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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회 소식

재경유족회 남한산성 봄맞이 소풍안내

작성자사무처|작성시간15.05.01|조회수107 목록 댓글 2

재경유족회 남한산성 봄맞이 소풍

 

[김경록 기자의 작은 사진전] 남한산성에 오르다 

 

일시:2015년 5월5일(화)오전 10시

집결지: 지하철 2호선 잠실역 1번출구 (롯데 타워앞 집결)

 

지하철 8호선 승차후 산성역에서 하차하여 남한산성행버스로 30분이동

버스 하차후 송림사이로 도보 15분 거리

소풍장소: 남한산성 수어대 솔나무숲

준비물: 등산복차림간편복장. 돗자리. 수건.개인생수

회비: 1인 2만원지참

찬조: 윤호상 재경유족회장님 200,000원 기증

 

연락처: 010ㅡ2555ㅡ9402(사무처장)

            010ㅡ3291ㅡ9461(재경운영위원장)

            010ㅡ5304ㅡ9837(재경유족회장)

 

* 도시락, 떡.주류, 음료수, 과일. 생수.컾. 상비약은 집행부에서 준비합니다.

 

* 재경유족회 회원님들 오늘 하루만이라도 모든 걱정 내려 놓으시고 남한산성 봄맞이 소풍에 동참하셔서 남한산성의 소나무숲길을 걸어보시며 유족님들끼라 단합과 친목을 도모하여 즐거은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5월1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 재경유족회

회장 윤호상

 

남한산성 (南漢山城)

 

Namhanssanseong.JPG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의 전반적인 지형은 청량산(497m)과 남한산(480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서, 주봉인 청량산(482.6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남한산의 주봉인 벌봉(522m)과 망월봉(502m), 남쪽으로 한봉(414m)을 비롯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남한산은 풍화에 강한 경기변성암 복합체로 이루어져있다. 산아래 해발 400m 내외의 고도에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비교적 넓은 면적의 평지가 펼쳐저있으며, 고위평탄면으로 알려져 있다. 이 평지는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룬다.

 

남한산 주변은 서고동저의 기복을 형성하며,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이다.산정을 중심으로 서쪽 저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 동쪽에는 또다른 지류인 광안천이 북으로 흘러 본류와 합류한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산 자체의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는 관계로 공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게다가 성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 개에 달하는 샘이 있어서사시사철 이 마르지 않아 장기간 농성에 유리하다. 하지만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은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수문을 통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면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약 8 km 구간이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성벽

 

또한 산성 안에는 산성천이라 불리는 소하천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고을을 관통한 뒤 동문 옆 수문을 통해 빠져나간다. 한편 산성내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비록 남한산의 수목에 대한 벌목을 금지하는 법령이 만들어졌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전쟁과 민간의 난방연료 수요로 인해 남한산의 식생은 비교적 황폐하였다. 이에 따라 산사태가 빈번해지자 철종 연간에 산성마을의 유지가 사재를 출연해 1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를 식재했으며, 고종 때에도 성내 산사태 피해지와 인근 민둥산에 1만 5천주의 소나무를 식재했다.

 

한편 남산산성의 식생은 주로 활엽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림군락이 분포한다. 남한산성에는 신갈나무와 갈참나무,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밤나무, 잣나무, 아까시나무 등이 조림군락을 이루고 있다. 2007년에 실시된 남한산성 북사면의 산림식생에 관한 연구에서는 남한산성 북사면에 총 137종, 평균 약 22종의 식생이 분포한다고 보고했다.

 

남한산성은 한강변의 가시권에 속해서 강북의 아차산 일대와 더 북쪽의 불암산과 인왕산까지도 조망이 가능하다. 남한산의 서북쪽은 백제의 중심지였던 풍납동, 방이동과 그아래 몽촌토성 일대이며, 동북쪽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6세기 이후로 한산주와 광주의 읍치가 있었던 이성산성이 있는 하남시 춘궁동 일대이다. 이들 역사 유적들은 남한산성으로부터 직선거리로 5~6 km 거리로 징검다리식 위치에 놓인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지역과는 고도 차이로 인해 약 4도 정도 낮은 기온이 나타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 ~ 1,400mm이다.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늦가을에 맑은 날이 많다. 산간 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남한 산성 내부는 높이 400m 정도의 고위평탄면으로, 일시적 방어 요새로만 기능하는 다른 산성과는 달리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광주 군청이 설치될 정도로 행정의 중심지이자 지역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또한 남한산성 내부의 취락은 고도가 높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입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남한산성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시대의 토기 파편과 신라 시대의 거대한 건물 터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일시적 농성전용 요새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본격적으로 사람이 남한산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에 남한산성을 수축하며 산성 내로 촌락을 이전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의 연주봉옹성

 

산성 수축 이전, 고대의 성을 중심으로 한 지방 통치 단계에서 광주의 관촌 일대는 자연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였다. 정치군사적인 역량이 강화되면서 영역이 확대되자 성촌의 수는 크게 증가했다. 지방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신라는 주군제를 실시함으로써 지방지배의 틀을 완성했다. 고구려의 한산군에 해당하는 광주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한산주로 불리다가 경덕왕이 이름을 한주로 개칭하였다. 한주에는 일찍부터 군주가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이후 고려 시대에 와서 성종 즉위년에는 외관의 파견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듬해 12목을 설치한다. 목은 기존의 주를 대체하면서 한주 또한 광주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조선 시대에 와서 남한산성의 축성이 완료되면서 1627년 조선 정부는 광주목의 읍치를 산성 안쪽의 성내동으로 이전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전의 읍치는 동부면 춘장리로 재편되었으며, 항간에서는 '고골'(古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일반적으로 산성의 존재의의가 방어에 있었던 것에 비해, 치소를 유치하게된 성내동은 행정기능을 추가하여 관아도회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성내동은 유사시 임시수도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설립되었으며, 이와함께 광주목은 광주부로 개칭되었다. 방어취락으로 시작해 새롭게 광주부의 행정중심지가 된 성내동은 남한산성 내부의 "성내"와 전략적으로 중요한 동문 밖의 일부 구역인 "외문"을 포함하였다.

 

 

포구

 

이렇게 산성안에 대규모 행정 중심지가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식수를 구하기 쉽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비록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했지만, 산성 내에는 적지않은 수의 우물이 있었을 만큼 수원이 풍부하였다. 하지만 초기에는 선뜻 남한산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모집해게 되었으며, 초기 이주자중 일부는 죄를 지어 변경으로 송치할 대상도 포함되었다. 이 결과 300여 호에 달하는 민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후로 모집은 계속되어 숙종 대에는 600여 호가 성내동에 거주하게 되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성내동은 대체로 1천 가구, 4천 여 명의 인구를 보유한 취락이었다. 이 인구는 남한산성 안팍의 인구를 모두 고려한 수치이며, 산성 안쪽에만 국한시키면 600여 호 남짓한 규모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1907년의 조사에 따르면 성내의 호구는 446호, 1840명이었다. 이후 구한말 의병운동이 남한산성에서 일어나면서 일시적 피해를 입고, 1917년 말 군청이 평지로 이전하면서 산성 취락은 급속히 쇠퇴하였다. 1930년대 중반의 보고에는 성분 안쪽의 산성리에 241가구, 1,402명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40년대 중반 무렵 산성리는 약 70여호의 벽촌으로 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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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사무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5.01 5월5일 재경유족회 남한산성 봄맞이 소풍에 재경유족회 유족님들 많이 참석하여 주세요.남한산성은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입니다. 그리고 수어장대로 산책하는 송림사이의 산책 코스는 환상적입니다.
  • 작성자문철 | 작성시간 15.05.01 많은 참석 참가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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