 방법을 통해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성범죄를 일반뇌물죄로 바꾸어 공소시효 만료를 확실히 하고 이로써 마약 주입 후 성폭행당했을 가능성(즉 특수강간)에 대한 윤지오의 진술이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이에 대한 윤지오의 반응을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에 대한 항변과 함께 실은 것은 이러한 사법기술에 대한 증언자의 정동적 반응을 전하기 위해서다.
윤지오가 진실이 아닌 다른 목적(돈)을 갖고 증언한다는 모함이 “영리하게”라는 단어에 집중되었다면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말일 수 있다는 모함을 위해 사용된 단어가 “10년 동안 숨어 살았다”라는 문구다. 4장 「진실혐오의 극장」은 “10년 동안 숨어 살았다”의 주어가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이지 생활인 윤지오가 아니며 숨어 삶의 방식이 이름과 얼굴을 대중 앞에 노출하지 않는 것(은유)이지 일상생활에서 도망자처럼 숨어지냈다(직설)는 의미가 아님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 언어분석, 지각심리분석을 동원하는 외에 나의 경험에 대한 분석까지 동원해야 했던 것은 진실에 대한 혐오의 양상이 그만큼 다양하고 그것의 심도가 깊어 쉽게 납득시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장에 실린 일련의 글들은 반진실의 장치들이 동원되기 전에 이미 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지, 즉 진실에 대한 혐오가 먼저 가동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5장 「증언과 증여의 공통장」은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불러와 증언을 시작했던 증언자 윤지오에 대해 국가가 마땅히 수행해야 했던 보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 시민사회가 증언자를 보호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다룬다. 증언자에 대한 시민사회의 보호는 청와대에 증언자를 보호하라고 국민청원을 하는 것(섭정행동) 외에 증언자에게 직접 후원금을 제공하는 것(직접행동)으로 나타났다. 윤지오 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2019년 3월의 시공간은, 증여 공통장으로 나타난 이 예술인간 공통장이 권력형 성폭력 가해권력의 정체를 드러내고 처벌할 힘으로 작동하여, 성폭력 체제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와해시킬 어떤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고조되었던 시공간이다. 그 기대가 드높았던 만큼 반발도 거셌다. 그것은 증여 공통장을 사기와 기망의 환상 공간으로 규정하여 범죄화하는 것이었다. 법 장치를 통해 저항과 운동을 범죄화하는 이 권력 테크놀로지의 구체적 작동 메커니즘이 어떠했던가에 대해서는 『까판의 문법』에서 상세하게 서술한다.
지은이 소개
지은이
조정환 (Joe Jeong Hwan, 1956~)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을 연구했고, 1980년대 초부터 <민중미학연구회>와 그 후신인 <문학예술연구소>에서 민중미학을 공부했다. 1986년부터 호서대, 중앙대, 성공회대, 연세대 등에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와 탈근대사회이론을 강의했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월간 『노동해방문학』 주간을 거쳐 현재 다중지성의 정원[http://waam.net(연구정원), http://daziwon.net(강좌정원)] 대표 겸 상임강사,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비판』(연구사, 1989), 『노동해방문학의 논리』(노동문학사, 1990), 『지구 제국』(갈무리, 2002), 『21세기 스파르타쿠스』(갈무리, 2002),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갈무리, 2003),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탈영자들의 기념비』(공저, 생각의나무, 2003),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비물질노동과 다중』(공저, 갈무리, 2005), 『카이로스의 문학』(갈무리, 2006),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공저, 갈무리, 2007), 『들뢰즈와 그 적들』(공저, 우물이있는집, 2007), 『현대철학의 모험』(공저, 길, 2007),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저, 그린비, 2008),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 『공통도시』(갈무리, 2010), 『플럭서스 예술혁명』(공저,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갈무리, 2011), 『인지와 자본』(공저, 갈무리, 2011), 『후쿠시마에서 부는 바람』(공저, 갈무리, 2012), 『옥상의 정치』(공저, 갈무리, 2014), 『예술인간의 탄생』(갈무리, 2015) , 『절대민주주의』(갈무리, 2017)
편역서 『오늘의 세계경제 : 위기와 전망』(C. 하먼, 갈무리, 1994), 『현대 프랑스 철학의 성격 논쟁』(A. 캘리니코스 외, 갈무리, 1995),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C. 하먼 외, 갈무리, 1995), 『이딸리아 자율주의 정치철학 1』(S. 볼로냐 외, 갈무리, 1997), 『자유의 새로운 공간』(A. 네그리 외, 갈무리, 2000)
번역서 『변혁기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G. 루카치, 동녘, 1986), 『오늘날의 세계경제 : 위기와 전망』(A. 캘리니코스 외, 갈무리, 1994), 『오늘날의 노동자계급』(A. 캘리니코스, 갈무리, 1994), 『디오니소스의 노동 1』(A. 네그리 외, 갈무리, 1996), 『디오니소스의 노동 2』(A. 네그리 외, 갈무리, 1997), 『사빠띠스따』(H. 클리버, 공역, 갈무리, 1998),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W. 본펠드 외, 갈무리, 1999),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J. 홀러웨이, 갈무리, 2002), 『무엇을 할 것인가』(W. 본펠드, 갈무리, 2004), 『들뢰즈 맑스주의』(N. 쏘번, 갈무리, 2005), 『다중』(A. 네그리 외, 공역, 세종서적, 2008), 『선언』(A. 네그리 외, 갈무리, 2012), 『크랙 캐피털리즘』(J. 홀러웨이, 갈무리, 2013), 『자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H. 클리버, 갈무리, 2018)
책 속에서 : 탈진실 시대에 공통진실 찾기
왜 그 증언자가 그 증언 때문에 여론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요? 게다가 촛불 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자신이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에게 필요한 사실을 증언해 준다면 (그가 증언 외의 삶에서 무엇을 하건) 그 증언만으로 국민들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 68쪽
이 순수주의 = 순결주의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 여성에게,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씌워온 굴레이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해온 운동들이 스스로 내면화해 온 거울 이미지다. 국민이 영웅을 기대하고 민중이 지도자를 기대할 때 그 국민과 민중은 그 영웅과 지도자에게서 순수를 기대하는 만큼 오히려 자기 자신이 순수하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백성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근대의 과정이다.
― 영리한 다중, 110쪽
연예 노동자와 자본가/권력자를 브로커와 기획사가 매개하는 성착취와 성폭력의 구조가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버닝썬 사건이 보여주는 것처럼 마약은 이 구조를 가동하는 윤활유다. 이것이 인지자본주의의 핵심분야인 연예 산업의 적나라한 실태이다. 이 연예 산업은 한류라는 이름의 준 국책산업으로서 세계시장에 자신을 자랑스레 내놓고 있다.
― 통계와 경험담이 뒷받침하는 윤지오 증언의 진실성과 신빙성, 171쪽
이렇게 윤지오의 증언이 이미 사법적 뒷받침을 받거나 교차 검증되거나 물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들은 그의 증언이 거짓 증언이라고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갖고 풀어야 할 문제는 윤지오의 증언보다 오히려 증언이 거짓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밝혀져야 하는 것은 정황들과 배치되는 이러한 주장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주장되는가이다.
― ‘윤지오 마녀사냥’이 묻어버린 ‘증언자 윤지오’의 여섯 가지 핵심증언 (2009~2019), 186쪽
여기서 장자연은 누가 봐도 증언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자들은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도록 만드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기보다 취재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동료 배우를 찾아다니며 사건을 오락거리로 가십화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검증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이상 경향을 보인다.
― 피해자다움의 강제적 수용에서 피해자다움에 대한 거부의 결단으로, 282쪽
윤지오에 대한 혐오와 마녀사냥은 나의 국가, 나의 언론, 나의 남편에 대한 믿음을 증언자에게 정반대의 방향으로, 즉 의심과 불신으로 투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만약 윤지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어쩔 것인가? 우리의 국가, 우리의 언론, 우리의 남편이 정확히 윤지오가 증언한 그대로 행동해 왔다면 어쩔 것인가?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쩔 것인가? 그래도 당신은 진실에 대한 그 혐오를 계속할 것인가?
― 진실에 대한 혐오, 310~311쪽
장자연의 육성 파일이 말해주다시피 증언조서 문건을 작성한 직후부터 사망하기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장자연은 마녀사냥에 시달렸다. “늙은이랑 만났다는 둥”의 별의별 이야기나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만약 살아남았다면 그가 이후 오랫동안 겪게 되었을 수난 이야기의 서막이었을 것이다.
― 증언자와 국가, 366쪽
나는 앞의 절에서, 출현한 이 자율 공통장에 대한 대응이 그 공통장의 범죄화 시도로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 말했다. 이러한 시도는 자본주의 사회가 낳는 모순을 타개하려는 일체의 운동을 빨갱이로 몰아 범죄화했던 역사를, 그리고 가부장체제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이 성적으로 자기를 해방하려는 운동을 풍기문란, 음란으로 몰아 범죄화했던1 마녀사냥의 역사를 다르게 지속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 대안 공동체의 가능성, 441쪽
프리뷰어 추천사
지은이의 귀한 통찰과 사유 그리고 삶의 이야기까지 녹여져 있는 내용이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탄식과 탄성의 소리를 번갈아 내며 읽었다. 책에는 나를 울컥거리게 만든 많은 구절들이 있었다. 작년 초 윤지오를 미디어에서 처음 본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표면에 드러난 온갖 저질스런 공격들을 멀리서 조금씩 함께 마주하며 고통스러움에 많은 밤 잠못 이루고 아파하기만 했던 나에게는 이 책읽기의 시간이 치유의 과정 그 자체였다. 지은이의 해석과 내용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동의의 탄성만 나왔을 뿐,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구절은 신기하게도 단 한 구절도 없었다. 진실을 꿰뚫고 파고들어 드러내고자 하는 지은이의 노력이 이 사회에서 그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을만큼 귀하고 값지게 느껴진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사건의 타임라인 위에서 동일한 뉴스를 마주했던 그때 내 삶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었는지, 지난 삶을 함께 돌이켜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 최송현, 윤지오 신한은행 후원자, 그래픽디자이너
2016년 촛불집회 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구호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 구호는 당시에 ‘진실 말하기’가 처한 위기를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이 책은 윤지오의 증언이 난도질당하는 비극적 현실을 통해 같은 위기를 보여준다. ‘증언’을 ‘진실 말하기’로, 증언에 대한 공격을 ‘진실혐오’로 보면서 증언자를 마녀로 둔갑시켜 음해하는 세력을 ‘진실혐오의 권력장’으로 규정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의미깊은 점은 장자연과 윤지오를 증언자로 연결한 것이다. 지금까지 장자연은 권력의 피해자나 희생자로만 여겨졌다. 저자는 장자연이 남긴 문서는 ‘증언 조서’이며, 윤지오는 그 증언을 이어받는 자라고 말한다. 고 장자연 10주기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며 뭔가 이상하고 또 잘못돼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거짓 뉴스들의 홍수로 사실관계나 정보를 알기 힘들어 답답하셨던 분들이 이 책을 꼭 만나면 좋겠다.
― 손보미, <탈진실 시대의 진실연대자들> 연대회원
조정환의 책들
『절대민주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7)
군주제적 대의민주주의에서 대의 정치가들이 전유하고 향유해온 정치지대는 다중의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재전유되고 사회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절대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민주화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민주화하며, 집회민주주의와 일상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힘으로 기능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절대적 구성역량과 헌법의지에 의한 모든 민주주의의 민주화, 이것이 촛불다중혁명이 가리키는 이정표다.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5)
예술성이 협의의 예술사회는 물론이고 생산사회와 소비사회 모두를 횡단하면서, 예술의 일반화, ‘누구나’의 예술가화, 모든 것의 예술 작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예술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센세이셔널한 예술종말론들이 유행하고 있다. 어째서인가? 종말로 파악할 만큼 급격한 예술의 위치와 양태변화는 항상 새로운 주체성의 대두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단토, 가라타니 고진, 벤야민 등의 예술종말론들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 나타난 예술적 변화를 예술종말로 파악한 과거의 관점들(헤겔, 맑스)을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다른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2011)
'인지자본주의'는 인지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삼는 자본주의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대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문제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다. 이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금융자본이 아니라 인지노동이 현대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을 가져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 노동의 역사적 진화와 혁신의 과정을 중심적 문제로 부각시킬 수 있다.
『공통도시』(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9)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이후 30년 역사를 신자유주의 30년 역사이자 그에 대한 대항운동 30년의 역사로 읽고자 한다. 또한 오늘날 80년 광주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미래사회를 상상하고 구축하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는 전지구적 다중의 세계사적 과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광주의 민중들은 군부독재와 싸운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사적 투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87년, 해방도시의 잠재력이 전국화되어 더 이상 지역적 봉쇄가 불가능하게 되자 자본은 전국적 해방운동들을 신자유주의적 혁신도시 건설, 다시 말해 메트로폴리스의 지역클러스터 구축의 동력으로 전용하였다.
『미네르바의 촛불』(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8)
2008년 촛불 현장에 참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의 기록이자 그것에 대한 성찰의 결과물을 담은 책으로, 2008년 5월 2일부터 지난 1년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이 참여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촛불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한다. 이 책은 촛불봉기의 새로움이 무엇이었던가를 맑스의 노동이론, 푸코의 삶권력론, 들뢰즈의 잠재력론, 네그리의 다중론을 통해 조명한다. 또한 전 세계적 금융위기를 촛불의 관점에서 조명하면서 촛불을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주체성으로 정의한다.
『아우또노미아』(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5)
지난 10여 년간에 걸쳐 네그리에 대해 연구해 온 정치철학자 조정환이 펴낸 세계 최초의 네그리 사상에 관한 연구서이자 네그리 사상을 체계적이고 쉽게 소개하는 입문서이다.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9)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마찰.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마리아 미즈 지음, 갈무리, 2014)
『에코페미니즘』,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의 저자로 알려진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의 고전적 저작.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 만들어 내는 생산(물)이 경제의 수면 아래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4, 5백년 동안 여성, 자연, 식민지는 문명사회 외부로 축출되고, 가려져 왔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이 ‘빙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왜 가려졌는지, 이 부분의 가치와 비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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