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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 한국전쟁홍성민간인학살지 붉은고개 원혼비설치&위령제봉행

작성자부엉이|작성시간24.05.15|조회수1 목록 댓글 0

● 한국전쟁홍성민간인학살지 붉은고개 원혼비설치&위령제봉행
 
-일시:2023년9월16일(토)오전 11시30분~12시30분
-장소:충남 홍성읍 소향리 붉은고개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후원:행정안전부
 

[홍성 붉은고개  민간인 학살지  고유문]


유세차 계묘년 국월 (菊月) 열여섯날
홍성 붉은고개  피학살  영가여!


삼가 고하나이다
의병 충절의고장 홍성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일때
‘구백의총(九百義塚) 열사의 순국정신이
나라를 지켰네


순국선열의 혼은 변함이 없건만 

민족의 운명을 갈랐던 통한의 6,25전쟁에
이곳 홍성땅도  피강물이 흘러갔네

한국전쟁피학살유족회는 삼가 위령제를 봉행하고

혼백들의 억을한 죽음을 만천하에 알리기위해
무릎 조아리고 제를 올리나이다.

만해선생과 백야장군의 호령소리

가을바람에 휘날리네

조국이 해방되고 좌우가 하나되어  새로운 국가건설을 외치던
지혜로은 홍성땅에 친일군경에게 말한디못하고 푸른청춘을 도륙당한 원한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오늘따라 사무친 그리움은 더해가고 망극할따름입니다.

홍성 영가들이시여!

통일정부수립하기위해 몸바친게 죄가되어 

꽃잎보다 아름다운 청춘 조국이 앗아가버렸네

홍성 피학살 영가여!

국가는 원혼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부인하지만 홍천의 붉은고개와 바다는
그날의 참혹하였던 죽음의 현장을 기억하고 기록하나이다.

고귀한 님들의 희망이었던 자주 조국통일의꿈 이루어 훨훨 부활하소서
엎드려 바라옵건데 영령들께서는 사무친 원한 풀어버리시고
정성스레 준비한 향초를 피워 제물로  제를 올리나니 흠향하옵소서

계묘년 국월菊月 )열여섯날

                                                              초헌(박종래 상임대표)

                                                                      아헌(임건상감사)

                                                      종헌(김선희 대외협럭위원장)
 

                                                             홍성읍 소향리 주민의증언

                                                    홍성읍 주민의 안내로 유해발견현장 답사하는 유족집행부

           

     홍성읍 소향리 붉은고개 학살현장에서 공장건설을 하다가 유해 수십구가 발견되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는9월16일 가을비가 내리는 토요일 충남 홍성읍 소향리 붉은고개에서
한국전쟁당시 홍성경찰서와 군인에의해 보도연맹원과 부역혐의자를 이곳 붉은 고개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암매장하였다
노인회관과 인근주민들의 협조를 구하여 탐문한결과 2020년 코로나 펜데믹당시)붉은고개 학살현장에서 공장을 신축하다가 수십구의 유해가 발견되어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고 제보하여 유족집행부는 현장을사진을촬영하여 보존하고
기록을 남기려고 학살현장 인근에 목각원혼비를 설치하고 원혼들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정성스럽게 봉행하였다.
 
[홍성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홍성에서는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경부터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연행된 주민들은 홍성경찰서 상무관에 며칠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용봉산으로 끌려갔다.
 
주민들 목격담에 따르면, 당시 홍성 쪽에서 트럭 1~2대가 용봉산 입구로 사람들을 실어 왔으며, 잠시 후 총소리가 들렸다. 이틀 뒤 두 명의 여성이 포함된 수십 구의 시신들이 목격되었다. 희생사건은 용봉산 이외에도 행산리 이동부락 뒷산에 위치한 폐광(금광굴)에서도 있었다. 인민군은 7월 12일 홍성에 진입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이 홍성지역을 수복하자 홍성경찰서는 1950년 10월 7일 공식 복귀하여 부역자 처리를 시작하였다. 홍성경찰서 유치장은 당시 8개 동이 있었는데 각 동에는 70~80명이 갇혀 있었으므로 모두 500~6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구금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홍성읍뿐 아니라 홍북면, 금마면, 갈산면에서도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분류에도 불구하고 이들 상당수는 소향리 붉은고개에서 희생되었으며, 일부는 용봉산 절 입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붉은고개에는 큰 구덩이 3개가 있었으며 100여 명에 달하는 시신들이 매장되어 있었다.
 
홍성경찰서 외에도 각 지서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갈산면에서는 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남직희 등 6명이다.
 
결성면에서는 10월 4일부터 100여 명 이상의 주민들이 희생되기 시작했다. 희생지는 아홉골목쟁이 금광구덩이, 영장골 방공호, 공동묘지 위 방공호 등으로 아직 유골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광천면에서는 감금되었던 36명이 10월 8일 트럭에 실려와 담산리 중담마을 한복판에서 총살당한 후 담산리 금광구덩이(꿀꿀이봉)에 암매장되었다. 오서산과 광천 독배에서도 집단희생사건이 있었다.
 
구항면에서는 인민위원장 이금용 등 국군 수복 후 구항지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오봉리 뒷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금마면에서는 감금되었던 50여 명의 주민들이 10월 14일 화양리 안골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은하면에서는 갇혀 있던 50~60명의 주민들이 은하지서 뒷산 대천리 공동묘지 방공호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이중 8명이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장곡면에서는 장곡지서와 산성출장소에 의해 1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장곡지서로 연행된 주민들은 장곡면사무소 맞은편 곡물창고에 감금되었다가 가송리 배밭 교통호, 장곡초등학교 뒤 방공호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산성출장소로 연행된 주민들은 산성리 하천변 모래구덩이, 덕골에서 희생되었다. 덕골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학살이 있었는데, 1차 7명, 2차 2명이 희생되었다. 산성리 하천변에서는 50여 명이 희생당했다.
 
홍동면에서는 200여 명의 주민들이 홍동지서 옆 곡물창고에 감금되어 지서장의 지휘 아래 조사 및 분류되었다. 이들은 송월리 모래강변, 월현리 금광구덩이, 홍동초등학교 뒷산, 홍동지서 뒷산에서 희생되었다. 송월리 사금을 캐던 모래강변에서는 1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희생되었으며, 월현리 석봉산 금광구덩이에서는 30여 명의 주민들이 총살되었다. 다른 곳의 희생자의 수를 감안하면 희생자 수는 150여 명에 달할 것으로 판단된다.
 
홍북면에서는 의용소방대 창고에 감금되어 있던 50여 명의 홍북면 주민들 중 30여 명이 대동리 뒷산 교통호에서, 10여 명이 동방송 골짜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홍성지역은 인민군 점령 당시 미군 전투기의 공격에 의한 주민피해도 있었다. 1950년 8월 29일 오전 11시 2대의 전폭기(F-80추정)가 장이 열린 광천읍 주민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해 최소 4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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