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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본 한반도 정세

작성자사무처|작성시간15.04.04|조회수127 목록 댓글 3

카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본 한반도 정세

 

1. 웬디 셔먼 미 국무차관의 과거사 편향발언과배경

 

[긴급] 미국무성 웬디셔먼 차관 과거사발언 규탄기자회견 ( 3 )/국내방송기자단 총 출동/취재현장 이모저모 

미국무성 웬디셔먼 차관 과거사발언 규탄기자회견 /국내방송기자단 총 출동


 

지난 2월27일 워싱톤DC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 기조연설에서 웬디셔먼 미국무부 차관의 '한, 중. 일 과거사는 3국 모두가 책임이 있고 빨리 정리하고 북핵과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해야된다"라는 일본 편향적인 발언을 하여 국내외의 뜨거운 논란과 비판에 직면하였다.

또한 '위안부 문제와 역사교과서 내용등의 이름등을 놓고 한, 중. 일 이 이견을 보이고 있는부분에 대하여 이해는 하지만 실망스럽다"고 전제하며 "과거문제가 미래협력을 제한하는 일이 불행하게 아주 많다"고도 하였다.

웬디셔먼의 발언은 한국인의 분노와 여론의 빈축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여기에 한술 더 나아가 자기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 한국과 중국에게 화해의 메세지를 던지라는 괘변을 늘어 놓았다.

미국은 2차대전의 승전국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피해자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특히 한국은 일본침략자로부터 36년의 식민통치와 지배를 받음으로서 씻을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받았다.

웬디셔먼은 자국의 국익을 위하여 민감했을지는 모르지만 한국과 중국이 입었던 과거의 고통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음을 내다보지 못한 적절치 못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자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한 외교 우월주의 발언이었으며 한국과 중국의 외교주권을 훼손한 오만하고 무례한 발언이었다. 

우리는 과거의 희미해 져버린 역사의 창고속으로 들어가 조선과 미국의 악연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여보자.


2.가쓰라. 데프트밀약의 진실

 

 

       미국무부장관 데프트                           일 외무성 카쓰라

단물 빠지면 씹던껌  뱉듯  던저버리는 국가간 관계 그것이 국제정치 ,100년전 대한제국의 일본통치를

넘겨준 미국 그들은 1883년 조미통상조약의 상대국 이었다  그러던 그들이....을사늑약 후

< 제일 먼저 국교를 단절한 것이 아름다울미자의 美國 >이었다. 인간사에도 속는것은 한번이면 족합니다.

아래는 신동아에서 발췌한 카쓰라 태프트 밀약 에 대한 전후 사정을 재 조명한 기사 입니다.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성(국방부의 전신) 장관인 윌리엄 태프트는 일본 도쿄를 방문해 한 호텔에서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했다. 1924년에야 그 내용과 실체가 알려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 회담의 산물이다. 도대체 밀약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1905년 7월의 동북아 국제정치 상황부터 살펴보자.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두 강대국이 벌인 일전이었다. 일본은 1905년 초,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러시아 점령하의 뤼순(旅順)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펑톈(奉天·지금의 선양)의 육전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그해 5월 동해상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까지 전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러시아는 물론, 일본 또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바닥난 상황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외교적 협상 구도를 미국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협조는 불가결했다. 우선 절실했던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관련 열강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명한 나라가 미국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배경에서 탄생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둘째 일본측의 일본-영국-미국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셋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회담 내용의 일부는 1905년 10월 일본 신문 ‘고쿠민(國民)’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의 전체 내용은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비밀조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전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밀약’이라는 표현은 데넷의 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

‘협정(agreement)’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가.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다. 이미 1899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즉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협정인가, 각서인가 >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양국간 법적 의무를 가진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의견교환, 즉 각서로 볼 것인지는 다소 복잡한 문제다. 태프트 장관이 회담 직후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 회담의 성격을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로 밝히고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각서라면 미국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왔다. 법적 의무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명기한, 우호적 중재(good office)와 관련한

체약국 의무를 의미한다. 게다가 태프트는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한 그의 의견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으며, (외교문제에 관한 한) 태프트 자신이

어떤 직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의견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 자신이 육군성 장관이라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이 국무성 업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도 이 전문에 드러나 있다.

 

이 비밀협상을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회담 내용상의 표현, 그리고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운다.

 

<루스벨트는 밀약에 동의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 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다.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그를 일컬어 ‘일인(一人) 국무성’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3. 2015년의 한반도정세


2015년들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 아시아의 정세는 요동치며 급변하고있다. 마치 100여년전으로 돌아가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과 패권을 확보하기위하여 한반도에 벌떼같이 달려들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분단된 한반도는 갈팡질팡 우왕좌왕 자주외교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미로속에 빠져들고있는 암담한 실정이다.우리는 100여전의 역사의 창고속으로 다시한번 들어가 역사속에서 교훈을 한번 찿아보자.


미국은 한국에게 사드배치를 중국은 AIIB가입을 일본은 한,미.일삼각군사동맹을 요구하며 외교적 공세와 압박을 하며 제2의 가쓰라. 데프트 밀약의 재판을 꾀하고 있는지 우려하고 있을 따름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전쟁터로서 우리 한민족이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수 없다.디시는 이땅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하여 한반도가 전쟁 놀이터가 되어서는 않된다. 냉혹한 국제외교무대에서 살아남아야한다. 가쓰라 데프트가 밀약을 하여 을사늑약으로 이어진 미국의 외교적 배신을 결코 잊어서는 않될 역사의 교훈이다.

이는 한민족 전체의 생존권과 한걸음 더나아가 자주권에대한 심각한 우려와 도전이 아닐수없다.

민족 생존권의 해법을 찿아야한다. 분단이 주는 민족적 존망이 걸려있는 중차대한 민족의 문제를 남과북이 따로 따로 놀아서는 않된다.남과북이 머리를 맞대고 테이블에 앉아 화해와 협상을 통하여 민족 생존의 활로를 열어야한다.


북한의 석유매장량이 세계 3위이고 이는 중국. 미국보다 훨씬 높은 1470억배럴이다.돈으로 환산한다면 1경 5000조.. 5000조도 상상도 못할 돈인데 1경 5000조라니이래서 지금 중국에선 석유자원을 북한이랑 공동개발하려고 군침을 흘리고 있고 미국에선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여 이를 저지하려고 사드배치를 노골화하고있다.북한 석유매장량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년도가 2003년도다'

사실 유무를 떠나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한번쯤 음미해볼 부분이다.

                           


南北共助! 이것만이 국토를 보전하고 민족을 살리는길일것이다.


2015년4월4일


힌국전쟁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부의장 윤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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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무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4.04 이글은 추모연대 소식지 '열사회보" 4월호에 게재될 원고입니다.윤호상 상임대표부의장님께서 추모연대의 원고부탁을 받고 기고해주신 [카쓰라 태프트 밀약과 한반도의정세]에 대한 기고문입니다.유족님들께서 읽어보시고 의견을 주시면 감하겠습니다.
  • 작성자문철 | 작성시간 15.04.04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박경옥 | 작성시간 15.04.13 미국과 일본의 외교적 흉계를 우리는 항시 경계하고 조심해야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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