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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후손 이종걸, 4수 끝 野 원내사령탑으로

작성자사무처|작성시간15.05.07|조회수1,733 목록 댓글 2

독립운동가 후손 이종걸, 4수 끝 野 원내사령탑으로

 

이종걸 신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머니투데이

이종걸 신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사진=뉴스1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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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에 선출된 이종걸 의원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지난 2009년 5월 원내대표 경선 당시 출마했다가 이강래 의원과 단일화한 것까지 포함하면 '4수' 끝에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관련기사 : '독립' 이종걸, '경제민주화 시즌2'로 네번째 도전)

이 신임 원내대표는 1957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했다. 고교 시절엔 박정희 유신 정권에 항거했으며, 대학시절에는 야학 운동을 했다.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법과대학에 편입, 사법시험(30회)에 합격했다.

연수원을 마친 이후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 사건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사법연수원 2기수 선배인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인연을 쌓았고, 박 시장과 함께 참여연대 설립의 터를 닦기도 했다.

이 원내대표는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일명 우 조교 사건)은 당시 박 시장과 함께 이 사건의 공동변호인을 맡아 6년간의 법정다툼 끝에 신 교수로부터 500만원 배상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재판으로 1998년 여성운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6대 총선에 경기 안양 만안에 출마해 국회에 진출했으며, 같은 지역구에서 내리 4선에 성공했다. 국회 입성 후엔 문화관광체육방송통신위원회, 교육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정무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대여(對與) 공세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여 공격수로 활동하면서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2008년 국정감사에서 이명박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던 과정에서 당시 유인촌 문화부 장관 등을 '졸개'라고 비하했다가 논란을 일으켰고, 2009년 4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선 일명 '장자연 리스트'를 공개해 거명된 언론사로부터 명예훼손으로 1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트위터에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을 '그년'이라고 표현했다 막말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이로 인해 18대 국회에서 두 차례, 19대 국회에서도 한 차례 여당 의원들에 의해 징계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이 원내대표는 4·29 광주 서구을 보궐선거에서 '호남정치 복원'을 내세워 당선된 천정배 무소속 의원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원내대표는 17대 국회 당시 천 의원이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지냈을 때 원내수석부대표를 역임했다.

19대 국회에 들어서는 이 원내대표는 김한길계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내 중도온건 성향 의원 모임인 '민주당의 집권을 위한 모임(민집모)' 소속으로 활동했다.

지난 4일에는 '경제민주화 시즌2'를 제안, 정책정당의 면모를 갖춘 야당이 되기 위한 대안으로 연금개혁·조세개혁·보육개혁·청년일자리 확충·사회적 경제 등 12가지의 세부과제를 내놓으며 '경제전문가'로 평가받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대한 대항마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도 했다.

△서울(1957) △서울대 법대 △안양지역시민연대 공동대표 △새천년민주당 대표비서실장 △16·17·18·19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 △국회 일자리만들기 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상옥 대법관후보자 인사청문특위 위원장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새정치연합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 위원장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이종걸의원 할아버지]

 

1867년 음력 3월 17일(양력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회영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의 형제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재 이제현과, 조선 선조조의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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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문철 | 작성시간 15.05.08 정보감사합니다!
  • 작성자사무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5.09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국회특별법제정에 원내대표로서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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