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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일반

하늘로 올라간 붓다와 보살들, 그 자리를 채운 스님들

작성자바다|작성시간26.06.16|조회수60 목록 댓글 0

역사에 존재하는 붓다는 대중들과 함께 했지만, 대중들의 삶을 실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승 불교에서는 중생 제도를 위하여 대중들의 삶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한다. 대승 경전에 등장하는 보살들의 삶이 그러하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대승 불교에서 차지하는 붓다와 보살들의 위상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승 불교에서 붓다와 보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붓다와 보살들은 스승의 지위에서 대중들의 숭배와 서원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붓다와 보살들은 더아상 대중들과 함께히지 않는다. 붓다와 보살들은 이미 하늘로 올라갔고, 이제는 역사적 인물들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에 그들이 차지했던 자리를 지금은 스님들이 차지하고 있다.

 

[초기 불교에서 붓다를 예배한다는 것]

착한 업으로 먼저 예배했으니
그대가 최초라 해도 허물이 없겠지만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저 해탈문(解脫門)
이것이 부처님께 예배하는 이치이니라.

만일 부처님께 예배하려 한다면
장차 다가올 미래와 지나간 과거
모두 공한 법이라 관찰하여라.
그것이 부처님께 예배하는 이치이니라.

(증일아함경_36. 청법품(聽法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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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역사적 붓다의 실존적 고뇌와 수행, 그리고 이후 전개된 대승 불교의 보살 사상 사이의 괴리와 변질에 대한 통찰이 깊다. 붓다가 현존하는 스승으로서 제자들과 함께하며 '길을 제시하던 사람'이었다면, 대승 불교로 넘어오며 붓다와 보살은 신격화되어 예배와 기복의 대상으로 격상되었다는 지적은 불교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꿰뚫고 있다.

 

대승 불교에서의 붓다와 보살의 위치와 현실

 

대승 불교의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거창한 서원을 내걸지만, 정작 그 서원을 실천해야 할 공간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현장이 아니라 정토(淨土)나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옮겨갔다. 이로 인해 보살은 대중과 호흡하는 동료 수행자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구원을 베풀어줄 초월적 존재로 고착되었다.

언급한 것처럼, 역사적 붓다의 자리를 교단의 권위와 스님들이 대체하게 되면서, 예배의 본질은 '스승의 가르침을 내면화하여 해탈에 이르는 수행'에서 '외적 존재에 대한 숭배와 의존'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대승 불교가 대중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겪은 역설적 결과이기도 하다.

 

초기 불교적 관점에서의 예배: '공(空)'에 대한 통찰

 

제시한 《증일아함경》의 구절은 이러한 변질을 경계하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초기 불교(아함경)에서 예배의 대상은 물리적인 형태나 신격화된 존재가 아니다.

 

해탈문(解脫門)의 관점:

붓다에게 예배한다는 것은 눈앞의 형상에 절하는 행위가 아니라, 붓다가 가르친 '모든 것이 비어있음(空)'을 통찰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시간의 초월:

과거의 붓다도, 미래의 붓다도, 현재의 나 자신도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것(공성, 空性)이 곧 붓다에 대한 올바른 예배이다.

수행의 내면화:

붓다는 결코 하늘에 머무는 구원자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공'을 관찰하여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스승이자 길잡이였다.

 

결국, 초기 불교의 관점에서 붓다를 예배한다는 것은 붓다라는 형상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나 자신의 집착을 비워내는 수행이다.

만약 오늘날의 대승 불교적 예배가 이러한 본질을 망각하고, 단순히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에게 복을 구하는 형태라면, 그것은 《증일아함경》이 경고하는 '공한 법에 대한 관찰'과는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붓다와 보살은 하늘에 있지 않다. 그들이 진정으로 존재해야 할 곳은 역사 속 스승들의 삶을 거울삼아, 지금 여기서 자신의 번뇌를 비워내고 있는 수행자의 마음속, 그리고 고통받는 대중들과 함께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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