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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대학살

작성자사무처|작성시간14.11.25|조회수114 목록 댓글 1

신천대학살

 

1950.10.17 한국 전쟁 중 황해도 신천대학살 

 

한국 전쟁중 일어난 사건으로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천여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신천 학살 혹은 신천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른다.

 

황해도 신천군 지도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대한민국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극명하게 상반되어 있어서 민감한 부분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아직 정확한 사실 관계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일설에는 미군의 학살개입과는 상관없고, 신천군내의 기독교세력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지지세력간의 싸움이 토지개혁을 매개로 파멸적으로 일어난 좌-우 대립 격화속에 일어난 비극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950년 10월, 인천상륙 작전 이후 한국전쟁의 판도는 대한민국 국군UN군의 반격과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고 조선인민군은 패퇴를 거듭했었다. 국군과 UN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을 향해 질풍같이 진격하고 있었고, 조선인민군은 물론 조선로동당은 황급한 후퇴와 패퇴를 거듭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황해도 신천군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 무려 약 3만 5천여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그 학살의 주체가 어느세력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주장

피카소가 그린... 미군의 >황해도 신천 대학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서는 "한국전쟁 중, 서울을 탈환한 미군들이 38선을 넘어와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신천 대학살이 ‘해리슨’을 중대장으로 하는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고 주장한다.

 

2001년 11월, 조선중앙방송에서는 황해도 신천군에서 한국 전쟁 중 살해된 것으로 보이는 59구의 유해가 새로 발굴됐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과 함께 신천 지역에 주둔했던 미군이 저지른 학살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황해도 신천군에서는 신천박물관을 설립하여 반미주의교육으로 이용함으로써 신천군 사건을 반미주의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대한민국측 주장

이와 반대로 황해도 신천군 출신으로 당시 겪었던 월남자들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노동당인민군에 대항한 우파 지하조직과 신천군민의 저항이며 반공투쟁 사건이다."라고 반공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유엔군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자, 전세가 불리해진 공산군들은 지주, 성직자를 포함한 우파 세력들을 처형했다. 이에 공산당에 반대하는 우파 청년들은 10월 13일을 기해 반공 봉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문화방송이제는 말할 수 있다-망각의 전쟁편〉(2002년 4월 방영)에 따르면, 이 사건은 ‘좌우 대립의 결과’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작품을 만든 조준묵 피디는 “당시 미군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어 신천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며 “‘미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밝힌다. 그는 이어 “신천지역에 반공청년단이 꾸려지고, 이승만 정부가 북진하면서 이들을 추인했다”며 학살은 이들 반공청년단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국제 민주 법률가 협회의 주장

미군이 신천군 사건의 가해자라는 주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만 주장하지 않는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 공산주의 계열 NGO)의 ‘코리아에서의 미군 범죄에 관한 보고서(1952년 3월 31일)’에서도 신천군 사건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국제 사법단체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의 조사위원회는 1952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 한반도 북부의 여러 지역을 방문해 미군의 학살에 대한 조사 작업을 증거수집에 천착하는 방법으로 진행을 하였다. 위원회에서 작성한 보고서의 ‘제4장 대량학살, 살해 및 기타 잔혹행위’에서 이들은 황해도 신천의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 7일,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해리슨(신천 미 점령군사령관)은 그의 휘하에 있던 미군 부대와 이승만의 원군 장교들에게 철수는 ‘일시적’이며 ‘전략적 이유’에 따른 것이라 말하고 주민들에게 미군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지시하라고 명령했다. ‘남아 있는 자는 모두 실질적 적으로 간주할 것이며 원자폭탄이 투하될 것이다.’ 그는 모든 ‘빨갱이’ 지지자들을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모든 인민군 병사의 가족들과 부역자 가족들은 빨갱이로 간주되었다. 그의 명령은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날 신천군 원암리의 창고 두 군데에서 900명의 남녀 학살이 발생했다. 건물 안에는 어린아이들도 200여 명 있었다. 미군들은 이들의 옷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창문 안으로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건물 안에 있던 한 여성이 자신의 두 아이를 창 밖으로 밀어냈다. 한 아이는 총에 맞았지만 한 아이는 도망쳤다. 어머니는 불에 타 죽었다. 해리슨과 다른 장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군대한민국 국군이 입성 소식을 미리듣고 봉기한 지역 우익청년단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미군과 국군은 평양시 점령에 집중해 있었으며, 황해도 신천군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학살주동자가 '해리슨'이라는 미군 중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로 신천군에 머물던 미군 명단에 보면 '해리슨'이라는 이름이 없다.

 

황해도 신천군 지역은 평야지대로 광복 직후부터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과 좌우익간에 갈등이 적지않았던 곳이었다. 그런 갈등은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면서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둘러싸고 좌우대립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토지개혁과정에서 상당수 우익청년들은 대한민국쪽으로 내려가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10월, 그들이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앞두고 선발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어 그들은 신천군에 남아있던 좌익활동가들에게 보복을 가했는데, 특별한 잘못없이 남아있던 민간인들도 부역혐의를 받아 처벌대상이 되었다. 민간인의 희생은 우익들의 후퇴 과정에서 미군의 폭격과 함께 다시 한번 재개되어 버려 희생자 수는 더욱 급격히 늘게 되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좌-우 대립과 갈등등 복합적인 원인등으로 터진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

소설 손님

작가 황석영은 신천군 사건을 소재로 2001년 <손님>이라는 역사소설을 발표했는데, 황석영 작가는 신천군 사건을 기독교 우파좌파간의 대립과 대결이 폭력으로 악화된 사상대립에 따른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황석영 작가의 친구였고 소설에도 등장하는 인물인 유태영 목사는 반공주의를 신봉하는 기독교 우파공산주의 사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얼마나 잔악하게 이루어졌는가를 목격하였다. 그럼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핍박한 기독교 우파들에 대해 어떠한 보복도 하지 않고 오히려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이루었다고 유 목사는 주장하였다.

 

 

신천박물관(信川博物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황해남도 신천군1960년 6월 25일 건립된 역사 박물관이다.

 

 

신천박물관
400 어머니묘와 102 어린이묘
신천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의 모습

 

본래 1947년 신천군 인민위원회 건물로 지어졌다가 한국 전쟁 중 미군이 정렴하여 미군 사령부로 사용한 곳이다. 2003년의 기록에 의하면 1관 16호실, 2관 3호실 등 2개 건물 총 19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신천 지역은 한국 전쟁 중 미군이 전체 군민 수의 4분의 1에 이르는 3만 5천 383명을 학살했다는 곳으로, '죽음의 땅', '원한의 땅'으로 불린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한국 전쟁 발발 10주년이 되는 날 이 곳에 신천박물관을 개관하고 반미교양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학살이 일어난 기간은 박물관 측의 주장에 따르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0여일 동안이며, 희생자 3만여 명 가운데 어린이, 노인, 부녀자가 1만 6천 234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미군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목을 작두로 잘라 살해하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창고에 가둬 아사시키거나 질식시키고 불태웠으며, 잔인하게 고문해 죽이기도 했다는 주장이다.

 

신천박물관에는 학살 관련 유물과 자료, 폭격 피해, 세균전 및 화학전에 대한 자료 수천 점이 전시되어 있다. 민간인들이 불태워져 학살된 장소로 주장하는 방공호와 '400 어머니묘', '102 어린이묘'와 같은 희생자들의 합장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생존자의 증언도 들을 수 있다. 북조선의 대표적인 반미교육장이므로 반미 성토모임이나 결의모임 등 관련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김정일1998년 11월 이 박물관을 방문하여, 일부에서 "미 제국주의자의 야수성과 악랄성, 잔인성, 교활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신천박물관이 인민의 미국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과 비타협적인 투쟁정신"을 기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시한 바 있다.(위키백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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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무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1.2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서는 미군이 좌파 성향의 민간인 3만여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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